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41화 (540/653)
  • 제541화

    루난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머리가 어지러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체감으로는 이틀 이상 흐른 것 같은데, 창문이 없는 지하라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수하들의 피로 시선을 돌린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오우거 로드의 목을 벨 수 있었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는 시리아가 광기 어린 시선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다음 임무는 구출이었어. 협곡 사이에 떨어진 버러지들을 구하는 일이었는데, 시간 낭비 같아서 내 손으로 죽이고, 모두 사망했다고 보고 했었지.”

    “…….”

    루난은 시리아의 뒤틀린 눈동자를 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처음에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시리아는 오러만 제압한 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본인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는데,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예측되질 않았다.

    “아! 거기서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혹시 인간 사냥이라고 들어봤어? 동물들을 풀어놓고 죽이는 것처럼 사람들을 일부러 놔주는 건데….”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시리아가 저렇게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말만 계속하는데, 이상하게도 놈에 대한 살의와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더 기괴한 건 놈이 해왔던 악행들을 내가 함께한 것 같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아마 이것 때문이겠지.’

    루난이 시선을 내려서 바닥을 보았다.

    본래 창고로 사용하여 거칠고 먼지가 가득했던 방에 피로 그린 듯한 시뻘건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마법진의 효과를 몰랐지만, 지금은 대강 느낌이 온다.

    내 감각이 사포로 비빈 것처럼 말랑해지고 있다. 감정과 영혼을 느슨하게 만드는 마법이 분명했다.

    ‘이 마법진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루난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끝까지 견딜 거니까.’

    시리아에 대한 살의와 혐오가 가라앉을 때마다 부모님과 라온 그리고 광풍대를 떠올렸다.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자 흐트러지던 마음이 다시 굳건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살인만 한 건 아니야. 가끔은 좋은 일도 했지. 수해가 일어난 지역을….”

    “엄마와 아빠는.”

    루난이 시리아를 보며 눈동자를 사납게 세웠다.

    “두 분은 어떻게 됐어!”

    “걱정하지 마. 죽지 않게 약을 조절했으니까.”

    시리아는 부모에게 약을 썼다는 섬뜩한 말을 다정한 어투로 읊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보여줘. 두 분이 무사하다는 걸 보여달라고!”

    루난은 로칸과 클라라가 죽었다면 본인도 여기서 죽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시리아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검사 두 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검사들의 손에는 로칸과 클라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기절한 상태 같았다.

    “아직은 두 분을 죽일 생각이 없단다.”

    “아, 아직…?”

    “슬리온이 개집도 아니고, 갑자기 가주가 사라진다면 지그하르트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가주 자리를 넘기고 조용히 은퇴하실 거란다.”

    그는 은퇴라고 말했지만, 그게 평범한 은퇴일 리가 없다. 죽일 거라는 뜻이었다.

    “너….”

    루난의 슬리온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너무 세게 주먹을 말아쥐었기에 손아귀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 아까운 것을.”

    시리아가 루난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핏물을 손가락으로 쓸어서 본인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

    루난이 다리를 떨며 뒤로 물러섰다. 소름이 끼쳐야 하건만, 진법 때문인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그녀가 진법을 세차게 내리쳤지만, 오히려 붉은빛만 더 진해졌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지?”

    시리아는 손가락에 묻은 피를 모두 빨아먹은 후 광기가 흘러내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간단해. 지그하르트의 심장을 찌를 거야.”

    “뭐?”

    “곧 대륙은 불바다가 될 거야. 슬리온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조용히 지그하르트의 뒤에 서 있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놈들의 심장에 칼을 찌를 거다.”

    “그게 될 거 같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시리아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기류가 연기처럼 번지며 긴 뿔을 세운 염소의 투구가 나타났다.

    “그, 그 투구는….”

    루난이 염소의 투구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모를 수가 없는 투구였다.

    “잘 보고 있으렴.”

