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루난이 시선을 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는….”
달이 뜨지 않은 밤처럼 어두운 방이다.
아니, 이곳은 방이 아니다. 한눈에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고, 그 모든 곳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물결처럼 찰랑이는 암흑 속에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손끝이 떨렸다.
“으….”
루난이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았다. 정면에 도사리던 어둠과 달리 맑은 느낌을 주는 푸른 공간이 보였다.
얼음으로 만든 듯한 작은 집이 있었고, 그 안에는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듯한 인형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라온과 광풍대 모두를 형상화한 인형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검인 설화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둠을 마주하고 있을 때와 다르게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땅이었다.
“이리 와.”
루난이 팔을 뻗자, 설화가 천천히 가라앉아 손아귀에 잡혔다.
‘여긴 대체 뭐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둠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 아빠와 밥을 먹다가… 윽!”
루난이 설화를 쓰다듬다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누군가 머리를 찌부러뜨리는 듯한 두통과 함께 이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투구!’
맞아. 바포메트의 투구를 썼어.
시리아가 억지로 바포메트의 투구를 씌웠던 게 떠올랐다. 그럼 답은 하나다. 저 어두운 공간은 투구 속 바포메트의 영역이 분명했다.
쿠우웅!
루난이 떨리는 손으로 설화의 검병을 말아쥐자, 어둠 속에서 거친 울림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검은 대지가 갈라지고, 짙은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끼이이이이이!
산양의 발굽으로 땅에 섰고, 허리는 사람처럼 얇고 곧았으며, 나선형 뿔이 길게 솟구친 염소의 머리에서 아이의 울음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화아아아아!
바포메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위로 길게 솟구친 타원형 눈동자에서 검은 불꽃이 타오른다.
“으윽….”
루난이 왼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턱을 떨었다. 바포메트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데, 내상을 입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우우우웅!
바포메트가 어둠을 짓누르며 다가온다. 큼지막한 보폭. 얼마 걷지도 않아서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아아….”
루난이 입술을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바포메트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강한 몬스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우우우웅!
루난의 입술이 퍼렇게 질려갈 때 설화가 청아한 검명을 일으켰다. 공포를 지우고, 정신을 일으키는 진중한 울림이었다.
지이이이잉!
설화는 뒤에 있는 얼음집으로 들어가라는 듯 칼날을 떨었다.
“저 집으로 가라고?”
우우우웅!
그 말이 맞다는 듯 설화가 더 큰 울림을 터트렸다.
“알겠어.”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바포메트의 기세 때문에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얼음집으로 들어갔다.
‘따스해.’
얼음으로 만들어진 집이지만, 내부는 불을 피운 것처럼 따스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그 안락함을 즐길 시간은 없었다.
쿠우우우웅!
바포메트가 괴기스러운 기파를 드러내며 얼음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의 발굽이 푸른 땅을 밟자, 백지에 검은 물감이 떨어진 듯 내 공간 속으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숨어도 아무 의미 없다.”
바포메트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염소가 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반항할수록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놈의 육체가 어둠의 크기만큼 커지더니, 끝내 하늘에 닿을 것처럼 부풀었다.
“좋다. 벌레답게 짓밟아주마.”
바포메트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집채만한 발로 얼음집을 내리찍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루난이 설화를 꼭 말아쥔 채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쿠와아아아앙!
바포메트의 다리가 얼음집을 내리친 순간 머리 안쪽을 망치로 후려친 듯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악….”
뇌리가 뜯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지금이라도 나온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마.”
바포메트는 검붉은 채찍을 든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시, 싫어.”
루난이 고개를 저었다. 이 집에서 나가는 순간 바포메트에게 먹혀서 몸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
“멍청한 것.”
바포메트가 미간을 구기며 어깨 뒤로 넘겼던 채찍을 내리쳤다.
파아아아아앙!
얼음집 위로 채찍이 떨어지며, 대지가 뒤틀어지는 듯한 충격이 사위를 휩쓸었다.
“아아악!”
루난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얼음집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채찍에 맞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고통이 뇌를 잠식했다. 너무 아파서 살을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이제 알겠어….’
이 집은 내 정신이고, 이 안에 있는 인형들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야.
지금 나는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가치와 내 몸을 두고 바포메트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나와라.”
“으으….”
