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38화 (537/653)

제538화

라온이 축 늘어진 라스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얘는 내 애완정령이야.”

“애, 애완정령?”

버렌이 라스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 드래곤을 잡다가 우연히 만났어. 푸르딩딩한 색을 보면 알겠지만, 바다의 정령이지.”

-저, 정령? 그것도 애완? 이 미친 또라이 자식아! 마계의 왕이자, 분노의 군주인 본왕에게 냄새나는 정령이라니, 죽고 싶어서….

라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악을 질렀다.

“어? 춤춘다.”

-눈깔아! 눈깔 좀 똑똑히 뜨거라! 이건 춤이 아니라, 분노의 외침이니라!

“그런데 조금 빨개지네.”

“널 만난 게 좋아서 흥분했나 봐.”

라온은 라스의 반응과 반대로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보니까 귀엽다. 정령 맞네.”

버렌이 난동을 부리는 라스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만 스쳤다.

-끄아아아아악!

라스가 본인의 가슴을 북처럼 두드렸다. 답답해 죽겠다더니, 정말 스스로 숨을 끊을 기세였다.

“이 정령은 왜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이고, 나한테만 보이는 거지?”

“글쎄?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나? 아니면 네 새로운 눈 때문일지도 모르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버렌의 질문을 어물쩍 넘겼다.

“눈!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가주님도 이 눈이 특이하다고 했거든.”

버렌이 본인의 푸른 눈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다! 눈깔아! 제발 생각해라. 본왕이 네놈에게 눈을 넣어준 것이니라! 이 악귀 놈을 무시하고 본왕을 따르거라!

라스는 버렌에게 달려들어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지금 이 정령이 뭐라고 하는 거야?”

“너랑 잘 지내보자고 하네.”

라온은 버렌이 라스를 정령으로만 생각하도록 유도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버렌은 라스의 동그란 손을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지, 진짜 답답해서 뒈지겠느니라! 수, 숨이 안 쉬어지는….

반대로 라스는 입에서 푸른 거품을 뿜으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얘 괜찮아? 거품을 뿜는데?”

버렌은 거품을 뿜는 라스가 걱정되는지 손을 떨었다.

“바다 정령이잖아. 반갑다고 거품 뿜기로 인사를 하는 거야.”

라온은 라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품을 손가락으로 터트리며 빙긋 웃었다.

“아아!”

버렌은 그렇군 하면서 받아들였다.

-야! 눈깔아! 눈깔이 있으면 좀 봐라! 이걸 어떻게 인사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라스가 기절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제발 본인의 뜻을 알아달라며 팔을 마구 움직였다.

“이 녀석 춤 진짜 잘 추는데? 감정이 살아 있어!”

버렌은 라스의 몸짓을 춤으로 받아들이며 박수를 보냈다.

“정령이는 좋겠네.”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끄으으윽, 네놈은 정말 천벌을 받을….

라스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눈을 까뒤집은 채 뒤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뭐 하는 거야?”

“잠수 놀이. 아직 어리거든.”

“귀엽네.”

버렌은 기절하여 경련하는 라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라온이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여움 덕분에 누구도 마왕이라는 생각을 못 할 거야.’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솜사탕 형태의 라스는 귀엽게 생겼다.

포동포동한 몸체에 동그란 눈이 달린 귀여운 외형이었기에 버렌은 라스를 정말 바다 정령이라 여기고 있었다.

“저 녀석을 본다는 건 비밀로 해줘.”

“왜?”

“지금 너랑 나만 볼 수 있잖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미친놈 소리만 들을 거야.”

“음, 알겠어.”

버렌은 합당한 이유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가주전 밖까지 나와 있었다.

“너희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둘이서만 속닥거려!”

마르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나와.”

루난도 어서 밖으로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갔다.

“너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두 사람은 조금 전 투정을 부린 것과 달리 정말 다친 곳은 없는지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부대주님!”

“오르고스에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드래곤은 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광풍대 검사들까지 달려들어서 움직일 공간 자체가 나오질 않았다.

“난 괜찮아. 오히려 너희들이 걱정이었는데.”

라온은 걱정과 염려가 가득 차올라 있는 광풍대 검사들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라스가 치료는 해주었지만, 깨어나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전부 후유증 없이 건강해 보였다.

“다 좋은데, 연락 좀 해!”

마르타가 주먹으로 복부를 후려치며 입매를 비틀었다.

“진짜 치네….”

라온이 얻어맞은 배를 부여잡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오러를 안 쓴 걸 다행으로 여겨.”

마르타는 이것도 참은 거라며 눈을 부라렸다.

“아이스크림.”