    시리아가 염소의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자, 투구 속에서 쇳물 같은 것이 흘러내리며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검은빛의 갑주를 이루었다.

    하체는 산양이었고, 상체는 기사의 갑주였으며, 염소의 투구 속에서는 오싹하기만큼 차가운 보랏빛 안광이 번쩍였다.

    “바, 바포메트. 그럼 네가 악양귀….”

    루난이 벽에 등을 기대며 흔들리는 팔을 붙잡았다.

    ‘그래서 바포메트의 이야기를 꺼낸 거였어.’

    시리아가 식당에서 갑자기 바포메트의 이야기를 한 것도, 혈육인 나한테 광적인 집착을 해온 것도 그가 바포메트의 투구에 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악양귀란다.”

    시리아는 본인이 에덴의 악양귀임을 인정하며 열기가 차오른 숨을 내뱉었다.

    “오, 오빠를! 우리 오빠를 돌려줘!”

    라온은 저 투구 속에 있는 몬스터의 영혼이 인간의 혼을 잡아먹고 육체를 차지한다고 말했었다.

    어릴 적 누구보다 친절하고 다정했던 오빠가 사라진 건 저 투구 안에 있는 바포메트가 그의 혼을 집어삼켰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야.”

    시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역으로 바포메트를 잡아먹었단다.”

    “…뭐?”

    “환원. 난 ‘그분’의 이상대로 이 평화로운 대륙을 몬스터가 지배하던 낙원의 시대로 되돌리고 싶을 뿐이야.”

    그는 본인이 바포메트를 집어삼켰다고 말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아….”

    루난이 마른침을 삼켰다. 미쳤다. 저자는 정말 미쳤다. 무슨 짓을 해서도 막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작이 바로 대륙 전쟁이지.”

    시리아가 왼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불꽃과 함께 새로운 투구가 나타났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바포메트의 투구와 비슷했지만, 광대가 작고, 뿔은 더 길게 솟구쳐 있었다.

    “그 중심에 너와 내가 있을 거란다.”

    그는 투구로 루난의 얼굴을 가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아.”

    *     *      *

    라온은 마르타와 도리안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력을 다해 보법을 밟았다.

    ‘왜 이렇게 먼 거야….’

    슬리온 가문의 별채는 지그하르트 영지 외곽에 세워져 있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답답한 상황이 되니,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느리지 않느냐! 더 빨리 움직이거라!

    라스는 굼벵이처럼 느리다고 말하며 등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라온이 입술을 씹었다. 라스의 말대로 내 다리가 느리게 느껴졌다.

    검술만이 아니라, 보법 수련에도 집중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내가 과민 반응을 했고, 루난은 그저 늦잠을 잤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뇌리에 차오르는 건 좋지 않은 생각뿐이었다.

    ‘그 녀석이 아이스크림 약속을 어길 리가 없으니까.’

    버렌이나, 마르타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둘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도, 딱히 싫어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루난은 아이스크림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매번 한 시간씩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기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확실했다.

    -집이 보이느니라! 저거 맞지?

    라스가 우아한 곡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푸른 지붕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맞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더 거칠게 땅을 박찼다. 오러 소모가 어떻게 되었든 속도에만 집중하여 슬리온 가문의 정문으로 달렸다.

    정문 앞에는 두 명의 검사가 서 있었는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 인상이었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슬리온 가문의 사유지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온이 문 앞에 서자, 검사들이 길을 막아서며 방문 의도를 물었다. 두 사람은 검병에 손을 올린 채 경계하는 눈빛을 드러냈다.

    “광풍대 부대주.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2조장 루난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소집에 응하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라온 님을 뵙습니다.”

    검사들은 실례했다는 듯 검병에서 손을 내리고 목례를 취했다.

    “루난 님이 소집에 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까?”

    “예. 두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연락도 없어서 찾아왔습니다.”

    실제 시간과 달리 두 시간이 지났다고 거짓말을 뱉었다.

