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화
라온이 아리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게 통하겠냐고.’
아무리 글렌이 대륙의 정점에 선 초월자라고 해도 상대는 드래곤 로드다.
드래곤은 인간 자체를 무시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저런 협박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내 할아버지 이전에 본인 아버지잖아!
훨씬 더 가까운 관계면서 본인 아버지가 아니라, 왜 내 할아버지라고 말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싸움이나 준비해야겠… 음?’
다만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드래곤 로드는 당황한 듯 턱을 떨었다.
“…저 인간이 글렌 지그하르트의 손자라고?”
드래곤 로드의 굳건했던 음성이 처음으로 갈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던 거목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
라온이 창백해진 드래곤 로드를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게 통한다고?’
평범한 드래곤도 아니고, 모든 드래곤을 통제하는 드래곤 로드가 글렌이라는 이름에 짓눌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음….”
드래곤 로드가 침음성을 삼키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차례로 살핀 그의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확실히 얼굴과 기질이 비슷하군.”
“내가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겠어. 그의 피를 제대로 이은 손자야. 누구보다 아끼고 있지.”
아리스가 드래곤 로드를 놀리는 것처럼 턱을 모로 틀었다.
“어쩔래? 해볼래?”
그녀는 조금 전처럼 힘 자랑을 해보라며 비웃음을 흘렸다.
“크흠!”
드래곤 로드는 헛기침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고오오오오오!
그는 싸움을 시작하기는커녕 끝없이 퍼져나가던 마나의 파동을 거두었다. 아이카르를 지배하던 강맹한 기파가 숨 한 번 내쉬기 전에 가라앉았다.
“왜 안 와? 대륙을 수호한다며.”
아리스는 도발을 계속 이어가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댁이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와 시체를 가져가는 게 왜 대륙의 균형을 위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일은 해야지.”
“드래곤 하트 안에는 거대하면서도, 순도 높은 마나가 깃들어 있다. 잘못 사용된다면 대륙의 균형에 심각한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
드래곤 로드는 이 와중에도 본인은 세상을 위할 뿐이라고 말하며 입매를 굳게 내렸다.
“그럼 카이바르의 시체는?”
“드래곤의 뼈와 발톱 그리고 뿔을 이용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무구가….”
“그게 대륙의 균형을 위협할 정도야?”
“음….”
아리스의 조롱이 섞인 물음에 드래곤 로드의 달싹이던 입술이 멎었다.
다만 그는 지금도 본인이 세상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고고함을 드러내는 눈빛을 풀지 않았다.
“좋아. 그럼 가져갈 수 있게 도와주지.”
아리스가 팔을 들어 시원하게 뒤로 뻗었다.
“라바윈. 꺼내.”
“알겠습니다.”
라바윈이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그는 무지갯빛으로 번쩍이는 드래곤 하트를 꺼내서 아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본인의 주인을 완벽하게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자, 가져가.”
아리스가 드래곤 하트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으며 가늘게 눈짓했다.
“대신 댁이 이거 가져가면 저 녀석의 할아버지가 다른 드래곤을 찾아가서 목젖을 뽑아 버릴지도 몰라. 한 세 마리쯤 죽겠네.”
그녀는 드래곤 하트 하나를 돌려주고, 세 개를 가져가겠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헛소리!”
드래곤 로드가 아리스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냈다.
“나는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인간을 알고 있다. 그가 그런 일로 움직일 리가….”
“있어.”
아리스가 드래곤 로드의 말을 뚝 끊었다.
“당신 대륙 중앙에서 북멸왕이랑 만났잖아. 그가 왜 그 자리에 나타났는지 알아?”
“그건….”
“당신처럼 마왕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 녀석을 구하기 위해서 온 거라고.”
그녀는 이번에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말이 되는….”
드래곤 로드가 반박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당시에 그자의 움직임은 이상했어.’
글렌 지그하르트는 마왕에게도, 다른 파벌의 인간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성검련주, 백혈교주와 싸우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결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진 검사들을 흔적을 찾았었다.
대륙 전쟁 시절의 글렌 지그하르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가 전과 달라진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른 드래곤을 습격할 가능성도 있어….’
아리스의 말대로 이 금발적안의 인간이 글렌이 아끼는 손자라면 그가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은 피하는 게 옳았다.
“으음….”
드래곤 로드가 지팡이 위에서 흔들리는 손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마지막 경고라고 했었지.’
글렌은 한 번 더 본인의 일에 끼어들면 드래곤과의 전쟁을 치르겠다고 선언했었다.
지그하르트의 다른 이들은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글렌이라는 괴물 하나가 문제였다.
성검련주를 꺾고 껍질을 벗은 그를 죽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허….”
라온은 생각에 잠긴 드래곤 로드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게 통한다고?’
아리스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글렌은 광풍대와 천검대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그곳에 왔지, 나 하나를 구하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짓말이었지만, 드래곤 로드의 표정을 보니, 아리스의 말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무슨 말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냐!
라스가 얼굴을 쭉 빼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왕이 저 반짝이 도마뱀의 목을 뽑아 줄 테니까. 그냥 몸이나 넘기거라!
‘음….’
살짝 끌리기는 했지만, 마왕 강림이 또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었고, 기껏 회복한 상처가 더 커질 게 뻔했기에 라스를 밀어냈다.
“대륙의 균형을 위해서 가져가라고. 여기 있잖아.”
