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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52화 (551/653)
  • 제552화

    라온이 오늘따라 좁아 보이는 글렌의 등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페리톤 블랑이라는 백포도주를 사오라는 건가?’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글렌이 원한다면 페리톤 블랑이 아니라, 얼마 전에 어렵게 구했던 바다의 유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공과 사가 철저한 글렌이 백포도주를 사오라는 듯 눈치를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멍청한 놈 같으니!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영감탱이가 왜 갑자기 백포도주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럼 넌 알고 있어?’

    라온이 좁아진 눈매 그대로 라스를 내려보았다.

    -당연하느니라! 본왕은 네놈보다 더 인간적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지!

    라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글렌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백포도주와 어울리는 음식이 무엇이더냐.

    ‘보통은 생선 요리지.’

    꼭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적포도주는 육류, 백포도주는 생선 요리와 잘 어울린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느니라!

    라스가 맞다는 듯 크게 손뼉을 쳤다.

    -지금 이 영감은 생선 요리가 먹고 싶은 것이니라!

    ‘…….’

    라온의 눈동자가 한심함을 넘어서 처량하게 변해갔다.

    -야들야들한 연어 위에 얇게 썬 양파를 깔고, 크림소스를 얹어서 입에 넣으면….

    라스는 아이카르에서 먹었던 연어 요리가 생각난 듯 통통한 볼을 감싸 쥔 채 헤헤 웃었다.

    -당장 연어를 대령하거라! 어? 왜 본왕을 드는 것이냐! 놔라!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호수로 던져버리고 글렌에게 다가갔다.

    “그 포도주를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글렌이 포도주에 대해 말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그 술을 원하는 것 같아서 일단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흠, 쓸데없는 말을 했군.”

    글렌은 포도주에 대해선 이미 잊은 것처럼 가볍게 턱짓했다.

    “뒤를 돌아보거라.”

    “네.”

    그가 나쁜 짓을 할 리 없고, 해도 막을 수가 없기에 순순히 등을 돌렸다. 글렌의 손이 날개뼈 사이에 닿는 게 느껴졌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라온이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글렌의 음성이 들려왔다.

    “페리톤이 만들어낸 체술은 인체의 모든 마나회로를 이용한다. 즉, 인간의 육체에 통달해야 하지.”

    그 말과 함께 글렌의 오러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뇌기를 띠고 있는 기운이었기에 불에 데인 것처럼 따끔했다.

    “책을 읽어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 잘 견디도록 해라.”

    “…….”

    라온은 육체 내부를 파고들어 오는 글렌의 오러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한 채 고개만 떨었다.

    고오오오오!

    글렌의 뇌기는 단전과 이어진 주요 마나회로를 질주하며 아직 다 발달시키지 못한 미세한 마나회로까지 자극했다.

    오러의 움직임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기에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우주와 같다. 무인의 몸을 소우주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들어 본 말이었다. 인간의 몸은 무한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에도 오를 수 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이 단전과 마나회로다.”

    글렌은 그 말을 하면서 뇌기를 동시에 움직여서 단전에서부터 뻗어나가는 마나회로 여섯 개를 동시에 자극했다.

    아릿한 벼락의 기운이 손끝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단전까지 되돌아와서 페리톤 체술의 흐름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뇌기가 흐르는 길과 운용 방식을 기억해라. 네가 그랜드 마스터를 넘어서 그 위로 가고자 한다면 지금 느낀 흐름이 큰 도움이 되어 줄 테니까.”

    라온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뇌기의 움직임을 느끼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우웅!

    글렌은 단전과 연결되어 있는 여섯 개의 주요 마나회로를 동시에 움직이는 방식을 두 번이나 보여주고 나서야 뇌기를 회수했다.

    “후우….”

    라온이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극도로 집중을 했기 때문인지 몸이 물먹은 듯 무거웠고,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죽을 것처럼 힘드네. 그래도 배운 건 많아.’

