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44화 (543/653)

제544화

라온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라스를 놔두고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내 심상을 조금 더 넓힐 수 있겠어.’

루난의 서리에 정화된 바포메트의 투기가 전신으로 스며든다.

지금 이곳에 있는 나는 정신체였기 때문에 바포메트의 기운은 당연하게도 심상 속에 둥지를 틀었다.

투기란 오직 싸우기 위해서만 태어난 힘이었기에 심상 속 세계에 박혀 있는 칼날에 사나운 예기가 맺혔다.

‘이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어.’

바포메트의 기운을 내 성향에 맞게 바꿀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놈이 지니고 있던 야성적인 기질을 유지시켰다.

글렌이 만검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것을 겪어보라고 했듯이 지금까지 없던 기운을 받아들여서 심상의 세계에 새로운 자극을 일으키고 싶었다.

라온은 바포메트의 투기 덕분에 영혼의 격이 더 단단하게 여무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루난은 아직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지 눈을 꼭 내리감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제기랄!

라스가 단팥빵처럼 생긴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왜 본왕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냐!

녀석은 함께 활약을 했는데, 본인만 먹는 게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야. 너도 얻을 건 있잖아.’

-저, 정말이냐?’

‘그래. 여기서 나가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잖아.’

-아, 그렇군! 확실히 좋은… 그건 원래 먹기로 한 거잖아!

라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날려왔다.

‘먹고 싶다던 음식들도 사줄 테니까. 조용히 좀 있어 봐.’

라온은 턱을 트는 것으로 가볍게 주먹을 피하며 손을 저었다.

-그,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야…가 아니지! 그것도 원래 네놈이 할 일이잖느냐! 아직 3주는 끝나지 않았어!

‘이제 잘 안 속네.’

아쉽다고 중얼거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 정말….

‘어쨌든 오늘은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정말이겠지?

‘그래. 쓸데없는 짓만 안 하고 조용히 있으면.’

라온이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라스에게 고개를 끄덕일 때 루난의 심상 전체가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바포메트가 잠식하고 있던 어둠이 녹아내리고, 루난의 심상의 세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새롭게 솟구친 땅 위로 아름다운 결정이 맺힌 눈이 내린다. 루난의 세계가 청아하면서도, 순수한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콰아아아앙!

루난을 지켜주던 얼음집이 무너져내리고, 그 안에 박혀 있던 아이스크림 인형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허.”

라온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로 다투기 시작한 버렌과 마르타 인형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이건….’

-아이스크림 소녀의 심상이 성장했다는 뜻이니라.

라스가 제 발로 걷기 시작한 인형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인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정신이 성숙해졌다는 것이지.

‘그래. 그렇게 보이네.’

얼음집이 깨지고, 그 안에 소중히 장식되어 있던 인형들이 홀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라스의 말대로 루난의 정신이 크게 성장한 것 같았다.

“음….”

라온이 하얀 세계를 활보하는 인형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루난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별빛 같은 휘광이 번져 나왔다.

‘강해졌군.’

성장한 건 그녀의 정신만이 아니다. 밖으로 나가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루난의 무력 역시 몰라보게 발전한 듯 보였다.

“라온.”

루난이 앞으로 다가와서 손을 뻗었다. 아직 아이스크림 인형의 모습이었기에 가볍게 도약해서 그녀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기분은 어때?”

라온이 루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심상의 세계임에도 그녀의 머리칼에 흐르는 청초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따스한 물로 목욕한 기분이야.”

루난이 손을 들어 올려서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은 더이상 맹해 보이지 않았다.

풀잎에 고인 이슬처럼 맑은 눈동자. 별자리가 가득한 밤을 보는 듯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온. 고마워.”

“네가 한 거야.”

라온은 고개를 꾸벅이는 루난에게 손을 저어주었다.

“아니. 나 혼자라면 절대 못 이겼을 거야.”

루난이 입매를 가늘게 올렸다. 작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아이스크림으로 예를 들어줘서 힘이 났어.”

“그거 다행이네.”

-아니니라! 그건 본왕이 한 말이니라! 요놈은 아무것도 안 했어! 본왕의 저작권을 뺏어간 악독한 놈이니라!

