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화
쯧.
라온이 뒤로 물러서는 악양귀의 목을 살피며 짧게 혀를 찼다.
‘얕았어.’
루난을 보호하느라 완벽하게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악양귀의 목이 갈라지며 핏물이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깊은 상처가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악양귀의 투구 속에서 환희에 차오른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놈은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환영한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악양귀. 아니.”
라온은 악양귀의 투구 속에서 번들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시리아 슬리온이라고 불러야 하나?”
“후후후.”
악양귀가 염소의 투구를 벗었다. 곱상한 외모지만, 어딘가 어긋난 듯한 시리아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떻게 알았어?”
“이 지랄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바포메트의 투구를 강제로 쓰게 된 루난이 검은 기류에 휘감겨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기절한 듯한 로칸과 클라라의 기척이 느껴진다.
슬리온 가문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 놈은 내부인인 시리아 슬리온 뿐이었다.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아.’
페드릭을 구할 때 처음 만났던 악양귀의 기질이 이상하게 익숙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소녀!
라스가 루난에게 날아가 입술을 떨었다.
-저런 구제 못 할 쓰레기 같은 놈이!
녀석은 몸만 있었다면 당장 시리아의 목을 뽑을 듯한 지독한 살의를 뿜어냈다.
라온은 사지를 떠는 루난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투혼식….’
내가 에덴에 납치되었을 때 용의 투구를 써서 드래고니안과 싸웠을 때처럼 지금 루난은 정신세계에서 저 투구의 주인인 바포메트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와줘야 해.’
어떻게 도와야 할지 방법은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시리아 슬리온의 목을 베고, 루난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입술을 깨물며 제천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내가 널 살려줬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입 다물어.”
“바로 저 모습을 위해서였어.”
시리아가 손가락을 들어 경련하는 루난을 가리켰다.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루난이 더 빠르게 마스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내가 널 도와준 적도 꽤 많아.”
놈은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다만 내 동생이 껍질을 깨는 날이 왔으니, 너는 이제 필요 없다.”
시리아가 발을 굴렀다. 가시가 솟구쳐 있는 놈의 어깨 위로 검붉은 투기가 타오른다.
묵직하면서도, 사나운 기파에 피부가 뜯겨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스르르릉!
라온이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았다.
강하다.
처음부터 힘을 숨긴 건지, 그사이에 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시리아의 기파는 성검련주의 제자인 클라우드 이상이었다.
하지만 놈이 두렵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고오오오오오!
영혼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의 감정이 폭죽처럼 튀어 올라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내 거죽을 뒤집어쓰는 느낌이었다.
분노. 라스의 분노가 내 감정과 이어지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악양귀가! 거기다 얘 루난이잖아!”
마르타는 시리아와 루난을 번갈아 보고서 눈동자를 떨었다.
“저 안쪽에 루난의 부모님이 있어. 넌 두 사람을 구해줘.”
로칸과 클라라가 기절해 있는 좌측 방을 가리키며 두 사람을 구해오라 지시했다.
“저, 저는요!”
땅 위에 있는 도리안이 본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곧 슬리온 가문의 무인들이 들이닥칠 거야.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아.”
“아, 알겠습니다.”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기다란 피리를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가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저건….”
“네가 없을 때 만들어둔 거야. 곧 광풍대 전체가 이쪽으로 올 거야.”
마르타는 믿으라고 말하며 무너진 벽으로 뛰어들었다.
“서로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네.”
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자, 뭉개진 땅속에서 성인 남성만 한 대검이 솟구쳤다.
놈이 대검을 움켜쥐자, 칼날 위에서 시꺼먼 투기의 불꽃이 타올랐다. 확실하다. 지금의 시리아는 클라우드보다 윗급이다.
“그럼 빠르게 끝내도록 하지.”
라온은 시리아가 다가오려는 순간 제천검과 진혼검을 갈라진 대지에 박아넣었다.
미완성의 검계현신.
“신마조화결.”
분노가 차오른 음성이 세계의 흐름을 뒤틀었다.
한층 더 성장한 심상의 세계가 개방되며 하늘과 땅이 요동친다.
붉은 태양과 푸른 달이 떠오르고, 그 신비로운 빛 아래에 선 라온의 두 손에 불꽃과 서리로 타오르는 신검과 마검이 현현했다.
“…검계현신?”
