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검은 그림자가 늪지처럼 꿀렁거리더니 곧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림자 소속 암살자들의 은신술이었다.
라온은 호수 앞에 몰려든 열 명의 암살자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하나같이 고수로군.’
먼 거리에 있어서 오러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은신술의 수준과 몸놀림을 볼 때 전부 상당한 수준에 오른 암살자들이었다.
‘지금까지 온 놈들 중 가장 강해.’
이틀간 대기하면서 공장에 진입하려던 그림자를 여러 번 보았지만, 지금 온 놈들이 가장 뛰어났다.
‘그렇다면….’
라온은 호수에 들어가려는 듯한 암살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곧 데루스도 온다는 뜻이겠지.’
저 암살자들의 목적은 시선 끌기다. 데루스가 공장 안을 모두 살필 때까지 암시장 요원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려는 게 분명했다.
라온이 공장을 굽어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런 때에도 본인의 흔적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가 보군.’
그 족제비 같은 놈의 얼굴을 떠올리자,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수화객 공장 내부에는 내 흔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위 마법사가 마나의 흐름 자체도 뒤틀었기에 아무리 데루스라고 해도 저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것이다.
‘놀린다고 생각하겠지.’
데루스는 냉정한 인간이지만, 한 번 본색을 드러내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다.
수화객 공장이 망가지며 수십 년의 세월과 천문학적인 돈이 날아갔기에 아무리 이성적인 데루스라고 해도 분노를 터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준비는 모두 해놨지.’
데루스의 정체를 완벽하게 드러낼 수는 없더라도 그를 막고, 추적할 수 있는 길은 만들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놈의 본색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라온이 계획을 재점검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나딘 빵의 고무 맛에 기절해 있던 라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와, 왔느니라.
‘뭐?’
-네놈이 찾는 놈이 왔단 말이다.
라스가 동그란 손으로 공장을 가리켰다.
‘못 느꼈는데?’
-네놈하고는 격이 다른 놈이 은신까지 사용했으니, 모를 수밖에. 솔직히 말해서 본왕도 놓칠 뻔했느니라.
녀석은 위험한 놈이라며 눈매를 찌푸렸다.
‘무력이 더 강해진 건가?’
라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수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모여 있던 암살자들이 일부러 소리를 내며 호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루스가 공장을 수색할 수 있게 시선을 끄는군.’
대기하던 암살자들이 움직인 것을 보니, 라스의 말대로 데루스는 이미 공장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부단주님.]
라온이 근처에 숨어 있는 덴젤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놈이 온 듯합니다.]
덴젤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호수 근처에 있는 암시장의 요원들을 움직였다.
그의 지시를 들은 암시장의 요원들이 호수에 들어가던 암살자들을 습격하며 전투가 벌어졌다.
라온은 호수 쪽을 덴젤에게 맡긴 후 계속해서 공장에만 집중했다.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혹여나 분노한 데루스를 놓친다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에 절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감에 집중했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손과 발에 미세한 오러를 운용했다.
천천히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있을 때 공장 앞으로 검은 로브를 두른 한 남자가 나타났다.
‘뭐지?’
아예 보지도 못했다. 마나의 흐름도, 바람도 없이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솟구친 듯한 느낌이었다.
‘놈이다….’
로브를 쓴 실루엣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공장을 살피고 나타난 게 분명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데루스가 움직인다면 바로 사용할 아티팩트와 신호탄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데루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석상으로 화한 듯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뭘….’
예전에 바다에서 폭발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봐온 데루스의 성격이라면 이성을 잃은 채 마을을 파괴하고, 암시장의 요원들을 모두 죽이려고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었다.
‘설마 내 흔적을 찾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라스에게도 확인했었다. 저 안에 내가 남긴 흔적 따위는 없다.
남은 거라곤 조롱하기 위해서 일부러 새겨둔 몇 가지 검흔이 전부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내리누를 때 데루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쓰고 있는 놈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푸른 안광 속에 시뻘건 용암 같은 것이 요동치고 있었다.
‘온다! 분명 올… 어?’
신호탄을 쥐고 있는 손 힘을 주었을 때 갑자기 데루스가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호수인가?’
라온이 호수 쪽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만약 데루스가 호수에 있는 사람들을 노린다면 1초도 버티지 못한다. 신호탄을 터트려서 암시장의 요원들을 구해야 했다.
-그거 쏠 필요 없느니라.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아 올리려고 할 때 라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놈 돌아갔느니라.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인간이 도망쳤다는 뜻이니라.
라스는 데루스가 이 지역을 아예 떠났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 되는….’
라온이 호수 부근을 보았다. 그림자의 암살자들은 더는 반격하지 않고,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만약 데루스가 있었다면 암살자들이 저렇게 물러설 리가 없다. 라스의 말대로 데루스가 사라졌기에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허….”