    글렌은 단순히 페리톤 체술의 운용법만 전수해준 게 아니라, 미세 마나회로의 위치 그리고 단전과 주요 마나회로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인공단전과 실비아의 망가진 마나회로를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 감이 왔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꾸준히 수련하여 온몸의 마나회로를 지금보다 더 넓고 곧게 발전시켜라. 그게 된다면 너도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는 품에 손을 넣어서 책자 하나를 던졌다. 운용법을 먼저 익혀버린 페리톤 체술이었다.

    “정진하도록.”

    글렌은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서 밤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라온은 글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머리를 들지 않았다.

    *     *      *

    “아오!”

    리메르가 본관으로 돌아가는 글렌을 보며 땅을 후려쳤다.

    “진짜 왜 저러시는 거야! 술 한잔하자고 말하면 되는 걸 왜 어렵게 가는 건데!”

    그는 글렌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흙 묻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셰릴이 바위에 등을 기댄 채로 짧게 혀를 찼다.

    “가주님은 지금도 본인이 실비아와 라온에게 다가가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하고 계시니까.”

    “그거야 나도 알지만 진도가 너무 느리잖아. 이러다간 내가 먼저 돌아가시겠다고!”

    리메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후….”

    셰릴도 조손 관계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점은 동의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라온 저놈도 좀 이상해! 눈치가 귀신 같은 놈이 왜 가주님 앞에만 서면 눈먼 장님이 되는 건데! 술 이야기를 왜 꺼냈겠냐! 너랑 먹고 싶으니까 꺼냈지!”

    리메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온을 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라온을 탓하지 마.”

    셰릴이 리메르의 뒤통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에게 있어서 가주님은 닿을 수 없는 고고한 하늘이다. 그 하늘이 본인 앞에서 부끄러워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

    “아, 선이. 선이 이어지질 않아. 답답해 뒤지겠네!”

    리메르가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악을 질렀다.

    “허허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로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라온의 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약간이지만 선이 닿은 듯하니까요.”

    *     *      *

    한 달이 지났다.

    라온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실비아의 체력 단련을 도와주고, 밤에는 페리톤 체술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괜히 의선이라 불린 게 아닌지 페리톤의 체술을 익힐수록 오러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나뭇가지로 나뭇잎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실비아의 몸 상태도 올라왔고, 페리톤의 체술에도 익숙해졌기에 오늘 그녀의 단전과 마나회로를 잇기로 결정했다.

    라온은 별관 앞에 서 있는 리메르와 도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도괴는 일에만 집중하라며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깨에 힘 풀어. 긴장하면 될 것도 안 된다.”

    리메르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도괴와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마님을 부탁드려요.”

    시녀들은 떨리는 두 손을 감춘 채 담담한 표정을 보였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부대주님! 힘내세요!”

    “잘 될 겁니다!”

    유아는 활기차게 손을 들어 올렸고, 율리우스는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

    주디엘은 담담한 척하지만, 긴장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좋은 소식을 가져올 테니까. 식사 준비만 해줘.”

    라온은 시녀들에 미소를 지어주고서, 실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안전한 장소에서 할 수도 있지만, 실비아의 마음이 가장 안정되는 장소였기에 이곳으로 골랐다.

    “라온.”

    검은 무복을 입은 실비아가 뒤를 돌았다. 안색이 편해보였다.

    “긴장 안 되세요?”

    “네가 해주는데 왜 긴장을 하겠어.”

    실비아는 아들을 믿고 있다고 말하며 구김 없이 웃었다.

    “잘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

    “그럴 일은 없어요.”

    라온이 손에 힘을 주며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말거라! 문제가 생기면 본왕이 다 처리해주겠노라!

    라스는 보이지도 않는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부탁한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본왕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이런 때에 음식은 생각하지 않느니라!

    녀석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눈을 흘겼다.

    ‘미안. 내가 말이 심….’

    -그런데 연어는 있겠지?

    ‘역시.’

    라온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라스의 헛소리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떨림을 멈춘 손으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인공단전과 해령화의 줄기를 꺼냈다.