시리아는 못 볼 것을 본 듯 눈동자를 떨었다.
“그래. 그래서 성검련주의 제자를 꺾었던 건가?”
그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라온은 시리아가 입을 떼는 순간 땅을 박찼다. 맹호처럼 뛰어들어 놈의 머리를 향해 신검을 내리찍었다.
“성격이 급하구나!”
시리아가 입매를 끌어 올리자, 대검에서 타오르던 투기의 불꽃이 응집되며 묵빛의 광구를 일으켰다. 투기로 만들어낸 강환이었다.
쿠와아아아아앙!
대검에 깃든 강환과 신검의 불꽃이 격돌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폭발했다. 굳건하게 다진 듯한 땅이 쪼개지고, 벽면이 바스러졌다.
“죽여주마.”
라온은 루난에게 충격파가 번지지 않도록 막으며 좌수의 마검으로 시리아의 목을 쳤다.
우우우웅!
시리아는 대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기괴한 술식을 그렸다.
놈의 좌측 어깨 위로 검은색 줄기 같은 것들이 피어나 마검의 칼날을 막아섰다.
“모르나? 바포메트는 마법과 무학 모두 사용할 수 있….”
“어쩌라고.”
라온이 숨을 멈췄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전신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신검과 마검에 담으며 시리아를 찍어눌렀다.
쿠구구구구구!
지옥 불처럼 타오르는 신검이 시리아의 대검을 밀어내고, 삭풍처럼 거친 냉기가 검은색 줄기를 끊어버렸다.
“검계현신이라, 확실히 의외긴 하지만….”
시리아가 음습한 웃음을 흘리며 미꾸라지처럼 몸을 휘돌렸다.
놈은 신검과 마검의 기파를 흘려낸 후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흑진주처럼 매끄럽게 솟구친 강환이 신검과 마검을 동시에 밀어냈다.
“아직은 미숙해.”
라온은 시리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밀려난 만큼 앞으로 나아가며 신검과 마검을 쥐고 있는 손목을 비틀었다.
치이이이이잉!
셰릴에게 배운 쌍검술의 묘리가 만검의 투로로 이어지며 무지막지한 압력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공간을 지배하던 묵빛의 강환이 신검과 마검에 틀어막힌 채 터질듯한 떨림을 일으켰다.
힘과 힘. 오러와 투기의 격돌에 지축이 뒤틀리며 벽과 천장이 말라붙은 과자처럼 무너져 내렸다.
“빌어먹을! 죽는 줄 알았네!
라온이 이를 악물고 더 나아가려 할 때 마르타가 로칸과 클라라를 양쪽 어깨에 들쳐메고 나왔다.
이마와 어깨에서 핏물이 끝없이 흘러내린다. 그녀 역시 지독한 싸움을 치르고 온 것 같았다.
“루난까지 데리고 갈게! 무조건 이겨!”
마르타는 아직 경련하는 루난을 목덜미를 잡고, 무너진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어딜 가는 것이냐! 루난은 내 것이야!”
시리아는 라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잊은 듯 왼팔을 뻗어서 마르타를 향해 검은빛의 섬광을 뿜어냈다. 고위 마법 어둠의 손길이었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신검을 상단으로 그으며 염주벽을 일으켰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불의 기둥이 어둠의 손길을 막아냈다.
쿠와아아앙!
짙은 불길과 어둠의 마나가 격돌하며 보랏빛 스파크가 허공을 뒤덮었다.
촤아아아악!
라온은 시리아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놓치지 않고, 좌수의 마검으로 놈의 허벅지를 베었다.
“크아아아아!”
시리아는 살점이 뜯겨나가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에도 마르타의 등을 향해 투기를 겨누었다.
“내 것을 건드리지 마라!”
“역겨운 새끼.”
라온이 시리아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루난은 네 것이 아니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시리아가 루난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건 집착을 넘어선 광증이다. 구역질이 뱉는 대신 검에 분노를 담았다.
쿠와아아아앙!
신검과 마검에 응집되어 있던 화염과 서리가 폭발하며 시리아의 투기를 찢어버렸다.
놈은 대검과 어둠의 장벽으로 간신히 방어만 하고 있음에도 루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루나아아아안!”
라온은 시리아의 장벽에 막힌 마검을 손에서 놓았다. 왼손으로 주먹을 말아쥐고, 루난의 이름을 외치는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뿌드드드득!
