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0화
라온은 금화를 강탈하는 것도 모자라서 망가진 정원을 복구하는 노동력까지 써먹고 나서야 감찰관 직원들을 풀어주었다.
감찰관들은 귀신을 마주한 듯 창백해진 안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발데르처럼 다시는 별관에 발을 들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라온.”
실비아는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려가는 감찰관들을 보다가 라온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그녀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는다는 듯 고개를 떨었다.
“총관님과 진무전주가 사제관계였다고 하더라구요. 덕분에 감찰을 피해 갈 수 있었죠.”
라온은 도괴를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아!”
실비아가 탄성을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도괴와 발데르의 관계가 떠오른 것 같았다.
“사제관계는 무슨! 전주에 올라간 이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놈이 무슨 제자냐!”
도괴는 하루종일 발데르를 괴롭히고서도 성이 차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치고는 진심을 담아서 조언해주시던데요.”
“한때 내 밑에 있던 놈이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홱 돌린 도괴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속 깊으신 분이야.’
지금까지 겪어 본 도괴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오늘도 발데르가 옳은 길을, 그리고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언해주었다.
발데르가 현명했다면 도괴의 조언을 발판 삼아서 특별 감찰관 업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겠지만, 왠지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라온.”
실비아가 눈매를 찡그린 채 라온의 어깨를 꽉 잡았다.
“다 알겠는데, 집은 왜 부순 거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거 다 진무전주가 때려 부순 거잖아요.”
라온이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나까지 속이려고?”
실비아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엄마가 네 능글맞은 표정을 못 알아볼 거 같아?”
그녀는 라온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올리며 픽 웃었다.
“윽….”
라온이 뒤로 물러서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역시 우리 엄마이니라!
라스가 잘 걸렸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 기회에 저 얍실한 족제비 놈을 패주세요!
녀석은 실비아를 응원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너희 엄마 아니라니까….’
라온이 라스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도리안.”
“옙!”
도리안은 단번에 손의 의미를 알아듣고서 배 주머니에서 오늘 별관에서 얻었던 금화를 보자기 채 꺼내놓았다.
“좌측 복도가 좁은 게 계속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라온은 도리안에게 건네받은 돈을 전부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특별 감찰관님이 자발적으로 기부해주셨으니, 별관 증축 좀 하죠. 식구도 늘어서 좁잖아요.”
“자, 자발적 기부? 자발적의 뜻이 뭐였지?”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도리안이 정신이 멍해진 듯 눈을 꿈벅였다.
“너는 진짜….”
실비아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라온. 이런 식으로 남의 돈을 강탈하는 건 안 돼. 정당하게 번 돈으로….”
“지금까지 진무전주가 우리를 무시하고, 조롱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위로금은 애교에 불과해요. 거기다 실제로 때려 부쉈잖아요.”
라온은 전부 다 들킨 상황에서도 망가진 집을 가리키며 발데르의 탓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이 돈이면 시녀들도 개인 방을 쓸 수 있고, 정원도 더 넓힐 수 있을 텐데….”
그가 금화를 주머니를 도로 빼려고 하자, 실비아가 냉큼 달려와 손을 막았다.
“으음, 네 말대로 발데르 오빠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실비아는 고개를 슬쩍 돌리면서 금화를 챙겼다.
“워낙에 성질을 잘 부리는 사람이고, 집도 고쳐야 하니까. 음음, 이게 맞아.”
그녀는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열며 황금빛 안색을 드러냈다.
라온은 금화를 세는 실비아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녀와 아이들 때문이겠지.’
시녀들이 늘었고, 성자의 저택에 있는 아이들이 자주 놀러 와서 별관이 좁게 느껴지고 있었다.
실비아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녀와 아이들 모두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별관을 증축할 생각일 것이다.
그래도 실비아의 밝아진 표정을 보니, 왜 용돈이 부모님에게 최고의 효도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
라온은 바로 증축 계획을 세우는 실비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장난기를 지우고, 진중한 눈빛으로 물었다.
“진무전주 별거 아니죠?”
“어…?”
