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4화
광풍대와 성검련 검귀들의 전투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멎었다.
“크, 클라우드 님!”
“말도 안 돼….”
“클라우드 님이 주, 죽었다고?”
검귀들은 성검련주의 제자인 클라우드가 부상을 입은 라온에게 패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하! 저 미친놈은 진짜!”
마르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검계현신까지 써놓고, 그랜드 마스터를 또 잡았다고?’
미쳤다는 말 말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인간은 가까이서 보든, 멀리서 보든 이해 불가능한 존재였다.
“저쪽이 먼저 끝날 줄은 몰랐는데.”
버렌이 라온을 돌아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정말 큰 일을 해줬어.’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위험했던 건 라온이었다.
검계현신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오러를 소모했고, 부상까지 입어서 이기는 건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그 의심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클라우드의 목을 베었다.
라온을 걱정했던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부대주님!”
“믿고 있었습니다!”
“남은 검귀들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도리안과 광풍대 검사들도 라온을 향해 들뜬 미소를 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다만 루난의 보랏빛 눈동자는 라온이 아니라, 성검련 검귀들을 향했다.
촤아아아악!
설화에 차오른 냉기가 검귀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검귀는 베인 상처가 통째로 얼어붙은 채 숨이 끊어져 쓰러졌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야.”
루난은 광풍대에게 짧게 고개짓을 한 후 바로 다음 상대를 찾아서 움직였다. 라온을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를 완전히 신뢰하기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루난이 맞는 말을 다하네?”
“그래서 열받아!”
버렌과 마르타도 전장의 흐름이 광풍대 쪽으로 넘어온 것을 느끼며 오러를 아끼지 않고, 검귀들을 베어나갔다.
“후우.”
리메르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눈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신성 대결은 우리 쪽이 이겼나 본데.”
그는 목이 떨어져 나간 클라우드의 시체와 당당히 선 라온을 번갈아 보며 키득거렸다.
“으음….”
용현검주도 클라우드가 패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주군의 제자가 뒈졌으니, 속이 많이 쓰리겠어. 돌아가면 욕 좀 먹겠는데? 아니다.”
리메르가 폐에 차오른 마기를 뱉어내며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넌 여기서 죽으니까 상관없겠군.”
“그래. 상관없다.”
용현검주는 숨 한 번 내쉴 시간에 안정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라온 지그하르트는 전장에서 이탈했으니까.”
그는 검은 피를 토하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라온 지그하르트를 데려가면 련주님도 별말 하지 않으실 거다.”
“라온을 데리고 간다고?”
리메르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미간을 구겼다.
“련주께서 저 재능을 원하고 계신다. 그분이 더 위로 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
용현검주는 라온을 실험체로 사용할 것처럼 냉담하게 입을 놀렸다.
“지랄이 풍년이네.”
리메르가 칼날 위로 섬뜩한 바람을 불러왔다.
‘역시 라온을 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군.’
성검련주는 신주오령의 도시 바레네에서도 라온을 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던 것 같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겠어.’
마검 크리아투스가 피워내는 마기가 광풍대와 라온에게 닿지 않도록 막느라, 속이 조금씩 아려왔다.
가장 걱정했던 라온도 결착을 맺었으니,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게 맞았다.
“검계현신.”
리메르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바람과 벼락의 노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나운 음성이 하늘 높은 곳에서 땅의 끝까지 퍼져나갔다.
쿠구구구구구!
천지가 요동치며 폭풍과 뇌전을 쉴새 없이 일으켰다. 마나 자체가 깎여나가는 검의 결계 속에서 리메르는 푸른 눈을 번득였다.
광검이라 불렸던 전성기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웅대한 기파가 뻗어 나왔다.
“그래. 그 정도가 아니라면 죽이는 재미가 없지.”
용현검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메르를 향해 마검 크리아투스를 겨누었다.
뿌드드득!
요동치는 칼날 위로 마검의 붉은 눈동자가 치솟았다. 핏줄 선 눈동자에서 솟구친 우악스러울 정도의 마기가 사위를 뒤덮었다. 요동치는 마기의 파동에 공간이 세로로 비틀어졌다.
“2차전을 시작해보지.”
* * *
라온이 입술을 적신 검은 핏물을 쓸어내렸다. 내상과 마기가 일으키는 통증에 당장 기절하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전장을 살폈다.
