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루난은 독사처럼 끈적한 시리아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찾아온 거지?’
시리아는 라온에게 망신을 당한 이후로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한동안 집에도 오지 않아서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복귀한 순간에 찾아온 것을 보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너 뭘 했길래 손이 이렇게 차가운 거야!”
클라라는 얼어붙은 듯한 시리아의 하얀 손을 만져주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직 추운 날씨니까요.”
시리아는 선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서 벽에 기대놓았다.
“오러로 몸을 보호하면 되잖느냐.”
로칸이 왜 맨몸으로 추위를 버티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잖아요.”
“너는 이 슬리온의 후계자다. 네 몸을 더 소중히 여기도록.”
“알겠습니다!”
시리아가 경례하듯 이마 위에 손을 얹고서 루난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여튼.”
“변하질 않는다니까.”
클라라와 로칸은 그런 시리아가 귀엽기만 한 듯 따스한 미소를 피워냈다.
“…….”
루난은 두 사람과 달리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전신에 가느다란 긴장을 얹었다.
‘예전의 눈빛 같아.’
시리아의 눈빛은 라온에게 굴욕을 당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노골적인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식탁 옆에 설화가 있다는 것이다.
식사 후에 칼날을 닦아주려고 가져왔는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되어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시리아를 꺾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아빠와 엄마에게 이상한 짓을 하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막을 거야.’
루난이 오른손을 식탁 아래로 내리며 시리아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리고, 새로운 음식을 든 시녀들이 들어왔다.
시녀들은 식은 음식들을 치우고,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선물이 있지.”
시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루난이 설화의 검병에 손을 얹을 때 시리아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회색 상자가 튀어나왔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온 상자였다.
“새로운 맛이 나왔다고 하길래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시리아는 받아 가라면서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잠깐!”
로칸이 쫙 펼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 것이 먼저다! 어디서 새치기를!”
그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시리아보다 더 큰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내 들었다.
“루난! 아빠 것부터 먹으렴!”
로칸은 시리아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본인의 것부터 열라며 손을 흔들었다.
“부자 아니랄까 봐. 똑같다니까.”
클라라는 세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좋아 보였는지 손으로 턱을 괸 채 따스한 웃음을 그렸다.
“응….”
루난은 설화의 검병에서 손을 뗀 후 시리아와 로칸의 아이스크림 상자를 받았다.
“밥 먹고 먹을게.”
“그러거라. 대신 아빠가 사온 것부터 먹어줄 거지?”
로칸은 무조건 본인의 아이스크림부터 먹어달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리아를 살폈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다가 로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섭섭하네요. 전 아버지의 선물도 준비했는데.”
시리아가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 나오는 건 고풍스러운 하얀색 포도주였다.
“시첼레 블랑 40년 산이에요.”
“오오! 이 귀한걸?”
로칸은 포도주가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떨었다.
“우연히 경매에서 구했죠. 바로 드셔보세요.”
“안 돼.”
루난이 의자를 거칠게 밀어내며 일어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시리아가 저 와인에 무슨 짓을 했을 것만 같았다.
“아빠. 그거 먹지 마.”
“루, 루난? 왜 그러니?”
클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깝잖아.”
루난은 로칸이 든 포도주를 보며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럴 때는 라온의 입을 빌려오고 싶었다.
“확실히 아깝기는 하지. 이 와인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거기다 아들이 오랜만에 준 선물이기도 하고.”
로칸이 포도주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드세요. 다음에 또 사드릴 테니까.”
시리아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싫다. 이 녀석아. 너는 루난의 선물이나 사 오고, 내 선물은 안 사 오잖느냐. 이건 나중에 자랑용으로 남겨두련다.”
로칸은 실실 웃으며 뒤에 있는 집사에게 포도주를 맡기고, 다른 고급 와인을 가져오라 명했다.
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포도주와 잔을 가져와서 네 사람에게 따라주었다.
“바레시아 30년 산이다. 시첼레 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먹을 만할 거다.”
로칸은 처음으로 가족끼리 건배를 하자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죠.”
시리아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캬앙.
루난은 시리아의 눈빛과 손에 집중하면서 세 사람과 잔을 부딪쳤다.
시리아는 단숨에 잔을 비웠고, 로칸과 클라라도 웃으며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타악.
루난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았다.
“루난은 안 마실 거야?”
“응.”
클라라에게 고개를 저으며 조금 굳은 듯한 손가락을 풀었다.
“아버지, 어머니 혹시 그거 아십니까?”
웃음기 있는 술자리가 이어지며 와인병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시리아가 식탁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뭘 말이니?”
“남부에 바포메트라는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포메트!”
“음….”
로칸은 눈매를 찌푸렸고, 크라라는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괴물이….”
“네. 괴물이죠. 그것도 무지막지한 괴물.”
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와 루난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굉장히 강한 몬스터에요. 투기와 마나를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수장급 몬스터죠.”
그는 식탁 위에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바포메트에겐 특징이 하나 있어요.”
