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3화
리메르가 북해에서 불어온 듯한 삭풍을 일으켰다. 폭풍에 휩쓸린 풀잎처럼 거칠게 나아가 용현검주의 심장을 향해 붉은 뇌전을 찔러넣었다.
화아아아아!
용현검주가 마검 크리아투스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마기의 굴곡을 세웠다.
쩌어어어어엉!
붉은 뇌기와 검은 마기가 맞물리며 거센 충격파가 사위를 몰아쳤다.
쿠구구구구구!
리메르와 용현검주의 주변에 있던 광풍대와 성검련의 검귀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강환?”
용현검주는 리메르의 검에 맺힌 붉은 기류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 사이에 강환에 닿았다고?”
“뭘 그리 놀라. 강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리메르가 구겨진 용현검주의 미간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회복이 빠르군.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용현검주가 짧게 고개를 주억이고서 마검을 쥔 손목을 우측으로 꺾었다.
마기의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리메르의 등을 향해 내리꽂혔다. 앞을 막아서고, 뒤를 노리는 기묘한 한 수였다.
“그걸 정하는 건 네놈이 아니라, 나다!”
리메르는 오히려 용현검주의 공간 속으로 들어서며 푸른 바람을 피워올렸다. 검극에 맺혀 있던 강환이 바람의 흐름을 타고 퍼져나가 그의 등을 막아주는 방패를 이뤘다.
캬아아아앙!
마기의 칼날이 매섭게 떨어졌지만, 두껍게 솟구친 오러의 막을 뚫어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쯧.”
용현검주는 불시의 일격이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은 몰랐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네놈이 생긴 것과 달리 야비하다는 건 잘 알고 있거든.”
리메르가 검을 가볍게 휘돌리며 비웃음을 그렸다.
‘그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용현검주는 성직자라도 된 것처럼 청수한 인상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에 수천 마리의 뱀을 키우는 협잡꾼이다. 검술만이 아니라, 심리전에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저 망할 마기 때문에 방심 자체를 할 수 없지만.’
용현검주의 검격도 무섭지만, 마검 크리아투스가 일으키는 마기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마스터 급이 아니라면 다가가기도 힘들겠어.’
마검은 적도 아군도 상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마기를 흩뿌리며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싸우면서 완벽하게 마기를 막을 자신이 없기에 움직임에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거나 물러설 수는 없다. 복수를 떠나서 뒤에 있는 라온과 광풍대를 위해서라도 용현검주를 빠르게 베어야 했다.
터어어엉!
리메르가 거친 보법을 밟으며 용현검주를 향해 나아갔다. 바람과 뇌전을 두른 채 쇄도하는 그의 모습은 천공을 노니는 신룡을 보는 듯했다.
“조급하게 굴지 마. 싸움은 이제 시작이니까.”
용현검주가 입매를 비틀며 마검의 불꽃으로 강환을 일으켰다. 동심원을 그리면서 확장되는 강환의 파동에 검게 물든 땅거죽이 뒤집히고,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여기가 끝이다!”
리메르는 압도적으로 강맹한 용현검주의 강환을 보고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더 빠르게 짓쳐 들어 장대한 검격을 쏟아냈다.
“멍청한 놈!”
용현검주 역시 물러서지 않은 채 리메르의 목을 향해 검격을 찔러넣었다.
쿠와아아아아앙!
풍뢰의 강환과 마기의 강환이 충돌하며 터져 나온 회색 기류가 라키온 가문을 뒤덮었다.
* * *
라온은 리메르와 용현검주가 일으킨 파동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버틸 수 있으려나?’
리메르는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고, 용현검주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성을 챙기기 힘든 상태였다.
그의 무력이 본래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치이이잉!
난잡해진 상황에 미간을 찌푸릴 때 클라우드가 좌측으로 쇄도해 검을 휘둘러왔다. 빠르면서도, 급격한 변화를 이루는 검격. 놈의 만검은 이전보다 더 발전해 있었다.
라온이 가슴을 향해 짓쳐 들어오는 검격의 투로를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딪쳐서는 안 돼.’
클라우드의 검에는 선명한 강환이 맺혀 있다. 지금 상태로 저 검과 부딪쳤다간 회복하기 힘든 내상을 입게 될 게 분명했다.
터엉!
발목을 사선으로 돌리며 태화삼보를 밟았다. 해류를 따라 움직이는 산호처럼 클라우드의 검격을 밀어내지 않고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물러섰다. 놈의 칼끝이 흑룡포의 끝단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어딜 보고 있는 것이냐! 네놈의 상대는 나다!”
클라우드가 이를 갈며 추적해온다. 빠르면서도 다채로운 보법.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려는 의도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네.”
라온이 제천검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 말이 맞아.’
다른 사람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대부분의 체력과 오러를 소모한 상태에서 심각한 부상까지 입었다.
클라우드는 몸 상태가 정상이라고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상대였기에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랐다.
