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4화
“…그건 네 생각이냐?”
글렌은 미간을 찌푸리며 시뻘겋게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내리꽂았다.
“으음….”
라온이 글렌에게서 전해지는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아닌 건가?’
글렌은 본래부터 숨통을 짓누르는 것 같은 패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은 더 했다.
말 한번 잘못하면 당장 벼락을 떨어뜨릴 듯 그의 주변으로 매서운 기파가 휘몰아쳤다.
‘내가 했다고 하는 게 좋겠어.’
실비아가 글렌을 모셔오라고 했지만, 혹시나 그녀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에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나아 보였다.
“그렇습니다.”
라온은 당당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스스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비아의 상태는 어떠하지?”
글렌은 식사 초대에 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실비아의 상태를 물었다.
“인공단전을 안착시키는 건 성공했습니다. 다만 무인으로 돌아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칠었던 음성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라온이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글렌은 그 이상 말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꼭 옥좌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저 영감탱이 왜 저렇게 비싸게 구는 것이냐!
라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수십만 합이면 엎어질 약골 주제에 감히!
‘또 늘었네….’
수천 합에서 수만 합이 되더니, 이제 수십만 합이 되었다.
이럴 거면 그냥 비슷하다고 하면 될 것을 자존심 때문에 계속 이긴다고 하는 것 같았다.
-저 영감이 안 오면 본왕이 먹을 게 늘어나서 더 좋으니라! 그냥 돌아가거라!
라스는 빨리 나가자며 허공에서 글렌에게 주먹을 날렸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이 라스를 어깨로 쳐냈을 때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고 고르게 이어지던 박자가 멈추고 글렌이 턱을 주억였다.
“좋다. 어차피 해야 할 말도 있었으니,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글렌은 결정을 내리자마자, 다시 옥좌에 등을 파묻었다.
“영광입니다.”
라온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받아들이실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글렌이 식사 초대에 응할 줄은 몰랐다. 페르톤 블랑만 가져갈 줄 알았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할 말이 뭐지?’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이상하게 불안감이 들었다. 다만 지금은 그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페리톤 블랑을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도 오시겠습니까?”
단상 아래에 서 있는 셰릴과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글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두 사람이 있으면 더 편할 것 같았다.
“임무가 없다면 가마.”
“허허허. 그리하지요.”
셰릴과 로엔은 글렌을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세 사람에게 차례로 눈인사를 보내고서 알현실을 나섰다.
글렌이 한다는 말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가주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라온은 작은 먼지가 떨어지는 천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지진이 잦네.”
* * *
쿠구구구구!
글렌은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채 다리를 떨었다.
초월자인 그가 차오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진동을 일으키자, 알현실만이 아니라 가주전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허허허.”
로엔이 시선을 들어 천장에서 눈처럼 떨어지는 작은 먼지를 바라보았다.
“이 진동은 오랜만이군요.”
그는 먼지를 치워야겠다며 어디선가 빗자루와 걸레를 꺼내 들었다.
“다행이네요.”
셰릴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글렌에게 다가갔다.
“가주님이 라온과 실비아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기가 막힌 순간에 라온이 찾아왔네요.”
그녀는 글렌의 생각을 읽고 있었던 듯 연한 웃음을 그렸다.
“맞다.”
글렌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셰릴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저 뒤에서 지켜주려고 했는데, 내겐 저 아이의 초대를 거절할 용기도 없더구나.”
그는 라온의 초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다리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기쁨과 서글픔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대받기는 했지만 가서 그 이상을 바랄 생각은 없다. 조용히 식사만 하고 올 것이야. 그거라면 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글렌은 그 이상은 필요 없다며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우 답답해!”
셰릴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뭐?”
“실비아랑 라온이 뒤에서 지켜달라고 했어요? 가주님이 해준 일이 고마워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것뿐이잖아요! 왜 혼자 비극 소설을 쓰고 있냐구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가주님이 실비아에게 했던 짓은 아버지로서 용서받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제가 아는 라온과 실비아는 그 과거의 일에 얽매일 아이들이 아닙니다. 분명 현명하게 행동할 거예요!”
“알고 있다. 그럴 아이들이 아니지. 하지만 다른 이들이 용서해도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글렌은 절대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러니까 더 다가가서 두 사람에게 잘해줘야죠. 최소한 다른 후계자들에게 해준 만큼은 해줘야 하고.”