“특징?”
“네. 태어난 이후부터 본인의 짝을 찾으려고 하죠.”
시리아가 왼손 검지와 오른손 검지를 천천히 맞댔다.
“짝을 얻은 바포메트는 이전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강해진다고 하더군요. 남부에 나타났다는 바포메트도 지금 짝을 찾고 있을 거예요.”
“그게 다가 아니지.”
로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포메트는 성장하는 몬스터다.”
그는 피처럼 붉은 와인을 내려보며 미간을 구겼다.
“놈들은 천재라고 불리는 인간보다도 빠르게 강해지지. 짝을 만나기 전에 그리고 더 성장하기 전에 처치해야 해.”
“아버지는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내가 너만 할 때쯤 싸웠던 적이 있다.”
로칸은 끔찍한 경험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좀 불쌍하네.”
클라라가 손가락으로 술잔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짝을 찾기 위해서 움직이는데, 공격당하다니….”
“…어머니는 다정하시군요.”
시리아는 클라라의 말이 의외였던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런 말 마시오. 놈들은 본능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인간을 습격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로칸은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바포메트에게 특이한 점은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뭐지?”
“짝을 찾는데, 만약 그 짝이 혈육이라면 상상을 초월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혈육? 정말 괴상한 몬스터… 아.”
클라라가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 이게….”
그녀는 감전된 것처럼 전신을 떨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클라라!”
로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클라라에게 달려갔다.
“왜 그러는 것이오!”
“엄마!”
루난도 설화를 챙긴 채 식탁을 밟고 올라가 클라라가 쓰러진 자리로 뛰어내렸다.
“뭣들 하는 것이냐! 빨리 치료사를 불러와!”
로칸이 뒤에 있는 집사와 시녀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너희들 대체….”
“윽박지르지 마세요.”
시리아는 붉은 포도주로 입을 적시며 미소를 지었다.
“저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제 명령을 듣고 있을 뿐이니까.”
“시, 시리아?”
로칸은 삽시간에 돌변한 시리아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나저나 역시 아버지는 대단하시네요. 그 약은 무위와 상관없이 정신에 작용하는 건데, 지금까지 버티시다니, 조금 놀랐어요.”
“네 짓이냐?”
“그럼 누구 짓이겠습니까.”
“누구 없느냐!”
로칸의 외침에 식당의 문이 열리고, 가문의 검사들이 들어왔다.
“클라라를 치료사에게 데리고 가고, 어서 저놈을….”
하지만 들어온 검사들은 로칸이 아니라, 시리아의 뒤편에 서서 검에 손을 얹었다.
“너, 너희들이 왜….”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사용인들이 제 것이 되었는데, 검사들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놈들!”
“그래도 꽤 공을 들였답니다. 돈, 무학, 추잡한 욕망 그리고 약점까지 잡았으니까.”
시리아는 그의 뒤에 선 무인과 사용인들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너무 평화에 찌드셨습니다. 지그하르트가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늙고 살찐 개가 되었죠.”
“이놈!”
로칸이 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분노로 인해 그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지그하르트는 물론 강하죠. 하지만 그 강함의 8할은 글렌 지그하르트. 그 괴물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어중이떠중이일 뿐이에요.”
시리아는 키득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따스한 조명을 보며 섬뜩한 눈동자를 굽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바뀔 겁니다. 우리 슬리온 가문의 그 중심에서 지그하르트의 뒤를 치는 송곳이 되겠지요.”
“내가 그리 놔둘 줄 아느냐! 절대… 아!”
로칸이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그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팔과 다리를 떨다가 뒤로 넘어갔다.
“역시 흥분하니, 약이 잘 드는군요.”
시리아는 재밌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루, 루난. 도망….”
로칸은 마지막 말조차 제대로 뱉지 못하고 몸이 굳어졌다.
“아, 아빠, 엄마.”
루난은 오직 눈동자만 움직이는 로칸과 클라라를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제발 도망가라는 듯 눈을 떨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시리아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내가 술에 약을 탔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재미없잖아.”
시리아가 얼마 남지 않은 포도주병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떨어진 병이 깨지며 핏물처럼 붉은 술이 하얀 바닥을 적셨다.
“이 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내가 건드린 건….”
시리아의 손가락이 클라라와 로칸이 마셨던 잔을 향했다.
“저 잔이지.”
“엄마,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루난은 살기를 두른 채 설화를 들어 올렸다.
“루난. 너도 실수했단다.”
시리아가 방긋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날 막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하고 싶었다면 계속 말을 했어야지. 오빠가 이상하다고, 오빠가 미친 것 같다고 말을 해야 했어. 물론 의미 없었겠지만.”
“시리아….”
“아, 하긴 어릴 때는 내가 이상하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드렸었지? 그게 왜 안 통했을까? 두 분이 왜 네 말을 안 믿었을까?”
시리아가 그는 뒤에 선 무인과 사용인들을 가리키며 샛노란 웃음을 흘렸다.