망가진 별관을 보며 웃던 실비아의 눈매가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
“전 내년 안으로 어머니를 다시 직계에 올릴 생각이에요.”
라온은 스스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내, 내년에 직계?”
“너무 급한 건 아닐까요? 했다가 실패하면….”
“으음….”
시녀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를 걱정하는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도괴도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라온. 나는….”
“어머니가 직계로 올라가시면 진무전주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를 모욕했던 자들과 자주 만나게 될 거예요.”
라온이 실비아에게 한 발 더 다가가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피하거나,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잖아요.”
“으음….”
“오늘 일만 봐도 알듯이 직계라고, 전주라고 못 올려다볼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건 어머니가 더 잘 알고 계시겠죠.”
그 말을 하면서 허리를 살짝 숙여서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앞으로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오늘 우리 정원에서 꽁무니 빠지도록 도망친 발데르를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맞섰으면 좋겠어요.”
“…….”
실비아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아들 참 잘 컸네. 고마워.”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매를 떨었다.
“전에는 엄마가 허리를 숙여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이젠 네가 숙여야 하는구나.”
실비아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쁜 듯 환한 웃음을 그렸다.
“안 되겠어!”
실비아가 세차게 뒤를 돌았다. 그녀는 잘게 어깨를 떨면서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온 힘을 다해서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파티를 열자. 가지고 있는 재료 다 털어!”
“네!”
헬렌과 시녀들도 실비아의 감정을 느끼는 듯 평소보다 더 경쾌하게 대답하고서 별관으로 달려갔다.
-역시 우리 엄마가 통이 크다니까!
라스는 실비아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유아의 어깨에 탄 채로 별관으로 향했다.
“…….”
도괴가 조용히 뒤를 돌았다. 그가 별관을 떠나려고 할 때 라온이 그 앞을 막아섰다.
“오늘의 주역이 어딜 가시려구요.”
“귀찮다.”
“제가 선물을 안 드렸죠? 아이카르의 명주를 하나 가져왔는데….”
라온이 잔에 술을 따르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서, 설마 바다의 유물?”
“알고 계셨어요?”
“바다의 유물을 모를 수가 있나! 카이바르가 설쳐서 생산량이 확 줄었다고 했는데, 그걸 가져왔다고?”
“네. 몇 개 없더라구요. 그래도 도괴 님이 생각나서 받아왔죠.”
“커흠!”
도괴가 헛기침을 하고서 바로 등을 돌렸다.
“네 정성이 그러면 내 안 먹어볼 수가 없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구구구구구!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북망산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음?”
라온이 북망산을 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지진인가?”
* * *
루샤인 산의 지하 공동.
바닥에 자갈이 가득한 연무장에 대형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누워 있는 아이들은 악몽을 꾸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
데루스 로베르트는 마법진 밖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는데, 그의 눈동자에는 아주 자그마한 빛도 들어서지 않았다.
땅의 돌멩이를 보는 듯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오셨습니까.”
마법진의 뒤편에서 야행복을 입은 노인이 내려섰다. 그는 신관이 신을 영접하는 것처럼 극도의 예를 갖춰서 몸을 숙였다.
“상황은?”
“수화객의 연구를 통해 세뇌 역시 한 단계 발전했습니다. 전보다 속도도 빠르고, 그 강도도 강해졌습니다. 재료의 소모가 확연히 줄어들 것 같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시장터의 물건처럼 말하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군.”
데루스의 시선에 처음으로 연한 빛이 차올랐다.
“계속 수고해주게.”
“물론입니다.”
노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다시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갔다.
데루스는 조금 더 마법진과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공통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주님.”
그가 둔탁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술잔을 들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쿠바라가 나타나 허리를 굽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쿠바라의 미간에 작은 그늘이 졌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담담한 반응을 보이던 그녀에겐 의외의 모습이었다.
“문제?”
공통을 굽어보고 있던 데루스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살아있다고 합니다.”
“…….”
데루스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서 공통을 보았다.
“창염마군과 부딪쳤을 때 결계가 깨지면서 오웬 왕국 쪽으로 이동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해적왕을 만나서….”
