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36화 (535/653)

제536화

라온은 덴젤이 준비해준 숙소에서 하루를 묵은 후 하로 산 앞의 돌탑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곳에 묻혀있지 않겠지.’

이 돌탑은 산사태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곳이고, 전생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데루스의 부하들에게 당하셨다.

산사태에 깔린 것과 흔적이 다를 테니, 아마 이 밑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두 분을 찾을 수 없기에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후우….”

라온이 한숨으로 답답한 속을 풀고, 무릎을 꿇었다.

‘우리의 원수가 더 강해졌다고 해요. 명성, 힘, 돈 그리고 사람까지 아직은 제가 이길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에 눈조차 감지 못했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속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라온이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10년, 20년. 아니, 평생이 걸리더라도 데루스 로베르트의 패악을 밝혀낼 겁니다.’

이건 단순히 부모님께 전하는 인사가 아니다. 나 자신을 향한 다짐. 그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맹세였다.

‘떠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곳에 그 악귀 놈의 목을 가져올 테니까.’

라온이 두 손을 모았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데루스 때문에 본인들의 진짜 죽음을 밝히지 못한 채 이곳에 묻힌 모든 이들을 위로한 후 몸을 일으켰다.

-…….

라온이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스가 웬일로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너 뭐하냐?’

-보면 모르는 것이냐. 사자들을 위로하고 있지 않느냐.

라스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원하는 죽음을 얻는 이가 얼마나 되겠느냐만, 이들은 그 정도가 심하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녀석이 씁쓸함을 담은 눈으로 돌탑을 내려보았다.

-이미 죽었으니, 종족의 구별은 의미가 없느니라. 본왕도 작은 위로 하나를 보탰느니라.

라온이 조용해진 라스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왕이 기도라….’

위로라고 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기도를 해주는 것 같았다. 무슨 양파라도 되는 듯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이 나오는 녀석이었다.

-기분 나쁘게 왜 웃는 것이냐!

라스는 그 웃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손을 털었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없어?’

-다, 당연히 있느니라! 연어 구이, 관자 구이, 통돼지 구이, 드래곤 구이!

‘다 구이네….’

-맨날 육포와 나딘 빵만 먹어서 제대로 씹고 싶으니라!

녀석은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가 그립다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어차피 먹지도 않을 걸 왜 묻는 것이냐! 본왕을 놀리려고….

‘먹을 건데?’

-저, 정말이냐? 그럼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라온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광풍대와 시간을 맞춰서 복귀하려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이 망할 놈이 진짜아아아아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었어야지.’

분통을 터트리는 라스와 작은 다툼을 벌이며 마을로 돌아가자, 덴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가시는군요.”

“다 끝났으니, 돌아가야죠.”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덴젤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해왔던 임무 중 가장 보람된 일 중 하나였습니다.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백검룡.”

진심을 드러내는 듯 그의 눈동자는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그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이제 라온 님의 정보를 풀어도 되겠군요.”

“정보?”

“용살자 라온 지그하르트. 아이카르에서만 맴돌던 그 이름이 대륙 전체로 퍼져나갈 겁니다.”

덴젤은 그 이명이 대륙에 퍼지는 게 기대되는 듯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용살자.”

그는 처음에는 백검룡. 떠날 때는 용살자라 칭한 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근처에 있던 암시장의 요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인 후 모습을 감췄다.

-용살자는 개뿔! 본왕처럼 도마뱀들을 통째로 잡아먹지도 않았는데, 무슨 놈의 용살자야! 네놈에게는 과한 이름이니라!

역시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라스가 끼어들었다.

‘그럴지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캐폴리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 맞은편에서 촌장이 다가왔다.

“마을 구경을 오신 거요?”

촌장은 새롭게 변장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마음고생을 했는지 주름살이 늘어 있었다.

“예. 지나기는 길에 잠시 들렸습니다.”

라온은 지친 듯한 촌장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건 진짜 우리 마을의 모습이 아니라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악마 같은 놈들이 우리 마을에 숨어서 사령술 실험을 했다는군. 영웅들께서 그 괴물 놈들을 모두 처치했다고 하니, 곧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촌장은 맨 처음에 암시장의 요원들을 날강도 같은 놈들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영웅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 마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꼭 다시 오시오!”

“예.”

라온이 촌장의 눈가에 접힌 주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     *      *

쿠구구구구!

글렌의 옥좌에서 시작된 진동이 알현실을 넘어 가주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젠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지 않는 대신 벽과 바닥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주님.”