“그때도 이들 중의 상당수가 내 뒤에 서서 나한테 유리한 보고를 했으니, 먹힐 리가 있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네가 망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가엽게 여겼단다.”
“너….”
루난이 이를 악물며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뽑아냈다. 설화의 칼날 위로 냉기를 휘감은 시퍼런 강기가 타올랐다.
“멋지구나! 내가 이날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시리아는 본인의 목을 향해 겨누어진 강기를 보며 말아 올린 입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 녀석을 살려서 보낸 보람이 있어.”
그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무인들과 사용인들이 쓰러진 로칸과 클라라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 다 죽일 거야!”
루난이 악을 지르며 무인들에게 설화를 겨누었다.
“반항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지. 다만….”
시리아가 로칸과 클라라를 가리키며 붉은 입술을 핥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대로 놔두면 호흡이 막혀서 돌아가실 텐데 괜찮겠어?”
그의 물음에 루난의 손끝이 떨렸다.
“…….”
설화의 칼날에서 피어난 강기가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캬앙!
결국 루난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현명한 선택이야.”
시리아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식당의 조명이 꺼졌다.
* * *
라온은 5연무장의 중심에 서서 제천검을 뽑았다. 새하얀 칼날로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하늘을 겨누며 호흡을 멈췄다.
이틀 전 글렌이 말해주었던 조언을 뇌리에 되새기며 검을 내리쳤다.
후우우웅!
매서운 검풍이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연무장의 바닥에 얇디얇은 선을 그렸다.
후우우웅!
라온은 선을 보지도 않은 채 다시 제천검을 들어 올려서 똑같은 자세로 검을 그어 내렸다.
두 번째 검풍이 쏟아졌지만, 연무장 바닥의 검흔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00번의 내려 베기를 행했음에도 바닥에 새겨진 흔적은 맨 처음의 하나 뿐이었다.
파아아아!
라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제천검을 상단으로 세운 후 내리쳤다.
100번의 검격에 깃들어 있던 정확함과 날카로움이 빠름과 무거움으로 변하며 연무장의 바닥에 철퇴로 내리친 듯한 궤적이 새겨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익혔던 무학의 묘리를 하나씩 담아가며 기본 검술을 펼쳐냈다.
검격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했기에 한 차례의 수련을 끝내자, 떠오른 태양이 하늘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광풍검에….’
-얌마!
라온이 광풍검으로 무학의 묘리를 단련하려고 할 때 라스가 눈앞으로 튀어 올랐다.
-약속 시간이지 않느냐! 빨리 안 가냐고!
라스는 모두와 회식 약속을 잡은 시간이라며 하늘을 가리켰다.
“음….”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스의 말대로 약속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조금 아쉬운데.’
-아쉽기는 개뿔! 그 영감탱이가 다녀간 이후에 계속 수련만 했잖느냐!
‘요즘 수련이 잘 되거든. 이럴 땐 시간이 아까워.’
확실하게 성장한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어지러웠던 무학들이 정리되어가는 기분이라 수련할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네놈처럼 무학에 미친 놈은 처음이니라!
라스는 질린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럼 조금 더?’
-닥치고 빨리 아이스크림 매장이나 가라고! 오늘을 위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계속 참고 있었느니라!
‘알았다. 알았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게 몸을 씻고, 상가로 향했다.
10시에 거의 맞춰서 도착했기 때문인지 광풍대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모이라고 한 놈이 왜 이제야 오는 건데!”
마르타가 늦었다고 말하며 눈매를 찡그렸다.
“검을 들고 오는 거 보니까 수련하다가 왔네.”
버렌이 제천검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진짜 징하다. 징해.”
그는 따라갈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한테는 대체 어떤 수련을 시키시려고….”
도리안은 벌써부터 수련이 무서운지 어깨를 떨었다.
“부대주님.”
마크 괴튼은 존경스럽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음?”
라온은 광풍대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쯤이면 졸린 목소리로 존잘 라온이라고 중얼거려야 할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루난은 어디에 있어?”
“아직 안 왔어.”
버렌이 손을 저었다.
“별일이지? 그 녀석이 아이스크림 약속에 다 늦고.”
마르타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라온이 시선을 들어 광장에 세워진 시계를 바라보았다.
틱.
10시가 되었음에도 루난은 나타나지 않았다.
-야!
‘알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광풍대를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슬리온 가문에 무슨 일이 터졌다고 알려. 도리안이랑 마르타는 날 따라오고!”
“뭐?”
“그게 무슨 소리….”
다른 이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서쪽으로 달렸다.
-아이스크림 소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니라!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아이스크림 약속은 어긴 적 없으니까.’
루난은 게을러 보이지만, 두 가지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는다.
수련과 아이스크림. 특히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약속을 하면 한 시간 이상 빨리 와서 먼저 기다리는 녀석이다.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해.’
라온은 확신을 가진 채 슬리온 가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