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65화 (564/653)

제565화

캬아아아앙!

반원을 그리며 조형되던 불의 고리가 다섯 번째 고리에 닿자마자 마른 낙엽처럼 바스라졌다.

“후우….”

라온은 조각나서 깨져나간 고리의 잔재를 보며 답답함이 스며든 숨을 내뱉었다.

‘역시 쉽지 않군.’

불의 고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불의 고리가 회전하고 있을 때 그 고리들을 피해서 새로운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고리가 하나나, 두 개만 있을 때는 마나만 충분하면 쉽게 새로운 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고리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새로운 고리를 만드는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현재 불의 고리는 일곱 개고, 회전하는 속도도 빨라졌기에 새로운 고리를 만들어낼 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렵다고 해도 해야지.’

다른 길은 없어.

지금 이 암울한 상황을 이겨낼 방법은 여덟 번째 불의 고리를 만들어 벽을 깨부수는 것뿐이다. 영약으로 채운 마나가 모조리 다 빨려 나가도 고리를 완성해야 했다.

라온이 순도 높은 마나를 끌어와 심장 주변에 응집시켰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이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하여 새로운 불의 고리를 조형했다.

캬아아아앙!

하지만 새로운 고리는 반원을 이루기도 전에 두 번째 고리에 닿아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다시.’

실패에 좌절할 시간은 없었다. 바로 마나를 뽑아내서 도전을 이어갔다.

캬아아앙!

이번에는 조형을 시작하자마자, 일곱 번째 고리가 파고들어 마나를 으깨버렸다.

‘다시.’

‘다시.’

‘다시.’

쉴 새 없이 도전을 이어갔지만, 불의 고리가 회전하는 궤도 자체가 제멋대로라 도통 길이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그랜드 마스터와 생사결을 벌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

라온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심상의 세계에서 회전하는 고리들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텃세가 심하네.”

일곱 개의 불의 고리는 철옹성처럼 성문을 열어주질 않았다. 새로운 고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게 회전하며 다가오는 마나의 선을 모조리 뭉개버렸다.

‘계속 부숴 봐. 누가 이기나 보자.’

심상의 세계는 현실과 시간축이 다르다. 이곳에서 불의 고리를 조형할 수 있는 건 기연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꼭 여기서 끝을 봐야했다.

‘그럼 다시…. 음?’

라온이 불의 고리 조형을 위해서 마나를 이끌어내다가 멈춰 섰다.

‘아직도 남아 있다고?’

수많은 나는 여전히 심상의 세계에 박혀 있던 검을 쥔 채로 검술을 펼쳐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 깨달음을 주게 된 형상은 사라지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라온이 응집시키던 마나를 흐트러뜨리고 다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린 라온은 기본 검술에 집중했고, 소년 라온은 본인의 검을 만드는 것에 몰입했으며, 청년 라온은 상승의 검술을 탐닉했다.

모두가 다른 검술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 어떤 시절이든 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검술을 펼쳐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수련에 전력을 다했기에 보여지는 모습 같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불의 고리를 만들려다 말고 멈춰 섰다.

‘잠깐만….’

내가 정말 지금까지 검술에 아무것도 담지 않았었나?

다시 시선을 들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에 이른 지금까지 저렇게 열심히 검을 휘둘렀으면서 그 무엇도 검에 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검….’

제천검을 쥐고, 미숙한 광아검을 펼쳐내는 소년 시절의 나를 본 순간 잊고 있던 발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네 목표는 무엇이지?]

[그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단순히 데루스에 대한 복수만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한 목표를 모두 이루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었다.

그 의지가 심장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기에 나는 언제라도 온 힘을 다해서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의념이란 스스로 세운 의지에 영혼의 격이 깃든 힘. 나는 의념을 이룰 의지를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검술을 익히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모든 검술에는 펼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어렵지 않아. 답은 모두 네 안에 있다.]

검귀와 글렌의 대화가 다시 한번 들려온 순간 심상의 세계가 멈췄다.

소년 시절의 나도, 청년 시절의 나도, 바로 어제의 나도 들고 있던 검을 다시 땅에 박아 넣었다.

그들은 전할 것을 모두 전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끼기기기기긱!

일곱 개의 불의 고리가 천천히 멎는다. 고리들은 새로운 흐름을 기다리듯 장대한 불꽃을 일으키며 길을 열어주었다.

홀린 듯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마나를 움직여 멈춰버린 불의 고리 속에 새로운 선을 새겼다.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원이 그려지며 심상의 세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라온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덟 개의 고리를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둑해지는 세계 속에서 더 깊은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무조건 막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끌어내려!”

