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60화 (559/653)

제560화

라온이 바위에 설치된 기관을 작동시켰다. 거북이의 머리처럼 생긴 큼지막한 바위가 소리 없이 밀려나며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차디찬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무저갱처럼 어둑한 구멍 속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이밀었다.

벨스가 지나갔던 계단만 밟으며 아래로 내려가자, 새벽과 똑같이 샛노란 조명이 차가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라키온의 검사들. 눈동자에 시뻘건 마기를 드러낸 검사들이 길을 막아섰다.

‘의미 없는 일이지만.’

라온은 공동의 어둠을 로브처럼 휘감은 채 검사들을 스쳐 지나가 바시온이 머무는 중앙의 문 앞에 섰다.

“음….”

“뭐, 뭐지?”

“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내려오질 않아.”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이 기감을 퍼뜨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 누구도 라온의 기척을 발견하지 못했다.

“으음….”

검사 중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인이 인상을 구기며 바시온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두 번의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후안 라키온의 둘째 아들인 바시온이 튀어나왔다.

“뭐야!”

바시온이 뺨에 묻은 핏물을 닦으며 눈매를 찡그렸다. 놈이 나온 문틈을 이용하여 방 안쪽을 살폈다.

시을렌은 팔뚝과 허벅지에 멍이 든 채로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의 유모는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어깨의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둘 다 기절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옅은 숨만 내쉬었다.

-저놈 설마 애도 때린 것이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들키지 않게 옷으로 가릴 수 있는 부분만 건드렸어.’

-죽일 놈이니라! 할 짓이 없어서 어린 애를!

‘오랜만에 너랑 마음이 통하네.’

라온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누가 왔는데, 문까지 두드리는 거야!”

바시온도 바위가 열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지 소리를 지르며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무, 문은 열렸는데, 아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가 입매를 비틀며 방에서 한 걸음 벗어났다.

후우우웅!

라온은 바시온이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말아쥔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뻐어어어억!

바위가 깨져나가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바시온이 얼굴이 찌그러진 채 벽에 처박혔다.

“크허어억….”

라온은 뒤늦게 신음을 흘리는 바시온의 멱살을 쥐고,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아서 놈의 팔을 베었다.

“끄아아아아악!”

본능적으로 반격을 가하려던 바시온의 오른팔이 차디찬 바닥에 떨어지고, 놈이 찢어지는 비명을 터트렸다.

“너, 너는 누구냐!”

“라키온에서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날 수 있을 거 같아?”

“당장 그분을 놔줘!”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이 어깨 위로 마기를 일으키며 눈을 부라렸다.

“입 다물어.”

라온이 바시온의 목에 진혼검을 겨눈 채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주둥이를 나불거리거나,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너희의 주인이 죽는다.”

그 말을 하며 바시온의 목젖을 살짝 갈랐다. 붉은 핏물이 진혼검의 칼날 위를 적셨다.

인간의 삶을 포기한 악귀들에게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건 바시온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인지시켜주었다.

“끄으으….”

바시온이 왼손으로 잘려 나간 어깨를 만지며 이를 바득 갈았다.

“내, 내가 고작 그따위 협박에 굴할 줄 아느냐!”

마기에 씌였기 때문인지 놈의 어깨에서 새로운 살점이 돋아나고 있었다.

“공격해라! 어차피 이놈은 날 죽일 수 없어! 당장 목을 따버려!”

바시온은 본인은 상관없다고 외치며 라온을 공격하라고 외쳤다.

치이이잉!

명령을 들은 라키온의 검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돌진하여 검격을 쏟아냈다. 꺼뭇한 마기에 휘감긴 칼날이 게걸스럽게 쇄도해왔다.

라온은 역수로 잡은 진혼검으로 바시온의 척추를 찍어버렸다.

뿌드드득!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리고, 바시온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꾸우욱.

라키온 검사들의 검이 목 앞으로 다가온 순간 오른손으로 제천검의 검병을 말아쥐었다.

손끝에서부터 피어나는 시뻘건 검광이 마기로 타오르는 칼날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콰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터지며 눈앞을 가득 채웠던 마기의 검격과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이 재가 되어 가라앉았다.

쿠구구구구!

검격에 담겨 있던 강대한 힘 때문에 공동 위의 천장이 무너지고, 샛노란 빛만 가득하던 지하에 따사로운 햇살이 드리웠다.