루난이 설화에 의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로 안 돼.’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시리아의 목을 베어야 하고, 엄마와 아빠를 구해야 하며, 라온에게 받기만 한 빚도 갚아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광풍대와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기에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죽어도 버티겠다는 마음으로 고통에 먹힌 몸을 일으켰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
바포메트가 비웃음을 흘리며 채찍을 연달아 내리친다.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채찍 줄기가 얼음집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콰과과과과광!
채찍이 얼음집을 후려칠 때마다 뼈와 살점이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끄으으윽!”
통증이 너무 심해서 손과 발에 경련이 일어나고, 머리가 멍해진다. 밖으로 나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후회해도 늦었다. 난 이제 막 흥이 돋았으니까.”
바포메트는 루난의 비명을 즐기는 듯 더 짙은 투기를 휘감은 채찍을 내리치며 마법까지 운용했다.
쿠구구구구!
채찍은 불에 데운 칼로 살을 베는 듯했고, 마법은 차가운 송곳으로 급소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고통이 중첩되며 영혼체인 지금의 육체가 갈라지고,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루난이 창백해진 얼굴로 얼음집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굳건했던 집에 크고 작은 균열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고통에 정신이 무너지고 있기에 얼음집에 균열이 생기는 게 분명했다.
‘버텨야 하는데….’
견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텨야 하고, 또 어떻게 저 괴물을 이겨야 할지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루난이 입매를 꾹 다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든 공간은 바포메트의 어둠에 물들었고, 이 얼음집마저 깨지기 직전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버틸…아!’
다시 한번 버티자고 마음먹었을 때 매섭게 갈린 바포메트의 채찍이 얼음집의 중앙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깊은 균열이 돋아난 얼음이 깨지면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야 보이는구나.”
바포메트가 천장의 구멍으로 안구를 들이밀며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놈이 얼음집 안으로 손가락을 뻗어왔다.
“다 끝났다.”
“아….”
루난이 점점 다가오는 바포메트의 손가락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까지 견뎌보고 싶었지만, 얼음집이 무너진 이상 버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신이 무너지며 집을 유지하던 얼음이 녹아내렸다.
쿠구구구구!
바포메트의 거대한 손가락이 얼음집의 천장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다가왔다.
“미안해.”
루난이 뒤를 돌았다.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할 거 없어.”
죽음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문 순간 인형 쪽에서 라온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버텼어. 루난.”
“어?”
눈을 뜨자, 안고 있던 라온의 인형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촤아아아악!
라온의 인형은 장난감 같은 검을 뽑아서 얼음집을 뚫고 들어오는 바포메트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성의 기둥보다도 두꺼운 바포메트의 손가락이 갈라지며 놈이 뒤로 물러섰다.
“싸우자.”
라온의 인형이 바닥에 내려서서 뒤를 돌았다. 그는 진짜 라온처럼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어.”
* * *
라온은 당황한 루난에게서 시선을 돌려 본인의 손을 보았다.
벙어리 장갑을 낀 것처럼 손가락이 두 개였고, 팔과 다리는 짤막했다. 말 그대로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인형이 되어 있었다.
‘루난의 심상에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이곳은 루난의 정신세계였기에 그녀가 이곳에 박아둔 모습으로 변한 것 같았다.
-우헤헤헤헤!
라스가 이쪽을 보며 동그란 손가락을 겨누었다.
-추잡한 네놈에게는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니라! 현실에서도 그 꼴이면 참 좋을 텐데!
녀석은 진심으로 즐거운 듯 심각한 상황을 무시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 꼴이나 보고 웃어라.’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스는 루난의 심상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콩알만 한 솜사탕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먼지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엉?
라스는 본인의 몸을 보며 눈을 꿈벅였다.
-이, 이게 무엇이냐! 본왕이 왜 이렇게 작아진 것이야!
녀석은 분노의 군주를 무시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지만, 벼룩만큼도 못 되었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이스크림 소녀야!
라스가 루난에게 날아가서 꼬리를 흔들었다.
-걱정 마라! 지금부터 본왕이 도와주겠느니라!
“저, 정말 라온 맞아?”
루난은 라스를 무시하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그래.”
라온이 차분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이 입술을 깨문 채 말아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 위로 이슬처럼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
“정말 잘 버텼어.”
라온이 루난의 신발을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아직 제대로 된 심상을 열지 못한 루난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본왕의 부하이니라! 대견하느니라!
라스가 잘했다고 말하며 루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얘는 뭐야?”
루난이 손가락을 들어 라스를 가리켰다. 그녀는 라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라온이 멍하니 라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딸려온 먼지인 거 같은데?”