라온이 참지 못하고 육성으로 헛바람을 흘렸다.
‘그 미친놈이 그냥 갔다고?’
수십 년 동안 데루스를 봐왔기에 알 수 있다.
놈은 분명 냉정하지만, 오랜 시간 준비한 일이 망가졌을 때는 뇌의 회로가 망가진 것처럼 분노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설마 화가 나지 않았던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놈의 눈은 분명 지독할 정도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
-맞느니라.
라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본왕에게 닿을 정도의 분노를 일으켰느니라. 하지만 그걸 참고 물러났지.
녀석이 데루스가 서 있던 공간을 내려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무래도 그놈은 예전 바다에서 만났을 때보다 성장한 듯하구나. 무력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후….”
라온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은 없는 건가?’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생명을 농락하는 악귀가 더 성장했다는 말을 들으니,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거북해졌다.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저놈을 죽이고 싶다면 본왕에게 몸을 넘기거라. 본왕도 그놈의 행동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라스가 도톰한 손을 까딱였다.
-네 밥을 빼앗아 먹은 것으로 모자라, 생명조차 농락하는 놈이니, 본왕이 친히 죽여주겠노라!
녀석이 놀리듯이 솜사탕 꼬리를 흔들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완벽한 암살에 성공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2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암습>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수화객 공장의 사령술사와 그림자들을 암살했던 보상이 지금에서야 찾아왔다.
-어?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이, 이게 말이 돼? 암살 좀 잘했다고 이렇게 퍼주는 게 어디에 있는 것이냐!
녀석은 정도를 모른다며 악을 질렀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특성 <질투>의 대상이 셰릴에서 아리스 지그하르트로 전환됩니다.]
[공간검의 성장이 빨라집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질투>. 아니, <선망>의 대상이 셰릴에서 아리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건 또 왜 바뀌는 것이냐!
‘내가 공간검을 운용해서 그렇겠지.’
레시아가 마지막에 수화객들을 모두 자폭시키려고 할 때 놈들의 몸속에 신성력을 밀어 넣었던 묘리가 공간검이었다.
실전에서 처음으로 공간검을 운용하며 아리스에게 감탄했기 때문인지 선망의 대상이 셰릴에서 아리스로 바뀌어 버렸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며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이러면 나야 좋지.’
셰릴이 보여주었던 쌍검술 묘리는 거의 다 파악하여 이제 숙달만이 남았다.
여기서 아리스의 공간검을 빠르게 익힐 수 있게 된다면 앞으로의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어억….
‘고맙다. 라스.’
라온이 입을 떡 벌린 라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네 덕분에 저놈에게 금방 닿을지도 모르겠어.’
-크으윽! 닥치고 밥이나 차려와! 본왕이 원하는 음식이나 뱉어내라고!
‘뱉으면 맛을 못 볼 텐데?’
-처먹으란 뜻이잖아!
* * *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데무론 마을.
약초와 과일 농사로 살아가는 중견 마을 앞에 시꺼먼 로브를 그림자처럼 두른 남자가 나타났다.
“거기 누구요!”
“로브를 벗고, 신분을 밝히시오!”
늦은 시간이었기에 마을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철책 위에서 장창을 세웠다.
“…해라.”
로브의 남자는 철책 위에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아주 가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로브나 벗으라니까!”
병사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장창을 겨누었고, 철책 아래에 있던 다른 병사는 무인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마을 안쪽으로 달려갔다.
“…….”
검은 로브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아름다울 정도로 선명한 푸른 눈동자 속에 괴이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
“으….”
병사들은 남자의 눈을 보자마자, 손에 쥐고 장창을 떨어뜨렸다.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건 그저 공포. 몸이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로브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섬뜩함이 흘러내리는 음성과 함께 철책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그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의 육체도 가을 낙엽처럼 거칠게 바스러졌다.
비명조차 없이 두 사람의 목숨이 어둠 속에서 녹아내렸다.
“무슨 일이냐!”
“침입자다! 경종을 울려!”
마을을 지키는 병사와 무인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검과 장창을 꼬나쥐고 로브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촤아아아악!
로브의 남자는 손조차 뻗지 않고, 그저 길을 걸었다. 묵직한 걸음이 죽음의 늪이 된 것처럼 그에게 달려들려던 무인과 병사들이 뼈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끄아아아악!”
“아아….”
“이, 이게 뭐… 크억!”
병사들의 뒤에 서 있던 자경단원들은 본인들의 육체가 눈처럼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다가 붉은 핏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도, 도망쳐!”
“빨리 마을을 벗어나!”
“절대 돌아보지 마!”
마을 사람들은 로브의 남자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라 말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로브의 남자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저 피로 차오른 길을 걸으며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우우우웅!
그가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기이한 울림이 마을을 휘감았다.
“일단 여기만 벗어나면… 아.”
“자, 잠깐! 제발….”
“끄으으으….”