아이스크림 소녀가 잘 컸다고 감탄하던 라스가 펄쩍 뛰어올라서 손을 흔들었다.

“그 먼지는 아직도 있네.”

루난이 라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 먼지….

라스가 턱을 부르르 떨며 추락했다.

-아이스크림 소녀여. 네가 본왕에게 어떻게….

녀석은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탄신을 흘렸다.

“별거 아닌 먼지니까. 그냥 무시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라스를 가볍게 쳐냈다.

“불쌍해.”

루난이 왼손으로 라스를 잡아서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아이스크림 소녀와 본왕은 통하고 있느니라! 아이스크림 소녀여 조금만 기다리거라!

‘통하기는 무슨… 음?’

라온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릴 때 자신과 그와 라스의 몸에서 빛이 솟구치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아.”

생각해보니, 예전에 드래고니안과 싸울 때도 시간이 지난 이후에 라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었다.

루난의 심상에 적응되어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라스가 본인의 길쭉한 손가락을 보며 환희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본왕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누구?”

루난도 이제는 라스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아이스크림 소녀여! 잘 들어라. 요놈이 바로 악의 축이니라. 지금까지 이놈이 했던 말은 전부 본왕이 했던 말이고, 요 사악한 놈이 해온 행동은 전부 본왕이….”

라스는 아직 몸 전체가 보이지 않은 상태임에도 라온의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하지만 녀석이 다 말을 하기 전에 루난의 심상이 무너지며 하늘과 땅이 어둑하게 변해갔다.

바포메트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 루난의 정신세계에 있을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아, 안 돼! 아직 해야 할 말이 한참 남았으니라! 잠깐만….”

라스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루난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가 무너지는 바닥을 걷어차며 괴성을 질렀다.

“억까에 억까를 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본왕도 말 좀 하자고!”

“어휴….”

라온은 깜깜해지는 세계 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욕할 시간에 다 말했겠다.”

*     *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오른손이 루난이 쓰고 있던 바포메트의 투구에 닿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캬앙!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바포메트의 투구가 반으로 쪼개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만 루난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라온은 고로롱 숨을 내쉬는 루난을 조심스럽게 눕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강해지고 있군.’

예상대로 심상의 성장이 육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경지를 밟은 이후일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하늘아!

라스가 하늘을 올려보며 주먹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본왕을 방해하는 것이냐!

‘그러게 빨리 말했어야지. 내 욕을 안 했으면 말할 시간은 충분했어.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며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로칸과 클라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언가에 중독된 거 같은데….’

혈액의 움직임이 시간을 멈춘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특별한 약으로 둘을 계속 기절시켜둔 듯했다.

‘독은 아니야.’

페드릭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을 수준이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린은….’

바로 달려들 멀린이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축 늘어져 있는 두더지의 모습이 보였다.

‘무리한 건가.’

본체가 아니라, 동물의 모습을 빌린 상태에서 힘을 과하게 사용하다가 기절한 것 같았다.

‘계속 도움만 받네. 고맙다.’

라온이 두더지 멀린을 품에 넣고서 루난을 가두고 있었던 지하 공간 쪽으로 걸어갔다.

‘있군.’

루난을 구하기 전에 죽였던 시리아의 시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놈의 투구가 보이질 않았다.

‘뭐지?’

괴이하게 생각하며 눈매를 찌푸릴 때 우측에서 강렬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쿠구구구구구!

라온이 시선을 돌렸다. 마르타와 도리안 그리고 시리아에게 억압되어 있었던 슬리온 가문의 무인들이 시리아를 따르는 배신자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몬스터의 투구나 복면을 쓴 에덴의 귀신들도 꽤 많이 보였다.

“으윽….”

라온이 그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춰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몸이 제대로 안 움직여.’

심상의 세계가 성장했지만, 분노에 몸을 맡겼던 후유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발끝부터 두피까지 통증의 선이 닿아 있는 기분이다. 검계현신으로 오러와 정신력도 소모해서 더욱 버티기 힘들었다.

-전에도 말했지 않느냐. 네놈은 아직 분노를 운용하기에 이르다고.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어.’

루난이 투구를 쓴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분노에 빠져버렸다.