리메르와 용현검주의 외침에 먼저 반응한 건 당연히 광풍대였다.

라온의 사정을 알고 있던 조장들과 마크 괴튼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몸을 날렸다.

“광풍대는 최대한 빨리 따라붙어!”

버렌은 당황한 광풍대에게 지시를 내리며 허공에 떠오른 라온에게 이를 갈았다.

“안 들킨다고 하더니,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홍보를 때리면 어떻게 해! 이 미친놈아!”

그는 내뱉는 욕과 달리 절실한 표정으로 보법을 밟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마르타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정신 빠진 놈이 사고를 안 칠 리가 없지!”

그녀는 오히려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북쪽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뒤를 따라온 버렌은 남쪽을 막아섰다.

“눈 감고, 입 닫은 라온 존잘.”

루난은 맹하니 고개를 꾸벅이고서 동쪽에 섰다.

“후후.”

마크 괴튼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서쪽에 섰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거예요!”

“대주님이 여기서 무아지경에 빠지셨다는 건 그만큼 우리를 믿고 있다는 거 아니겠나. 난 그게 기쁠 뿐이야.”

“…….”

그 말에 세 명의 조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 대체 이게 뭐야!”

“저 양반 왜 허공에 떠 있는 건데!”

“서, 설마 지금 무아지경에 빠진 거야? 무슨 인간의 간땡이가 저따구야!”

“용 잡아먹고 왔다더니, 지가 용이 되어버렸네. 승천하냐?”

광풍대는 검귀들보다 먼저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 자체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개진!”

버렌의 외침에 광풍대가 라온을 둘러싼 채로 대광풍진을 세웠다. 검사들은 언제 불평했냐는 듯 어느 때보다도 굳건한 기파를 뿜어냈다.

“그대로 돌진!”

“뚫어라!”

“모조리 죽여 버려!”

뒤늦게 달려온 성검련의 검귀들이 살벌한 검격을 쏟아냈지만, 광풍대가 일으킨 오러의 방벽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뭣들 하는 거냐! 밀어붙여! 건드리기라도 하란 말이야!”

용현검주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지금 라온 지그하르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광풍대는 무시해라! 라온에게 검기를 날려!”

“클라우드 님의 원수를 갚아라!”

성검련 검귀들이 용현검주의 말에 힘을 얻고 우악스러운 오러를 휘감은 채 돌진했지만, 광풍대의 기세는 그 이상이었다.

검사들은 라온을 지키기 위해서 본인들의 목숨조차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방어에만 집중했다.

“자리를 사수해!”

“절대 뚫리지 마.”

“이 망할 놈이 일어나면 우리의 승리다! 목숨을 걸고 지켜!”

버렌과 루난, 마르타의 외침을 들은 광풍대의 방어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성검련의 검귀들은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공세를 퍼붓다가 역으로 반격을 당하여 뭉개진 대지에 피를 뿌렸다.

고오오오오!

광풍대의 오러가 중앙에 응집되며 광풍진이 더욱 단단하게 엮일 때 라온의 머리 위로 여덟 개의 고리가 떠올랐다.

고리는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뜨거운 불꽃과 함께 회전하다가 라온의 심장 부근으로 스며들었다.

“뭐, 뭐야 저건….”

“불꽃?”

그 기이한 광경에 광풍대도, 검귀들도 숨을 멈췄다.

하지만 라온의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머리 위로 세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

좌측의 꽃은 붉으면서 화려했고, 우측의 꽃은 푸르면서 청초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꽃은 소담했지만, 가장 찬란한 금빛을 품고 있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듯 가늘게 팔랑이던 꽃잎들은 신비로운 빛과 함께 아련한 향을 풀어냈다.

“이런!”

용현검주는 이를 바득 갈고서 허공을 박찼다.

‘저놈!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넘었어!’

저 세 송이의 꽃은 세 개의 단전을 보여주는 오러의 형상이고, 꽃이 피어났다는 건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 모두 이어졌다는 뜻이다.

벽을 깨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실수였다. 저 미친놈은 이 짧은 시간에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용현검주가 광풍진을 가르기 위해서 마검 크리아투스를 내질렀다.

마검의 칼날이 검은 불기둥이 되어 쏟아질 때 차디찬 바람이 불어와 그 앞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엉!

리메르의 광검이 용현검주의 마검을 밀어내며 허공에 거대한 뇌전을 일으켰다. 폭발하는 뇌전이 흩어지는 마기를 모조리 불태웠다.

“네 상대는 나잖아. 어딜 가려고?”

“비켜라!”

용현검주가 미간을 구기며 마검을 크리아투스를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왔다. 지금까지 힘을 숨겨두고 있었는지 검격의 위력과 속도가 단숨에 상승했다.