‘대주님이 검계를 열었군.’
리메르는 이쪽에 대한 걱정을 지우고 전력을 다해서 용현검주와 맞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둘 다 한치도 밀려나지 않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마검의 힘을 이용하는 용현검주가 더 우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겠지. 광풍대와 나를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마검 크리아투스는 상대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 마기를 뿌리는 지독한 마검이다.
리메르는 용현검주를 상대하면서 광풍대에게 마기가 닿지 않도록 오러의 막을 펼친 상태라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분노에 먹혀서 적만 바라볼 줄 알았거늘. 저놈도 할 때는 하는구나.
라스도 리메르의 판단이 놀라운 듯 거의 처음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게.’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리메르를 도와주고 싶지만, 저 마나의 파동에 닿는 순간 먼지가 될 것이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럼 이쪽은….’
리메르와 용현검주 뒤편에서 싸우는 광풍대를 보았다. 성검련의 검귀들의 숫자가 많은 대신 광풍대의 무력이 조금 더 강했다.
호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루난과 마크 괴튼이 균형을 깬 덕분에 결국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주님이 지면 다 끝이야.’
광풍대가 검귀들을 잡아도 리메르가 용현검주에게 진다면 상황 자체가 끝나버린다.
리메르는 여전히 광풍대를 보호하면서 싸우고 있기에 용현검주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동귀어진 혹은 대주님의 죽음이 이 싸움의 끝이겠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리메르에게 이곳을 맡기고 광풍대와 함께 퇴각하는 것. 리메르도 광풍대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니 양쪽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주변에 다른 성검련 검귀들이 있을지 모르고, 내가 도움 자체가 안 되기에 위험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방법은 내가 여기서 벽을 뛰어넘는 것이다.
클라우드와 싸우면서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다. 뇌리를 간지럽히는 흐릿한 무리를 잡는다면 지금 이곳에서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 깨달음도 사라질 수도 있기에 내게도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최악에 가까운 몸 상태, 그리고 적이 앞에 있기에 두 번째 선택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역시 그것뿐이야.’
라온은 짧은 고뇌를 마치고 가늘게 차오른 오러를 끌어 올렸다. 버렌과 마르타, 루난, 마크 괴튼에게 동시에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이쪽 보지 말고 들어.]
그 말에 조장들과 마크 괴튼은 고개만 짧게 움찔거리고서 계속 검을 휘둘렀다.
[지금부터 난 벽을 뛰어넘을 거야.]
그 말에 조장과 마크 괴튼의 떨림이 심해졌다.
[이 미친놈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마르타가 참지 못하고 오러 메시지로 비명을 질렀다.
[허!]
버렌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최소한 다른 곳에 숨어서 해!]
[내가 움직이면 용현검주나 다른 놈들이 쫓아올 수도 있어. 폐인이 된 척 쉬면서 깨달음을 정리하는 게 가장 나아.]
용현검주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움직이면 따라올 테니, 아무것도 못 하는 모습으로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게 제일이었다.
[응.]
루난은 그저 믿는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고서 상대를 몰아쳤다.
[걱정 마십시오.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겠습니다.]
마크 괴튼도 신뢰를 두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마지막으로 리메르의 등을 보고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해령화의 잎과 글렌에게 받은 영약 두 개를 꺼냈다. 열기를 품은 붉은 단약과 냉기가 깃든 푸른 단약을 해령화의 잎에 싸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화아아아아!
모두가 최상급 영약이었기 때문인지 혀에 닿자마자 영약들이 액체로 변하여 목구멍을 넘어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서늘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최악의 몸 상태였기에 고통이 심했지만, 해령화 잎의 효과 때문인지 통증이 금방 가라앉았다.
‘후우….’
천천히 해야 해.
지금 벽을 깨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용현검주와 검귀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다. 가볍게 연공을 하는 척하면서 깨달음을 정리해야 했다.
라온은 선 채로 눈을 감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마나 회로를 가득 채우는 영약의 기운을 전신으로 퍼뜨렸다.
쿠구구구구!
마나 회로를 질주하던 영약의 기운이 중단전에서 모여들며 화산처럼 폭발했다.
강렬하면서도 순도 높은 기운에 육체를 헤집던 마기가 밀려 나가 구석에 처박혔다.
