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46화 (545/653)

제546화

라온은 바닥에 늘어져서 하찮게 바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분노 개방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분노 개방(1성)>

분노의 군주에게 받은 기운을 오러와 함께 운용할 수 있다. (사용 한계: 5%)

내용은 간단했지만, 그 효과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감당하지 못했던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시작은 5%지만, 성장하면 달라지겠지.’

지금의 경지로 다룰 수 있는 분노의 기운은 고작 5%. 라스의 본체도 아니고, 녀석에게 받은 분노 중 고작 5%에 불과해서 적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 수치도 상승할 테니, 오히려 훗날이 기대되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본왕은 이놈에게 기운을 넘겨준 적이 없느니라!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몸을 빼앗기 위해서 밀어 넣은 분노를 지 멋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녀석은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다며 동그란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줬으면 끝이잖아. 그만 질척대.’

라온이 라스를 굽어보며 혀를 찼다.

-지, 질척? 지금 질척이라고 했느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네놈 같으면 전 재산을 다 빼앗고도, 돈을 버는 족족 훔쳐 가는 도둑놈을 그냥 놔둘 것이냐!

‘나라면 용서하지.’

-어어억! 뒷골이….

녀석을 결국 뒷목을 잡은 채 쓰러졌다. 눈동자가 돌아간 것을 보니, 열불이 도져서 기절한 것 같았다.

“흠….”

라온은 라스를 놔두고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항상 사용하기는 힘들겠지.’

아무리 특성이 생겼다고 해도 분노를 상시 유지하는 건 몸과 정신에 부담이 갈 것이다.

마르타가 광폭화를 사용할 때처럼 중요한 승부처에서 단숨에 끝을 내는 용도로 쓰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내상을 회복하고, 실험해봐야겠어.’

아직 내상을 완벽하게 치유한 게 아니었기에 함부로 분노를 끌어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만 분노 개방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을 때 가슴팍에서 작은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음?”

라온이 안주머니에 있던 두더지를 밖으로 꺼냈다.

“멀린?”

멀린의 이름을 부르며 두더지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살아는 있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우우웅!

혹시나 하여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으로 치유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무리한 건가.”

한숨을 내쉬며 멀린을 도로 안주머니에 넣을 때 다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어이.”

라온이 바로 멀린을 꺼내서 그녀의 배를 툭툭 두드렸다.

“너 기절한 거 아니지?”

“푸흐….”

두더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자, 녀석이 가는 떨림을 일으키며 입을 벌렸다.

“아하하하하!”

멀린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네 품이 너무 따뜻해서 계속 있고 싶었어.”

그녀는 평생 그 상태로 있어도 좋았을 거 같다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너는 진짜….”

라온이 질린 표정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 광녀! 꾸엑….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라스는 멀린의 말에 경악한 듯 본인의 머리를 후려치고 다시 기절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라온이 멀린의 눈을 보며 상태를 살폈다.

“응. 큰 문제는 없어.”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양팔을 날개처럼 퍼덕였다.

“그럼 왜 기절한 건데?”

“기절 안 했는데?”

“어?”

“힘이 빠져서 누워 있었는데, 네가 날 품에 넣더라고. 기회다 싶어서 가만히 있었지.”

그녀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히죽 웃었다. 살다 살다 두더지가 홍조를 띄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아….”

라온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장난을 친 건 화가 나지만, 별문제가 없다고 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라….’

대체 무슨 관계인지.

목숨을 노리는 적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젠 멀린에게 도움만 받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신기한 인연이었다.

“오늘은 너무 행복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은… 아.”

멀린이 헤실헤실 웃다가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손과 발이 격하게 떨렸다.

“멀린?”

“조금 무리하긴 했나 봐.”

“그럴 줄 알았어.”

라온이 눈매를 찌푸렸다. 아무리 투구가 있다고 해도 타인의 심상에 들어가는 통로를 만들어주었으니, 무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전에는 몇 주 동안 잠도 못 자고 날 찾아다녔다고 했었고.’