로엔이 글렌의 옥좌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요즘 지진 때문에 겁에 질린 검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벽과 바닥에 균열까지 생기고 있다니, 조금 참아주시지요.”

그는 지그하르트 전체에 영향을 주는 글렌의 다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흠!”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떨고 있던 왼쪽 다리를 멈췄다.

“나도 알고 있다. 아는데….”

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통 연락이 없지 않느냐! 카이바르를 잡았다는 소식 이후로 무엇 하나 오질 않았어!”

글렌은 입매를 비틀며 다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이럴 바에는 내가 직접 찾아 나서는 게 빠를지도….”

“드래곤을 잡고 휴식을 취하고 계시겠지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자, 로엔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연락을 해줘야지. 실비아가 매일 찾아오는데, 이젠 거절할 핑계도 없다.”

글렌은 실비아를 마주하는 게 겁이 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다. 책을 펼쳐서 천천히 읽기 시작하자, 글렌의 안색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후….”

로엔은 글렌이 들고 있는 책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온 복음을 읽고 있으니, 한동안은 저 발작이 멈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많이도 변하셨군.’

대륙 최강을 논하는 북멸왕이 손주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힌다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요즘 보면 대륙 최강보다 팔불출 최강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음….”

로엔은 가주전 밖에서 들려온 소리를 포착하고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광풍대 분들이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음.”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라온 복음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 아이들이라도 보면 속이 좀 풀리겠지. 데리고 오도록.”

“예.”

로엔이 미소를 지으며 알현실을 나섰다.

*     *      *

광풍대는 지그하르트 가주전 앞에 서서 몸가짐을 정리했다.

“오랜만이라 떨리네.”

버렌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소매를 매만졌다.

“잘못한 게 없는데, 겁을 낼 게 뭐 있어.”

마르타는 뭐가 무섭냐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눈매를 찌푸렸다.

“겁나는 게 아니라, 긴장되는 것뿐이야.”

“긴장? 쟤를 봐.”

그녀가 옆에서 멍 때리는 루난을 가리켰다.

“가끔은 저렇게 아무 생각 없는 게 필요해.”

“음….”

루난은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얘는 좀 심하지. 가만히 있지 말고, 먼지라도 좀 털어.”

버렌이 루난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묻어 있는 먼지와 눈을 털어주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루난이 낮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여기 있는 모두랑 라온이랑 다 같이.”

“음….”

마르타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라온이 생각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주님. 그 녀석 진짜 어디에 있는 겁니까?”

버렌이 리메르에게 다가가서 눈살을 찌푸렸다.

“응? 나도 몰라.”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

“안다고 했잖아!”

“잘 지낸다며!”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리메르에게 달려들어 동시에 멱살을 잡았다.

“그래야 너희가 안심하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리메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진 것처럼 라온의 안위를 가볍게 내뱉었다.

“야이 인간아!”

“죽어!”

“이딴 게 대주?”

다른 광풍대 검사들까지 달려들어서 리메르의 머리채와 옷을 잡고 흔들었다.

“자, 잠깐! 이러지들 말고….”

리메르가 공포를 느끼며 빠르게 손을 저을 때 가주전 안에서 로엔이 걸어 나왔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로엔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광풍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 들어오십시오.”

“후우….”

리메르가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놓치지 않고, 로엔의 옆으로 물러섰다.

“빨리 가자! 가주님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아직 안 끝났어요.”

“알현 끝나고 봅시다.”

버렌과 마르타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죽었어.”

루난도 리메르를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리메르는 망가진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만지지도 않은 채 로엔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런데 성벽이랑 건물들에 금이 좀 갔던데, 무슨 지진이라도 일어났어요?”

“허허허.”

로엔은 답을 하지 않고, 평소의 웃음을 흘리며 리메르와 광풍대를 알현실 앞까지 안내한 후 문을 열어주었다.

쿠우우우웅!

고고한 철문이 벌어지며 안현실의 전경이 드러난다. 거인의 창대처럼 솟구친 기둥 위로 황금빛 햇살이 이지러지며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피워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끄는 건 그 중심에 앉아 있는 글렌이다. 태양보다 더 붉은 듯한 눈동자 위로 세상을 짓누를 듯한 패기가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저 양반 또 폼잡고 있네.”

리메르가 낮은 숨을 내쉬며 뒤에 있는 광풍대에게 턱짓을 했다.

“가자.”

“음….”

“후우….”

그와 달리 광풍대는 팔과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무거워지는 중압감을 느끼며 알현실로 들어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리메르의 인사를 따라 광풍대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두 일어나도록.”