뜨겁게 달아오른 중단전의 기운이 천천히 마나 회로를 타고 올라가 상단전에 이르렀다.
상단에 닿은 열기와 냉기가 폭죽처럼 번지며 클라우드를 잡으며 얻었던 흐릿했던 깨달음이 선명하게 번득였다.
심상의 세계가 열린다.
외부의 반응을 느끼고자 펼쳐놓았던 기감이 스스로 가라앉으며 오롯이 나 자신만을 관조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이게 나아.’
어차피 연공을 시작한 이상 외부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최대한 빨리 벽을 넘어서는 게 나았다.
‘많이 변했군.’
심상의 세계는 이전보다 더 넓어졌지만, 수많은 검이 땅에 꽂혀 있는 검의 무덤 같은 형상은 변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공에 떠 있는 신검과 마검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땅에 꽂혀 있는 검을 잡았다.
‘저건….’
나잖아.
훈련복을 입은 어린 시절의 내가 심상에 세계에 박혀 있는 수련검을 뽑아 들고 기본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키가 커진 내가 다른 수련검을 들고 연성검술을 펼쳤다.
광아검을 휘두르는 라온, 만화공의 검술을 뻗어내는 라온 그리고 직접 만든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을 시전하는 라온까지.
검의 개수와 동일한 숫자의 라온이 나타나 검술을 펼쳤다.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내가 사용했던 검술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싸워온 다른 이들의 검술까지도 심상의 세계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검귀, 글렌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검이란 무엇이냐고? 검은 검일 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아니야.]
[가주님의 말씀이 맞다. 복잡하게 여길수록 어려워지는 게 검이지. 만검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다만 더 위로 나아가기 위해선 검술을 익히고, 그것을 펼칠 때 그에 합당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념을 둘러야 한다는 뜻이지.]
[인상 쓰지 마라.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 답은 언제나 네 안에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무학이라도 익힌 것처럼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답.
당시에 찾지 못했던 답을 얻기 위해서 또 다른 내가 휘두르는 검술들을 눈에 담았다.
하나같이 강하고 위력적이며 화려한 검술. 묘리가 제대로 스며들어 베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다만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기본 검술을 제외한 모든 검술이 각자 따로 놀고 있었다.
쇠사슬이 뚝뚝 떨어져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검술끼리 닿고 이어지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너무 많은 검술을 익혀서? 아니, 그게 아니야.’
검술을 많이 익힌 건 상관없다. 확실한 의념 없이 검술의 수만 늘린 게 문제였다.
검이 꽂혀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 검이 뽑혀서 직접 검술을 펼치니 문제점이 보였다.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오러의 양도 충분했는데도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건 이 세계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난 아직도 검술에 제대로 된 의념을 담아내지 못했으니까.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의 반응만으로 싸워왔다.
즉, 지금의 난 저 기본 검술을 휘두르던 어린 라온에서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후우.”
라온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둑했던 안개가 걷히고 일곱 개의 붉은 고리가 드러난다. 마음의 흔들림 때문일까. 불의 고리도 비틀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의 원점.’
이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의 시작이자 원점인 불의 고리로 돌아가 여덟 번째 고리를 완성해야 할 때였다.
‘그럼 일단 마기를 지우고….’
아니, 지울 필요 없지.
머리가 맑아지니,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난 마기는 없지만, 그보다 상위 개념인 마왕의 권능들이 있으니까.’
라온이 허공을 휘도는 일곱 개의 고리를 올려 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해보자.’
* * *
콰과과과광!
리메르의 손에 들린 풍뢰의 광검과 용현검주가 쥔 마기의 광검이 충돌하며 유성 같은 빛줄기가 끝없이 몰아쳤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마나의 파동 속에서 리메르가 공간을 갈랐다.
칼끝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무수한 뇌전의 폭풍을 쏟아냈다. 그 모습은 전성기 광검의 이름을 되찾은 듯 유려하면서도 폭발적이었다.
우우우우웅!
용현검주가 마검 크리아투스를 사선으로 세웠다. 극한으로 응집되어 하늘을 비틀어버리는 마기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찬란한 빛과 어둑한 빛이 맞물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을 터트렸다. 지축이 뒤틀리며 라키온 가문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진동했다.
리메르가 허공에서 몸을 휘돌린 후 용현검주의 좌측으로 쇄도했다. 바람이 깃든 칼날을 세워 용현검주의 목을 노렸다.
