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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29화 (528/653)

제529화

라온은 암시장주 로젤린을 보며 눈썹을 내렸다.

“꼭 알려주어야 할 정보라고 하신다면….”

“일단 앉으시죠.”

로젤린은 급할 필요 없다며 쿠베러드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있던 데닝로즈가 반갑다는 듯 눈인사를 보내왔다. 매끄러운 빛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창염마군의 습격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기에 먼저 안부를 물었다.

“라온 님 덕분에요.”

데닝로즈가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이번에도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서로 도운 거니,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일어나서 손을 저었다. 데닝로즈와 암시장은 여러 정보를 아무런 대가 없이 전해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파트너와 같은 관계였기에 저런 인사는 부담스러웠다.

“이 늙은이가 조언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로젤린이 연하게 웃으며 데닝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대에게 빚을 지게 만들었다면 그 대가를 확실하고 빠르게 받아내는 게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은혜를 잊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충고 감사합니다. 다만 데닝로즈 님이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이미 많은 배려를 받고 있기에 괜찮습니다.”

라온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가는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요.”

로젤린의 미소가 진해진다. 본인의 충고를 듣지 않았음에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 아이가 왜 그렇게 라온 님을 챙겨주고, 배려해줬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나도 좀 끌리는데.”

“스, 스승님!”

데닝로즈의 하얀 피부가 주홍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제발 하지 말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이를 먹어도 주책은 여전하구나.”

쿠베러드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게 제 최고의 매력이니까요.”

로젤린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라온이 쿠베러드와 로젤린을 번갈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분은 아는 사이셨습니까?”

“꽤 인연이 길죠.”

로젤린이 쿠베로드의 손등에 그림처럼 새겨진 주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룬 구석에 공방 자리를 내어준 게 저 녀석이다.”

쿠베러드는 식탁 중앙에 있는 고기구이를 한입에 삼키며 시선을 들었다.

“그 구석 자리를?”

“그래. 양아치 같은 놈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한 곳에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구석에 박아두더구나.”

그는 암시장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입매를 비틀었다.

“어머, 전 원하는 대로 해드렸을 뿐인데요.”

로젤린이 본인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손을 저었다.

“후, 난 이만 가보겠다.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나서.”

쿠베러드는 술잔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주점을 나섰다.

“보기보다 배려심이 있으신 분이지요.”

로젤린은 흔들리는 주점의 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쿠베러드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일부러 나가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진짜 대화를 시작해보죠.”

“예.”

라온이 로젤린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희는 라온 님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었어요.”

먼저 입술을 뗀 건 로젤린이 아니라, 데닝로즈다. 그녀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성검련이나, 흑탑에서 찾아올지도 모르기에 라온 님이 이곳에 살아 있다는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죠. 함부로 움직여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데닝로즈는 좋은 의도로 정보를 막았기에 오리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데닝로즈의 외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얼마 전. 아니, 광풍대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이후에 라온 님을 추적하는 단체가 있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서늘했다. 그 단체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체?”

“네. 여러 신분을 이용해서 저희에게 라온 님의 생사와 위치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어요.”

“음….”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디지?’

당장 떠오르는 곳은 다섯이다.

백혈교, 성검련, 흑탑, 백경 그리고 데루스 로베르트. 모두 내 정보를 찾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었다.

“그 단체는 저희에게 정보를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희극제의 백경을 찾아가기도 했고, 본인들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라온 님의 생사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백경에게도 정보를 요청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희극제는 아니다. 백혈교, 성검련, 흑탑, 데루스 넷 중 하나였다.

“혹시 그 단체가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추적에 실패했어요.”

데닝로즈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조직이라 뒤를 잡히지도 않지만, 추적에 성공해도 바로 목숨을 끊어버리더군요. 백혈교도를 보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피가 하얗지는 않았다며 눈매를 찡그렸다.

‘이제 알겠군.’

라온이 낡은 테이블을 내려보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데루스 로베르트야.’

점조직인 것과 추적에 걸리면 바로 목숨을 끊는 것. 데루스가 키우는 암살 단체 그림자의 특성이었다.

‘계속 생사에 관한 정보를 모은다는 건 날 전생의 라온과 동일 인물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라면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데루스는 지독할 정도로 의심이 강한 인간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위험하네. 다만….’

이건 놈의 실수야.

지금 있는 정보로 데루스 로베르트의 본색을 밝혀낼 수는 없지만, 한 번 꼬리가 드러났으니, 암시장이 놈들을 경계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건 훗날 놈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음, 저도 정보를 하나 드려야겠네요.”