    “음, 저희는 듣지 못한 일이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좌측에 있던 검사가 정문을 열고 중앙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

    라온은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운용하여 저택 내부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이는데….’

    기감을 세밀하게 뻗어냈지만, 전투가 일어났다던가 누군가 죽어가는 듯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부에 있는 사용인이나 검사들의 움직임도 잔잔했다.

    다만 그 어디에서도 루난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 간 거지?’

    루난의 위치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할 때 저택의 문이 열리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노인이 나왔다.

    ‘저 노인은….’

    본 기억이 있다. 선택식 때 로칸 슬리온의 뒤에 서 있던 집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온 님.”

    로칸의 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난 아가씨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치료를 받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는 어제 로칸과 함께 수련을 하다가 무리했다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라온 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지금 막 잠드셔서 깨울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집사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자는 모습을 한번 봐도 될까요?”

    “허허, 루난 님은 이제 아이가 아니라, 여성이십니다. 아무리 부대주님이라고 하셔도 그건 들어드릴 수가 없군요. 이해해주십시오.”

    그는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저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을 바라보았다.

    “루난은 방에서 연무장이 내려다보인다고 했는데, 그럼 저기 좌측에 있는 방에 있겠군요.”

    “아닙니다. 아가씨의 방은 우측에 있습니다. 착각하신 듯하군요.”

    집사는 연무장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루난은 방에서 정원이 내려다보인다고 했었다. 혹시나 집사가 바꿔치기 되었나 해서 떠봤는데, 그는 루난의 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만 루난이 자고 있다는 우측 방에서 그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루난의 기척을 찾지 못할 리가 없지.’

    10년 가까이 봐왔기에 확신할 수 있다. 루난은 지금 저 저택에 없다.

    “야! 대체 무슨….”

    “도, 도련님….”

    뒤늦게 도착한 마르타와 도리안이 죽을 듯이 얼굴을 구긴 채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별일 아니야. 돌아가자.”

    “응?”

    “그, 그게 무슨….”

    라온은 마르타와 도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

    실제 생각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채 집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난이 무사하다니 다행입니다. 깨어나면 연무장으로 와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가씨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슬리온 가문의 입구를 떠났다.

    “대체 무슨 일인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2조장님 얼굴은 보신 거예요?”

    마르타와 도리안은 왜 여기까지 와서 루난의 얼굴도 보지 않고 가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다만 루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해.”

    라온은 기막을 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후 두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 그냥 쳐들어가면 되잖아!”

    마르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다 때려 부수자고!”

    “시끄러워지면 루난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어.”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았다.

    “너희는 저 저택에서 큰 소리가 나면 바로 달려와 줘.”

    “크, 큰 소리요? 대체 뭘 하시려고….”

    “루난이 억류되어 있으면 구해야 하니까.”

    두 사람에게 간단한 계획을 말해준 후 기척을 감췄다.

    가볍게 담벼락을 넘어서 저택 앞의 나무에 몸을 숨겼다.

    ‘라스.’

    라온이 턱을 잡은 채 멍하니 허공을 보는 라스를 불렀다.

    ‘혹시 느껴지는 거 없어?’

    -일단 저 집안에는 없느니라.

    녀석은 루난을 찾는데 집중하는 듯 내려간 눈썹을 떨었다.

    ‘알겠어.’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정문으로 들어간 집사의 기척을 뒤쫓았다.

    그는 저택으로 들어가서 마스터급 검사 하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집사의 말을 들은 검사는 저택 뒤편으로 나가서 소연무장의 중심에 섰다. 잠시 그곳을 배회하던 그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쪽에 뭐가 있는 건가?’

    -찾았느니라!

    라온이 연무장의 아래로 오러의 줄기를 퍼뜨릴 때 라스가 폴짝 뛰었다.

    -추잡한 마나들 때문에 어지러웠는데, 저 아래에 아이스크림 소녀가 있느니라! 상태가 좋지 않아!