글렌의 손짓에 리메르와 광풍대가 고개를 들고 허리를 폈다. 그는 리메르의 바로 뒤에 서 있는 버렌을 바라보았다.

“버렌.”

“예엡!”

호명 당할 줄 몰랐다는 듯 버렌의 목소리가 훌쩍 튀어 올랐다.

“왼쪽 눈은 괜찮으냐?”

“처, 처음에는 시력이 너무 좋아져서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적응되었습니다.”

“사이함은 느껴지지 않지만, 연원을 알 수 없는 눈이다. 그 눈만 믿다가는 위기에 처할 수 있으니, 항상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최선의 판단을 이루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버렌은 글렌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루난.”

글렌의 시선이 버렌의 우측에 선 루난에게 향했다.

“복부와 허벅지의 상처에 통증은 없느냐.”

“이제 괜찮아요.”

루난은 그 누구에게나 그렇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해 보거라.”

“네.”

그녀는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짧게 대답했지만, 글렌의 조언을 생각하는 듯 눈동자가 맑아져 있었다.

“마르타.”

글렌이 눈을 내리깔고서 마르타를 불렀다.

“아직까지 동료들을 돕지 못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구나.”

“음….”

마르타는 버렌과 루난을 한 번씩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들이 절 지키느라 죽을 뻔했으니,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네 동료를 모욕하는 짓이다.”

“아….”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네 동료들이 그리했듯 위험한 순간에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것뿐이다. 동료 사이에 빚 같은 건 없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모두를 지키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

“예익!”

글렌의 네 번째 부름에 도리안이 전신을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에게 보고 받기로 너는 광풍대 최고의 겁쟁이라고 하더구나.”

“그, 그건 맞습니다.”

도리안은 스스로 겁쟁이임을 인정하며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겁쟁이는 없다. 동료를 위해서 네 목숨을 걸고 나섰다면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글렌이 도리안을 보며 진중하게 턱을 주억였다.

“성장했구나. 도리안 세피아.”

“아, 그….”

도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글렌은 그 뒤로도 광풍대 한 명 한 명에게 칭찬과 조언을 해주었다.

“마크 괴튼.”

“예.”

마지막으로 마크 괴튼이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본래 이 세계는 불공평한 법이다. 무학의 벽이 누구에게는 산보다 두껍고, 누구에게는 종이보다 얇지. 남들을 신경 쓰다 보면 내 안의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되는 법이다. 앞으로는 남이 아닌 자신만을 관조하며 나아가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마크 괴튼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본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겐 할 말 없으십니까?”

“너는….”

글렌이 인상을 팍 찌푸릴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하던 로엔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가주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오신 분이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지금은 광풍대와 할 말이 있으니, 나중에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차라도 하시는 게….”

로엔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음?”

글렌이 그런 로엔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차라고?’

로엔은 친절해 보이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차를 함께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잠깐. 누가 찾아온 것이냐.”

“음….”

로엔이 다시 고개를 내밀며 눈썹을 내렸다.

“광풍부대주가 복귀했습니다.”

“다, 당장! 당장 들라 하라!”

“라온?”

“라온이 온 거야?”

글렌은 처음으로 말을 더듬으며 빠르게 손짓했다. 리메르와 광풍대도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아쉽네요.”

로엔이 미소를 지으며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구!

웃고 있는 로엔의 옆으로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로브를 벗자, 알현실을 휘감은 햇살보다 더 찬연한 금발이 휘날리고, 칼날처럼 곧게 뻗는 콧대가 드러났다.

입가에서 부드럽게 피어난 붉은 미소는 넝마가 된 듯한 그의 제복과 대비되어 마성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저벅.

라온은 뒤를 돌아보고 있는 광풍대와 차례로 눈을 마주치며 진중한 걸음을 걸었다. 그는 리메르의 뒤편에 서서 글렌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

“됐다!”

글렌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넌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온 것이냐!”

그는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결계가 깨진 여파로 오웬 왕국의 구석에 떨어졌는데, 이모님께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제가 기절해 있는 동안 바다에 나가게 되었는데….”

“뭐?”

글렌의 입술이 얼어붙은 것처럼 퍼렇게 질려갔다.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예? 바다에 나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라온이 글렌을 보며 눈을 꿈벅였다.

“그 앞에!”

“결계가 깨져서 오웬 왕국의 구석에 떨어진….”

“그 뒤에!”

“이모님이 저를….”

“이모….”

글렌이 옥좌를 쥐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었다. 알현실이 아니, 가주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모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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