캬아아아앙!

리메르가 풍뢰의 광검을 뻗어 마검의 투로를 차단했지만, 그의 손목은 부러질 것처럼 덜덜 떨렸다.

‘젠장….’

여력을 남겨두고 있었던 건가.

마검 크리아투스의 마기로부터 라온과 광풍대를 보호하느라, 3할 이상을 오러를 소모했기에 이 이상 버틸 기운이 없었다. 내상도 터져서 가슴이 끊어질 것처럼 아려 왔다.

‘죽어도 버텨야 해.’

검계를 휘감은 뇌기와 바람 덕분에 마기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여기서 죽더라도 검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

“꺼지라고!”

용현검주가 조급한 심리를 드러내듯 마검을 급격하게 꺾었다. 마기가 대해의 파도처럼 요동치며 광풍대를 향해 쏟아졌다.

“꺼져야 할 건 네놈이다!”

리메르가 무겁게 대지를 찍어 누르며 풍뢰의 용오름을 일으켰다. 광검이 기둥이 되어 솟구친 폭풍이 마기의 파도와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마기와 뇌전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천지에 자욱한 스파크를 터트렸다.

“절대 못간다!”

리메르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훔치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지킨다고? 네놈 따위가?”

용현검주가 마검 크리아투스를 중단에 세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하들을 잡아먹고 살아남은 네놈이 무얼 지킨단 말이냐!”

그는 여유가 사라진 표정으로 마검을 쏘아냈다. 주인의 손을 떠난 마검 크리아투스는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노니며 리메르를 향해 십수 개의 마기를 뿜어냈다. 하나하나가 즉사급의 위력을 담은 매서운 검격이었다.

“후욱….”

리메르가 풍뢰의 광검으로 허공에 떠 있는 마검 크리아투스를 겨누었다. 바람과 뇌기가 부채꼴로 퍼져나가며 다가오던 마기의 줄기를 모조리 뜯어냈다.

우우우우웅!

마검 크리아투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검명을 흘리고서 다시 용현검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헉….”

리메르가 손을 부르르 떨면서 검은 피를 토했다.

‘빌어먹을….’

억누르던 내상이 심해졌다. 핏물 속에 내장 조각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정말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연공을 하고 싶었지만, 용현검주가 섬뜩한 안구를 들이밀고 있어서 그런 사치는 부리기 어려웠다.

콰과과과광!

리메르는 요동치는 마검의 파동을 가르며 턱을 떨었다. 정신이 흐릿해진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날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용현검주가 붉어진 눈동자로 비웃음을 흘렸다.

“날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길만 막아서는 게 네 복수인가?”

그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놈도 지금 답답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그릇이 그따위였기에 네놈의 수하들이 몰살당한 것이다. 그리고….”

용현검주는 붉어지는 리메르의 눈동자를 보며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저놈들 역시 네놈의 밑에 있기에 죽는 것이다!”

그는 자그마한 준비 동작 없이 그대로 마검을 찔렀다. 섬전처럼 나아간 마기가 광풍진의 중심에 있는 라온을 향해 쇄도했다.

“크윽….”

리메르가 입술을 깨문 채 보법을 밟았다. 마기의 우측으로 짓쳐 들어 바람과 뇌전을 검격을 터트렸다.

쿠와아아앙!

마기가 폭발하며 리메르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의 검격은 산산조각으로 깨졌지만, 빠른 판단 덕분에 광풍대는 자그마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성검련의 검귀들만 죽어 나갔다.

“끝까지 방해를….”

용현검주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리메르의 담담한 눈빛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맞아.”

리메르가 힘겹게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의 죽음은 나 때문이다. 네놈의 하찮은 도발에 넘어가 내가 모두를 죽였지.”

그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씁쓸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내가 죽기 전에는 저 아이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해.”

리메르가 뇌전이 번뜩이는 검을 들어 용현검주를 겨누었다. 그의 손은 더는 떨리지 않았다.

“크….”

용현검주의 청수한 인상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좋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네놈의 배부터 갈라주마!”

그가 거칠게 나아가 마기를 흩뿌렸다. 날카롭게 조형된 마기가 칼날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리메르가 대지에 발을 박아 넣은 채로 광검을 쳐올렸다. 검의 중심에 응집된 빛이 폭발하며 하늘을 가르고, 칼날 폭풍을 잠재웠다.

쿠와아아아아앙!

마기와 뇌기의 격돌에 공간을 으깨는 듯한 거대한 폭발이 연달아 터졌다.

