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다만 그전에….”
글렌이 붉은색 눈동자를 깊게 가라앉혔다.
“하던 것을 계속해보도록.”
“하던 것이라면 수련 말씀이십니까?”
라온이 달빛을 가늘게 담고 있는 제천검을 보며 물었다.
“카이바르를 잡았다고 했으니,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보거라.”
“가주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이모. 아니, 아리스 님이 힘든 일을 전부 맡아주셨고, 제가 마지막에 숨통을 끊었을 뿐입니다.”
“…….”
글렌은 입술을 꾹 내리누른 채 인상을 구겼다. 표정이 좋지 않다. 또 이모 소리를 꺼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말 싫어하시는군.’
앞으로 글렌 앞에서는 절대 이모 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가볍게 몸만 풀어보겠습니다.”
라온이 제천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검병을 움켜쥔 후 정신을 집중하여 호수에 비친 달빛을 베었다.
후우우웅!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할 법한 내려 베기였지만,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본 수련을 해온 라온의 검은 달랐다.
각이 진 듯 정제되어 있었고, 어디에도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자유로웠으며, 무엇이라도 벨 수 있는 예리함이 뻗어 나왔다.
수직 베기에서 이어지는 수평 베기와 사선 베기 그리고 찌르기까지. 라온은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는 기본 검술을 온 정신과 근육을 집중하려 그어 내렸다.
그는 광아검과 설풍검결의 초식도 실전처럼 그려낸 후 더운땀을 닦으며 뒤를 돌았다.
“지금까지도 기본 검술을 놓지 않았구나.”
글렌이 미간을 가늘게 찌푸린 채 팔짱을 풀었다.
“예. 시간만 있다면 계속해 왔습니다.”
“이유가 뭐지? 그 정도 기본기는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가다듬었을 텐데?”
“제가 목표로 하는 검이 가주님처럼 모든 검을 아우르는 만검이기 때문입니다. 기본 검술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기에 토대가 흔들리면 제 검 자체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라온은 기본 검술을 단련하며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꺼내놓았다.
“훌륭하다.”
글렌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이 은은하게 떨리는 듯 보였다.
“어떻게 그랜드 마스터를 꺾을 정도의 심상을 갈고 닦았나 했더니, 기본에 충실한 검술 덕분이었어.”
“가, 감사합니다.”
라온이 얼떨떨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놓고 칭찬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글렌은 함부로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훌륭하다고 말한다는 건 진심으로 잘했다는 뜻. 기본 검술에 충실했던 보람이 있었다.
“그 기본이 너를 검계에 닿게 한 것이다. 미완성이지만, 처음으로 검계를 쓴 기분은 어떠했느냐.”
“조금 더 성장한 저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쓰는 기분이었습니다.”
신마조화결을 펼쳐냈을 때 그랜드 마스터 이상에 오른 나의 검술과 오러를 당겨오는 느낌을 받았었다.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맞지도 않아.”
글렌이 주름이 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검계현신은 현재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네 상상의 강함을 현실에 끌어오는 것이다.”
“상상의 강함….”
“그렇기에 검계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삶과 검이 녹아 있지.”
“아….”
그래서 내가 두 검과 냉기를 쓰게 된 건가.
글렌의 조언 덕분에 내 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로 심상의 세계가 더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더.”
감사하다고 말하려 할 때 글렌의 말이 이어졌다.
“만검을 익히다 보면 본인에게 익숙한 검술에 집중하고, 부족한 검술을 등한시하게 되는 때가 온다. 고통스럽다고 해도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거라.”
그는 기본 검술에 대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번째 조언까지 해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글렌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내일 훈련에서는 숙달되지 못한 검술을 다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따악!
글렌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곱게 가라앉는 달빛처럼 은은한 휘광이 퍼지며 허공에서 고풍스러운 상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그 상자를 잡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받거라.”
“이건….”
“알현실에서 말하지 않았느냐. 카이바르에 관한 건은 나중에 주겠다고.”