라스에게 얻은 분노가 많아질수록 원초적인 감정까지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황은 정리해야겠지.’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발을 내디뎠다. 억지로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마르타의 옆으로 다가갔다.

“끝난 거야?”

마르타가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부상도 심했지만, 강자와 연달아 싸우며 체력이 모두 빠진 것 같았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도리안이 거의 반쯤 주저앉은 채 울상을 지었다. 그 역시 부상이 심했고, 힘이 빠져서 손을 떨고 있었다.

“수고했어.”

라온이 마르타와 도리안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앞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봐! 저 녀석 괜찮은 거냐고!”

마르타는 본인도 죽도록 힘든 상황임에도 루난을 먼저 생각했다.

평소에는 견원지간이더니, 이럴 때는 친자매보다도 더 가까워 보였다.

“괜찮아.”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보다 강해져서 깨어날 거야.”

“흥. 그래도 좋으니, 빨리 좀 깨어났으면 좋겠네.”

마르타는 루난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그럼 정말 시리아 님이….”

“비, 빌어먹을!”

시리아의 손을 잡고 가문을 배신한 검사들이 라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 너희들은 다 끝났어!”

도리안이 헥헥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제대로 봐라.”

놀 로드의 투구를 쓴 에덴의 귀신 시견귀가 라온을 가리켰다.

“백검룡은 정상이 아니다.”

그는 라온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하고서 입맛을 다셨다. 놀의 후각으로 부상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싸워라. 어차피 저놈들을 모두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을 뿐이다.”

“으윽….”

“어쩌다가 이렇게….”

슬리온 가문의 배신자들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지금 난 정상이 아니야. 다만….”

라온은 순순히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난 건 변하지 않아.”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슬리온 가문의 서쪽 성벽이 무너졌다.

쿠와아아앙!

광풍대가 먼지를 헤치며 달려와서 에덴과 배신자들을 포위했다.

“광풍대. 부대주님의 명을 받습니다!”

버렌이 라온에게 고개를 숙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촤아아악!

마크 괴튼은 말도 필요 없다는 듯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적안귀의 목을 갈라버렸다.

다른 광풍대 검사들도 두 사람을 따라 서늘한 기파를 일으켰다.

“어차피 어중이떠중이들이다! 끝까지 싸워!”

시견귀가 억지로 기세를 끌어 올렸지만, 배신자들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광풍대가 다가 아니야.”

라온이 에덴의 귀신과 배신자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악양귀와 싸울 때 퍼진 기파 때문에 가문의 고수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들에 제압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네놈만큼은!”

시견귀가 누런 광기를 드러내며 라온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갈린 기형검이 그의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라온!”

“피하세요!”

마르타와 도리안이 앞을 지키려고 했지만, 두 사람 다 지쳤기에 몸이 비틀거렸다.

“날 너무 무시하네.”

라온이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촤아아아악!

손가락을 모아서 만들어낸 예리한 수도가 시견귀의 검을 가르고, 놈의 투구를 갈랐다.

“아….”

투구가 반으로 찢어지며 집사와 대화를 나눴던 검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입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부상을 입었어도 너희들 따위에게 먹힐 정도는 아니야.”

라온이 시견귀의 뒤를 따라온 노검사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자는….’

아까 정문으로 나왔던 로칸의 집사였다. 오랜 기간 가문을 따른 이까지 배신했으니, 로칸이나 루난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죽일까?’

정보를 빼낼 놈은 많으니, 루난이 더 슬퍼하기 전에 저 집사를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라온이 살의를 품고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루난이 차분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많은 고통을 받았고,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텐데도 그녀의 눈빛은 곧았다.

“내가 할게.”

루난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앞으로 나갔다.

“아, 아가씨. 오해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집사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루난의 여린 마음을 이용하려는 듯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가 아는 루난과 지금의 루난은 다르다.

촤아아아아악!

루난은 들고 있던 검으로 집사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버렸다.

“끄어억….”

집사는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목이 떨어진 본인의 몸을 보다가 숨이 끊어졌다.

“슬리온의 가주 대리로서 명한다.”

루난이 집사의 시체를 넘어서 배신자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맑고 선명한 시선으로 가문의 수치들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배반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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