“네, 네놈 대체….”

바시온은 척추에 가해진 충격에 전신이 마비된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입술만 떨었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다고?”

라온이 바시온과 눈을 마주치며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그, 금발적안.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이 왜 여기에….”

“내가 물어본 건 내 이름이 아니야. 왜 널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인질?”

“그건….”

“맞아. 지금은 안 죽일 거야. 네놈이 두르고 있는 그 마기가 필요하거든.”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바시온의 어깨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만 네 사용 가치가 다 하면 그 모가지도 떨어질 거다.”

“끄윽….”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면 입 다물고 있어.”

라온은 바시온의 머리통을 밟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상태가 심각한 유모를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으로 치료해준 후 시을렌에게 다가갔다.

“거, 검사님이 라온 지그하르트였어요?”

폭음 때문에 깨어난 시을렌이 얇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라온은 시을렌의 팔과 다리를 조이고 있던 쇠사슬을 가볍게 깨부숴 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아, 네….”

시을렌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벽을 잡고 일어났다.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인지 바로 주저앉았지만, 바로 다시 일어섰다.

“지금부터 난 너희 가문과 싸우게 될 거야. 이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게 하려면 라키온 가문의 죄악이 낱낱이 밝혀져야 해.”

라온이 무거운 시선을 내려서 시을렌의 투명한 눈망울을 마주 보았다.

“그 일을 네가 해줄 수 있을까?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네가 나서준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다.”

바시온을 살려두었기에 어떻게든 증거는 만들 수 있지만, 시을렌이 본인 입으로 사정을 말해준다면 아직 마기에 휩쓸리지 않은 무인들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시니건 지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고, 지금도 갇혀서 고문당했기에 해주지 않아도 이해해야 했다.

“할게요. 꼭 하게 해주세요!”

시을렌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유모와 쓰러진 바시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희 가문을 구해주실 수 있나요?”

“후….”

라온은 시을렌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도 가족이라는 거겠지.’

이 아이는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들을 구하고 싶어 했다.

시니건 지부에 가문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것도 가족의 틀이 깨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보마.”

확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 다 끝났어요?”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리안이 굉음을 듣고 올라온 듯 무너진 천장 위에서 눈썹을 떨었다.

“산사태라도 난 줄 알았어요….”

“내려와라.”

“아, 넵!”

도리안은 공동에 내려오자마자 코를 잡으며 미간을 구겼다.

“어으, 진짜 이상한 냄새가 가득하네요.”

“마기의 악취다.”

라온이 시을렌이 있던 옆방의 문을 열었다. 라키온 가문의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숨이 끊어진 채 구석에 쌓여 있었다.

‘지독한 놈들….’

시체가 살점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것을 보니, 생기를 모조리 빨아 먹은 것 같았다.

라온은 여러 개의 방과 이어지는 공동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 밑에서 가장 깊고 짙은 마기의 악취가 피어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발을 구르자, 땅이 갈기갈기 터져나가며 안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고약한 마기의 악취를 뿌려대는 나무뿌리 같은 것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이건….’

-음?

무언지 알 수 없어서 손끝을 비비고 있을 때 라스가 나무뿌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주목의 뿌리가 왜 여기에 있지?

‘명주목?’

-왜 뿌리만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마계의 나무이니라. 조용히 땅을 파고들어서 주변의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먹는 아귀 같은 놈이지. 식욕이 강해서 명주목이 있는 주변에는 마물도 살지 않느니라.

녀석은 글러트니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을 이 뿌리에 제물로 바쳐서 마기를 모았던 건가?’

다만 이 뿌리 자체에서는 그리 큰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악취만 지독할 뿐이었다.

“도리안. 이거 챙겨라.”

마기가 짙지는 않지만, 마기의 향이 남은 것만으로도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기에 명주목의 뿌리를 도리안에게 던졌다.

“으헥!”

도리안은 무서운지 손톱으로만 뿌리를 잡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준비는 됐냐?”

라온이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바시온의 머리채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크윽, 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냐….”

“알면서 뭘 물어.”

덜덜 떨리는 바시온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네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을 준비지.”

*     *      *

쿠우우웅!

후안 라키온은 단상을 박차고 가주전을 뛰쳐나갔다. 벨스와 다른 간부들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허어!”