라온이 글렌이 건넨 상자를 받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오신 거였군.’
이제 글렌이 왜 별관에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광룡을 잡은 보상으로 조언과 이 상자를 주려고 한 것이다.
“적류환이다. 화속성의 영초와 내단을 조화시켜서 만든 영약이니, 아까 주었던 청소단과는 잘 어울릴 것이다. 함께 먹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라온이 붉은빛을 띈 상자를 꼭 잡은 채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기….”
“뭐지?”
“사실 카이바르를 잡았을 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드래곤 로드가 나타나 협박했었던 것을 글렌에게 말해주었다.
“드래곤은 인간의 천적과도 같은 종족이다. 놈들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도시가 무너지고,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가지. 특히 카이바르처럼 인간을 증오하는 놈들은 재앙과도 같다.”
글렌은 이미 카이바르의 악행에 대해 알고 있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네가 한 일은 옳았고, 합당했다. 드래곤 로드가 한 말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다음에 그를 만난다면 바로 나를 부르도록.”
그는 드래곤은 자신들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아집 있는 자들이라며 눈매를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글렌이 저런 말을 해주니, 마음이 편해졌다. 에이션트 드래곤들이 우르르 달려든다고 해도 무섭지 않을 정도였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
라온이 입술을 달싹이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왜 저러시는 거지?’
가르침을 내렸고, 영약까지 주었는데, 글렌은 평소와 달리 바로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누구와 대화라도 하시는 건가?’
다른 사람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내나 보다 했는데, 갑자기 글렌이 손짓을 해왔다.
“고급 검술도 펼쳐보아라. 아무래도 줄 게 좀 부족한 듯하니 네 무학을 봐주마.”
“예? 아, 네!”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기회였기에 라온은 직접 만들었던 검식과 만화공의 검술 그리고 창궁검을 펼쳐냈다.
“만화공의 검술들은 분명 강하지만, 지금의 너와는 맞지 않는 결이 있다. 네 감각에 맞도록 조금 더 조절해라. 네가 직접 만든 검식은….”
글렌은 그 검술들을 모두 보고 냉정하면서도 난해한 조언을 해주었다.
바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항상 그런 식으로 알려주었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다만 검술 수련이 모두 끝났음에도 글렌은 떠나지 않고, 손가락을 비비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라온이 그런 글렌의 뒤편에 있는 별관을 보고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왜 가만히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말할 기회야.’
오늘 식당에서 실비아를 보고 다짐했던 결심을 꺼내놓기로 마음 먹으며 글렌에게 다가갔다.
“가주님.”
“날 할….”
라온이 글렌을 부르다가 멈추고 손을 들어 올렸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아니, 네가 먼저 말해라.”
글렌은 괜찮다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음, 조만간 어머니의 단전과 마나 회로가 회복될 겁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드래곤 하트를 이용하는 건가?”
글렌은 이미 그 방식을 알고 있다는 듯 강한 마나의 향이 풍기는 엔시아의 방을 돌아보았다.
“예. 아리스 님이 주신 드래곤 하트로 어머니의 단전을 만들어서 예전의 무위를 회복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라온이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께서 아리스 님을 이모라고 부르지 말라는 이유는 제가 아직 방계이기 때문이겠죠.”
“…….”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금패로도 직계가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받은 패와 비공식적으로 받은 금패를 모두 합친다면 7개다.
적지 않은 숫자지만, 직계들의 방해를 뚫고, 실비아의 지위를 회복시키기엔 한참 부족하다.
‘그렇기에 도박을 해야 해….’
라온은 해내겠다는 의지가 타오르는 눈을 들어 글렌의 허무함이 차오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인 금패와 내년에 부왕과 대련을 이기는 것으로 실비아 지그하르트를 직계에 복귀시켜주십시오.”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길고 큰 손으로 본인의 입을 가리며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시선이 매섭게 떨어져 내렸다.