-야아아아아! 제대로 설명해!
라스가 손을 버둥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 먼지가 아니야.”
라온은 비명을 지르는 라스를 밀어내고 루난을 보았다. 키 차이가 너무 나서 올려보는데도 한참이었다.
“저 바포메트를 처치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응. 그럼 함께….”
“아니, 네가 잡아야 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내, 내가?”
“이곳은 네 정신세계야. 네가 주인이고, 나는 손님이지. 저 괴물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
루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바포메트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공포에 짓눌린 표정. 내가 오기 전까지 심하게 당한 듯했다.
“저, 저걸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어.….”
“괜찮아.”
라온이 땅을 박차고 올라가서 루난의 어깨 위에 섰다. 그녀에게 만화공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말했듯이 이곳은 네 세계야. 오러와 신체, 무학의 경지보다 정신력이 중요한 곳이지.”
“응….”
“시리아의 세뇌를 스스로 극복한 너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거짓이 아니다. 저 바포메트는 분명 강한 개체지만, 루난의 정신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등을 밀어주고, 조금만 도와준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정말?”
-그렇느니라! 저거 크기만 하지 속은 비어 있느니라! 민트 없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라고!
“저거 크기만 하지 속은 비어 있어. 민트 없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야.”
라온은 라스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루난을 격려했다.
“후.”
루난의 입매가 올라갔다.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설화를 꼭 말아쥐었다.
“알겠어. 믿을게.”
“그럼 나가자.”
“응.”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망가진 얼음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야아아아아아!
라스가 라온에게 다가가 빽 소리를 질렀다.
-본왕이 한 말이잖느냐! 저작권 생각하라고!
‘누가 했는지 뭐가 중요해. 루난이 용기를 얻은 게 중요하지.’
-끄으으으윽….
녀석은 분했지만, 할 말이 없는지 입술만 깨물었다.
“감히!”
바포메트가 손을 재생시킨 후 몸집을 더 크게 부풀렸다. 이 세계 자체가 바포메트에게 먹힌 것 같았다.
“으….”
루난은 어둠을 지배하는 바포메트의 기세에 짓눌린 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본래 별거 없는 것들이 저리 몸집만 부풀리는 법이니라. 쿠키 없는 쿠앤크라고 생각하거라!
“루난. 별거 없는 놈들이 저렇게 몸집만 부풀리는 거야. 쿠키 없는 쿠앤크라고.”
-따라 하지 말라고!
라스가 죽일 듯이 소리를 지르며 멱살을 잡았다.
“알겠어.”
루난은 그 말에 공포를 극복한 듯 맹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짓밟아주마!”
바포메트가 거대한 발을 들어서 루난을 내리찍어왔다.
“루난!”
“응.”
루난이 검게 물든 대지를 박찼다. 경쾌하면서도 현묘한 보법이 끈적한 어둠을 밀어내고, 그녀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쿠와아아아앙!
바포메트의 거대한 발은 텅 빈 땅만을 허무하게 깨부쉈다.
터어엉!
루난은 갈라지는 듯한 땅을 밟고 올라가 바포메트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네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한 무인을 떠올려. 아니면 네가 강해진 미래를 생각해도 좋아.”
라온은 직접 깨달았던 심상에 관한 조언을 해주며 루난의 정신을 다독였다.
“그건 정해져 있어.”
루난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땅을 접어서 달리는 듯 순식간에 바포메트에게 다가가 매서운 검격을 내리쳤다.
촤아아아아아악!
설화의 칼날에서 피어난 서리의 기운이 끝도 없이 솟구쳐 바포메트의 발목을 갈랐다.
“크아아아아아!”
바포메트의 발목을 찢어지며, 안에서 피가 아닌 어둠이 흘러내렸다.
‘지금 움직임은….’
보법은 태화보, 검술은 만화공 적섬을 보는 듯 했다.
‘나인가?’
지금 루난은 강한 무인의 이미지로 나를 그리는 듯했다.
‘대체 왜….’
나보다 강한 무인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왜 나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루난의 집중력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 응원만 해주었다.
“잘하고 있어!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강하게!”
“응.”
루난은 평소대로 돌아간 듯한 맹한 눈으로 바포메트의 채찍을 피하고, 놈의 정강이를 베어버렸다.
쿠구구구구웅!
바포메트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지금이야.”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바포메트의 심장을 향해 서리의 검격을 뻗어냈다. 첩탑처럼 솟구친 냉기의 칼날이 반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꺼져라!”
