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라온은 자연스레 눈동자를 굴려 작업반장이라 불린 남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뒷짐을 진 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와 친근함 속에 외지인을 향한 의심을 두른 듯한 표정. 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작업반장은 언제라도 보법을 밟을 수 있게 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었고, 어떤 공격이 다가와도 피할 수 있게 마차 바퀴처럼 두꺼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그림자 소속 암살자의 특징이지.’
거짓된 인물을 연기하면서 언제라도 암살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교육받은 그림자 소속 암살자들의 성향이 작업반장에게서 그대로 느껴졌다.
“그럼 우리 촌장님 말동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작업반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눈동자를 가늘게 벌리며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는데, 당연히 연기였다.
“자, 그만 쉬고 다들 나와. 마무리 해야지!”
그가 손뼉을 치며 공장 안쪽에 소리치자, 방문이 열리면서 작업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라온은 촌장의 뒤에 선 채로 기감을 열어서 빠르게 작업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여섯.’
지금 나온 50여 명의 작업자 중 암살자는 일곱이었고, 모두 본인의 기척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고수였다.
‘역시 여기가 수화객의 공장이 맞아.’
무인 하나 없는 평범한 공장에 암살자를 일곱이나 넣어두었을 리가 없다. 이 주변 어딘가에 수화객을 만드는 공장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디에 있지?’
공장의 위치를 찾아보기 위해서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운용했다. 누구도 느낄 수 없도록 마나를 여러 가닥의 실 형태로 조형하여 바닥으로 뿌렸다.
꽤 깊게 내려갔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특별한 마법을 설치했거나, 더 깊은 곳에 만들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둘 모두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이 마나를 아래만이 아니라, 공장 전체로 퍼뜨릴 때 작업반장의 방에서 비서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걸어 나왔다.
“반장님. 남들 일 시킬 생각말고 본인 일부터 처리하시죠.”
콧잔등에 주근깨가 박힌 차분한 인상의 비서는 서류를 흔들며 빨리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난 그냥 용광로 앞에 있는 게 편한데….”
“그러면 반장님 퇴근만 늦어지시는 거죠.”
“어휴, 인생의 낙이 없어….”
작업반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본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비서는 다른 작업자들에게 고개를 숙인 후 그 뒤를 따라갔다.
‘저 여자도 암살자로군.’
그것도 남자보다 강해.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비서로 보이는 여성의 무력과 경험은 작업반장보다 한참 위였다. 겉으로는 비서였지만, 그림자 내부 서열은 저 여자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리고….’
수화객의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저 사무실 안에 있었군.
조금 전 비서가 밖으로 나올 때 저 안쪽에서 불어오는 아주 옅은 바람을 느꼈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지하에서 올라온 듯한 음습한 바람이 흐를 리가 없으니, 저곳은 수화객을 만드는 공장과 연결된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꾸며놨군.’
따로 암살자를 배치하지 않고, 근로자 중 상당수를 암살자로 넣어두다 보니, 자연스레 주변 감시가 가능해졌다. 아무래도 수화객 공장의 규모는 생각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어떤가.”
라온이 바닥을 내려보며 눈매를 찡그리고 있을 때 촌장 베루릭이 다가왔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일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야. 오게 되면 얻을 게 많을 걸세.”
“그런 것 같네요.”
라온이 촌장의 인자한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덕분에 얻은 게 많습니다.’
내가 어떻게 납치되었는지를 알았고, 그림자의 암살자들을 포착했으며 작업반장의 방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촌장은 오지랖이라 말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일들이 빠르게 끝났다. 여러 가지로 고마울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진심을 담아서 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 그리 고마우면 꼭 다시 오게. 자네 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촌장은 늙으면 말 상대가 없어진다며 손짓을 했다.
“자, 더 늦기 전에 광산도 구경하러 가세. 곧 광부들이 나올 시간이니, 딱 좋아.”
그는 광산에도 가보자며 산으로 이끌고 갔다.
* * *
“이 늦은 시간에 꼭 가야겠나?”
“일정이 촉박해서요.”
라온은 아쉬워하는 촌장에게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어땠나?”
“사람들도 친절하고, 살기도 편해보입니다. 좋은 곳이에요.”
“그렇지?”
촌장은 마을의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걸 알았으면 빨리 와서 자리나 잡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라온은 촌장의 생각과는 의미가 다른 말을 하며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기다리고 있겠네.”
“그럼.”
라온은 촌장에게 고개를 숙인 후 캐폴리 마을을 떠났다.
‘친절한 사람이야.’
촌장은 광산을 구경시켜준 후 자고 가라고 방까지 내어주었다. 말이 많은 것만 빼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자하면서도 친근한 사람이었다.
‘저들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겠어.’
그림자와 수화객을 만드는 놈들만 처리하고, 마을에는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을 떠올리며 어둑해진 길을 걷고 있을 때 뒤편에서 풀벌레처럼 아주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역시 따라오나.’
조금 전에 느꼈던 시선과 움직임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다. 작업반장이 뒤에 따라붙어 있었다.