    화아아아아!

    인공단전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빛이 투명한 해령화 줄기에 스며들며 단아한 휘광을 일으켰다.

    “이건….”

    실비아는 푸르게 번들거리는 해령화의 줄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령화의 줄기에요. 단전과 마나회로에 활력을 주고, 노폐물을 배출하는데 효과가 좋죠.”

    해령화의 잎과 달리 딱 하나 밖에 쓸 수 없지만, 그만큼 육체를 정화하는데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 실비아의 마나회로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도 이 줄기 때문이었다.

    “이 귀한 걸 나한테 써도….”

    실비아는 줄기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떨었다.

    “인공단전만이 아니라, 줄기에도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되잖아요.”

    라온이 씩 웃으며 실비아의 손에 해령화의 줄기와 인공단전을 올려놓았다.

    “너도 참….”

    “둘 다 한 번에 삼키세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

    실비아가 인공단전과 해령화의 줄기를 동시에 입에 넣었다. 둘 다 혀에 닿자마자 녹은 것처럼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해령화는 혈액처럼 흘러서 굳어버린 마나회로를 살려낼 것이고, 인공단전은 스스로 움직여 본래 단전이 있어야 할 위치까지 내려갈 것이다.

    “윽….”

    실비아는 인공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에 고통을 느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시작할게요.”

    시간을 끌수록 실비아의 통증만 가중될 게 뻔해서 바로 시작하자고 말하며 손을 들었다.

    “그래.”

    실비아가 억지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후우….”

    라온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오러를 실처럼 부드럽게 조형하여 실비아의 육체에 밀어 넣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고드는 것처럼 딱딱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녀의 마나회로는 20년 넘게 오러를 운용하지 않아서 모두 막힌 상태였다.

    ‘그래도 가야 해.’

    오러의 끝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아서 마나회로를 채운 노폐물들을 찌르며 억지로 안으로 들어섰다.

    실비아는 통증 때문에 어깨를 떨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 견뎌주었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은 실비아의 인내심을 믿으며 그녀의 마나회로 전체로 오러를 퍼뜨렸다.

    ‘해령화 줄기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군.’

    해령화 줄기에 맺혀 있던 순도 높은 마나가 돌처럼 굳어버린 마나회로에 생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단전과 마나회로를 잇기 위해서는 저 기운을 극대화해야 한다.

    제 스스로 움직이는 해령화의 기운을 오러로 휘감았다.

    더이상 활력을 낭비하지 않게 막은 후 그 힘을 이용하여 굳어버린 마나회로 전체에 생기를 퍼뜨렸다.

    우우우우욱!

    말라비틀어진 싹이 이슬을 먹고 고개를 치켜들듯 해령화의 줄기에 깃들어 있던 자연의 기운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나회로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푸는 게 전부가 아니야. 노폐물도 뚫어내야 해.’

    실비아의 마나회로의 문제는 둘이다.

    굳어서 딱딱해진 것과 내부가 노폐물로 차 있는 점으로 둘 다 처리하지 않는다면 단전과 마나회로를 잇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자신 있지.’

    혹한의 저주 아홉 가닥을 모조리 뚫어본 경험이 있기에 마나회로를 막은 노폐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

    만화공의 열기로 마나회로 내부의 노폐물들에 열을 가한 후 송곳처럼 날을 세운 글래시아의 냉기로 길을 열었다.

    해령화 줄기의 활력, 만화공의 열기 그리고 글래시아의 냉기가 모두 제 역할을 하면서 가득 쌓인 노폐물들이 실비아의 육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천천히.’

    급하다고 속도를 높였다간 사고가 나는 법. 집중력만을 더더욱 끌어 올리며 실비아의 마나회로를 뚫는 데 집중했다.

    치이이이잉!

    겨우내 쌓이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눈덩이들이 봄의 햇살을 받아 녹아내리는 것처럼 실비아의 육체에 청아한 기운이 피어났다.