“저, 저게 대체….”

“왜 배킨 산에서 연기가 나는 거지?”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은 동쪽에 있는 배킨 산 중턱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후안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리메르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의 검은색 안구에서 섬뜩한 살의가 흘러나왔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까? 눈동자에서 마기가 흘러나오는데요?”

“무, 무슨 개소리를!”

후안은 산이 터진 것보다 더 당황하여 입술을 떨었다. 그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그를 보호하는 간부들도 눈동자에 기괴한 빛을 일으켰다.

“아, 농담이에요.”

리메르는 착각한 것 같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당황하세요? 마기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그는 입매에 비웃음을 내건 채로 턱을 치켜들었다.

“네놈은 언젠가 그 주둥아리 때문에 죽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다만 나보다 댁이 먼저 아닐까?”

“벨스!”

후안은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벨스를 불렀다.

“예.”

벨스가 후안의 거친 목소리를 듣고, 앞으로 부복했다.

“네가 가보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와!”

“알겠습니다.”

“갈 필요 없어.”

리메르가 경쾌하게 손을 저었다.

“우리 미친개가 뼈다귀를 물고 이쪽으로 오고 있을 테니까.”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후안도 리메르가 말하는 미친개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오, 미친개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라온이 지붕을 연달아 밟으며 가주전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 사람을 들고 있는 거 같은데?”

“어? 저, 저 사람은!”

“바시온! 바시온 님입니다!”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은 라온의 손에 들려 있는 사람이 바시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터엉!

모두가 놀란 사이에 라온은 가볍게 벽을 박차고서 후안의 앞에 내려섰다.

“야. 늦었어. 손님들이 기다리셨다고.”

리메르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인상을 찌푸렸다.

“찾을 게 좀 많았거든요.”

라온이 대답을 하면서 바시온의 머리를 툭툭 쳤다.

“바, 바시온….”

후안은 팔이 뜯겨나가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둘째 아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무리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은 당장 덤벼들 것처럼 검을 뽑아 든 채 살기를 일으켰다.

“싸움 좋지.”

리메르가 부드럽게 검병을 말아쥐었고, 광풍대는 언제라도 진법을 펼칠 수 있도록 간격을 조절하며 예리한 기세를 드높였다.

“둘째 아드님이 보이질 않아서 어디에 있나 찾았더니,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숨어 있더군요.”

라온은 바시온을 들어 올려서 후안과 눈을 마주칠 수 있게 해주었다.

“아, 아버지….”

“이놈!”

후안이 악을 지르며 시꺼먼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이 저지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거라….”

“당신이 죽겠지.”

라온이 검을 내지르듯 후안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댁네 둘째가 내 손에 잡혀 있는데, 언제까지 연기를 하실 겁니까.”

비웃음을 흘리며 바시온의 왼팔을 비틀었다. 뼈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팔이 끈이 떨어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끄어어억!”

바시온이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떨었다. 망가졌던 척추가 마기로 재생되었는지 놈의 감각은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으음….”

후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씹었다. 그만이 아니다. 벨스와 다른 검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시리아만 미쳤던 슬리온 가문과 달리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한통속이었다는 뜻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가주님을 모욕하지 마라!”

“둘째 도련님이 뭘 했다는 거야!”

다만 젊거나, 나이가 많아서 후안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무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 말해줘야겠네.”

라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검사들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놈. 아니, 이놈만이 아니지. 지금 너희 앞에 있는 가주 후안 라키온과 간부들은 성검련의 손을 잡고, 라키온 가문의 무인들을 마검의 제물로 바쳤다.”

“허, 헛소리! 헛소리다!”

“맞아! 우리 가문이 왜 성검련과 손을 잡는단 말이냐!”

“증거를 가져와!”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기 때문인지 당차게 외치던 라키온 가문의 목소리가 진흙에 묻힌 것처럼 가라앉았다.

“이걸 보면 알 텐데.”

라온이 바시온의 몸을 돌려 뜯겨나간 어깨를 보여주었다. 놈의 몸을 잠식한 마기가 억지로 팔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재생의 공능? 아니, 저거 마기잖아….”

“그, 그럼 지금 한 말이 전부….”

“그래. 진짜다.”