다만 용현검주는 이미 리메르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마검 크리아투스를 사선으로 뉘어 마기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쩌어어어어어엉!
풍뢰의 광검의 강렬한 파동이 마기의 광검을 갉아먹었지만, 끝내 뚫어내지는 못했다. 힘 자체는 여전히 용현검주가 우위에 있었다.
우우우웅!
용현검주가 마검 크리아투스를 내뻗자, 둥글게 돌아가는 검끝에서 아홉 갈래의 마기가 솟구쳤다. 채찍처럼 휘어진 마기가 주변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콰과과과광!
마기에 후려 맞은 대지가 독기에 중독된 것처럼 시꺼멓게 물든다. 한 번만 맞아도 숨을 끊어버리는 필살의 공세였다.
리메르가 전신에 바람을 휘감으며 우측으로 물러섰다.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반격을 포기하고, 회피에 집중했다.
하지만 용현검주는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리메르의 이상의 속도로 날아들어 크리아투스를 내리쳤다.
“크윽!”
새장처럼 주변을 휘감는 마기의 칼날에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구네!’
그가 입술을 깨물고서 좁혀오는 마기의 칼날을 향해 나아갔다.
촤아아악!
뇌전의 광검이 두 개의 마기를 갈랐지만, 남은 일곱 개의 칼날이 돌개바람처럼 꼬이더니 심장을 노리고 돌진해왔다.
리메르는 어둠을 주무르는 듯한 용현검주의 마검을 향해 달려들어 바람과 뇌기가 응집된 칼날을 내질렀다.
쿠구구구구구!
리메르의 광검에서 붉고 푸른 휘광이 몰아쳤지만, 마검 크리아투스의 어둠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묵혈.”
용현검주가 마검 크리아투스를 좌측으로 젖혔다. 장검 수준이었던 칼날이 끝없이 솟구치며 하늘의 신장이 들 법한 대검을 세웠다. 검붉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칼날이 세상을 벨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리메르는 검계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을 느끼며 광검을 들어 올렸다. 검날의 빛이 전방으로 퍼지며 장대한 빛의 폭풍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앙!
대지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고, 리메르와 용현검주가 발을 끌며 뒤로 밀려났다.
퉷.
리메르는 입에 고인 검은 핏물을 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힘들겠는데….’
마검 크리아투스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점점 더 강렬한 마기를 흩뿌렸다. 속이 거북해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고, 손끝도 떨려왔다.
용현검주는 마검에 의지해서 본인의 오러를 많이 소모하지도 않았기에 점점 더 상황이 불리해졌다.
‘아이들이라도 보내야 하나?’
광풍대를 살린 후에 동귀어진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 용현검주가 비웃음을 그렸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놈은 마검 크리아투스로 대지를 헤집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수하들을 도망치게 만들 생각인가? 하긴 검계현신 시간 동안 날 꺾을 수도 없고, 광풍대의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으며, 라온 지그하르트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으니, 합당한 판단이야. 하지만 그 고민도 의미 없는 일이다.”
그가 좌측과 우측으로 턱짓을 했다.
“이미 이곳은 전부 포위되어 있어. 네놈이 선택할 건 여기서 함께 죽느냐. 넌 여기서 죽고, 다른 이들을 밖에서 죽느냐 뿐이다.”
용현검주는 포위망 자체에 자신이 있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남을 구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이젠 본인도 구하지 못하지만.”
“너 이 새끼….”
리메르의 눈동자에 오싹한 기류가 차오른다. 이성이 녹아내린 공간을 시뻘건 분노가 채웠다.
“여기가 네놈의 마지막… 어?”
말을 하던 용현검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무슨….”
리메르가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았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 거리던 라온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서, 설마 저 녀석….’
여기서 벽을 깨려고 한 건가?
지금 라온이 보이는 건 벽을 깨기 직전에 보여주는 현상 같았다.
‘무슨 놈의 간땡이가 저렇게 커!’
전장의 한복판에서 벽을 부수려고 하다니, 대륙 제일의 광인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미친….”
용현검주 역시 그것을 느낀 듯 이를 갈았다.
“잡아! 당장 저놈을 끌어내려!”
반대로 리메르는 광풍대에게 손짓했다.
“막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