뼈와 이빨이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시리아가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커흐으윽!”
시리아의 입에서 붉게 물든 이빨들이 뽑혀 나갔다. 하지만 놈은 지독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루난의 이름을 외쳤다.
“루난!”
라온이 시리아의 시선을 가리며 신검을 내리찍었다.
“크으!”
시리아는 벌레처럼 몸을 굴리며 검을 피한 뒤 벽을 잡고 일어섰다.
“지그하르트의 개 주제에 방해하지 마라!”
놈이 대검을 양손으로 잡고, 기괴한 영창을 읊었다.
고오오오오오!
천지에서 검은 마나의 알갱이가 모이더니, 시리아의 육체로 스며들었다.
놈의 기파가 해일처럼 치솟고, 대검에서 타오른 강환의 크기가 배 이상 부풀었다.
쿠와아아앙!
시리아가 대검을 뒤로 젖힌 채 쇄도해온다. 바닥이 뭉개지고, 마나의 흐름이 뒤틀린다.
놈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기파만 강해진 게 아니다. 뒤에서부터 내질러오는 대검에서 극한으로 갈고 닦은 중검과 강검의 묘리가 느껴졌다.
저런 무식한 돌진은 피한 후 반격하는 게 정석이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바포메트에게 먹혔든 아니든, 동생에게 집착하는 변태 새끼를 힘으로 짓누르고 싶었다.
쿠우우웅!
라온이 왼발 진각을 밟았다. 근육과 오러의 박동을 한 호흡에 조화시키며 신검과 마검을 동시에 내리쳤다.
쿠와아아아아아앙!
투기로 응집된 강환과 열기와 냉기가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강대한 마나의 폭풍을 일으켰다.
바닥과 벽 천장이 지워지고 뻥 뚫린 듯한 하늘이 열렸다.
쿠구구구구구!
시리아의 힘과 투기는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귀신답게 괴랄했지만, 라온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검계현신을 사용하고, 전력을 다해 검격을 펼치며 많은 오러를 소모했지만, 역으로 점점 더 강한 힘이 차오른다.
분노.
라스에게 받았던 분노가 내 영혼을 파고들며 이성을 녹이는 힘을 전해주었다.
평소라면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분노의 움직임을 막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불의 고리를 멈추고, 분노를 받아들였다.
고오오오오!
혈관 속에서 피가 아니라, 분노가 질주하는 기분이다. 휘몰아치는 분노의 감정이 손끝에서부터 뇌리까지 잠식했다.
-이….
라스가 뭐라고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죽여주마!”
라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듯한 만능감 속에서 눈앞의 쓰레기를 죽이겠다는 의념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분노의 감정을 받은 신검의 불꽃과 마검의 서리가 하늘 끝에 닿을 것처럼 타올랐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통제를 벗어난 분노를 드러내며 시리아를 짓눌렀다.
“이, 이게 어떻게….”
시리아는 전력을 다한 강환이 힘에서 밀릴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촤아아아악!
라온은 살의를 그대로 드러내며 밀려 나간 시리아의 복부를 베었다.
푸카아악!
강철보다 단단한 갑주가 뜯겨나가고, 거칠게 베여나간 상처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크으으….”
시리아가 대검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놈의 떨리는 눈동자에 당황과 의문이 비쳤다.
“너, 너는 대체….”
“저 아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뎠는지 알고 있나?”
라온이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시리아에게 다가갔다.
“네놈에게 얻은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르고, 고뇌해왔는지 알고 있냐고.”
옆에서 루난을 지켜 봐왔기에 알 수 있다. 그 녀석은 매일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부모에게도, 동료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전해주고 싶지 않아서 표정을 지우고 홀로 슬픔을 견뎌왔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시리아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루난이 방어적인 검술을 익히는 이유도 네놈 때문이다. 네놈에게서 부모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막는 것을 먼저 선택한 아이라고!”
바드득 이를 갈며 신검과 마검을 고쳐 잡았다.
“너는 이 세계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닥쳐! 루난의 이름을 네 주둥이로 말하지 마라!”
시리아가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깎여나간 검극 위로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강환이 차오른다. 남아 있던 투기와 마나를 모두 담아냈는지 오싹할 정도의 묵빛이 소용돌이쳤다.