    라온은 실비아의 전신 모공으로 노폐물들을 배출한 후에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지만, 실비아가 잘 참아준 덕분에 주요 마나회로의 노폐물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단전과 마나회로를 연결하는 일뿐이었다.

    ‘이게 안 되면 다 허사야.’

    단전과 마나회로를 제대로 잇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목숨을 건 전투 이상으로 집중력을 드높이며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여섯 개의 마나회로를 한 번에 연결시켜야 해.’

    단전에 연결되어 있는 마나회로는 여섯 개. 그 주요 마나회로 여섯 개를 동시에 연결시켜야 인공단전의 마나가 실비아의 육체 전체로 고르게 퍼져나갈 수 있다.

    라온은 만화공의 열기를 회수하고, 글래시아만으로 실비아의 마나회로를 뒤덮었다.

    ‘이게 맞을 거야.’

    카이바르는 블루 드래곤이었기 때문에 마나 내부에 수 속성의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마나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글래시아로 이끄는 게 제일이었다.

    우우우웅!

    글래시아의 냉기를 통제하여 여섯 개의 마나회로를 동시에 움직였다. 페리톤의 체술에서 익혔던 오러 운용을 이용하여 더 세심하게 오러를 조작했다.

    ‘긴장되네.’

    내 몸으로 많은 연습을 해보았지만, 실비아에게 직접 하려고 하니 심장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 반동으로 오러의 조작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중해. 기회는 또 없어.’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손과 오러에 힘을 주었다. 좋지 않은 방법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시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긴장을 느끼며 여섯 개의 마나회로를 동시에 움직일 때 한 달 전 글렌의 몸으로 알려주었던 오러의 운용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가 뇌기로 이끌어주었던 오러의 움직임은 지금 마나회로를 단전에 붙이는 것과 굉장히 흡사했다.

    ‘그랬군.’

    이제야 알겠어.

    글렌이 갑자기 찾아와서 페리톤의 체술을 알려주었던 건 발데르의 행패에 대한 배상이 아니었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조언이었다.

    ‘지켜보고 계셨구나.’

    실비아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멀리서나마 예전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글렌의 조언이 함께한다고 하자 긴장이 풀리고, 딱딱하게 굳었던 오러의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고오오오오오!

    라온은 글래시아의 냉기를 유려하게 움직이며 실비아의 마나회로를 인공단전으로 이끌었다.

    글렌의 조언, 페리톤의 체술에서 얻은 지식 그리고 실비아의 성향을 생각하며 인공단전의 최적 위치에 여섯 개의 마나회로를 결합하며 짙은 냉기를 일으켰다.

    찌지지지직!

    쇠를 용접하듯 냉기를 이용하여 실비아의 단전과 마나회로를 연결하는 통로를 깊숙하게 다져냈다.

    퍼어어어엉!

    마나회로와 인공단전이 완벽하게 결합한 순간 실비아의 내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인공단전에 깃들어 있던 거대한 마나가 해일이 되어 마나회로에 남아 있던 노폐물들을 모조리 멀어내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

    새벽에 떠오른 태양 빛이 밤을 그린 어둠을 지우듯 거대하면서도 순수한 마나는 도움을 주던 글래시아의 냉기마저 밀어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기 시작했다.

    딱딱한 땅을 이겨내며 새싹이 발아하듯 실비아의 육체가 진중한 흐름을 일으켰다.

    “후우.”

    라온이 실비아의 등에서 손을 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실비아는 바닥에서 한 뼘가량 떠오른 채 자연의 기운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별관이 뒤흔들리며 거대한 마나가 응집되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며 실비아의 머리 위로 푸른 안개 같은 것이 차올랐다가 그녀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우욱!

    다시 땅에 내려앉은 실비아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푸른 기광이 번쩍였다.

    “아….”

    실비아가 힘이 빠진 듯 뒤로 기울어졌다.

    “어머니.”

    라온이 실비아의 몸을 받았다.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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