쿠바라는 암시장의 퍼뜨린 이야기를 고스란히 데루스에게 읊어주었다.
“…광룡 카이바르를 잡고, 며칠 전에 지그하르트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 살아 있을 줄 알았어.”
데루스가 본인의 손을 가리고 있는 장갑을 보며 어딘가 들떠 있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었지. 그놈 쉽게 죽을 놈이 아니라고.”
그는 정말 이 상황을 염두에 둔 것처럼 당황하지 않은 채 잔에 든 술로 입술을 축였다.
“…괜찮으십니까?”
쿠바라는 데루스의 진짜 반응을 살피려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괜찮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군.”
“예?”
“수화객 공장을 망친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졌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역시 그놈밖에 없어.”
데루스는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며 머리를 부여잡은 채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지만, 그건 아닐 겁니다.”
쿠바라는 데루스의 광기를 보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광룡을 잡은 건 수화객 공장이 망가진 이후입니다. 시간상 절대 그곳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내 말이 맞다.”
데루스가 쿠바라를 굽어보며 턱을 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수화객을 보낸 이후에 공장이 터졌고, 죽었던 놈이 살아 있어. 그게 무슨 뜻이겠나.”
그가 다시 잔을 들어 올리며 감정이 뒤틀린 듯한 눈웃음을 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시리스에게 공장의 위치를 알아낸 다음 다른 곳에 있다는 정보를 흘린 후 그곳을 친 것이다. 놈은 암시장과 깊은 관계이니 그 정도 정보 조작은 어렵지 않은 일이야.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데루스가 장갑을 벗었다. 그는 꿀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핏물을 술잔에 떨어뜨렸다. 노을빛 같았던 술이 짙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내 본능이 놈의 짓이라 외치고 있다.”
“음….”
쿠바라는 광기를 두른 데루스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는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가장 싫어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과 관계가 되면 누구보다도 비논리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살아 있다라….”
데루스는 핏방울이 스며든 술을 들이켜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막내가 좋아하겠군.”
* * *
라온은 별관의 호수 위에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바람이 발악하듯 입김을 불고 있었지만, 호수 표면은 얼어붙은 것처럼 잠잠했다.
심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경지가 한층 더 물이 올라서 이 공간 자체가 라온의 의념 안에 속해 있다는 뜻이었다.
명상으로 의념을 갈고 닦던 라온이 차분히 눈을 떴다. 그는 청아한 안광으로 세상을 마주하며 제천검을 뽑았다.
화아아아아아!
하얗게 번쩍이는 칼날 위로 불꽃과 서리가 동시에 치솟았다.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오러는 바람의 기운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듯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라온은 세 가지 기운이 뻗어 나오는 제천검을 들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가 의념으로 공간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검신에 가공할 양의 오러가 응집되어 있음에도 호수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후우.”
라온은 기본 검술과 광아검, 설풍검결의 초식을 모두 펼쳐낸 후에야 제천검을 내렸다.
‘나쁘지 않군.’
의념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도, 심상을 끌어내는 것도 나름 익숙해졌다. 이제 라스에게 얻은 새로운 능력을 시험해볼 때였다.
수련으로 차오른 탁기를 내뱉으며 제천검을 두 손으로 말아쥐었다.
쿠구구구구구!
만화공의 오러와 글래시아의 오러를 동시에 운용하면서 영혼의 격을 끌어 올렸다.
나 자신이 이 세계와 맞물리는 듯한 고아한 감각을 느끼며 영혼의 끝에 달라붙은 분노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찌지지지직!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내 거죽을 뒤집어쓰는 듯한 불쾌한 감각. 시야가 어두워지고, 생각이 뚝뚝 끊어진다고 느껴질 때 분노 개방을 운용했다.
콰아아아아아!
좁아지던 시야가 밝아지고, 달아올랐던 뇌리가 차갑게 식었다.
차분해지는 정신과 달리 분노의 기운은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오러에 스며들어 막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라온은 제천검을 비트는 듯한 마왕의 기운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분노 개방인가.’
시리아와 싸울 때와 달리 분노의 기운은 내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지 않고, 오직 강대한 힘만을 전해주었다.