“루난은 내 것이다!”
“그 녀석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라온이 폭발할 듯 일렁이는 묵빛의 강환으로 뛰어들며 신검과 마검을 교차시켰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제6형 신마조화결 연계기 청홍무적검.
대가의 붓이 올곧은 선을 긋듯 굳건하게 떨어져 내린 신검과 마검이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붉고, 푸른 선을 그었다.
쿠와아아아아아!
적색 불꽃과 푸른 서리가 본래 하나의 색인 것처럼 어우러지며 장대한 빛을 토해냈다.
뿌드드드득!
천지를 집어삼킬 듯했던 강환이 갈라지고, 시리아의 양팔이 뜯겨나갔다.
“끄아아아아악!”
시리아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뽑혀 나간 팔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시리아 슬리온!”
라온은 곧 죽을 듯한 시리아의 얼굴을 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푸카아아악!
검계가 풀리며 되돌아온 제천검과 진혼검을 시리아의 어깨에 박아넣고 말아쥔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뻐어어어억!
오러는 바닥을 드러냈지만, 분노는 점점 더 짙은 불꽃을 일으켰다. 끝없이 타오르는 분노를 연료 삼아 시리아의 얼굴을 연달아 내리쳤다.
콰앙! 콰아아앙!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시리아의 광대가 부러지고, 코뼈가 뭉개지며, 이빨이 뽑혀 나온다.
“끄으으….”
시리아는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 비명인지 아니면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죽어!”
라온의 입가에 피에 젖은 미소가 피어난다.
뜨겁게 달아오른 분노가 뇌를 녹이며 외친다. 놈을 죽이라고, 최대한의 고통을 주면서 죽이라 말한다.
그 의지에 답하듯 더 난잡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시리아의 전신을 두들겼다.
-…니라!
주먹으로 시리아의 쇄골을 부수려고 할 때 눈앞으로 라스가 튀어 올랐다.
-정신 좀 차리라고!
‘라스?’
-이 멍청한 놈아!
라스의 호통치는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좁아지던 시야가 열리고 정신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이 변태 새끼에게 시간을 쓸 때가 아니라고!
녀석은 루난을 구하지 않을 거냐며 머리를 후려쳤다.
“아….”
그제야 오러를 짓누르고 육체와 정신을 이끌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커헉….”
라온이 시꺼먼 피를 토했다. 분노에 몸을 맡겼던 후유증인지 힘이 빠지고 전신에 격한 통증이 일어났다.
-네놈은 아직 분노를 다루기에 이르니라!
‘허억….’
-아니, 지금은 혼낼 시간도 없어. 빨리 움직여라!
라스는 어서 위로 올라가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미안….’
라온이 입술을 깨물고 뒤를 돌았다. 무너진 공간을 기어서 올라갔다.
쿠우우우웅!
땅에 올라가자, 여러 장비를 이용하여 슬리온 가문의 무인들을 막아서는 도리안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몸을 일으키는 루난을 억지로 잡고 있는 마르타가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빨리 막아!”
마르타는 힘을 과하게 썼는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루난은 바포메트의 투구를 쓴 채 마르타를 거칠게 쳐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마나가 번져갔다.
“아….”
라온이 투구 속 보라빛 안광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늦은 건가?’
손에 힘이 빠져서 제천검과 진혼검을 떨어뜨렸다. 머리가 멍해지고, 분노에 몸을 맡겼던 게 후회의 물길이 되어 돌아왔다.
‘라스 혹시 방법은….’
-으음, 싸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저 상태에서는….
라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루난. 내가….”
악마처럼 변해가는 루난을 보며 이를 악물고 있을 때 발밑에서 두더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아직 안 늦었어.”
두더지가 머리를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멀린의 목소리였다.
“가봐. 내가 도와줄게.”
“네가 어떻게 여기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더 늦으면 진짜 못 돌려.”
그녀는 어서 가라며 손을 저었다.
투우웅!
라온은 입술을 깨물며 뭉개진 땅을 박찼다. 마르타를 쳐내고 홀로 일어선 루난이 쓰고 있는 바포메트의 투구에 손을 얹었다.
“꺼져라.”
루난의 음성이 지옥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갈라진다.
그녀가 검게 물든 손날을 세워서 나를 찌르려는 순간 멀린의 마나가 스며들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