“부왕은 강하다. 같은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네가 이겼다던 성검련주의 제자와는 수준과 경험이 달라.”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부왕의 패악적인 기운을 잊지 못한다. 그가 강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보겠다는 건가?”
“그날의 저는 지금의 저와 다를 테니까요.”
“발전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네 말대로다. 금패 일곱 개로도 실비아를 직계에 올리는 건 쉽지 않지. 하지만….”
글렌의 붉은 눈동자에 그와 똑닮은 라온의 눈이 비쳤다.
“22살의 나이에 부왕을 꺾는 업적을 세운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다.”
그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이름을 걸고, 네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인사는 필요 없다.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이니까.”
글렌은 모든 일을 끝내고 난 이후에 고맙다는 말을 하라며 손을 저었다.
“그럼 가주님이 하려던 말씀을….”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글렌이 하다가 멈춘 말을 꺼냈다.
“…….”
글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다.”
“예? 분명 할이라고 하셨는….”
“할 일이 없으면 수련이나 하라고 했다.”
“아….”
“이만 가보도록 하지.”
글렌은 갑자기 기분이 상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사라졌다.
라온은 글렌이 있었던 자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닥이 왜 이렇게 파여나갔지?’
* * *
글렌은 별관의 호수를 떠나 북망산의 중턱으로 향했다.
“어휴….”
호랑이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있던 리메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아버지 소리 들으러 가셔놓고 왜 그냥 오신 거예요!”
그는 글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로엔은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내리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크으….”
글렌이 두 사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 너무 기특하지 않느냐.”
“예? 그게 무슨….”
리메르가 글렌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기본 검술에 충실한 것도, 저 나이에 검계현신을 이룬 것도 대단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제 어미에게 바로 넘긴다는 게 너무 대견하지 않느냐. 영약을 넘어서 영물 자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드래곤 하트를 고민도 없이 실비아의 단전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다니! 어디서 저렇게 선하고, 착한 녀석이 나타난 것이야!”
글렌은 손주가 너무 기특해서 참을 수가 없다며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강대한 의념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북망산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손주 좀 안아주라고!”
리메르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라온 앞에서 좀 드러내라며 이마를 짚었다.
“허허허, 가주님.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로엔은 한밤중에 북망산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글렌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떻게 흥분을 가라앉히란 말이냐! 내 생전 저런 아이는 본 적이 없다. 내 손자라서가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칭송을 받을 아이야!”
글렌은 라온 앞에서 참고 있던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라온이 선한 놈인 건 내가 제일 잘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건 라온이 말해주었지 않느냐.”
“예…?”
리메르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년에 부왕을 꺾고, 스스로 할아버지라 부르러 온다고 말했잖느냐.”
“어, 언제요?”
“지금까지 모아둔 금패와 부왕을 잡은 업적으로 실비아를 직계로 되돌린다는 게 그 뜻이지. 실비아가 직계가 되면 라온도 자연스럽게 직계가 되어 날 할아버지라 부를 테니까! 저 아이는 그걸 기다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는 왜 이해를 못 하냐면서 호통을 쳤다.
“너는 라온의 큰 뜻을 보지 못하는군.”
“어우….”
리메르가 울렁거리는 복부를 부여잡았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이미 글렌의 눈과 귀에는 라온에 관한 콩깍지가 단단히 쓰여서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이럴 때 셰릴이 있어야 하는데.”
리메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냉정한 녀석이 있어야 제대로 말을 해줄 텐데 임무 때문에 없는 게 너무 아쉬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글렌은 내년이면 할아버지라 불릴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두 손을 비볐다.
“로엔.”
“예. 가주님.”
“라온 복음에 오늘 내용은 추가했겠지?”
“물론이지요.”
로엔이 허리에 대고 있던 책자를 펼치며 미소를 지었다.
“기본 검술에 관한 철학과 실비아 님을 위해 드래곤 하트를 사용한 것 그리고 스스로 부왕을 꺾고 실비아 님을 직계에 올리겠다는 발언을 모두 적어두었습니다.”