루난이 옆으로 다가와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응?”

“아이스크림 쏴.”

그녀는 걱정시켰으니, 모두에게 아이크림을 쏘라며 손짓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

라온이 루난의 맹한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이스크림 소녀이니라!

어느새 정신을 차린 라스가 잘했다고 외치며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왕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너 하나뿐이니라!

“오, 또 춤을….”

버렌은 라스의 귀여움에 빠진 듯 녀석의 몸짓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도리안.”

라온은 날뛰는 라스와 버렌을 놔두고, 도리안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과 다리를 확인했다.

“팔다리는 괜찮아? 아프지는 않고?”

“당시에는 죽고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멀쩡해요.”

도리안이 헤헤 웃으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러려고요. 저랑 안 맞더라구요.”

그는 다시는 안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럼요!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진짜 무서웠다구요!”

도리안은 겁먹은 듯 목소리를 떨었지만, 그의 눈빛은 말과 달리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라온 도련님!”

“부, 부대주님!”

유아가 세차게 달려와서 안겼고, 율리우스는 울음을 참느라, 턱에 동그란 주름을 만들었다.

“그간 고생했어.”

허리를 숙여서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두 정렬.”

라온은 광풍대 모두와 차례로 인사를 나눈 후 정말 오랜만에 부대주가 되어 그들의 앞에 섰다.

“가주님의 말씀대로 그간 고생 많았다. 내일모레까지 푹 쉬고, 사흘 후에 다시 보도록 하지.”

3일 뒤에 보자는 말에 광풍대 검사들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어윽….”

“이틀 쉬고 바로 훈련인가?”

“지, 지독하네.”

“라온 지그하르트. 맞네. 역시….”

광풍대는 라온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훈련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소식 없이 너희를 기다리게 했으니, 그 보답은 해야지. 회식이다.”

라온은 훈련이 아니라, 회식을 하자고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우오오오오!”

“웬일이래?”

“죽다 살아나니 사람이 변했나?”

광풍대는 환호를 지르며 무조건 참여하겠다고 외쳤다.

“그럼 시간은….”

“6시.”

루난이 팔짝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오후 6시로.”

“아니 아침 6시.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 앞에서.”

“어…?”

라온과 광풍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잠탱아. 너 그 시간에 일어나지도 못하잖아.”

“아이스크림 약속은 지킬 수 있어.”

루난은 절대 안 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6시에는 아이스크림 매장이 문을 안 열어. 10시로 하자.”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마르타가 신기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어쩌다 보니….”

당연히 라스 때문이다. 녀석이 새벽부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외친 적이 하도 많아서 매장의 오픈 시간을 외우고 있었다.

“응.”

루난은 10시도 괜찮다며 맹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유아, 율리우스와 함께 별관으로 가려는데 버렌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 정령은 뭐 먹어?”

버렌은 루난 때문에 정말 춤을 추기 시작한 라스를 보며 물었다.

-오오!

라스가 춤을 멈추고 버렌에게 달려왔다.

-당장 본왕이 민트초코 아이스크림과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한다고 알리거라! 지금 바치면 용서해주겠다고….

“아, 정령은 마나를 먹고 산다고 했지….”

버렌이 깜빡했다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라도 주고 싶었는데 아쉽네. 정령아. 다음에 보자.”

그는 안타깝다는 듯 손을 저으며 멀어졌다.

-야. 야! 야아아아!

라스가 소리를 외쳤지만, 버렌은 당연히 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저놈 눈을 고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온은 라스와 버렌의 뒤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     *      *

“저희 계속 수련했어요!”

유아는 부상을 회복한 이후로 광풍대 전체가 하루종일 수련만 했다며 말아 쥔 주먹을 흔들었다.

“그건 대단한 게 아니야. 당연한 거라고.”

율리우스는 무슨 그런 자랑을 하냐며 손을 저었다.

“그래. 잘했어.”

라온은 유아와 율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별관으로 걸어갔다.

-으으….

라스는 아직도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어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쿠구구구!

평소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향할 때 별관 쪽에서 먼지구름과 함께 사람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얘들아!”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상승 보법을 운용하는 것처럼 뛰어와 라온과 유아, 율리우스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다친 곳은 없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실비아는 항상 그렇듯 라온과 유아, 율리우스가 다친 곳은 없는지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도련님. 제발 어디 가시면 말 좀 해주세요. 긴장되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전 위장병이 생겼어요!”

“아으,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헬렌과 시녀들은 왜 연락을 안 했냐면서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들의 손아귀에서 아릿한 떨림이 느껴졌다.

“…….”

무표정한 주디엘조차 화가 난 듯 눈매를 찡그리고 있었다.