치이이잉!
클라우드의 검이 섬광처럼 뻗어온다. 하나의 검극이 호수에 비친 햇살처럼 십수 개로 갈라져 전신의 급소를 노려왔다.
‘환검과 정검 그 뒤는 절검인가.’
클라우드는 만검을 익히고 있기에 평범한 검술 하나하나가 다른 무인들의 절기와 비슷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막는 것도 어렵지만 피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라온이 호흡을 멈추며 검광의 파도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곱 개의 불의 고리를 동시에 공명시키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미간을 향해 짓쳐 드는 검광에 내 모습이 비친다. 집중력이 극한까지 차오른 상태. 적의 호흡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치이이이잉!
머리를 뚫어버리려는 검격은 목을 좌측으로 젖혀서 피하고, 허리를 노리는 참격은 제천검에 얇은 오러를 둘러서 흘려냈다.
클라우드의 검격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집중력에도 한계가 있다.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잘난 검계현신을 쓰지 못하니, 허수아비일 뿐이로구나!”
클라우드가 비소를 흘리며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복잡한 검술이 아니라, 무학의 묘리만을 휘감은 검격으로 무식하게 돌진해왔다.
‘현명하군.’
놈은 이전의 대결에서 검술이 모조리 파훼된 경험을 잊지 않고, 검술을 최대한 단순화해서 힘에 집중했다. 상대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라스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라스와 거래를 한다면 체력과 오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강해진 만큼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양의 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요즘도 분노가 통제가 안 되는데, 이 이상 받았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거기다 적은 또 남아 있으니까.’
용현검주와도 싸울 수 있기에 지금은 라스의 도움을 바랄 때가 아니라,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라스도 알아서 할 거라 믿는 듯 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피하나 보자!”
클라우드는 여전히 검격에 단순한 묘리만을 담아서 휘둘러왔다. 다만 단순하면서, 빠르고, 정확했기에 하나하나가 피하기 쉽지 않았다.
‘묘리를 줄였다고 해도 검술은 검술.’
분명 파고들 틈이 있을 거야.
클라우드는 격 높은 검사답게 깔끔하게 찔러오는 검격에도 고차원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그 흐름을 파악해야 했다.
고오오오오!
라온은 불의 고리만이 아니라, 분노의 마안과 설화의 감각까지 운용하여 클라우드가 만들어내는 오러의 흐름 자체를 살폈다.
‘역시나.’
클라우드는 그저 힘만으로 검술을 펼쳐내고 있지 않았다. 만검을 극한으로 단순화해서 평범하게 보이게 만드는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성검련주에게 배운 건가?’
아니, 조금 다른 느낌이야.
같은 만검이지만, 이전의 클라우드가 사용했던 검술과는 궤가 다른 것 같았다. 다만 그의 흐름이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후우우우웅!
라온은 사납게 짓쳐 드는 클라우드의 검격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우측 허리.’
강환이 다가오는 건 좌측 어깨였지만, 실제 노리는 건 우측 허리 같았다.
클라우드는 뇌리에 그린 그대로 우측의 허리를 노리고 검극을 회전시켰다. 예측이 맞았기에 움직임에 여유가 생겼다.
치이이이잉!
라온이 클라우드의 검을 흘려낸 후 놈의 간격 속으로 파고들어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요기가 깃든 검격이 클라우드의 오러를 가르고, 놈의 허벅지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이, 이놈!”
클라우드는 본인이 상처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듯 눈을 부릅뜬 채로 검격을 쏟아냈다.
“후….”
탁한 숨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클라우드의 검과 오러에 박아두었다.
‘이번에는 중심인가.’
클라우드는 변화를 지우고, 힘과 속도로 명치를 노리고 있었다.
‘아니야. 뭔가 더 있어.’
불의 고리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회전시키며 검극의 움직임을 끝까지 살폈다.
정직하게 뻗어나가던 검격이 급격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놈은 단숨에 심장을 가를 생각이었다.
라온이 선 자리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등이 땅과 수평이 되도록 자세를 굽힌 후 그 반동을 이용하여 제천검을 쳐올렸다.
피아아아악!
이번에는 제천검의 칼날이 클라우드의 가슴을 갈랐다. 놈의 가슴팍에서 붉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얕아.’
허리를 파고든 마기가 방해하여 평소의 움직임을 펼칠 수 없었다. 아쉬움에 혀를 찼다.
“크윽….”
클라우드가 흘러나오는 핏물을 손으로 털어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분의 검술인데, 네놈이 어떻게!”
그는 묘리를 단순화시킨 검격이 파훼된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그분?’
라온은 클라우드가 말한 그분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련주가 아닌 건가?’
스승이나, 련주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 같았다.
‘그게 누구….’
“빌어먹을 재능!”
클라우드가 참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며 돌진해왔다.
콰과과과광!
강환이 사위로 뻗어나가며 대지가 무너지고, 허공이 비틀어졌다.
