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53화 (552/653)
  • 제553화

    실비아는 아직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 내 단전이….”

    “네. 성공했어요.”

    라온은 바람에 쓸린 풀잎처럼 흔들리는 실비아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끼실 수 있죠?”

    “그래.”

    실비아가 울먹이며 턱을 끄덕였다.

    “단전이, 마나회로가 그리고 마나가 느껴져.”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단전이 있는 아랫배를 매만지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맞아. 마나는 이렇게 온 세상에 가득했지.”

    “…….”

    라온은 떨고 있는 실비아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이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

    실비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눈물 한 가닥이 흘러내렸다.

    “고마워.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입술을 떨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라스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실비아의 뺨에 달라붙었다.

    -그동안 고생했느니라! 엄마는 앞으로는 꽃길만 걷거라!

    녀석은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좀 비켜봐.’

    라온은 라스를 밀어내며 실비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머니가 제게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비아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여러 인연을 쌓으며 성장한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전생처럼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포기하고 데루스를 죽이기 위해 남과 자신을 모두 태우는 복수귀 한 마리만 울부짖었을 것이다.

    실비아가 옆에 있어 주었기에 가족이 있는 집의 따스함과 동료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내가 살인귀에서 인간이 된 건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혹시 기억나니?”

    실비아가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잡으며 순박하게 웃었다.

    “네가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지금처럼 내 눈물을 닦아준 적이 있었어.”

    “…….”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리가 없지.’

    글렌이 처음으로 찾아와서 내게 라온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때 실비아가 서럽게 울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네 도움을 많이 받았지.”

    실비아가 라온의 손을 품에 가져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널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주길 원했는데, 넌 집안 사정 때문에 너무 빨리 철이 들었잖아. 그게 내 탓 같아서 정말 안타까웠지.”

    그녀는 처음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21살에 이런 집안이면 나가서 사고도 치고, 망나니짓도 하고, 술 먹고 행패도 부려야 하는데 넌 처음부터 오직 앞만을 바라보았지. 그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단다.”

    실비아는 손가락을 들어 라온의 뺨을 얇게 꼬집으며 위로 들어 올렸다.

    “좋은 일만 남았으니까. 앞으로는 네 나이처럼 웃어주렴. 내가 네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엄마가 잘 모르는구나! 저놈 잘 웃느니라!

    라스가 실비아의 앞으로 날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만 저 얍실이는 남을 괴롭히고, 놀려먹을 때만 웃느니라! 사악한 마귀 그 자체… 끄엑!

    ‘시끄러.’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손등을 찍어버리고, 실비아를 보며 환히 웃었다.

    “노력해볼게요.”

    “역시! 내가 우리 아들 얼굴 하나는 기똥차게 낳아놨다니까. 뭐라고 하더라? 아! 존잘!”

    실비아가 라온의 뺨을 매만지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라온이 확연히 피곤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얼굴은 그만 보시고, 이제 확인해보세요. 단전의 마나는 잘 움직이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이게 현실 같지 않아.”

    실비아는 지금도 새로운 단전이 생긴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한번 해볼게.”

    그녀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활짝 펼친 손아귀 위로 바다색 마나가 솟구쳤다.

    돌고래가 헤엄치는 듯한 유려한 움직임. 20년 넘게 쉬었어도 실비아 지그하르트의 무재는 죽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게 내 오러….”

    아름다우면서도 순도 높은 마나의 자태에 실비아의 붉은 눈동자가 출렁였다.

    “원래 내 마나는 노란빛이었는데, 이제 파란색이 되었네.”

    “별로인가요?”

    “아니, 네가 준 것이니 더 마음에 들지. 예쁘잖아.”

    그녀는 지금이 더 좋다며 손을 저었다.

    “그 오러를 앞으로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인가요?”

    실비아의 단전에 깃든 마나의 양은 그랜드 마스터 이상이다.

    체력과 육체를 회복하고, 무학의 경지를 끌어 올린다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도 닿을 수도 있기에 그녀가 무엇을 할지는 굉장히 중요했다.

    “그건 이미 정했단다.”

    실비아의 손에서 출렁이던 바다색 마나가 넓게 번지며 방패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난 이 별관을 지킬 거야.”

    그녀는 해가 지기 시작하여 노을이 비치는 창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없는 동안 네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을게.”

    실비아는 싸움이 두려워서 이곳에 있겠다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라온은 실비아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전에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많네. 일단 엔시아부터….”

    실비아는 이 와중에도 먼저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 사람을 세기 시작했다.

    “아!”

    그 말을 듣자 글렌이 떠올랐다.

    “왜?”

    “사실 어머니의 단전과 마나회로를 이은 건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당연히 알지. 엔시아도 그렇고 밖에서 지켜준 사람들도….”

    “그게 아니라, 한 달 전에 가주님이 오셨어요.”

    “가주님이?”

    “네. 밤에 찾아오셔서….”

    라온은 글렌의 가르침괴 오늘 깨닫게 된 부분을 모두 실비아에게 말해주었다.

    “그랬구나.”