담벼락을 넘어서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본인들의 팔과 다리가 톱니에 갈린 듯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들은 고통과 공포에 질린 비명을 터트리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녹아내렸다.
쿠우우우우웅!
백 년을 넘게 이어져 왔던 데무론 마을이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먼지가 되어서 사라졌다.
인간의 신위가 아니라, 악신이 죄 없는 인간들에게 철퇴를 내리친 듯한 모습이었다.
로브의 남자가 먼지를 떼어내듯 손을 털었다. 백이 넘는 인간을 죽였음에도 그의 가죽 장갑은 핏방울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섬뜩한 침묵이 이어질 때 복면을 쓰고, 검은 야행복을 입은 쿠바라가 내려섰다.
“추적자는 없습니다.”
쿠바라는 로브의 남자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공장 안에 있는 흔적이라곤 조롱이 전부더구나.”
“음….”
로브의 남자. 데루스 로베르트가 오싹하리만큼 냉랭한 시선을 돌렸다. 쿠바라가 본인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나를. 내 성격을 아는 것처럼 도발을 해오더군. 꼭 힘을 드러내라는 듯이 말이야.”
“…….”
쿠바라는 감히 데루스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대로였다.
예전의 데루스라면 그 자리에서 폭발하여 마을을 지우고 주변에 숨어 있던 암시장의 무인들을 학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은 채 이곳에 와서야 분노를 토해냈다. 전보다 더욱 공포스러웠다.
“암시장 따위가 아니야. 분명 놈들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데루스가 어둑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음처럼 냉랭한 눈동자로 하늘을 노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찾아라. 암시장을 찢어서라도 그 뒤에 있는 놈을 찾아.”
“…알겠습니다.”
쿠바라는 지금 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대답을 내뱉었다.
“다른 곳에 있는 공장과 유화 상단과의 연결고리도 끊도록.”
“거기는 왜….”
“캐폴리에 있는 공장이 들켰다면 그곳도 안전하지 않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예.”
“정리하고 돌아오도록.”
데루스는 쿠바라와 그림자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홀로 로베르트 영지로 향했다.
가문에 가까워질수록 살 떨리게 만드는 오싹함이 사라지고,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가문에 도착한 후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고, 막내아들 레폰 로베르트와 그를 따르는 검사들이 더운 땀을 흘리며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어? 아버지!”
레폰이 데루스를 발견하고 검을 내린 채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잊은 게 있어서 왔단다.”
데루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푸른 차원이 열리고, 그 안에서 고아한 형태의 붉은색 검이 솟구쳤다.
“네 생일 선물을 잊었더구나. 늦어서 미안하다.”
“아, 아니 뭘 이런 걸….”
레폰은 그 말과 달리 적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너도 제대로 된 검 하나는 있어야지.”
데루스는 미소를 지으며 적검을 레폰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레폰이 활짝 웃으며 데루스에게 안겨들었다.
“그래. 더 크기 전에 지금 실컷 안아보자꾸나.”
데루스도 환한 미소를 그리며 레폰을 더 깊게 끌어안았다.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그의 장갑은 여전히 깨끗했다.
* * *
라온이 마음을 가다듬은 후 덴젤에게 다가갔다.
“라온 님?”
“다 끝났습니다.”
“예?”
덴젤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미 왔다가 갔어요.”
“어, 언제….”
그는 공장 앞에 서 있던 데루스도 보지 못한 듯 눈을 꿈벅였다.
“공장을 다 살피고 갔습니다. 발작할 줄 알았는데, 조용히 사라지더군요.”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계획이 어긋났어요.”
“아, 아닙니다.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 오히려 다행이에요.”
덴젤은 그러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그럼 이제 이곳은 안전한 겁니까.”
“네. 괜찮을 거예요.”
라온이 캐폴리 마을과 배욘 호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데루스가 떠난 것을 보면 다시 이 마을에 마수를 뻗을 리는 없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을 다시 불러주세요.”
“이제야 그 촌장님의 잔소리를 그만 듣겠네요. 다행입니다.”
덴젤은 한시름 놓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과 말이 모두 많았던 촌장 베루릭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저희는 놈들이 남긴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 추적을 해볼 텐데, 라온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광풍대와 엔씨아 요난 님은 어디에 있죠?”
라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광풍대는 지그하르트로 복귀 중이고, 엔씨아 님은 이미 지그하르트에 계십니다.”
덴젤은 미리 조사를 했는지 광풍대와 엔씨아의 위치를 바로 알려주었다.
“그럼 저도 돌아가야겠네요. 집으로.”
라온이 북쪽을 바라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오오!
보상에 얼굴을 구기고 있던 라스가 펄쩍 뛰어 올랐다.
-밥! 밥이다! 드디어 밥이야! 나딘 빵의 고약함만 가득했던 본왕의 혀에 달콤함이….
‘제발 분위기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