무인들의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니건 지부를 습격한 것도, 산적을 연기한 것도, 가문의 주요 간부들이 떠났다고 한 후 죽인 것도 모두….”

라온이 검지를 들어 후안 라키온을 겨누었다.

“너희 가주와 간부들이 행한 일이지.”

그 말이 끝나자, 라키온 가문의 검사들이 후안을 바라보았다. 믿음이 깨진 그들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것처럼 출렁였다.

“미, 믿을 수 없다!”

“맞아! 네놈이 마기를 씌웠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여전히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가, 가주님!

“거짓말이죠?”

“말씀해주십시오!”

“너희의 가주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벨스가 앞으로 나오며 굳건한 눈빛을 드러냈다.

“믿어라. 우리가 가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믿겠느냐!

그는 지그하르트가 라키온을 분열시키려고 하는 거라며 가주를 믿으라 외쳤다.

“반박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

후안 역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거짓을 내뱉었다.

“저놈이 저지르고,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것이다.”

“역시!”

“백검룡이니, 용살자니 하더니 마족에 씌인 놈이었구나!”

“적이다! 당장 죽여야 할 적이야!”

검사들은 후안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악을 질렀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 후안은 명망 있는 가주였으니,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나오렴.”

뒤로 손을 까딱이자, 도리안이 시을렌을 데리고 앞으로 나왔다.

“아, 아가씨?”

“아가씨도 잡힌….”

“아니에요.”

시을렌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저는 라온 검사님이 아니라, 둘째 오빠에게 잡혀 있었어요. 그동안….”

그녀는 라키온 가문의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밝혔다.

우습게도 시을렌의 처참한 모습이 그녀의 증언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가, 가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주십시오!”

“…….”

후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하아아….”

그가 거센 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에 먹구름이 차오른 듯 검게 번들거렸다.

“가주님?”

“미안하구나.”

후안이 담담하게 손을 뻗자, 사실을 밝히라던 검사들의 가슴이 터져나가며 시꺼먼 구체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악취가 극에 달한 오염된 마기였다.

“아….”

“가, 가주….”

“끄으으윽!”

검사들은 본인들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조차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

“너희의 죽음은 라키온이 우뚝 서는데 큰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후안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대단하구나. 라온 지그하르트의 가장 무서운 점은 검이 아니라, 심계라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어.”

그가 라온을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찌푸렸다.

“다만 너는 나를 모른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텼는지 모른다고!”

후안은 라온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듯 하늘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뭐?”

라온이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봉신가의 삶을 아느냐.”

후안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키득거렸다.

“봉신가. 말이 좋아 봉신가지. 따지고 보면 노예에 불과하다. 지그하르트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개새끼일 뿐이라고.”

그가 손톱으로 본인의 손등을 긁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지그하르트가 라키온을 먹어 치웠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나? 이 가문이 오롯이 내 것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가주인데, 내 위에 글렌 지그하르트가 있단 말이다!”

후안이 웃음을 뚝 멈추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굴욕. 시작할 때부터 남의 밑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굴욕을 네놈이 아냔 말이다!”

“알고 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일을 해내도 무시를 당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비웃음과 조롱이 따라오지. 그런 삶은 나도 알고 있다.”

직계로 태어나 방계로 살며 수많은 굴욕을 당했다. 부대주의 직위를 얻은 지금도 직계들은 무시하는 눈빛을 던지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후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뭐?”

후안은 그런 대답이 들려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 모욕적인 시선을, 그 굴욕적인 조롱을 이겨내려면 네 힘으로 했어야지. 남의 힘을, 그것도 성검련에게 마검을 받아?”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디찬 비웃음을 그렸다.

“너는 지그하르트를 벗어나 홀로 선 게 아니다. 꼬리를 흔들 대상을 성검련으로 바꾼 개일 뿐이야.”

“끄윽….”

후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목울대를 부르르 떨었다. 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게 분명했다.

“나한테도 꼬리를 흔들어봐. 검술 하나 내어줄지 누가 알아?”

“입 닥쳐라!”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아, 아빠.”

시을렌이 두 손을 모은 채 후안을 바라보았다.

“제발 그만해요. 여기서 멈추라구요!”

어린아이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긋난 아버지를 멈춰 세우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을렌.”

후안이 짧게 고개를 떨었다.

“네가. 네가 다 망쳤어. 전부 너 때문이다.”