‘어깨!’
어깨를 뜯어낼 것처럼 짓쳐 드는 검격을 피하자마자, 좌측에서 강환이 밀려왔다.
‘이건 못 피해.’
라온이 몸을 비틀며, 제천검을 초승달처럼 구붓하게 그어 내렸다.
회피와 흘리기를 동시에 펼쳐냈지만, 클라우드의 칼날은 허벅지의 살을 거칠게 뜯어냈다.
‘젠장!’
주저앉고 싶은 고통을 참아내며 역수로 든 진혼검을 찍었다.
퍼어억!
요기로 번들거리는 칼날이 클라우드의 오러를 가르고 놈의 어깨를 갈랐다.
“죽어!”
클라우드도 어깨의 통증 따위는 무시한 채 악을 지르며 돌진해왔다.
다리의 움직임이 흔들리며 강환이 타오르는 칼날이 목 끝을 스쳤다. 붉은 핏방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후….”
라온은 죽음이 코앞까지 찾아왔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이야.’
클라우드의 검술은 무식할 정도로 거칠어졌지만, 그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놈을 꺾을 청사진은 천천히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허리와 허벅지의 통증을 잊은 채 오직 클라우드의 검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좌측 어깨, 우측 허리, 우측 발목 그리고 목!’
클라우드의 검술 흐름이 점점 더 선명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놈의 검술이 빨라졌지만 피하기는 더 쉬워졌다.
라온은 몸 전체를 움직여서 회피하는 것을 멈추고, 클라우드가 노리는 부위만을 짧게 물러서며 체력과 오러를 아꼈다.
“뭐, 뭐야!”
클라우드가 한발 물러서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떻게 피하는 건데!”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듯 괴성을 질렀다.
“넌 그날부터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군.”
라온은 끝이 다가온 것을 느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내가 정상이었다면 일격에 끝이 났을 거다.”
“입 다물어!”
클라우드가 이성을 잃은 듯 가지고 있던 오러를 모조리 폭발시키며 검격을 내질렀다.
검극에 어린 강환이 거세게 약동하며 사위를 휘감는 오러의 폭풍을 일으켰다. 무식하지만, 피할 공간 자체를 지워버리는 효과적인 공세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앙!
라온은 땅거죽을 뒤집어엎으며 다가오는 강환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
옆에서 본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이건 내가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 기회였다.
‘놈의 기운이 분산되었으니까.’
강환은 검강을 응집시켜서 파괴력을 높이는 상승의 기예다.
범위는 늘어났지만, 밀집도가 약해졌으니, 지금 강환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라온은 참고 참던 인내의 시간을 견디고, 열매를 따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남아 있는 오러를 상단전으로 끌어 올리며 다시 한번 검계를 열었다.
찰나의 검계현신 신마조화결.
제천검과 진혼검이 증발하고 그 손아귀에 신검과 마검이 치솟았다. 두 자루의 검이 완벽한 형상을 그리기 전에 발을 내디뎠다.
‘지금은 검을 완성시킬 수 없어.’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몸 상태로 제대로 된 검계현신을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지금 내 머리 위로 태양과 달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두 자루의 검은 불꽃과 서리로 타오르지 않았다.
제대로 완성조차 시키지 못한 신검과 마검. 하지만 상관없었다. 칼날의 날카로움만큼은 여전했으니까.
라온의 두 손에서 황금빛 전광이 타오른다. 그가 지닌 영혼의 격이 클라우드의 기파를 밀어내고, 검과 검을 부딪칠 수 있는 공허의 경계를 만들어냈다.
“거, 검계현신? 아니, 이건….”
당황하여 눈동자를 떠는 클라우드를 향해 교차시킨 두 검이 오연한 칼날을 드러냈다. 신검의 고고함과 마검의 섬뜩함이 하나의 검술에서 어우러졌다.
“두 번은 지지 않는다!”
클라우드가 다급하게 강환을 다시 응집시키며 날아들었다. 당황했음에도 그의 검에는 확연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검술은 모두 파악했어.
신검과 마검이 이뤄내는 하나의 선이 강환의 흐름을 비틀고, 클라우드의 목에 붉은 선을 새겼다.
“나, 나는 아직….”
클라우드는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갈라진 목을 부여잡고 어깨를 떨다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핏줄이 선 눈동자로 라온을 올려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네놈을 그때 죽이지 않기를 잘했군.”
라온이 사라지는 신검과 마검을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덕분에 또 성장할 수 있었어.”
이젠 듣지 못하는 클라우드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서 떨어뜨린 두 검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다.
“커헉!”
라온은 검을 집다 말고 검은 피를 핏물을 토해냈다. 무리해서 오러를 뽑은 덕에 마기가 더욱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장기를 흔들었다.
‘1초의 검계현신이라….’
희생은 컸지만,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클라우드였을 것이다.
라온이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