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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30화 (529/653)

제530화

라온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뇌리에 떠올랐던 작고 아담한 마을 전경과 달리 캐폴리 마을은 세련되면서도, 큼지막한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소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흐릿한 기억 속 마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캐폴리 마을을 굽어보는 것처럼 솟구친 산등성이의 형태와 그사이에 걸린 듯한 노을은 갑작스레 피어난 기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다른 사람이 그린 서로 다른 그림이 하나로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확실해….’

라온이 퍼렇게 질린 입술을 내리눌렀다.

‘여긴 내가 살았던 마을이야.’

계곡에서 발장구를 치면 흙탕물이 치솟듯이 기억의 바다 깊은 속에 잠겨 있던 전생의 과거가 천천히 떠오른다.

이곳은 내가 납치되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 분명했다.

‘그래서 모든 게 익숙했던 거였어.’

수화객을 조종하던 시리스의 입에서 캐폴리 마을이 튀어나왔을 때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이곳으로 오며 자연스레 오솔길을 걸었던 것도,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산등성이를 보고 확신을 얻을 수 있던 것 모두 내가 이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으윽….’

강한 두통과 함께 새로운 기억이 뇌리를 자극한다. 젊은 남녀. 전생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드러나는 건 손과 입뿐인데, 두 사람의 손길은 굉장히 딱딱했고, 입가는 화가 난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어서 어머니가 나를 업은 채로 오솔길을 뛰는 모습이 떠오른다. 걸음이 거칠었다. 내가 다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

라온이 이마를 감싸 쥔 채로 낮은 탄식을 흘렸다.

‘납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팔렸던 건가.’

부모에게 버림받은 게 아니라, 그림자에게 납치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역질이 나온다. 괜히 이곳에 와서 더러운 기억을 보았다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개미가 심장을 갉아 먹는 것처럼 속이 아려왔다.

‘빌어먹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가 불편하시오?”

라온이 황급하게 등을 돌렸다.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허리를 굽힌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반인이 다가왔는데도 몰랐다니….’

노인에게서는 자그마한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학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일반인.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저런 노인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은 위장하고 있는 외모에 맞게 중년 남성의 굵직한 음성을 뱉었다.

“흐음, 이곳이 초행은 아닌 것 같구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오솔길.”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조금 전 자신이 지나왔던 오솔길을 가리켰다.

“마을에 처음 온 사람은 넓은 길을 걷지, 저 오솔길을 지나지 않는다오.”

그가 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캐폴리 마을의 촌장. 베루릭이오.”

“발랜이라고 합니다.”

라온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가명을 말하고서 베루릭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우리 마을을 봐서 놀란 것 같구려.”

“그렇습니다.”

베루릭에게서 마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변했지. 조금만 더 있으면 도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오.”

그는 마을 전체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눈짓을 했다.

“캐폴리 마을이 왜 이렇게 커진 겁니까?”

“당연히 철광석 광산 때문 아니겠소.”

“철광석 광산?”

“음? 그것도 모르는 거요? 광산이 발견된 건 한참 전인데….”

베루릭은 본인이 젊었을 때 발견된 광산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 몇 번 와보기는 했지만, 매번 지나가기만 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럼 내가 설명을 좀 해주어야겠구려!”

그는 발전한 마을을 알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일단 들어오시오.”

베루릭은 가볍게 손짓을 하며 먼저 마을에 들어갔다.

라온이 베루릭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쁜 일은 아니야.’

캐폴리 마을에 너무 빨리 왔기 때문인지 아직 암시장의 정보가 도착하지 않았다.

먼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베루릭의 걸음에 맞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 마을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이유는 조금 전에 말했듯 철광석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오. 나도 당시에는 옆 마을에 살고 있을 때라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수십 년이 넘게 지났지.”

“…….”

라온은 베루릭의 말을 들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내가 마을을 나간 이후겠군.’

그 전에 철광석 광산이 있었다면 마을이 그렇게 작고 아담했을 리가 없다. 납치당했든, 팔렸든 그 이후에 광산이 발견된 게 분명했다.

“광산 입구에 있던 철광석은 질이 별로였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상태가 좋고, 매장량도 많아서 조금씩 우리 마을의 이름이 알려지는 중이라오. 얼마 전에는 대륙 중앙에 새로운 거래처도 뚫었지.”

베루릭은 마을이 발전해 나가는 게 기쁜 듯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잘된 일이군요. 그런데 예전에는 다른 마을에 계시다가 어떻게 이곳의 촌장이 되신 겁니까?”

라온은 베루릭에게 관심을 가지는 척하면서 정보를 빼낼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본래 이 하로 산 반대편에 있는 프리실 마을에 살았었소.”

“그런데 왜 여기에….”

“우리 마을이나, 이 캐폴리에 큰 문제가 생겼었거든.”

“문제라고 하신다면?”

“산사태가 일어났소.”

베루릭은 마을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십 년 전에 이 마을과 내가 살던 프리실 모두 산사태 때문에 마을의 절반 이상이 무너졌소. 어른이고 애고 할 거 없이 많이도 죽었고, 지금까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소.”

“아….”

“당시에는 지옥 그 자체였소. 내가 있던 프리실 마을도 피해가 컸지만, 캐폴리는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지. 마을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 떠나려 할 때 우연히도 철광석 광산이 드러났소.”

그는 하로 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광산의 입구를 가리켰다.

“죽은 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산 사람들은 살아야 하는 법. 캐폴리와 프리실의 생존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광부가 되었소. 유화 상단이라는 곳에서 저렇게 공장까지 세워 주어서 모두가 배불리 먹고살 수 있게 되었지.”

