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7화
“후….”
카룬이 알현실을 떠나며 짜증 어린 숨을 내뱉었다. 그가 깊게 미간을 찌푸리자, 가뜩이나 매서운 눈빛이 얼어붙은 것처럼 냉랭하게 보였다.
“누구 하나 죽일 듯한 표정이군.”
발데르가 카룬의 옆으로 다가가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라온 놈이 그렇게 싫은 거야?”
“싫다?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카룬은 발데르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가 오늘처럼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본 적 있나?”
“음….”
발데르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지. 칭찬에 아예 인색하신 분은 아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띄워주는 경우는 없었어.”
“그래. 아이들은 물론이고, 우리도 저런 칭찬은 받아 본 적이 없다. 내가 전주가 되었을 때도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하셨을 뿐이지.”
카룬은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그때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는 다르고, 이번 일은 누가 봐도 대단한 일이었잖아. 에덴 새끼들이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계획을 뭉개버린 거라고!”
발데르는 단순한 성격답게 잘한 것은 칭찬해주자며 손을 저었다.
“너는 속 편해서 좋겠군.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음….”
그는 카룬의 말을 기억 못 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께서 라온 지그하르트를 후계자로 만들려는 것 같다고 했었지.”
“아!”
“오늘 일로 확실해졌다. 아버지는 라온을 우리의 경쟁자로 만들 생각이시다.”
카룬은 이전과 달리 확신을 담은 말을 내뱉었다.
“그놈은 이제 막 약관을 넘은 애송이잖아! 어떻게 우리의 경쟁자가 된다는 거야!”
“어린 건 중요하지 않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충분한 실적과 무력을 쌓았어.”
“하지만 아직 마스터….”
“놈의 손은 이미 벽 너머에 있다. 내일 당장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아.”
그가 처음으로 발데르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마음 놓고, 멍청하게 있다간 너부터 잡힐 거다. 네 아들이 라온에게 씹어 먹혔듯이.”
카룬은 라온이 훈련생 시절에 꺾었던 레이든의 이야기를 꺼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 나랑 레이든을 비교하는 거야?”
발데르가 폐인이 된 레이든을 떠올린 듯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거기다 놈은 아직 직계도 아니잖아!”
“그것도 시간문제다. 지금은 너와 내가 반대만 해도 찍어누를 수 있지만, 만약 놈이 내년에 부왕을 꺾는 위업을 세운다면 무얼 가져와도 막을 수 없어.”
“부왕….”
“이번에 우연히도 네게 나름의 권력이 주어졌지. 그 망아지에게 뒤를 잡히고 싶지 않다면 미리 견제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카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무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아….”
발데르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짜증이 어린 한숨을 뱉어냈다.
“항상 지만 잘났지.”
그가 카룬에게 눈을 흘길 때 뒤에서 데니어가 조용히 다가왔다.
“형은 어려서부터 저랬잖아. 새삼스레 왜 그래.”
데니어는 발데르의 우측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들은 거야? 기막을 쳤는데?”
발데르가 데니어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조금 엿들었지. 형은 알고 있었을걸.”
데니어는 멀어지는 카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생각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뭐?”
“네 말대로 라온이 대단한 활약을 해서 아버지가 평소보다 과하게 칭찬을 해주셨을 뿐이라고.”
데니어가 벽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형은 예전부터 사소한 일에 신경을 많이 썼잖아. 누님이라면 모를까. 우리 조카인 라온이 후계자가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음….”
“물론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 아이를 견제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는 라온 대신 현무전을 얼마든지 뒤져도 된다고 말하며 떠났다.
“먼지라….”
발데르는 데니어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카룬의 경고보다 데니어의 평온한 말이 라온에 대한 위기감을 일으켰다.
“조금만 건드려볼까.”
* * *
라온은 로칸 슬리온의 요청에 가주전 내부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향했다.
“광풍부대주.”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로칸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왔다.
“고맙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뿐이오.”
“가주님?”
라온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로칸의 어깨를 잡았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글렌을 대하는 것처럼 과한 인사를 해올 줄은 몰랐다.
“루난을 구해주어서 고맙소.”