“그래서 뒤에서….”
“라온이 먼저 다가왔잖아요! 그럼 마중이라도 나가세요!”
셰릴이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글렌을 존경하는 그녀의 첫 번째 쓴소리였다.
“한 번에 하라는 건 아니에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도 돼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으음….”
글렌은 셰릴이 강하게 나오자, 도움을 요청하듯 로엔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로엔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홱 돌렸다.
“쓰레기통이 어디에 있더라….”
그는 셰릴을 막을 생각이 없는 듯 조용히 사라졌다.
“가주님!”
“그, 그래….”
“내일 별관에 가셔서 라온과 실비아에게 덕담 하나씩 건네고 오세요. 무조건!”
셰릴은 거절은 없다며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주님?”
셰릴은 대답을 하라는 듯 글렌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후우….”
글레은 셰릴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마.”
* * *
다음 날 저녁.
실비아와 시녀들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으으….”
헬렌은 하루종일 청소를 하고도 불안한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바닥을 닦고 쓸었다.
“대충해도 되는데.”
먼저 도착한 리메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까딱였다.
“어차피 가주님은 청소 같은 거 별 신경 안 써요. 가끔 내 사무실에도 오시는데, 아무 말도 안 하시거든.”
그는 그만 힘 빼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저었다.
“그건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네놈의 더러움을 포기했을 뿐이다.”
도괴가 헛소리 말라며 리메르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 영감. 잘 모르네. 우리 가주님이 신뢰하는 건 나뿐이라고.”
“신뢰가 아니라, 신명나게 패는 놈이 너뿐인 거겠지.”
라온이 두 사람의 말씨름을 보며 웃고 있을 때 현관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흐음….”
“왔군.”
리메르와 도괴도 그 기운을 알아차린 듯 말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했다.
“오고 계세요.”
라온의 경고에 실비아와 시녀들에 허리를 곧게 세웠다.
티익.
시계가 정확히 일곱 시를 가리키자,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실비아가 천천히 숨을 내쉬고서 현관문을 열자, 로엔이 고개를 숙여왔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옆으로 길을 비키자, 찬란한 금발을 말끔하게 뒤로 넘긴 글렌이 들어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실비아의 인사를 따라 별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그 정도면 되었다.”
글렌은 손을 저어서 무릎을 꿇으려던 이들을 막아섰다. 그는 실비아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턱을 끄덕였다.
“단전이 제대로 안착되었구나.”
“가주님 덕분입니다.”
실비아는 글렌을 띄워주며 담담하게 웃었다.
“내가 한 건 없다.”
글렌은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시녀들과 함께 서 있는 엔시아를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단전을 제작하다니, 대단한 업적을 세웠군. 요난 가주가 자랑스러워하겠어.”
“전 라온님이 구해주신 인공단전의 원형을 보고, 본을 떴을 뿐이에요. 그런데….”
엔시아도 긴장했는지 말을 더듬다가 멍하니 눈을 꿈벅였다.
“뵐 때마다 느끼지만, 가주님도 정말 존잘이시네요. 노년 존잘 미쳤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존잘 발언에 현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라온 님이 왜 저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할아버지가 잘생겨서 그런 거였네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에, 엔시아 님!”
라온이 보법을 밟아서 엔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
글렌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시선으로 엔시아를 굽어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화가 나셨겠지.’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왔으니, 속이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리메르가 앞으로 나왔다.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을 거예요. 좀 들어가죠?”
그는 다리가 아프다며 주먹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 이쪽으로 오세요.”
실비아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식당을 가리켰다.
“…….”
글렌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은 채 실비아의 뒤를 따라갔고, 셰릴과 로엔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식당 안에 들어가자, 글렌이 가장 상석에 앉았고, 그 왼쪽에 실비아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빨리 와서 앉으라는 듯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후우….’
라온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실비아의 맞은편이자, 글렌의 옆에 앉았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데 이거.”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질 때 리메르가 눈살을 찡그렸다.
“누구 죽었어요? 왜 다들 입을 다물고 있지? 오늘은 축하 파티 아니었냐고.”
“확실히 너무 조용하군.”
도괴가 리메르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이제 시작이지 않습니까.”
로엔은 기다려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음….”
실비아가 작게 입맛을 다셨을 때 주방에 대기하던 시녀들이 요리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지금 막 완성한 건지 하나같이 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향과 빛깔이 살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흐에에엑….