해안가에서 갈매기로 만났을 때는 계속 잠을 안 자는 상태로 수천 마리의 동물에게 본인의 의념을 담는 미친 짓을 했으니, 아직 정신력과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온이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예전에 해안 던전에서 구했던 해령화의 이파리를 하나 꺼내서 멀린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고 한동안 쉬고 있어.”

“투명한 잎?”

멀린이 해령화의 이파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령화의 이파리야.”

“해령화? 그 전설의 영약?”

“그래. 육체와 정신의 손상을 회복시키는데, 효과가 있으니까. 지금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해령화의 이파리는 최상급 영약이지만, 멀린에게 받았던 도움이 훨씬 크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난 필요 없어. 너부터 챙겨.”

멀린은 해령화의 이파리에 관심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먹었고, 남은 것도 있어.”

멀린에게 아직 남은 이파리를 보여주며 가져가라고 손짓했다.

“하아….”

멀린이 이파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들뜬 숨을 내뱉었다.

“평생 가보로. 아니, 나라를 세워서 국보로 간직할게!”

“그냥 먹으라고….”

라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응. 알겠어.”

멀린이 빙긋 웃으며 해령화의 이파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하얀 반짝임이 일어나며 이파리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본체가 있는 곳으로 보낸 것 같았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얼마든지!”

“너도 봤겠지만….”

라온은 루난이 전해준 이야기를 하며 시리아 슬리온의 생사에 관해 물었다.

“나도 몰라.”

멀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다고?”

“전에도 말했지만, 에덴은 파벌이 나뉘어 있어. 일은 같이하지만, 실상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한쪽은 투구를 다른 한쪽을 가면을 쓰잖아.”

“아….”

라온이 그간 만났던 에덴의 귀신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에 투구를 쓴 멍청이가 오기도 하고, 투구를 쓰는 쪽에 가면을 쓰는 미친놈이 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끼리끼리 모여.”

멀린은 이번 일도 몰랐다며 고개를 까딱였다.

“시리아는 투구 귀신들이 아끼던 놈이었어. 특별한 아티팩트를 넘겼다면 투구째로 살아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지.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그놈에게 관심이 없어서 알 수 없다는 거지만.”

아무래도 시리아에 대해서 그녀에게 묻는 건 의미가 없던 일 같았다.

“그럼….”

라온은 시리아의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그간 의문이었던 질문을 던졌다.

“가면을 쓴 이들의 수장은 타천이고, 투구를 쓴 놈들의 수장은 천마인 건가?”

“맞아. 천마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역시 그랬군.”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느끼지만, 멀린 덕분에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았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고맙다.”

“고맙기는 무슨.”

멀린이 고개를 젓다가 어깨를 떨었다.

“정말 무리하기는 했나 봐. 이제 가봐야겠어.”

그녀가 떨리는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요구를 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 두더지의 입이 열렸다.

“이 아이는 뱀이 먹고 싶다고 하네.”

“배, 뱀?”

“응. 두더지의 천적이 뱀이거든. 맨날 당하기만 해서 한번 먹어보고 싶대. 부탁할게!”

멀린은 손을 힘차게 흔들고서 사라졌다.

“이 겨울에 뱀을?”

헛웃음을 흘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조금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키욱.”

두더지가 빨리 뱀을 내놓으라며 손을 까딱였다.

“진짜 미치겠다….”

라온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전투를 치를 때처럼 기감을 전력으로 펼쳐내서 4시간 만에 겨울잠을 자는 뱀을 찾은 뒤 두더지에게 먹이고 별관으로 돌아왔다.

“더럽게 피곤하네….”

빠르게 목욕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머리가 멍해졌다.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좀 자야겠어.’

육체와 정신 모두 피폐해진 느낌이다. 나태의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광녀 때문에 고생했느니라. 이제 좀 쉬… 아니지!