로칸은 허리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죽어도 상관없소. 아니, 죽어 마땅했지. 하지만 그 아이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 싶었는데, 그 일을 부대주가 이루어 주었소. 정말 감사하오.”
그는 본인과 부인의 목숨보다 루난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에 안도한 듯 어깨를 떨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클라라가 로칸의 옆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딸이기도 하지만, 제 부하입니다. 이런 인사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온이 로칸과 클라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로칸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이 부대주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대로구려.”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본인의 뺨을 후려쳤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소. 제대로 눈이 멀었어.”
로칸이 입술을 꾹 씹다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오늘부로 광풍부대주를 슬리온 가문의 은인으로 모시겠소. 무슨 부탁을 해오더라도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겠소.”
그는 가슴에 손을 얹어서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하는 맹세를 보여주었다.
라온이 로칸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진심인가?’
무슨 부탁을 듣더라도 따르겠다는 말은 지그하르트의 봉신가가 된 것처럼 내 지시를 듣겠다는 뜻이었다. 가주로서 쉽게 할 말이 아니었다.
“가주님.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생각을 잘해보시고….”
“어제부로 나와 클라라 그리고 루난은 새로 태어난 것과 다르지 않소. 그 생명을 부대주께서 이어주셨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로칸은 오히려 더 해주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 둘만이 아니라, 남은 슬리온의 모두가 함께 생각한 일입니다. 부담가지지 말아 주세요.”
클라라는 말리기는커녕 로칸의 팔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끄응! 지루하느니라! 그냥 맛난 밥이나 달라고 하거라!
라스는 배알이 꼴린 듯 이를 갈며 배가 고프다고 떠들어댔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로칸과 클라라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의. 아니, 슬리온 가문의 의지를 소중하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과한 거절은 실례가 되기에 두 사람의 감사 인사를 받아들였다.
“고맙소.”
“고마워요.”
그제야 로칸과 클라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힘이 빠졌는지 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통스러운 일을 본인의 입으로 다시 꺼냈기 때문인지 얼굴이 10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로칸과 클라라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별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루난?”
루난이 벽에서 등을 떼고 앞으로 다가왔다.
“저 안에서 했던 말은….”
“아빠가 말해줘서 나도 알고 있었어.”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들었다.
“가문의 일은 괜찮아? 도와줄까?”
그 사건이 터지고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루난이나 그녀의 부모님 모두 힘든 상태일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괜찮아.”
루난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할 수 있는 걸 다해줬어.”
그녀의 눈은 여전히 명했지만, 이전과는 성격이 달라진 듯 보였다.
다른 누가 아니라,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회색 상자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라스가 난동을 부려서 억지로 산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건….”
“아직 회식 약속이 남아 있잖아. 일단 이걸로 참아줘.”
“응.”
루난이 나름 활기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온은 루난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주전을 나섰다.
-크으….
라스가 루난을 돌아보며 빨개진 코를 매만졌다.
-성장했구나. 아이스크림 소녀여!
‘나는 아이스크림이 아까워서 우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네.’
라온이 훌쩍이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본왕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이런 상황에서 음식을 따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녀석은 웃기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렇지. 미안하다. 내가 실언을….
-근데 저거 민트초코로 준 거 아니지? 그러면 좀 아까울 거 같은데….
‘…….’
* * *
일주일 후.
“하아….”
버렌이 구겨진 서류들을 책상에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의미가 있으려나? 어떻게 해서든 시비를 걸어올 거 같은데.”
그는 특별 감찰관이 된 발데르가 분명히 억지로 트집을 잡을 거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해야지.”
라온이 버렌이 가져온 서류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잡히는 트집은 짜증 나는 정도로 끝나지만, 실제 있는 문제로 시비를 걸어오면 많이 귀찮아질 거야.”
“그 사람은 억지로 잡은 문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라고.”
버렌이 발데르의 성격을 모르냐면서 책상을 두드렸다.
“나도 알아. 아주 잘 알고 있지.”
지금 발데르는 특별 감찰관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어서 말 그대로 가문 전체에 깽판을 치고 있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하루종일 트집을 잡고 늘어져서 대와 단을 비롯한 무력단체와 비연회 같은 정보단체들이 매일 앓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무식한 주제에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더 문제야.’