라스가 음식들을 하나씩 살피며 입에서 침을 질질 흘렸다.
-고기 스튜, 통돼지 구이, 닭튀김, 소갈비와 양갈비에…. 어? 저건 연어잖느냐! 그것도 구이와 생이 모두 있느니라!
녀석은 유아가 가져오는 연어 요리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부탁해놨어.’
라스가 팔찌에서 자고 있을 때 도리안에게 재료를 구해서 유아에게 요리를 부탁했었다.
-크으윽!
라스가 유아에게 날아가 머리를 부볐다.
-역시 본왕에게는 파인애플 소녀뿐이니라!
‘내가 부탁했다니까?’
-파인애플 소녀여!
‘…….’
녀석은 오직 유아만을 칭찬했다. 이래서 호구에게 잘해주면 안 되는 것 같다.
라온이 라스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널찍한 직사각형 식탁에 음식이 꽉 들어찼다. 긴장한 상태임에도 식탁에 앉은 모두가 입맛을 다셨다.
“끝내주네. 일단 소갈비부터….”
“가만히 있어!”
“으억!”
리메르가 포크를 집다가 셰릴에게 손등을 얻어맞고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셰릴에게 미소를 짓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끝에 있는 시녀부터 상석에 있는 글렌까지 이곳에 있는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본 후 입술을 뗐다.
“이곳에 계신 분들 덕분에 전 다시 무인의 길 위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어요.”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뜻과 눈빛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워요. 제가 이런 행복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여러분들이 절 도왔다는 게 부끄럽지 않을 무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비아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기대할게.”
“그리될 겁니다.”
“축하드려요!”
셰릴이 먼저 박수를 쳐 주었고, 다른 이들도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
글렌은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팔짱만 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럼 음식이 식기 전에 식사부터 드시죠.”
실비아는 그런 글렌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음식을 들라고 손짓했다.
“아, 그 전에 라온이 술을 준비했다고 하니까. 모두 한 잔 어떠세요?”
그녀가 라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서 미리 준비했던 페리톤 블랑을 꺼냈다.
“야! 고기 요리가 산더미인데, 백포도주가 웬 말이야! 칼만 쓸 줄 알지. 술은 모르는 꼬맹이 녀석이… 커헉!”
리메르가 다른 술 없냐고 주절거리다가 셰릴에게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넌 또 입 열면 죽는다.”
셰릴은 어서 하라는 듯 라온에게 미소를 지었다.
“으음….”
라온이 낮은 신음을 흘리고서 글렌에게 다가갔다.
“드시겠습니까?”
“…그래.”
글렌은 따라보라는 듯 팔짱을 풀고 잔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적을 앞에 둔 것처럼 필사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최대한 조심스럽게 글렌의 잔에 페리톤 블랑을 따랐다.
잔의 중간쯤 왔을 때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흠….”
글렌은 먹고 싶다던 술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인지 조금 안색이 환해진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
라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실비아의 잔에도 술을 따라준 후 리메르와 도괴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려는데, 반응들이 이상했다. 그들은 글렌 쪽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글렌이 포도주잔을 리메르와 도괴를 향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지?’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어서 지금 상황이 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셰릴과 로엔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건배 한 번 할까요?”
실비아가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은 모두 함께 잔을 올렸지만, 글렌은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건배사가 있어야지.”
셰릴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실비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면 우리 라온의 행복을 위해서!”
“본인 축하 파티 아니었어?”
“하여튼.”
리메르와 도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셰릴, 로엔도 미소를 지으며 잔을 위로 올렸다.
건배에 관심 없어 보이던 글렌도 슬그머니 잔을 들어 올렸다. 좋은 날이다 보니, 분위기를 맞춰주시는 것 같았다.
허공에서 잔이 부딪치고 모두가 페리톤 불랑으로 입을 축였다.
“흠? 꽤 괜찮은데?”
“시원하고 청량한 게 백포도주의 장점인데, 페르톤 블랑은 적포도주의 진한 맛까지 담겨 있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도괴는 한 입에 술을 모두 비우고, 스스로 잔을 채웠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실비아는 식사를 시작하자며 손을 펼쳤다.
-본왕은 연어부터 먹고 싶으니라!
라스는 술맛에 인상을 찡그리다가 동그란 손가락으로 연어를 가리켰다.
-생연어, 아니 구운 연어! 아니다! 일단 생연어부터!