다만 마검 크리아투스의 마기는 점점 더 강해졌지만, 리메르의 뇌기는 색이 옅어지고, 흐름이 뚝뚝 끊어지기 시작했다.

검계의 범위 역시 줄어들어서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메르가 절망 속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라온의 머리 위에 피어있던 세 송이의 꽃이 각자의 빛으로 변해 라온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용현검주는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마검 크리아투스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구구!

마검의 칼날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으며 지독할 정도로 불길한 기파를 퍼뜨렸다.

용현검주는 마검이 지닌 기운을 단번에 쏟아부으려는 듯 마기가 극도로 압축된 강환을 일으켰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마검이 떨어져 내린다. 검은 태양처럼 마기로 타오르는 강환이 어마어마한 파동을 일으키며 검계를 밀고 들어왔다.

“아….”

리메르가 쇄도해오는 강환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죽일 수 있어.’

용현검주는 흥분하여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놈의 목을 가르고 복수를 끝낼 수 있다. 놈에게 죽어간 수하들의 원한을 내 손으로 풀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떨어진 검은 막을 수 없다. 내가 복수에 성공하는 대신 라온과 광풍대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이건 생각할 것도 없이….’

광풍대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려 할 때 죽어간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현검주에게 심장이 뜯겨 나가면서도 날 걱정해주던 그 멍청이들의 눈동자가 뇌리를 적셨다.

그들은 복수를 원한다는 듯 피에 젖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지금 여기서 광풍대를 선택한다면 다시는 용현검주에게 복수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놈이 죽더라도 그건 내 손으로 하는 복수가 아닐 것이다. 평생의 숙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게 영혼으로 느껴졌다.

느릿하게 눈을 떴다. 죽은 수하들의 얼굴은 여전히 그곳에 떠 있었다.

웃으며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너희가 그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너희의 후배들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살리마.

저벅.

결정을 내린 리메르가 거침없는 걸음으로 강환 앞으로 나아가며 광검을 들어 올렸다.

“말했지. 나부터 넘으라고!”

칼날을 불태우던 뇌기가 모조리 가라앉고, 그 위를 두터운 바람이 채운다. 아래에서부터 뻗어 올라가는 바람의 파동이 굳건한 벽을 세웠다.

소리가 사라지고 무풍지대가 형성된다.

바람과 벼락의 노래가 아닌, 태풍의 눈.

근원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만을 바라본 검계의 변화였다.

그 무엇보다도 고고한 바람의 벽이 마기의 칼날을 막아섰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검게 타오르던 강환이 목표에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바람의 벽 역시 제 할 일을 다 하고 흐릿하게 허물어졌다.

버틴 이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리메르의 검은 더 이상 그의 손에 잡혀 있지 못했다.

캬아앙!

그는 뜯겨 나간 오른쪽 어깨를 잡은 채로 피를 토해냈다.

“너….”

용현검주는 이것조차 막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하.”

리메르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지. 나를 뚫고 가지는 못한다고….”

“이제 끝이다!”

용현검주가 리메르를 무시하고, 광풍대에게 달려들었다. 마검으로 가장 앞에 있던 크레인을 찌르려는 찰나 리메르가 다시 그 앞에 섰다.

퍼어억!

리메르는 마검 크리아투스를 몸으로 막으며 히죽 웃었다.

“귀가 먹었어? 나부터 죽이라니까?”

“그래! 그게 소원이라면 죽어라!”

용현검주가 리메르를 찌른 칼날을 폭발시키려고 할 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앙!

광풍대의 중심에서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 시초의 불꽃처럼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이 사위로 뻗어나가 마기를 지져버렸다.

저벅.

불길의 폭풍 속에서 황금빛 그림자가 다가와 리메르의 복부를 뚫고 튀어나온 마검을 잡았다.

화아아아아!

진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마검의 칼날을 뜯어내고, 리메르의 상처를 막았다.

“허억….”

리메르가 뒤로 넘어갔고, 금빛 그림자가 그의 등을 받쳤다.

“느, 늦었잖아.”

“죄송합니다. 살짝 늦잠을 자서요.”

불길을 지우고 제 모습을 드러낸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맡기세요.”

“너는 진짜….”

리메르는 광혈귀 앞에서 그가 라온에게 했던 말을 돌려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리다가 눈을 감았다.

“부탁한다.”

라온은 리메르는 조심스럽게 들어서 도리안에게 맡겼다.

“네, 네놈….”

용현검주가 라온의 기세가 급변한 것을 느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어도 소용없다! 어차피 나는….”

라온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천검을 뽑았다.

천 개의 불꽃이 이어져 하늘에 닿았다.

만화공 천화.

무금향.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라온의 눈동자 속에 화염의 신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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