바포메트가 투기를 폭발시키자, 강대한 파동이 번지며 루난이 밀려났다.
우우우우웅!
바포메트의 크기가 빠르게 줄어든다. 놈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얼굴 전체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죽여버리겠다!”
바포메트가 이를 갈며 채찍을 내리쳐왔다. 채찍의 위력은 줄었지만, 그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고, 사나운 무학의 묘리가 스며들어 있었다.
“쾌와 변 그리고 환의 묘리가 들어 있어. 채찍의 끝을 잘 본다면 피할 수 있을 거야.”
“알겠어.”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투기에 젖은 채찍 속으로 파고 들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채찍의 궤도를 흘려내며 바포메트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은 당하지 않는다!”
바포메트는 루난의 검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듯 뒤로 물러섰다. 채찍과 마법을 연달아 쏟아내서 아예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쿠구구구구구!
라온은 마법과 투기가 요동치는 공간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대로라면 루난이 불리해.’
루난은 얼음집을 보호하느라, 정신력의 대부분을 소모했다. 시간이 끌린다면 그녀의 집중력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는 게 맞겠지.’
라온이 펼친 손으로 입을 감싸며 배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발악해서 나가봐야 소용없다! 네 짝은 이미 죽었으니까!”
라온은 밖에 있는 시리아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만났던 드래고니안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투구 속에 있는 몬스터와 외부에 있는 에덴의 귀신은 어느 정도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분명 통할 것이다.
“거짓말 마라!”
바포메트는 헛소리 말라는 듯 더 매섭게 채찍을 내리쳤다. 뱀처럼 굴곡진 투기가 바닥을 사정없이 찢어버렸다.
“으….”
루난이 최선을 다해서 보법을 밟고 있지만, 점점 더 틈이 사라지고 있었다.
“잘 생각해봐. 네 짝이 밖에 있었다면 타인인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겠어.”
라온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거짓 따위는 없어. 네 짝은 나한테 죽었다.”
“다, 닥쳐!”
바포메트의 움직임이 커지고, 마법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공세였지만, 반대로 보이지 않던 틈이 돋아났다.
터어어엉!
루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찼다. 두 손으로 말아쥔 설화의 칼날로 어둠을 가르고 들어가 바포메트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커어억….”
바포메트가 검을 뽑고 물러서려 했지만, 루난은 이빨로 놈의 팔을 물어뜯으면서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콰과과과과!
설화에서 피어난 냉기가 바포메트의 목 아래로 퍼지며 놈의 전신이 퍼렇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내, 내가 인간들 따위에게….”
바포메트는 본인의 몸이 냉기에 굳어지는 것을 보며 부릅뜬 눈을 떨었다.
‘제대로 먹혔군.’
바포메트의 정신력은 루난보다 여력이 있었지만, 시리아가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 이점을 이용하지 못했다.
심리전이 먹혀서 다행이었다.
촤아아악!
루난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바포메트의 목을 완전히 갈라버렸다. 놈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우우우웅!
이 세계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던 바포메트의 어둠도 알갱이가 되어 녹아내렸다.
“잘했어.”
라온이 루난의 어깨에서 내려와서 그녀의 발목을 두드려주었다.
“…….”
루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포메트가 죽으며 남은 기운이 그녀에게 내려앉으며 새로운 힘을 전해주고 있었다.
예전 내가 드래고니안 록타를 잡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가 떠올랐다.
“잘됐네.”
라온은 무아지경에 빠진 루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고통을 이겨낸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계획대로 되어서 다행이었다.
-기, 기특하느니라.
라스가 루난을 보며 코를 훌쩍였다.
-그 꼬맹이가 저렇게 잘 자라서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니, 본왕이 다 뿌듯… 응?
“음?”
라온이 양손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바포메트가 남긴 기운은 루난만이 아니라, 내게도 내려와 힘을 전해주고 있었다.
-네놈이 그걸 왜 처먹어!
‘루난이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게 나한테 온 거 같은데?’
루난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기운이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심상의 세계가 더욱 크고 튼튼해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해야 하는….”
-본왕은!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본왕도 좋은 일을 했잖느냐! 네놈이 아이스크림 소녀를 위로한 말은 전부 본왕의 것인데, 왜 네놈만 처먹는 건데!
‘넌 사람이 아니잖아.’
-그거 종족차별이니라!
‘이제야 제대로 말하네. 맞아. 인종차별이 아니라, 종족….’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