‘파인애플 소녀에게 먹여달라고 하시던가요.’
라온은 그 말을 무시하고 스튜부터 퍼서 먹었다.
-야!
라스와 싸우는 자신과 달리 저녁 식사는 조용하게 흘러갔다.
가끔 리메르가 농담을 던졌고, 도괴나 셰릴이 받을 뿐 글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침묵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따라드릴까요?”
라온이 비어 있는 글렌의 포도주 잔을 보며 페리톤 블랑을 가져왔다.
“그래.”
글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들어 올렸다. 잔에 술을 따르는데 글렌의 손이 조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라스처럼 초월자지만 술에 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하면서 글렌의 잔이 비면 계속해서 술을 따라주다 보니, 어느새 도리안에게 받았던 페리톤 블랑이 모두 비어버렸다.
-크흡!
라스가 길게 트름을 하고서 배를 까뒤집고 누웠다.
-보, 본왕은 오늘 만족하느니라!
녀석은 그 말을 하고서 잠에 빠졌다. 정말 본능대로 사는 짐승 같은 마왕이었다.
“실비아.”
글렌도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실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렌은 얼마 전 내가 실비아에게 물어보았던 질문을 똑같이 던졌다.
“저는 이곳에 있을 생각이에요.”
“다시 검을 잡지 않는다는 건가?”
“아뇨. 잡아야죠. 잡을 겁니다. 다만 외부에 나가서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제 사람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실비아는 내게 해주었던 대답을 그대로 읊었다.
“라온이 너를 내년에 직계로 올린다고 하더구나. 부왕을 잡고 지금까지 쌓인 업적을 모두 사용하겠다고 했지.”
글렌은 술잔에 마지막으로 남은 페리톤 블랑을 한입에 털어 넣고서 시선을 가늘게 좁혔다.
“나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너희가 그걸 이룰 수 있다면 본관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글렌은 실비아에게서 라온으로 시선을 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주님….”
실비아는 글렌에 본관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바다에 비치는 일몰처럼 출렁였다.
“시간을 낼 보람이 있는 식사였다.”
글렌은 그 나름대로 극찬을 하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
“음식이 하나같이 훌륭하더군요.”
“이 집 잘한다니까.”
“잘 먹었다.”
셰릴과 로엔, 리메르, 도괴도 글렌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글렌은 고개를 숙인 실비아와 라온은 차례롤 보고서 별관을 떠났고,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아….”
실비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것을 보니,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라온이 실비아의 어깨를 잡아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하겠지.’
지금 글렌이 본관으로 돌아오라고 말한 건 실비아를 다시 딸로 생각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직접 들었으니, 지금까지 참고 있던 일들이 밀려오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온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실비아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 * *
“드디어 한마디 하셨네요.”
리메르가 글렌의 등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제가 바라던 건 조금 더 따뜻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 음?”
그가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벌렸다. 지금 뒤를 돌아본 글렌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어? 뭐, 뭡니까? 그 열받는 표정은?”
“나한테도 보내고 있다.”
도괴도 글렌의 표정을 보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훗.”
글렌은 리메르와 도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듯 두 사람을 동시에 비웃고서 거침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 설마 오늘 라온이 먼저 술을 따라줬다고 그러는 거예요?”
“설마…?”
리메르와 도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 라온이 내 잔에 술을 따라준 게 열 번이지. 너희는 각자 따라 마셨고.”
글렌이 다시 뒤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그건 댁이 옆자리라서 그런 거잖아!”
“술 따라준 게 뭐 어쨌다는 거요!”
“패배한 개들이 짖는군.”
그는 리메르와 도괴를 꼬리를 만 개라고 칭하며 손을 저었다.
“저, 저!”
리메르가 이를 갈 때 셰릴이 막아섰다.
“오늘 드디어 진도가 좀 나갔잖아. 네가 참아.”
셰릴은 오늘은 놔두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글렌은 참을 생각이 없는 듯 이번엔 눈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저 표정을 보고 어떻게 참아! 열받는다고! 라온이랑 내가 더 친해… 크에에엑!”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글렌에게 달려들었다가 벼락을 맞고 추락했다.
“여, 영감은 왜 가만히 있어….”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도괴를 올려보며 턱을 떨었다.
“이 나이에 맞기는 싫거든.”
도괴는 멍청한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허허허.”
로엔은 이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모두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