    실비아는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단 가주님이 드시고 싶어 하시는 페리톤 블랑이라는 술을 구해서 가져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니.”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그 술도 구하고, 가주님을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해줘.”

    “예?”

    라온이 실비아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님이 오실까요?”

    지금까지 봐온 글렌의 성격이라면 실비아의 단전을 고친 것으로 만족하여 불러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실 거야.”

    실비아는 확신을 담아서 말하며 방문을 향해 다가갔다.

    “아, 엄마! 잠깐….”

    라온이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실비아는 문을 열었다.

    “헉! 마님!”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헬렌이 실비아에게 달려갔다.

    “마님!”

    “괜찮으신 거예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시녀들도 모두 실비아의 앞에 쪼르르 서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들을 잘 둔 덕분이지.”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아귀 위로 오러를 일으켰다. 물고기를 닮은 마나가 허공을 유유하게 헤엄쳤다.

    “성공했구나….”

    엔시아가 두 손을 모은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도 내심 많이 긴장했던 것 같았다.

    “모두 고마워.”

    실비아는 엔시아를 포함한 시녀들을 안으며 환히 웃었다.

    “으음….”

    “그, 그런데….”

    “어디선가 시궁창 냄새가….”

    엔시아와 헬렌, 시녀들이 코를 막은 채 실비아에게서 훌쩍 물러섰다. 비위가 약해 헛구역질을 하는 시녀들도 있었다.

    “어?”

    실비아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비아에게 카펫에 깔린 검은 때 같은 것들을 가리켰다.

    “저게 어머니 몸에서 나온 노폐물들이라서요. 냄새가 굉장히 심할 거예요….”

    “그러면 문을 열기 전에 말해줘야지!”

    실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달려와 손바닥으로 라온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아아아악!

    라온은 갑작스럽게 터진 충격에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벽을 무너뜨리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민망했던 실비아가 가진 힘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라, 라온!”

    “도련님!”

    “꺄아아아악!”

    실비아와 시녀들은 튕겨 나간 라온을 따라 밖으로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

    라스는 그 모습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폭력적인 건 집안 종특인가?

    *     *      *

    셰릴은 떠들썩해진 별관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공한 모양이에요!”

    “그래.”

    그녀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회로와 단전을 제대로 이었어.”

    글렌은 쓰러진 라온을 살피는 실비아를 보며 포근한 미소를 그렸다.

    ‘저 아이가 다시 마나를 다루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실비아는 라온을 키우며 구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눈동자 구석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끼어 있었다.

    무인에게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라는 단전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단전이 안착하며 그녀의 안색에 스며들어 있던 어둠이 완전히 가셨다.

    마에 빠져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어린 실비아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후우.”

    로엔도 긴장했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페리톤 체술을 전한 보람이 있군요. 라온 도련님이 정말 큰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래. 이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듯하군.”

    글렌은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가늘게 올렸다.

    ‘수고했다.’

    페리톤 체술을 알려주었다고 해도 그것을 완벽하게 운용한 건 라온의 공이었다.

    예상보다 더 뛰어난 성취로 실비아를 치료한 라온이 그저 대견할 뿐이었다.

    “실비아의 단전을 회복한 기념으로 파티를 한다는 거 같은데.”

    셰릴이 별관 쪽의 소리를 들은 듯 웃으며 뒤를 돌았다.

    “가주님도 가셔야지요.”

    그녀는 함께 가자며 손가락으로 별관을 가리켰다.

    “…….”

    글렌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별관을 내려다보았다.

    “기쁜 날은 제대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끼리 함께 하도록 놔두는 게 좋겠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았다.

    “가주님….”

    “그만 가도록 하지.”

    글렌은 활짝 웃고 있는 실비아와 라온의 얼굴을 눈에 담은 후 미련 없이 북망산을 떠났다.

    “글쎄요.”

    로엔은 글렌이 아니라 라온을 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도련님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죠.”

    *     *      *

    라온은 별관의 정원으로 향하며 가슴을 매만졌다.

    ‘아프네….’

    아무리 대비를 안 했다고 해도 쇠망치로 가슴을 후려 맞은 듯 충격이 느껴지다니, 실비아의 무력이 제대로 부활한 것 같았다.

    다만 너무 아파서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별관은 언제나 시끄럽군.”

    정문 앞에 호법을 서고 있던 도괴가 헛웃음을 흘렸다.

    “실비아의 상태는 어떠냐.”

    “예상보다 더 잘 끝났습니다. 마나 손실도 적어서 경지만 깨우친다면 바로 벽을 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라온이 실비아에게 얻어맞은 가슴을 주무르며 웃었다.

    “고생 많았다.”

    도괴가 다가와서 라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살린 사람이 벌써 둘이네.”

    바닥에 누워 있던 리메르가 일어나며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렸다.

    “나와 네 엄마. 너는 구원에도 재능이 있는 모양이야.”

    그도 수고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아니에요. 운이 좋았을 뿐….”

    “겸손 떨기 전에 일단 수고비부터 주고 시작하자. 내가 요즘 좀 쪼달려서. 헤헤.”

    리메르는 들어 올린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돈을 달라 말했다.