발데르는 어리석으면서 일은 열심히 하는 최악의 상사 유형이었기 때문에 현재 지그하르트는 그에 대한 경보가 울리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진무전주는 널 싫어하잖아.”
“그렇겠지. 아들을 폐인으로 만들었으니까.”
라온이 서류에 서명한 후 펜을 내려놓았다.
요즘 발데르가 가주전에서 입을 다물고 있고, 가끔은 편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그건 그의 단순한 성격 때문이다.
아들이 망가진 원한은 절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레이든이 먼저 시비를 걸어 온 거잖아.”
버렌은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 사람에게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아.”
“하긴 그렇겠네.”
“일이나 해. 마르타랑 루난이 없어서 너랑 나랑 둘이서 다 해야 하니까.”
라온은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며 탁한 숨을 뱉었다.
-음?
라스가 더러운 책상을 내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은 한동안 집에 없었고, 오자마자 휴가를 받았잖느냐.
‘그랬지.’
-그런데 왜 이렇게 서류가 쌓여 있는 것이냐?
‘이곳의 주인이 일을 안 해서 그렇지.’
라온이 책상에 올려진 광풍대주의 명패를 가리키며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귀때기….
라스는 진정으로 감탄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오! 이 얄미운 인간!”
버렌도 리메르에게 분노가 치밀었는지 책상을 내리쳤다.
“대놓고 튄다고 말하니까. 더 열받아!”
그가 어제 도망친다고 선언한 리메르를 떠올리며 이를 갈 때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크, 큰일 났어요! 그 인간. 아니, 특별 감찰관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도리안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로 입술을 떨었다.
“벌써?”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막 해가 뜨고 있는데, 벌써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부지런함만큼은 진짜였다.
“어떻게 해! 아직 정리가 안 끝났는데!”
“대충 쑤셔 넣고 나와.”
라온이 손을 털고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너, 너무 빨리 오는 거 아니야?”
“어제 철중단이 아주 박살이 났다고 하던데.”
“철중단? 거기 직계 많잖아.”
“우리는 그 이상으로 털리겠네….”
광풍대 검사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걱정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평온한 안색으로 서 있는 건 마크 괴튼뿐이었다.
콰앙!
라온이 광풍대의 앞에 섰을 때 거친 걸음 소리와 함께 연무장의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삐걱거리는 문 뒤로 발데르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 맞춘 듯한 검붉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사이즈가 작아서 어깨와 다리가 터질 것 같았다.
왼팔에 착용한 완장에서 특별 감찰관이라는 글자가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본인의 지위를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를 보는 듯했다.
“커흠!”
발데르는 묵직한 걸음으로 광풍대 앞으로 다가와 턱을 치켜들었다.
가뜩이나 몸집이 큰 사람이 머리를 세우고 있으니, 오우거처럼 보였다.
라온은 짧게 입맛을 다시고 앞으로 나가 발데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특별 감찰관님을 뵙습니다.”
일부러 특별 감찰관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주었더니, 발데르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간다.
본인이 이겼다는 표정. 생각 이상으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잘하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광풍대주는 어디에 있지?”
발데르가 곰 같은 시선을 굴리며 리메르를 찾았다.
“개인 단련 중입니다.”
차마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개인 수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단련?”
발데르의 시선이 가늘게 좁혀졌다.
“대원이 모두 이곳에 있는데 홀로 수련을 한다는 건가? 그것도 대주가?”
“새벽부터 오전까지는 개인 정비 시간이라, 무얼 해도 상관이 없는….”
“아무리 개인 정비를 한다고 해도 대주는 대원들을 눈에 담고 있어야지!”
그는 잘 걸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흐음!”
감찰부 소속으로 보이는 염소수염의 노인이 가지고 있던 책자에 뭐라 적기 시작했다. 감점을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대원들을 놔두고 홀로 움직이는 대주라니, 영 수상하군.”
“낮에는 대주님도 함께 수련합니다. 다른 대는 새벽 훈련이 없는 곳도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금 대주가 없는 게 문제지 않나!”