    녀석은 손을 들어서 연무장의 외곽에 있는 작은 창고를 가리켰다.

    ‘좋지 않다고? 다친 거야?’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흐릿해진 상태이니라!

    라온이 창고로 달려가려 할 때 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내려가는 계단에 이상한 것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느니라! 최대한 피하면서 가야 늦지 않을 것이야!

    ‘음….’

    라스의 말을 듣고, 기감을 펼쳐내니 기이한 마나들이 응집되어있는 게 느껴졌다. 시간을 끌기 위한 함정들이 분명했다.

    ‘함정이라….’

    라온은 조금 전 검사가 서 있던 땅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딴 거랑 놀 시간이 없어.’

    *     *      *

    “으….”

    루난이 악양귀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거부하지 말렴.”

    시리아가 두 번째 바포메트의 투구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싱긋 웃었다.

    “그 진법은 본인의 진심을 드러나게 해주지. 나한테 끌린다면 너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닥쳐!”

    루난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씹었다.

    ‘거짓말이야.’

    시리아는 숨 쉬듯이 거짓말을 뱉는 인간이다. 이 진법은 진심을 드러내게 하는 게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벽을 무너뜨리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버틸 수가 없었다. 점점 머리에 안개가 차오르고, 끊어진 고무줄처럼 마음이 느슨해졌다.

    “언제봐도 귀엽다니까.”

    시리아가 인상을 찌푸린 루난을 보며 본인의 뺨을 긁을 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칸과 클라라를 데리고 왔던 무인이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찾아왔습니다.”

    “뭐?”

    “루난 아가씨께서 소집에 오지 않아서 찾아왔다더군요.”

    검사는 라온이 정문까지 찾아왔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아!”

    루난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라온이….’

    나를 믿어 준 거야.

    라온의 이름을 듣자, 마음을 만지작거리는 듯했던 시리아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고, 머리에 차오르던 안개가 물에 씻은 듯 지워졌다. 찬물로 세수를 한 듯 정신이 들었다.

    “일단은 돌아갔다고 하니, 안심해도….”

    “안심이라….”

    시리아가 뒤를 돌아서 검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 시리아 님?”

    “라온 지그하르트를 모르는군. 그 미친놈은 분명 여기까지 찾아올 거야.”

    그의 나지막한 말이 끝난 순간 검사의 머리가 터지고, 분수 같은 피가 벽과 바닥을 적셨다.

    “아….”

    루난이 더욱더 빨갛게 물드는 마법진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갑자기 부하를 죽이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일단 대비를 좀 해둘까.”

    시리아가 뭔지 알 수 없는 구슬을 방의 모퉁이에 던진 후 루난에게 다가갔다.

    “나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거든. 네가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길 바랐어. 하지만 시간이 없구나.”

    그가 바포메트의 투구를 든 채로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미 늦었어. 라온이라면 분명 널 막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자, 잠깐!”

    “진법에 이틀 동안 노출되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시리아가 루난의 양손을 막은 채 그녀의 머리에 바포메트의 투구를 씌웠다.

    콰아아아아!

    투구의 안구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내려 루난을 휘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야.”

    “아, 아….”

    루난이 투구를 억지로 벗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시리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투구만 긁다가 멈췄다.

    “아, 하나 더. 이 오빠가 질투가 좀 많아. 앞으로는 다른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렴.”

    시리아는 투구 밖으로 벗어난 루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라온 놈이 이곳에 도달했을 때쯤에는 모두 다 끝난….”

    그가 루난을 바닥에 눕힌 채 뒤로 물러설 때 붉게 물든 천장이 뒤흔들리다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쿠와아아아앙!

    쏟아지는 먼지와 돌조각 사이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번뜩였다.

    촤아아악!

    붉은 눈의 주인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시리아의 목을 향해 서슬 퍼런 칼날을 그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