    평소와 달리 돈 이야기를 하면서도 장난기를 드러냈다. 그 나름의 축하 인사 같았다.

    “두 분 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말 돌리지 말고 수고비 달라고!”

    다만 리메르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미친놈.”

    도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온은 리메르를 무시하고, 정원 쪽으로 다가갔다.

    푸드드득!

    닭이 날개를 펼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리안, 버렌, 마르타, 루난이 튀어나왔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수련에 방해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네 명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와 있었다.

    “거, 걱정되어서 왔죠.”

    도리안이 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말 좀 해라.”

    버렌이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입은 먹을 때만 쓰는 거야? 좀 주절거리라고!”

    마르타도 짜증이 났는지 이를 갈았다.

    “못잘? 잘못 생긴? 존못!”

    루난은 오늘은 못생겼다고 외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미안. 괜히 이야기하면 수련에 방해될까 봐.”

    “이러는 게 더 방해야!”

    마르타가 주먹으로 가슴을 후려쳤다. 다행히 실비아보다는 안 아팠다.

    “그래서 잘 끝난 건 맞지?”

    버렌이 조금 뜸을 들이며 물었다.

    “그래. 잘 끝났어.”

    “그럼 됐다.”

    그는 잘되었으면 다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윽, 정말 다행이에요….”

    도리안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쭉 내밀었다. 겁쟁이 기질이 조금 줄었어도 눈물이 많은 건 변하지 않았다.

    “후우….”

    루난도 숨을 크게 내쉬며 주저앉았다.

    라온은 안도하여 웃음을 되찾은 조장들과 도리안을 보며 옅게 웃었다.

    ‘이 녀석들과 이런 관계가 된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지.’

    실비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 녀석들을 그저 경쟁자로만 여겼을 것이다.

    역시나 그녀에게 받은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표정이 굳어계시는 거예요?”

    도리안이 기쁜 날인데, 무슨 생각을 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야 할 물건이랑, 할 일이 있는데 조금 애매해서.”

    “살 게 뭔데요?”

    “페리톤 블랑이라는 포도주인데….”

    “아, 저 그거 있어요!”

    그는 본인에게 페리톤 블랑이 있다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음?”

    하지만 도리안은 평소처럼 바로 포도주를 꺼내지 않고 뜸을 들였다.

    ‘없는 건가? 하긴 저기에 다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몇 년 산이요?”

    “어…?”

    “페리톤 블랑이 많아서 몇 년 산을 원하시는 건지. 일단 작년 것부터 30년까지는 다 있어요.”

    “그, 그게 다 있다고?”

    “필수품이잖아요.”

    라온은 년도 별로 페리톤 블랑을 꺼내는 도리안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너한테 필수품이 아닌 건 대체 뭐냐?

    *     *      *

    글렌은 가주전 옥좌에 등을 깊게 묻은 채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오늘 별관에서 보았던 실비아의 밝은 얼굴이 그린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막내딸인 실비아에게는 해주지 못한 게 많았다. 아니, 그보다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너무도 많이 저질렀다.

    아무리 악의와 욕망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라고 해도 딸을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못하게 보았던 건 절대 사라지지 않을 죄업이다.

    오늘 실비아의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버지의 자격도, 할아버지의 자격도 없는 내가 요즘 너무도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고.

    ‘지금처럼 그저 뒤에서 지켜만 주면 될 뿐이야.’

    내겐 그 아이들과 함께 할 자격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외벽이 되어 라온과 실비아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게 맞았다.

    고오오오오.

    글렌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라온을 만나기 전처럼 허무함을 두른 절대자로 돌아갔다. 지루한 듯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후우….”

    셰릴은 그런 글렌이 이해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갑갑한 듯 낮은 숨을 내쉬었다.

    “…….”

    로엔은 눈을 감은 채 글렌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알현실 문에서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로엔이 움직이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저었다.

    “들어오라.”

    글렌은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 입장을 허했다.

    쿠구구구구!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라온이 들어왔다. 그는 담담한 안색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본론이나 말하라.”

    글렌은 귀찮으니 빨리 말이나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예.”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페리톤 블랑 다섯 병을 꺼냈다.

    “전에 말씀하셨던 술을 구해왔습니다.”

    “…그런가.”

    글렌이 라온의 손에 들려 있는 맑은 포도주병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게 옳은 일이겠지.’

    저 술을 라온과 함께 마시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건 과한 보상이다.

    그저 소중히 여기는 손자가 술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잘 마시도록 하지.”

    글렌이 턱짓을 하자, 그 뜻을 알아차린 로엔이 라온에게 다가가서 술을 받으려 했다.

    “가주님.”

    하지만 라온은 그에게 술을 넘기지 않고, 다시 글렌을 보았다.

    “오늘 저희 어머니의 단전을 회복시키는데, 가주님이 알려주신 페리톤 체술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온이 술병을 뒤로 빼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내일 별관에서 저녁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명백한 초대 의사를 밝히며 별관에 와달라 고개를 숙였다.

    꿀꺽.

    글렌은 본인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 파묻은 등을 들썩였다.

    그는 지금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전신에 힘을 준 채로 마른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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