라온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데닝로즈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제가 바레네에서 싸운 사람은 성검련주의 제자만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성검련주의 제자를 쓰러뜨리고, 광풍대를 찾아 움직일 때 복면인들에게 습격을 당했었습니다.”

“아, 그건 알고 있어요.”

데닝로즈는 이미 그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들이 죽은 시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시, 시체요?”

그녀는 복면인들이 시체일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시체라….”

암시장주 로젤린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라온은 수화객의 정보를 암시장주와 데닝로즈에게 풀어주었다.

“하, 시체술사도 아니고, 뭐 그런….”

로젤린도 수화객 같은 존재가 세상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제 생각이지만, 암시장에 제 정보를 요구했다는 자들과 그 시체를 다룬 이들이 한패가 아닐까 합니다.”

라온은 두 세력의 접점을 이어서 암시장이 조금이라도 데루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 참….”

로젤린이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저희가 정보를 드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받아서 가게 되었네요.”

그녀는 일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시종일관 여유 있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온은 로젤린, 데닝로즈와 차례로 눈을 마주했다.

“네. 뭐든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데닝로즈와 로젤린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이 정보는 누구에게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가능할까요?”

“암시장주의 이름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로젤린은 데닝로즈와 함께 본인의 목숨이 날아가도 오늘의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며 맹세했다.

“사실 제가 그 시체를 조종하던 놈에게 정보 하나를 얻었습니다.”

“정보?”

“좀비 암살자를 어디서 만드는지에 대한 정보였죠.”

“그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걸 왜….”

데닝로즈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살하려는 자에게서 정보를 빼낼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로젤린은 데닝로즈와 달리 단숨에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거기다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의심과 위험도 회피할 수 있겠고.”

“맞습니다.”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기회야.’

캐폴리 마을에 있는 수화객 공장을 부수게 되면 내가 그림자들의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정보를 데루스에게 알리게 된다.

놈이라면 인간의 뇌를 개조해서라도 정보가 빠져나갈 수 없게 막을 테니, 큰 손해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암시장이 그 공장을 찾아내게 된다면 놈의 견제 방향은 내가 아니라, 암시장을 향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내 정보를 숨길 수 있게 되기에 꼭 이뤄져야 할 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암시장주는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그럼 실제 라온 님은 캐폴리에 가시더라도, 정보상 계속 이곳에 있는 것으로 되어야겠군요.”

데닝로즈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암시장주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그녀 역시 뛰어난 인재였다.

“맞습니다.”

라온이 두 사람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데루스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수화객 공장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보죠.”

암시장주는 본인들이 추적해서 캐폴리 마을에 다가가게 되는 방법을 만들겠다며 자신에 찬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를 믿고 좋은 정보를 주셨으니, 신뢰할 수 있게 준비할게요.”

그녀는 믿어달라고 말하며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 알려드려야 할 정보가 하나 더 있어요.”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데닝로즈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어디선가 푸른 마왕을 소환한 사람이 라온 님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예?”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생각도 못 한 일이었기에 박동 소리가 밖으로 들릴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와 라스의 관계를 아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글렌이나, 성검련주, 데루스 조차 라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누가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악의적으로 정보를 풀더군요. 정보를 역추적해보려고 하는데, 이쪽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다만….”

데닝로즈가 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저희가 나설 필요도 없이 곧 헛소문이라는 게 드러나겠네요.”

“그게 무슨….”

“광룡 카이바르의 난동은 대륙 전체에 퍼져 있을 정도로 심각했어요. 라온 님이 그런 광룡을 죽여서 용살자라는 이름까지 얻었으니, 푸른 마왕에 관한 소문은 알아서 죽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 그건 그렇겠네요. 음? 용살자?”

“못 들어보셨군요. 검룡이 광룡을 죽이고 얻은 이명.”

데닝로즈가 라온을 바라보며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매섭게 보이던 눈매가 단아하게 풀려 올라갔다.

“용살자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 님의 새로운 이명이에요.”

*     *      *

라온은 암시장주와 데닝로즈를 배웅해준 후 아리스가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라스가 갈매기한테 어죽을 빼앗겼던 곳이었다.

“그렇게 되어서 내가 라온에게 이모 소리를 들었다는 거 아니야! 솔직히 큰 기대 안 했는데, 가슴이 울리더라고. 엄마 소리 이후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아리스의 떵떵 울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을 붉히며 식당 문을 열었다.

“이야, 성공했네요.”