‘자리 한번 더럽게 잘 잡았군.’
겉으로는 마나가 뭔지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이용해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친근한 분위기의 마을을 보여주고, 속에서는 시체를 이용하여 암살자를 만드는 쓰레기 짓을 하고 있는 데루스와 그림자 놈들을 당장 철퇴로 내려치고 싶었다.
‘후우….’
라온은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잔잔한 걸음으로 길을 나아갔다. 하로 산의 반을 돌아서 걷고 있음에도 등 뒤의 암살자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생각보다 의심이 많네.’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죽이려는 거겠지.
철광석 공장에 있던 암살자 모두가 조장급 실력에 경험도 많아 보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수화객에 꽤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의 투자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주지.’
라온은 나중에 보게 될 데루스의 표정을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걷다 보니, 하로 산을 넘어 이름 모를 호수까지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따라붙던 작업반장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귀찮게 하네.’
생각 이상으로 거리가 멀어졌지만, 상관 없었다. 보법을 밟으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까.
라온이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기감을 열어서 누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로브를 벗었다. 허리춤에 아무 무늬도 없는 단검을 착용하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공장 내부에 침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라스가 보였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냐?’
-무슨 말이 필요하지?
라스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되물었다.
‘밥 먹자는 말도 안 하고, 궁금한 것도 있을 텐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한 번 말했을 텐데.
라스의 하늘색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본왕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지 않느니라.
녀석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털어놓고 싶은 날이 온다면 네 입으로 말하거라.
라스는 평소 식충이 짓을 하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진중한 음성을 흘렸다.
-본왕은 그저 들어주겠노라.
“하!”
라온이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헛바람을 흘렸다.
‘너 때문에 코끝이 찡해질 줄은 몰랐어.’
코를 한 번 훌쩍이고서, 라스를 보았다.
‘술이 땡기네.’
-본왕은 술을 안 좋아하느니라.
‘이번 일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할까?’
-본왕은 안 좋아한다고!
‘안주는 네가 고르고.’
-콜이니라!
* * *
어둠이 내려앉은 작업반장의 사무실.
방의 주인인 작업반장은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고, 그의 비서는 다리를 꼰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놈은 갔나?”
겉으로는 비서의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곳의 그림자들을 통제하는 조장 레시아가 턱짓을 했다.
“예. 슈르 호수에서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특별한 점은?”
“걸음 속도가 조금 빠른 것 이외에는 딱히 없었습니다.”
작업반장이 보고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널 눈치챈 느낌도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무학 자체를 익히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흐음….”
레시아가 눈매를 찡그리며 턱을 매만졌다.
“왜 그러십니까?”
“그놈을 볼 때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착각이었던 것 같군.”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도록.”
“예.”
작업반장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본인의 사무실을 나갔다.
“…….”
레시아는 의자에 앉은 채로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가 좌측 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마나를 두른 손가락으로 책장 옆에 있는 벽을 두드리자, 소리 없이 바닥에 구멍이 열렸다.
스으으으.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 하나만 보이고, 그 밑은 무조갱 같은 어둠이었지만, 레시아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은 높고 깊었다. 레시아가 일반인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걷고 있음에도 쉽게 그 끝을 드러내지 않았다. 10분이상 내려가고 나서야 계단이 끝났고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음울한 보라색 빛과 괴이한 문양이 천장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우우우웅.
레시아는 바닥의 문양을 순차적으로 밟으며 공간을 빠져나가 길쭉한 복도로 들어갔다. 또 한참을 걸어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환한 빛으로 차오른 공동이 드러났다.
“그 시체에는 폭발 처리가 안 되었어. 이쪽으로.”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건가?”
“빨리 빨리 좀 움직여!”
넓고 깊은 공동 안에는 보라빛 로브를 입은 사령술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들의 주변에는 썩은 악취가 피어나는 시체와 살점 그리고 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인간도 있었는데, 뒤집어보면 척추가 모두 빠져 있거나, 뼈 대신 사령술이 깃든 쇳물이 차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을 겪은 인간이라고 해도 구역질을 참을 수 없는 광경이건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살점을 장난감처럼 뜯고 조립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옆에서 음식을 먹는 이들도 있었다.
“…….”
레시아는 무표정으로 공동 중앙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슈펠 님.”
그녀는 검은 로브를 입은 청년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죠?”
기괴한 마법 술식을 운용하던 남성이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말끔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목소리가 음울하며 날카로웠다.
“조금 전 마을에 온 여행자가 돌아갔습니다.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텐데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뺏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귀찮은 소리를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레시아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틀 뒤에 지원이 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큰 규모라서 미리 준비를 해놔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이틀 뒤에 온다는 말을 하자 슈펠의 얼굴이 미소가 그려졌다.
“이틀이라고 했느냐?”
슈펠의 반대편 책상에서 음울한 기운과 함께 깡마른 노인이 일어섰다. 꿀을 바른 것처럼 달달한 음성이었다.
“쥬란 님도 계셨군요.”