발데르는 들었던 대로 시작부터 억지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새벽 수련은 가벼운 몸풀기 수준이라 대주가 없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건 상관없네! 내가 정한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게 문제야!”
그는 말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저으며 연무장의 모래를 살폈다.
“음? 모래에 왜 이렇게 자갈이 많은 거지? 제대로 정비를 안 하는 건가?”
“이곳에 깔아놓은 흙은 남부에서 가져온 최상급 모래입니다. 자갈이 많을 수가 없는….”
“여기에 있지 않느냐!”
발데르는 모래 알갱이와 별 차이도 없는 작은 돌조각을 가리키며 미간을 구겼다.
“후우….”
라온은 불을 뿜듯이 소리를 지르는 발데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네.’
버렌의 말대로 발데르는 시작부터 억지 트집을 잡고 있었다. 그동안 당했던 굴욕을 제대로 갚아주겠다는 것 같았다.
“검사들이 부상당하면 어쩌려고 연무장 정비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군! 대주나 대원이나 이상한 곳에 정신이 팔린 것 아닌가?”
발데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 광풍대 검사들을 차례로 훑어내렸다.
“으으….”
검사들은 발데르의 기세에 질린 듯 어깨를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너!”
발데르가 유독 많이 떨고 있는 도리안에게 다가가 눈을 부라렸다.
“왜 떨고 있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는군.”
“아니, 저는 원래 따, 땀이 많아서요….”
도리안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지. 이 녀석을 심문….”
“특별 감찰관님.”
라온이 도리안의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번 슬리온 가문 습격 사건에서 슬리온 가주와 가모를 지키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서 땀을 흘렸을 뿐입니다.”
“그, 그런가?”
발데르는 그 일을 대단하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도리안을 보며 콧잔등을 긁다가 턱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걸 놔둘 수는 없지! 특별 심문 대상에 올려!”
그는 예외는 없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겠군.’
라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가 갑인 입장에서 논리를 무시하고 무식하게 들이밀고 있어서 다루기 쉽지 않았다.
진짜 단순, 무식, 지랄 그 자체였다.
‘희극제의 기분을 알 것 같네.’
내 깽판을 끝까지 참아낸 그녀의 인내심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흠!”
발데르는 도리안을 지나서 연무장의 외곽에 세워진 전투 인형들에게 다가갔다.
“이 장비들은 왜 이렇게 더럽지? 관리를 안 해서 먼지가 가득하지 않나!”
그는 아까 바닥을 살피며 모래가 잔뜩 붙은 손으로 인형들을 만지며 먼지가 가득하다고 떠들어댔다.
“신성한 연무장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게 분명해! 이곳을 책임지는 자가 누구야! 어떤 새끼가 이따위로 연무장을 다루냐고!”
발데르가 인형들을 내던지며 거칠게 발을 굴렀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라온이 혀를 차면서 발데르에게 다가가려 할 때 그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노인이 앞으로 달려 나가 발데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아악!
발데르는 누가 본인의 뒤통수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 그대로 얻어맞았다.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무장으로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뒤통수를 쳤어….”
“이게 대체….”
연무장 전체에 어둑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광풍대는 물론이고, 감찰관들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도, 도괴 님?”
라온은 발데르의 뒤통수를 후린 사람이 도괴임을 알아차리고 눈을 꿈벅였다. 갑자기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떤 새끼야!”
발데르가 살기 짙은 기파를 폭발시키며 뒤를 돌았을 때 그의 앞에 서 있던 도괴가 미간을 구겼다.
“나다. 이 새끼야.”
“교, 교관. 아니, 해리안 님!”
다들 발데르가 폭발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도괴를 보고서 당황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여긴 어떻게….”
“네가 책임자 나오라고 해서 나왔다. 할 말이 뭐냐.”
도괴는 말해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으음….”
발데르가 뒤로 물러섰다. 그는 노골적으로 도괴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지금 특별 감찰관입니다.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십시오.”
“아, 그렇군. 감찰관 나리셨어. 그럼 다시 말해드려야겠네.”
도괴가 실례했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서 다시 발데르의 이마를 후려쳤다.
“접니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