“후….”

라온은 어깨를 떠는 실비아와 시녀들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군.’

드래곤을 잡으러 간다고 하면 실비아와 시녀들이 더 걱정할 것 같아서 아예 말을 해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미안해. 경황이 없었어.”

라온은 실비아와 시녀들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연락 잘할게요.”

“도련님은 맨날 그 소리예요!”

헬렌은 콧물이 슬쩍 나온 채로 입매를 구겼다.

“아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듣기는 했는데, 얘는 그중에서도 심해!”

실비아도 눈가에 물기를 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안해요. 그래도 무사히 왔으니….”

“라온 님!”

실비아와 시녀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을 때 맨 뒤에서 엔시아가 비호처럼 날아들었다.

퍼억!

피하면 엔시아가 그대로 바닥에 쓸릴 기세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그대로 받아냈다. 정말 호랑이가 달려든 듯한 충격에 살짝 다리가 흔들렸다.

“에, 엔시아 님….”

“라온 님! 보고 싶었어요!”

엔시아는 본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목을 껴안았다.

“저,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그녀는 그날 오르고스 앞에 놔두고 가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일로 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라온이 울음을 참는 듯한 엔시아에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너무 늦게 가서 제가 죄송하죠.”

“아뇨. 그날 이후로 얼마나 걱정이 되었… 음? 라온 님 혹시 바닷가에 가셨다 오셨나요?”

엔시아는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피부가 살짝 타셨는데, 어떻게 더 잘생겨질 수가 있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녀의 이성이 가라앉고, 본능이 튀어 나왔는지 다시 잘 생겼다는 말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봐도 대존잘.”

엔시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엄마!

라스가 실비아의 머리에 달라붙은 채 훌쩍였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느니라. 너무 힘들었느니라! 제발 맛난 밥을 좀 다오!

녀석은 아직도 입에 고무 맛이 돈다고 중얼거리며 실비아의 머리 장식을 붙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생겨지네. 이럴 수가 있나?”

엔시아는 라온의 얼굴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점점 입을 크게 벌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턱이 땅에 닿을 기세였다.

“엔시아 님이 이곳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라온은 엔시아의 존잘 발언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예? 예에?”

엔시아가 양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건 고백? 전 정말 언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니, 아니야! 예술 작품을 독점할 수는 없는데! 아아아악! 어쩌지?”

“예?”

라온이 어벙하게 눈을 꿈벅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내가 없는 동안 실비아와 함께 해주고, 드래곤 하트로 인공단전을 만드는 것 때문에 한 말인데, 그녀는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엔시아가 괜찮기는 한데, 좀 빠른 것 같아서 아직은 반대….”

실비아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마님. 요즘 애들은 빠릅니다.”

헬렌이 그러지 말라며 실비아의 소매를 잡았다.

“하아….”

라온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없네.’

모두가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어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끌벅적함이 나쁘지는 않았다.

-밥! 밥! 바아아압!

라온은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라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단 밥부터 먹죠.”

*     *      *

성인 남성 두 사람이 누워도 될 정도로 큼지막한 테이블 위로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 음식들이 올라온다.

불향을 두른 돼지 바비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여 고소함이 풍겨 나오는 소갈비, 생생함이 라는 단어를 입은 듯한 생연어, 보기만 해도 바삭함이 흘러넘치는 치킨과 커틀릿에 라스가 가장 좋아하는 파인애플 피자까지.

커다란 식탁이 내려앉을 정도로 여러 음식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짝!

마지막으로 라온이 좋아하는 소고기 스튜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자, 실비아가 큼지막한 손뼉을 쳤다.

“이렇게 다 모여서 먹는 건 오랜만이네. 아직 남은 음식도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실비아는 바로 옆에 앉은 라온과 유아, 율리우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에!”

“감사합니다.”

유아는 손을 번쩍 올렸고, 율리우스는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흐어억….

라스는 가지각색의 향을 뿌리는 음식들을 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뭐부터 먹어야 하지? 하도 나딘 빵과 육포만 먹다 보니, 음식들의 맛이 기억 안 나느니라!

녀석은 본인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입술을 떨었다.

‘천천히 골라.’

-천천히는 개뿔! 음식이 식지 않느냐! 사실 고를 필요도 없었느니라!

라스가 동그란 손으로 왼쪽에 놓여 있는 파인애플 피자를 가리켰다.

-선봉은 파인애플 피자로!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피자 한 조각을 접시에 덜어서 입에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따끈한 치즈와 쫄깃한 도우가 만족스럽게 입안을 채우고, 잘 구워진 파인애플의 달달함과 돼지고기의 짭짤함이 혀를 휘감았다.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피자였기 때문인지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이 좋았다.