라스도 멀린은 인정한다는 듯 턱을 주억이다가 우뚝 멈췄다.

-네놈 오늘 본왕이 원하는 거 다 먹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

라온은 이미 잠에 빠졌기에 라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똥강아지 같은 놈아! 일어나라고! 생각해보니까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어!

*     *      *

다음날 정오.

가주전 알현실의 철문이 위압적인 소리와 함께 열렸다.

단상으로 이어지는 붉은 카펫의 외곽으로 지그하르트의 무인들이 서 있었다.

전주와 대주 그리고 단주까지. 가문 내에 있거나, 근처에 있던 간부들이 알현실의 기둥 앞에 서서 창백한 안색으로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간부들이 저렇게 긴장하는 이유는 하나다. 옥좌에 앉아 있는 북방의 왕. 글렌 지그하르트가 피를 모조리 말려버릴 것처럼 건조한 기파를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

라온은 질식할 것 같은 중압감을 밀어내며 루난과 함께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시작하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글렌은 본론을 말하라고 지시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옆에 있는 루난을 바라보았다.

“응.”

루난이 한 발 앞으로 나와서 그동안 본인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시리아의 세뇌와 고문 같은 언행들 그리고 납치 후 투구를 씌우는 일까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이어지자, 고요했던 알현실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깨어나니 라온이 에덴의 귀신들과 싸우고 있었어요.”

“루난이 투구를 쓴 이후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은 루난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직접 찾으러 갔을 때부터 시리아를 잡고, 루난의 심상에 들어가서 바포메트를 상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멀린에 관한 것은 지우고, 우연히 그녀의 심상에 닿았다고 말해주었다.

“에덴. 이 개자식들이!”

진무전주 발데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무지막지한 힘이 대지를 후려치며 알현실 전체가 뒤흔들렸다.

“…….”

데니어 역시 분노한 듯 유연한 인상에 서늘한 예기를 드러냈다.

“하!”

“귀신 놈들이 선을 넘었군.”

“에덴….”

“가면쟁이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단주와 대주들도 지그하르트가 농락당한 것에 화가 돋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처음의 안색을 유지했는데, 그 담담함이 더욱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다.

“죽여주십시오!”

단상 아래에 있던 로칸이 글렌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부 제 탓입니다! “

그는 뼈가 박살 나는 듯한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너무도 자랑스러웠던 아들인지라, 의심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로칸이 루난에게 시선을 돌리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루난이 제게 경고를 해주었음에도 저는 시리아를 믿고, 저 아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제 무능이 원인입니다! 죽여주십시오!”

그의 이마에서 터진 핏물이 하얀 바닥을 적셨다.

“여보. 그만 해요!”

옆에 있던 클라라가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면 로칸은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세였다.

“…….”

루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로칸에게 가고 싶으면서도 글렌을 올려보며 숨을 골랐다.

“슬리온 가주.”

글렌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냉기와 허무가 뒤섞인 붉은 눈동자에 로칸이 턱을 부르르 떨었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지그하르트에 과할 정도의 충성을 보였지. 나로서는 자네를 믿고 싶지만, 에덴과 연결되어 있던 자가 시리아 슬리온인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네.”

“물론입니다.”

로칸이 각오를 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전주.”

“예.”

데니어가 앞으로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현무전의 인원을 모두 동원해서 슬리온 가문의 인원과 자금, 행적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분명 아직 에덴과 연결고리를 가진 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

아무리 슬리온이 지그하르트의 봉신가라고 해도 가문의 모든 것을 확인하겠다는 건 슬리온에게 큰 굴욕이었다.

하지만 로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슬리온 가주에 관한 죄는 조사 이후에 묻겠다. 그때까지 대기하도록.”

“며, 명을 받듭니다.”

로칸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광풍부대주.”

글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무전주 카룬이 라온에게 손짓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루난 슬리온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마자, 슬리온 가문으로 갔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지 않나? 사정이 있어서 늦을 수도 있는데, 전력을 다해서 뛰어갔다는 게 난 이해가 가질 않아.”