“백검룡. 아니, 용살자에게 이모 소리를 듣다니, 부럽네.”

“이모 소리에 부끄러워한다고? 라온 님도 아직 어리네. 광룡과 싸울 때는 우리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크으, 그게 멋있는 점이지.”

선원들은 아리스의 자랑에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었다.

“이모!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너희 들어봤어? 이모 소리?”

“저는 남자라서 못 듣죠….”

아리스는 식당의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본인이 처음으로 이모 소리를 들었다고 자랑을 하고 있었다.

선원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은 그녀의 성이 지그하르트라는 것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너무도 보기 좋았다.

“후….”

라온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어? 우리 조카!”

아리스가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와서 끌어안으려 들었다. 그 사이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이 그녀의 머리 색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윽.”

라온이 어깨를 돌려서 아리스의 포옹을 피한 뒤에 옆으로 물러섰다.

“어쭈? 피해?”

아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가볍게 발을 구르자, 그녀의 팔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잡았다.”

“아….”

라온은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아리스의 품에 안긴 채 턱을 떨었다.

“지, 지금 공간검을 이용하신 겁니까?”

“우리 조카. 눈도 좋지.”

아리스가 흐느적거리는 머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묘리나 보법 묘리나 비슷하거든. 팔과 다리로 행하는 것만 다를 뿐. 무학을 생활까지 연결시켜야 강해질 수 있어.”

그녀는 주정인지, 가르침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히죽 웃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온은 자신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아리스를 억지로 떼어내면서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럼 나갈까?”

그녀는 분위기를 읽은 듯 어깨에 손을 걸친 채로 식당을 나섰다.

“떠나려고?”

아리스는 조용한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그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암시장주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뭔가 정보를 줬겠지.”

그녀는 술에 취하지 않은 것처럼 이지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도 사정을 묻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하고 싶지만, 안 돼….’

데루스 로베르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칫 잘못 끼어들면 초월자인 아리스도 죽을 수 있기에 그녀에게는 아직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광룡도 잡았으니, 돌아갈 때도 되었지. 실비아의 단전도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네 그렇죠.”

라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리스는 상단전의 구멍이 더 커지지 않게 막아주었고, 드래곤을 잡은 위업으로 그 상처를 메울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이번 사냥에서 얻은 가장 큰 보물인 드래곤 하트까지 넘겨주었다.

아니, 다 떠나서 내게 실비아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평생을 보답해도 모자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라온은 걸음을 멈췄다. 가슴 속에 깃든 진심을 드러내며 머리를 숙였다.

“진지하기는.”

아리스가 가는 웃음을 흘리며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족끼리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음….”

라온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조심히 돌아가고, 다음에 보자.”

“예. 어머니의 단전을 만든 후에 제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아리스의 눈빛에 다시금 장난기와 웃음이 피어났다.

“다음에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보게 될 거야.”

*     *      *

라온은 로젤린이 알려준 암시장의 차원문을 이용해서 캐폴리 마을 근처까지 이동했다.

머리와 눈동자 색을 모두 검은색으로 바꾸고, 여행자처럼 낡은 로브를 두른 채 캐폴리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끄응….

라스가 산과 숲으로 가득 찬 풍경을 둘러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여기는 시골이지 않느냐! 먹을 게 없느니라!

녀석은 구슬 아이스크림은 언제 먹어줄 거냐며 인상을 구겼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스크림으로 파티를 해줄 테니까. 좀 참아.’

아이를 달래듯이 라스의 뱃살을 두드리며 산길을 걸어갔다.

“음….”

라온이 시선을 돌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수십 년 전부터 닦아 놓은 듯한 오래된 오솔길을 걸을수록 가슴이 울렁인다.

꼭 이 길을 걸어본 것처럼 발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분명 처음 오는 곳일 텐데.’

현생은 당연하고, 전생에서도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주변의 풍경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머리도 아프고.’

라온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잡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차원문이 있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캐폴리 마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입구… 아?’

돌탑이 가득한 입구에서 마을 그리고 그 위를 지키듯 솟구친 산등성이를 보자, 꿈을 꾸는 것처럼 희미한 풍경이 뇌리에서 겹쳐졌다.

누구인지 모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인자한 미소 그리고 굴뚝으로 피어나는 따스한 연기가 들불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허억!”

라온이 거친 신음을 토하며 관자놀이를 강하게 눌렀다.

‘이제야 알겠어.’

처음 봐본 이 장소가, 처음 들었던 캐폴리라는 이름이 왜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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