베루릭이 마을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공장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도 많았을 테니, 아비규환이었겠군요.”

라온은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은근히 아이에 관해 물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들 대부분이 산사태에 깔렸소. 당시에는 아이의 울음이 아니라, 어른들의 울음만이 가득했지.”

베루릭은 그 지옥 같은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라온이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었다.

‘놈들은 나만 데리고 간 게 아니었어.’

아무리 이런 한적한 마을이라고 해도 많은 아이가 납치된다면 근처에 있는 무가나 왕국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데루스는 아이들을 납치하고, 외부의 조사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산사태를 일으켰던 게 분명했다.

‘악귀 같은 놈들….’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산사태를 일으켜 부모까지 죽이다니, 지옥의 악마들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후욱….”

저절로 입술이 열리고,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만약 이곳에 데루스가 있었다면 참지 못하고 놈에게 덤벼들었을 것 같았다.

“여기네.”

라온이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때 베루릭의 걸음이 멈췄다. 하로 산 초입에 건물 수준으로 큼지막한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게 당시에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위령비이자, 무덤이네. 당시의 생존자들이 직접 쌓았지.”

베루릭은 아련한 눈빛으로 돌탑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로 안타깝게 죽은 이들을 위로할 수는 없겠지만….”

“…….”

라온은 베루릭의 말을 들으며 돌탑에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탑을 만지려 할 때 뇌리에 강렬한 충격과 함께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새로운 기억이 아니라, 이 마을에 오자마자 본 기억이다.

다만 그때와 달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났다.

수염이 짙어서 사나워 보이는 외모지만, 눈매가 부드러운 아버지와 검은 머리칼을 곱게 넘겨 단아한 인상의 어머니. 두 사람의 거친 손길과 굳은 입매는 그대로였지만, 눈만큼은 달랐다.

부모님은 서글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다급함이 피어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후 어머니께 넘겼고, 벽에 걸린 도끼를 들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후 창문을 넘었다. 맨발로 마을 입구를 넘어 오솔길로 들어갔다.

거침없이 뛰는 어머니의 발과 얼굴은 나뭇가지에 스쳐서 피범벅이 되었고, 죽을 듯 탁한 숨을 내쉬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솔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느다란 달을 가리는 검은 그림자가 다가온 순간 그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내 기억도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럼 그 손짓은….’

처음 이 마을에 와서 보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딱딱한 손짓과 굳어진 입매 그리고 숲을 뛰는 거친 걸음은 모두 데루스의 부하들에게서 나를 살리기 위한 모습이었다.

나는 버려지지도, 팔리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본인들이 죽을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나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했다.

가라앉는 두통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

두 사람이 불렀던 나의 이름. 온화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다정한 이름.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나의 이름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는 선명한 기억을 끝으로 뇌리에서 피어났던 과거의 기억들이 모두 가라앉았다.

다시 돌탑이 눈에 들어온다. 전신에 힘이 빠진다.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팔다리가 흔들렸다.

라온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도록 혀를 씹으며 두 손을 모았다.

‘어머니, 아버지.’

복수하겠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곳에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죽은 이들의 위로는 나중 일이다. 지금은 자식을 잃어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에게 복수를 맹세할 때였다.

“고맙네.”

베루릭이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들도 자네에게 고맙다 여길 게야.”

그는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도를 했다고 생각한 듯 만족스러워했다.

“더 궁금한 건 없나? 다들 아는 이야기들이지만, 오랜만에 입을 좀 풀었더니, 이 늙은이도 기분이 좋아.”

베루릭은 라온이 만들어낸 발랜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일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이곳의 공장이나 광산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오, 정말인가?”

베루릭은 일을 하고 싶다면 본인이 소개해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던 게 점수를 딴 것 같았다.

“일단 제가 원래 가기로 한 마을의 지인에게 말을 해주어야 하기에 오늘은 둘러만 보고 싶습니다.”

“이곳에 오면 후회하지 않을 걸세. 곧 도시가 될 테니까.”

그는 빠르게 손짓하며 먼저 공장으로 들어갔다.

“어? 촌장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소?”

용광로 앞에 서 있던 공장 작업자들이 촌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다 들렸네.”

촌장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또 젊은 사람 붙잡고, 수다를 떠셨군.”

“입가가 마른 걸 보니 한참 시달린 모양이네.”

“매주 한 명은 걸리는구만.”

작업자들은 불쌍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예끼! 이 사람들아! 착한 사람에게 뭐라 하지 마!”

촌장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흔들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

라온은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공장을 살폈다.

‘저들은 모두 일반인이야.’

내부에 마나도 없고, 암살자 특유의 움직임도 없다. 말 그대로 이곳의 공장을 유지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공장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리스가 거짓말을 했을 리도 없으니, 이 안에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일으키려고 할 때 좌측에 있던 방이 열리고, 배가 불룩 나온 풍만한 중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

“어 촌장님. 오셨습니까?”

“작업반장. 왜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들어.”

베루릭은 중년 남성을 작업반장이라 부르며 입매를 찡그렸다.

“일이 워낙 많아야죠. 옆에 계신 분은?”

작업반장이 라온을 보며 미소를 흘렸다. 다만 입가와 달리 그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아, 지나가는 길에 잡았네. 오랜만에 입을 좀 털었지.”

베루릭은 본인이 먼저 다가갔다며 씩 웃었다.

“하, 희생자가 한 분 늘었군요.”

작업반장은 촌장의 수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서 제가 더 감사하죠.”

라온은 그런 작업반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시선을 올리는 그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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