레시아가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장 큰 규모면 어느 정도지? 시체는? 살아는 있는 게냐?”
“실험체와 재료 모두 3배로 온다고 합니다.”
“3배?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군!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쥬란은 마음에 든다는 듯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쥬란 님 격식을 좀 갖추시죠. 괴주사령이라 불리는 분이 그리 경박해서야.”
슈펠이 쥬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인 네놈과 달리 나는 못 배웠거든. 신경 꺼.”
“지금이라도 배우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의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당신도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 말하니까 더 막 나가고 싶은데?”
“…….”
두 사령술사는 서로를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고, 레시아는 익숙한 모습인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는 몰랐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쩍이고 있다는 것을.
* * *
라온은 천장에 선 채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슈펠과 쥬란이 여기에 있었나?’
옥면괴령 슈펠은 괴주사령 쥬란은 모두 수십 년 전에 이름을 떨쳤던 고위 사령술사다.
둘 다 보이지 않기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 숨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런 고위 사령술사를 둘이나 부리다니, 짜증이 나지만, 데루스 로베르트의 능력만큼은 진짜였다.
‘그건 그렇고, 이틀 뒤에 많은 보급이 온다고 했지….’
그 보급이 일반적인 식량이나 무구 일리가 없다. 실험체 이야기까지 나온 것을 보면 분명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때 치는 게 가장 좋겠군.’
보급을 모두 받은 이후에 이 공장을 습격한다면 데루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화가 나도 참을 때였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레시아는 두 사령술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라온은 그녀를 따라 방에서 나온 후 공동의 전경을 다시 살폈다.
‘고수는 많지 않지만, 암살자의 격이 높은 놈들은 많아.’
지금 공동에 보이는 사람은 사령술사뿐이지만, 실제로는 그들보다 많은 숫자의 암살자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을 전부 파악해야 해.’
정면에서 싸우게 될지 암살로 겨루게 될지 모르기에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이용하여 기감을 극대화했다.
어디에 어느 정도 실력의 암살자가 숨어 있는지, 은신 마법과 보호 마법은 어느 곳에 설치되어 있는지를 세세하게 파악했다.
라온은 공동 전체를 이곳에서 사는 암살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조사한 후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밑도 비어있군.’
천장에 새겨진 은신 마법이 밑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건지 지하에 다른 공간이 있는 게 느껴졌다.
안내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우측 벽으로 움직이는 중년의 사령술사 하나가 보였다. 그가 벽을 조작하자, 밑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렸다.
‘역시 저쪽이로군.’
사령술사의 뒤를 따라갔다. 공장에서 이곳까지 내려온 것과 달리 계단은 많지 않았고 굉장히 넓었다.
사령술사는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익숙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양옆으로 사람들이 철창에 갇혀 있었는데, 전부 숨이 끊어졌는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자를 능욕하다니, 마계에서도 욕을 먹는 짓이니라!
라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아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독한 놈들!
‘네 말대로 인간이 마족보다 사악할지도 모르겠어.’
라온은 라스에 분노에 공감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라.”
사령술사가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두 명의 암살자가 바닥에서 솟구쳤다.
“재료는 얼마나 남았지?”
“지금 살아 있는 건 없고, 죽은 것만 마흔넷입니다.”
암살자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재료는 사람을 말하는 거였군.’
살아 있고, 죽었고를 말하는 것을 보니, 놈들은 인간을 실험 재료로 여기고 있었다.
‘후우….’
당장 때려죽이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서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힘을 주었다.
“이틀 뒤에 대량의 보급이 들어온다고 한다. 반절은 위로 올려.”
“알겠습니다.”
암살자들이 철창을 열고 손짓하자, 시체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와 흐느적거리며 섰다.
‘움직인다고?’
시체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눈동자가 움직였고, 악취도 나지 않았다. 사령술로 조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독하군.’
이곳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악귀들의 둥지였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정보를 모았다.
사령술사는 시체들이 걸어서 계단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는 내려온 계단이 아니라, 반대편 통로로 걸어갔다.
라온은 시체가 아니라, 사령술사의 뒤를 쫓았다.
사령술사는 본인에게 이동속도 증가 마법까지 걸어서 한참 동안 걸어간 후 파헤치다 만 듯한 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벽에 손을 얹고 마나를 주입하자, 천장이 갈라지고, 물에 비친 듯한 흐릿한 밤하늘이 드러났다.
“지겹군.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사령술사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연초를 피기 시작했다.
라온은 사령술사의 감각에 잡히지 않도록 더욱 기척을 죽인 채 위를 올려보았다.
‘여기는….’
그 호수?
위치로 볼 때 하로 산을 지나가자마자 나타났던 이름 모를 호수 같았다.
‘여기였군.’
이곳으로 물자를 운반한 거였어.
호수의 중심에 보급로를 만들었으니, 누구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모였으니….’
투명해진 밤하늘을 담고 있는 라온의 눈동자 위로 붉은 벼락이 번쩍였다.
‘이틀 뒤에 끝을 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