‘다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군.
이전처럼 분노가 머리를 잠식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 불안정하다. 5% 이상의 힘을 끌어올리면 단숨에 이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라온이 제천검을 뒤로 젖혔다. 숨을 꾹 참으며 분노의 기운이 휘감긴 만화공 염룡결을 쏘아냈다.
쿠구구구구구!
붉은 용의 푸르게 타오르며 화염이 아니라, 서리의 숨결을 뿜어냈다.
빙룡결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검격은 솔개처럼 비상하여 별관 주변의 하늘을 푸르게 물들였다.
화아아아아!
빙룡결의 위력이 강했기 때문인지 갑자기 작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온은 솜털 같은 눈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천검을 쥐고 있는 손이 통제를 벗어나서 부르르 떨렸다.
‘역시 쉽지 않군.’
분노를 견디는 것과 분노를 운용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다.
-헹! 당연하느니라!
라스가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의 기운이 어디 어중이떠중이들의 것 같으냐? 네놈이 쓰기에 만년은 이르니라!
녀석은 까불지 말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것 같네.’
라온은 짤막한 미소를 지으며 라스에게 다가갔다.
‘역시 마왕님의 힘이야. 나 같은 하수가 다루기에는 이른가 봐.’
-크흠! 뭐, 그렇지.
오랜만에 칭찬을 받은 라스의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너는 어떻게 분노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거야?’
-간단하느니라. 감정의 흐름을 따르면서 그 감정에 먹히지는 않아야 하느니라. 간단히 말해서 분노라는 말의 고삐를 확실하게 잡아야 하는 것이지.
‘고삐라면….’
-네놈의 통제에 있는 불과 냉기로 분노를 집어 삼켜보아라. 불가능하겠지만.
라스는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며 키득였다.
‘그렇군.’
라온이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조언이었지만,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영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볼까.’
다시 수련하기 위해서 제천검을 들었을 때 별관 끝방에서 큼지막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쿠와아아아앙!
강대한 폭발과 폭음이 터지며 시꺼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터어엉!
라온이 폭발이 일어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경계하고 있을 때 시꺼먼 연기 속에서 얼굴에 숯 검댕이 묻은 엔시아가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에, 엔시아 님?”
“존잘 라온 님!”
엔시아의 지친 안색에 갑자기 활기가 차올랐다.
“드디어 완성했어요!”
그녀는 실비아에게 줄 인공단전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주먹만 한 구슬이 보였다.
“허….”
라온이 그 구슬을 보며 눈동자를 부르르 떨었다.
‘어마어마한 마나야.’
저 작은 구슬에서 마스터. 아니, 그랜드 마스터 급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본래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초월자 이상이었지만, 그것을 인공단전으로 만들면서 저 수준으로 유지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저거라면 어머니의 경지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도 있겠어.’
저 인공단전을 이용한다면 리메르처럼 오러를 모을 시간도 필요 없이 바로 실비아의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검을 잡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제 실력으로 돌아가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대단하네요. 역시 엔시아 님… 어?”
라온이 엔시아에게 다가가다가 멈춰 섰다. 구슬의 표면에 왠지 익숙한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저, 저기 단전에 새겨진 얼굴은….”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라온 님이에요! 존잘력을 표현하느라 고생 좀 했죠!”
엔시아는 보는 눈이 있다며 방긋 웃었다.
“아.”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무슨 일….’
엔시아는 인공단전의 표면에 내 얼굴을 그려놓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완벽한 인공단전이 무얼까 생각하는데, 라온 님의 얼굴이 떠오르더라구요! 완벽 존잘이잖아요!”
완벽 존잘. 또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사실 단전은 예전에 만들었는데, 이 얼굴이 계속 마음에 안 들어서 오래 걸렸어요.”
엔시아는 얼굴을 만드는 데만 나흘이 걸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커흑.
라온은 인공단전에 새겨진 얼굴을 자랑하는 엔시아를 보며 짧은 트림을 뱉었다.
‘왜 내 주변에는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지?”
-네놈이 제일 미쳤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