“아, 아빠?”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가 이를 바득 갈며 손을 뻗었다. 시꺼먼 마기와 오러가 뭉쳐진 구체가 시을렌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아….”

시을렌은 짓쳐드는 검은 기류를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고 눈을 내리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떨림을 가시게 만드는 열기가 어깨 위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자, 새까만 장포가 펄럭이는 라온의 등이 보였다.

“라, 라온 님.”

“미안하다.”

라온이 뒤를 돌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부탁은 들어주기 힘들겠어.”

그 말을 하며 가볍게 시을렌의 목을 두드렸다.

“아….”

낮은 신음을 흘리며 기절한 시을렌을 잡아서 도리안에게 넘겨주었다.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게요.”

도리안은 평소와 달리 눈에 힘을 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떨리는 손아귀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위협이 아니었어.’

조금 전 후안은 정말 시을렌을 죽이려고 했었다.

방심했다면 저 어린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꼴을 볼 뻔했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분노가 걷잡기 힘들 정도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바시온은 후안을 향해 감각이 돌아온 왼팔을 뻗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 힘을 이었으니, 절대 죽지 않는다. 내가 꼭 살려….”

라온은 오른손을 들어 후안의 말을 듣고 있던 바시온의 목을 꺾어버렸다.

뿌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바시온의 눈동자에서 빛이 가라앉았다.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으로 마기의 선을 끊어버렸기에 놈은 재생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바, 바시온!”

후안은 바시온이 죽은 것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네 아들은 내가 대신 처리했다.”

라온이 두 손을 털며 차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네, 네놈이 감히!”

그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자,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나무뿌리를 뽑은 듯 십수 개의 칼날이 달려 있는 기형검이 뽑혀 나왔다.

칼날은 오싹할 정도로 검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듯 결이 살아 있었다.

‘저게 마검인가.’

놈은 땅속 깊은 곳에 마검을 숨겨서 마기의 악취를 숨겨두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꼭 나무로 만든 것 같네.’

-나무로 만든 것 같은 게 아니라, 나무로 만들었느니라.

‘뭐?’

-아까 보았던 명주목의 뿌리로 인간들을 생기를 먹어 치운 후 저 줄기로 마기를 방출하는 것이니라. 재밌는 운용 방식이로구나.

라스는 명주목을 저렇게 쓸 줄은 몰랐다며 낮은 탄성을 흘렸다.

쿠구구구구!

후안이 마검으로 하늘을 찌르자, 갈라진 대지에서 시꺼먼 액체가 뿜어져 땅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어둑하게 물들였다.

마검이라는 이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괴이한 현상이었다.

“마검 크리아투스로 강해지는 건 나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야!”

후안의 말대로 그의 뒤에 선 검사들에게서 강렬한 기세를 타올랐다. 그들 몸속에 있는 마기가 오러에 스며들며 격이 다른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윽….”

“뭐, 저런 미친 마검이 다 있어….”

“으음.”

평검사들만이 아니라, 버렌과 마르타, 루난 같은 조장들도 마기에 질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쿠우웅!

라온이 발을 내리찍어 진각을 밟았다. 시뻘건 불꽃이 터져나가며 꺼뭇하게 가라앉았던 대지를 지져버렸다.

“광풍대는 들으라.”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고고한 기파가 고약한 마기를 쳐내고 청아한 빛을 일으켰다.

“외적과 결탁, 가문 내 살인, 인신공양의 죄를 물어. 라키온 가문의 가주와 간부 모두를 척살한다.”

“명을 받듭니다!”

마기에 질려있던 광풍대 검을 거꾸로 들어 검례를 취한 후 어둠을 밀어내는 포효를 내질렀다.

라온은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밑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어둠이 두려움을 느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가족을 버리고, 자존심을 내던지고, 가문을 몰락시키며 얻은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느끼게 해주마.”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대지에 박아넣었다.

“검계현신.”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마기로 얼룩진 공간이 뜯어내고, 적검과 청검을 강림시켰다.

“신마조화결.”

태양과 달이 교차하는 여명의 그 순간처럼 라온을 휘감은 황금빛 장막이 괴악한 어둠을 밀어냈다.

“지금부터.”

라온이 신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을 태우는 화염보다 더 붉은 눈빛으로 후안을 겨누었다.

“즉결참을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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