-크으윽….

라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음식이지. 정말 그리웠느니라!

녀석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돼지 바비큐를 향해 손짓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라스가 먹어달라는 음식을 하나씩 씹어 삼켰다.

“와, 먹는 것도 존잘….”

엔시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라온의 사진을 무수히 찍어댔다.

“도련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헬렌이 소스 범벅이 된 유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물었다.

“바레네에서 있었던 일은 다 알지?”

“아뇨.”

“저희는 몰라요.”

“처음부터 말해줘.”

실비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려달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알겠어요.”

어차피 드래곤 하트 때문이라도 모두 말했어야 할 일이다.

라온은 그간의 일을 모두에게 말해준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드래곤 하트를 꺼냈다.

찬란한 무지갯빛 마나를 휘감은 드래곤 하트 때문에 식당의 조명들이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드, 드래곤을 잡았다고?”

“이게 드래곤 하트….”

“그것도 광룡 카이바르라니….”

실비아와 시녀들은 광룡 카이바르를 잡았다는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우우….”

엔시아의 시선이 오늘 처음으로 라온에게서 다른 것으로 향했다.

“지, 진짜네요. 자연의 마나가 끝없이 응집되어 있어요.”

요난 가문의 천재도 드래곤 하트를 보는 건 처음인지 손끝을 떨었다.

“이걸로 어머니의 인공단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발 저한테 맡겨주세요!”

엔시아가 역으로 라온에게 매달렸다.

“전보다 더 좋은 영감이 떠올랐어요! 리메르 님에게 들어간 단전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보겠다며 크게 턱짓했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장인의 그릇이었다.

“그럼 부탁 드리겠….”

“잠깐!”

실비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받을 수 없어.”

“예?”

“네가 죽을 고생을 해서 얻은 걸 내가 어떻게 가져!”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드래곤 하트를 받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어요.”

라온은 미소를 지었다. 실비아의 성격이라면 분명 거절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저 드래곤 하트는 저 혼자 드리는 게 아니에요.”

“응?”

“아리스 님이. 아니, 이모가 엄마의 단전을 고친다고 하니까. 내 동생은 가장 좋은 것으로 해줘야지라고 하면서 주신 거예요. 이거 안 받으면 이모가 실망하실걸요.”

글렌이 없기에 아리스를 이모라고 부르며 실비아를 설득했다. 실제로 했던 말이었고, 이모라고 했기 때문인지 실비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언니가….”

“네. 이모가 꼭 확인할 거라고 했으니까. 받으셔야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앞으로 하시면 되잖아요.”

라온이 떨리는 실비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가족은 그저 서로를 위할 뿐이지, 대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어머니께 받은 게 훨씬 많아요.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주세요.”

“으….”

실비아는 그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와 팔이 거칠게 흔들렸다.

“역시 마님은 도련님을 못 이긴다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지.”

“그냥 받아들이세요.”

헬렌과 시녀들은 울음을 참는 듯한 실비아를 놀리듯이 미소를 지었다.

“결정됐네요!”

엔시아가 벌떡 일어섰다.

“전 그럼 오늘부터 작업에 들어갈게요!”

그녀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며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본인의 방에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야!

라온이 엔시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때 라스가 토끼처럼 튀어 올랐다.

-입 좀 그만 털고 먹어! 다 식느니라!

*     *      *

라온은 마지막까지 식당에 남아서 라스가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들을 모두 흡입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어우….”

배가 터질 거 같아.

솜사탕 녀석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어쩔 수 없이 과식을 하게 되었다. 먹어서 속이 거북해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캬아아아….

라스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속이 좀 풀리는구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느니라.

‘으, 너무 많이 먹었어.’

이대로 있다간 체할 것 같았다. 제천검을 들고서 방을 나갔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것이냐?

‘소화 좀 시키려고.’

-그런데 검은 왜 챙겨?

‘수련으로 소화시킬 거니까.

-진짜 미친 놈이로다….

라스는 지겹다고 중얼거리며 팔찌 속에 몸을 숨겼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별관 뒤편의 공터로 향했다.

‘역시 여기가 마음에 편하다니까.’

어렸을 때부터 수련해온 장소라 연무장보다도 이곳이 익숙했다.

라온이 굴곡진 달빛이 비치는 호수를 바라보다가 제천검을 뽑았다. 평소처럼 기본 검술부터 시작하려고 할 때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척에 뒤를 돌았다.

언제 왔는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글렌이 건조한 눈빛을 들어 올렸다.

“낮에 못 했던 말을 계속해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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