그는 노골적인 의심의 눈빛을 보내며 미간을 좁혔다.

“2조장은 본래 약속을 잘 지키는 성격이고, 아이스크림 약속은 매번 한 시간 이상 일찍 왔습니다. 전 루난과 시리아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카룬이 짧게 혀를 찼다.

“왜 그러는 거요. 이건 잘한 일이 맞지 않소.”

진무전주 발데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고 바로 집에 찾아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느냐. 집사의 말을 듣고도 무단침입한 것도 그렇고. 꼭 자작극을 일으켜서….”

“카룬.”

글렌의 냉랭한 시선이 카룬에게 내리꽂혔다. 그는 중무전주라는 명칭이 아니라, 카룬의 이름을 부르며 섬뜩한 손끝을 세웠다.

“입 다물어라. 내 말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카룬이 입술을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갔다.

“정말 큰 일을 해주었다.”

글렌은 카룬의 의심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듯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자들은 남들과 다른 것을 보고 느끼는 법이다. 네가 루난 슬리온의 지각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면 슬리온 가문은 에덴의 손에 떨어졌을 테고, 훗날 우리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겠지.”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넌 슬리온 가문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까지 구해냈다.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가, 감사합니다.”

라온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칭찬을 받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과하게 띄워줄 줄은 몰랐다.

“으음….”

카룬이 한 마디를 얹고 싶어 했지만, 조금 전에 타박을 들었기 때문에 입술만 깨물었다.

“올라오라.”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앞에 있던 셰릴과 리메르가 손을 흔들었다.

“뭐해. 빨리 올라가!”

“가서 돈 달라고 해! 많이!”

라온은 리메르의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악양귀를 처치하고, 슬리온 가문을 구원한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금패와 함께 부상을 내린다.”

글렌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로엔에게 금패와 붉은빛 목걸이 하나를 받아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이어서 금패를 또 받게 될 줄은 상상을 못 했기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인사를 하고 단상을 내려왔을 때 글렌이 몸을 일으켰다. 산이 솟구치는 듯한 웅대한 위암감이 알현실을 휩쓸었다.

“에덴. 아니, 오마의 마수가 봉신가를 넘어 지그하르트 내부까지 뻗어 있을 수도 있기에 한동안 특별 감찰부를 운영하도록 하겠다.”

글렌은 손가락을 들어 발데르를 가리켰다.

“진무전주를 특감의 수장으로 명할 테니, 가문 내 불온 세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모두 뿌리를 뽑도록.”

“맡겨만 주십시오!”

발데르는 이런 중책을 맡을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했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

라온은 주먹을 불끈 쥐는 발데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무식한 인간을 감찰로 쓴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카룬 보다는 낫지만, 단순, 무식, 지랄을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있는 발데르에게 저런 중책을 맡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우….”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     *      *

“가주님.”

리메르는 간부들이 모두 떠난 뒤에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 진무전주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은 아니죠?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 부수고 다닐 거 같은데….”

그는 진무전주가 발을 굴러서 터져나간 바닥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말대로 발데르는 감찰을 맡을 그릇이 아니지.”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로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엔. 흑연을 움직여라.”

흑연을 움직이라는 말을 듣자, 로엔의 인자한 눈빛이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발데르가 무식하게 쑤시기 시작하면 분명 세작들이 틈을 드러낼 것이다. 모조리 찾아서 끌고 오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로엔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항상 평온함을 두르고 있던 그의 기세가 비수와 같은 예리함을 휘감았다.

“발데르가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흑연이 어둠 속에서 조사하는 거군요. 괜찮네요. 다만….”

리메르가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무전주가 우리한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올 텐데, 그건 좀 귀찮을 것 같네.”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걸 왜 걱정해?”

셰릴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턱을 틀었다.

“뭐?”

“광풍대에는 그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 아!”

리메르가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러면 오히려 발데르가 오기를 바라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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