그는 라온의 말을 도로 읊으며 책자를 보여주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라온이 당당한 눈빛으로 선언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늘었군.”
“허허허, 이날을 위해서 틈틈이 연습해두었지요.”
로엔은 라온을 그리기 위해 매일 같이 그림 수업을 받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다 미쳤어….”
리메르가 마주 보고 웃는 글렌과 로엔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정신 차려라.”
글렌이 리메르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지금의 라온이 부왕을 꺾는 건 요원한 일이다. 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봐주도록.”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다만 가주님도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무얼 도와달라는 거지?”
“성검련주는 제 깜냥이 아니지만, 용현검주만큼은 놔둘 수 없습니다. 원수를 죽일 수 있게….”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 위로 살의가 깃든 바람이 피어났다.
“제 수련도 좀 도와주시죠.”
* * *
“음….”
로칸 슬리온이 입술을 가늘게 씹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막내딸이 무사히 돌아왔기에 그 어느 때보다 기뻐야 하건만, 그의 기분은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가라앉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라온은 우리 모두를 오웬 왕국으로 이동시키고 혼자서 그 숲에 남았어. 무슨 결계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집에 돌아온 이후로 4시간 동안 라온의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 녀석이 대단한 거야. 알지. 고마운 것도 당연히 맞고.’
라온 덕분에 루난이 살았고, 강해졌으며, 밝아지기까지 했으니, 당연하게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루난의 입에서 계속 라온의 이름만 나오니 아비로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라온은 그 이후에 바다에 가서….”
“커흠, 이제 그 아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딸 이야기 좀 해볼까?”
로칸은 루난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하라며 부드럽게 손을 저었다.
“아빠가 오웬에 찾아갔을 때도 바빠서 얼굴을 많이 못 봤잖아. 거기서 뭘 하다가 왔니?”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 봐요.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반대로 로칸의 부인이자, 루난의 어머니인 클라라는 말주변 없는 루난이 라온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말하는 게 귀여운 듯 계속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응. 그다음에….”
루난은 오늘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한 후 테이블 위에 금패와 영약을 올려놓았다.
“그렇게 되어서 라온 덕분에 우리 다 금패를 받았어.”
그녀는 본인의 업적이 아니라, 라온 덕분에 받았다며 금패를 쓰다듬었다.
“아니지! 그건 라온 자식 때문이 아니라, 네가 잘해서 받은….”
“뭐?”
로칸이 라온을 자식이라고 하자, 루난이 맹한 눈을 흘겼다.
“크흠, 조, 존잘 라온이….”
존잘이라고 하자 루난의 찡그려진 눈매가 풀렸다.
“그 녀석. 아니, 존잘 라온이 널 구해준 건 사실이지만, 너도 그 녀석을 구해준 것과 다를 바 없다!”
로칸은 동료는 서로 주고받는 거라며 무조건 고마워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네 아빠의 말이 맞아. 너도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단다.”
클라라가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휴, 모르겠다!”
로칸이 이마를 짚으며 술을 통째로 들이켤 때였다.
달칵!
식당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서늘한 빛의 웃음을 두른 시리아 슬리온이 들어왔다.
“어머? 시리아!”
“시리아? 네가 웬일로 이 시간에 왔느냐!”
클라라와 로칸은 갑작스럽게 귀환한 시리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반면 루난은 미소를 짓는 시리아를 보며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손이 경련하듯 흔들렸다.
“루난이 돌아왔다고 하길래 잠시 들렸습니다.”
시리아는 어깨에 눈이 내려앉은 코트를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식사 중이셨나 보군요.”
“밥은 먹었느냐?”
“아뇨. 아직입니다.”
“음식을 준비해주게!”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리렴.”
로칸은 주방에 음식을 데워오라 지시했고, 클라라는 시리아의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네. 배가 좀 많이 고픕니다.”
시리아가 손끝을 떠는 루난을 보며 혀로 입술을 훑었다.
“제가 오래 기다려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