아리스가 드래곤 로드에게 다가가며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를 내밀었다.
확연한 도발이었지만, 드래곤 로드는 반응하지 않은 채 눈매를 날카롭게 좁혔다.
“후우….”
드래곤 로드가 라온을 한 번 보고서 낮은 숨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물러나도록 하지.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의 이름이 언제까지 너희들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왜 그래? 대륙 안 지킬 거야?”
아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쟤 할아버지가 무섭나 보지?”
“…그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싸움을 피하는 것뿐이다.”
그는 드래곤 로드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한 변명을 내뱉으며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우우우웅!
드래곤 로드는 처음 나타날 때처럼 황금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하….”
라온이 드래곤 로드가 사라진 곳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 지금 도망친 거예요? 드래곤 로드가?”
“그래.”
아리스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드래곤 하트를 다시 라바윈에게 넘기며 주홍빛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너도 카이바르를 봐서 알겠지만, 저게 드래곤들의 본 모습이야. 내로남불의 극치지.”
“맞는 말이다. 고이고, 고여서 본인들의 행동이 항상 옳고, 이 대륙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붕어들이다.”
쿠베러드도 드래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깊게 내렸다.
-인간들이 도마뱀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구나.
라스가 아리스와 쿠베러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강하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강해지기 때문에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생물들과 다르니라.
녀석은 이 세계에 전혀 필요 없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라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도 저렇게 추할 줄이야….”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먼저 시비를 걸어 온 드래곤 로드가 조잡한 변명을 내뱉으며 도망친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추한 건 도마뱀들의 기본 특성이야.”
아리스는 앞으로 익숙해지라며 콧잔등을 긁었다.
“그런데 아리스 님.”
“응?”
“가주님을 왜 제 할아버지라고 한 겁니까? 아리스 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게 더 잘 먹히잖아요.”
“저놈에게 경고하는 거야.”
그녀는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경고요?”
“널 건드리면 아버지가 튀어나온다는 경고.”
“그건 허세인데요.”
“허세 아니야.”
아리스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야!
라온이 그 말에 반박하려고 할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다 끝났으니까. 빨리 준비나 해라!
‘무슨 준비?’
-드래곤 구이를 먹자고 말해야지!
라스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정말 죽일 거라며 주먹을 들이밀었다.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서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리스 님?”
“응?”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말해. 웬만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아리스는 말만 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검술 묘리를 알려달라고 하셔도 드리겠습니다!”
쿠베로드와 라바윈도 뭐든 말만 하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드래곤을 구워 먹어도 될까요?”
“어…?”
아리스를 포함한 세 사람은 드래곤 로드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가주전을 수호하는 검사들이 먼지가 떨어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진인가?”
“음, 북방에 지진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을 텐데.”
“그럼 뭐지? 왜 아침부터 계속 건물 전체가 흔들리냐고.”
“이러다가 가주님이 화내시는 거 아니야?”
검사들은 가주전 전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걱정되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로엔은 안색이 굳어진 검사들을 지나서 알현실로 향했다. 그는 흔들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
금빛 옥좌에 앉아 있는 글렌이 왼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 거센 진동에 알현실만이 아니라, 가주전 전체가 지진 난 듯 흔들리던 중이었다.
“…알아 왔나?”
글렌은 로엔을 보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예.”
로엔이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리스 아가씨와 라바윈 그리고 라온 도련님까지 무사히 복귀하셨다고 합니다. 카이바르는….”
“그놈은 됐고! 라온은 괜찮은 건가?”
글렌은 카이바르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예. 오히려 상단전의 상처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카이바르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로엔은 아이카르에서 들어온 보고를 글렌에게 전해주었다.
“큰 역할?”
“라온 도련님이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드래곤 하트를 뽑아? 그 녀석답군.”
글렌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하루종일 진동을 일으켰던 그의 다리가 그제야 떨림을 멈췄다.
“허허허.”
로엔은 그런 글렌이 재밌다는 듯 연한 미소를 지었다.
“크흠!”
글렌은 조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고서 어설픈 핑계를 읊었다.
“그리 보지 말라. 바다에서 문제가 생기면 여러모로 귀찮을 것 같아서 물었을 뿐이다.”
“그 귀찮은 일이 일어날 뻔하기는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는 것도 까먹은 듯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래곤 로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협박을 했다고 하더군요.”
“협박? 무슨 협박! 그 도마뱀이 무슨 말을 했는데!”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와 시체를 내놓으라고 시비를 건 후 주지 않는다면 공격할 기세였다고 합니다.”
“그 망할 놈이….”
글렌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분노가 의념이 되어 펼쳐지자, 가주전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 전체에 거센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도 없이 아리스 님이 잘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로엔이 지금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글렌이 서늘한 눈빛을 일으키며 턱을 매만졌다.
“이 기회에 전부 죽일까?"
진심인 듯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저희 쪽의 피해도 클 겁니다. 오마까지 끼어들 테니, 문제는 더 커지겠지요.”
로엔은 글렌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짧게 분석을 내놓았다.
“로드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고 하니, 일단은 놔두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는 드래곤 로드가 머리를 숙였으니, 한 번만 참자며 미소를 지었다.
쯧.
글렌이 짧게 혀를 차고서 옥좌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라온은 언제 복귀한다지?”
“아리스 님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보고 싶으면 직접 오든가 하라고….”
로엔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쿠웅!
글렌이 본인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길쭉한 다리의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녀석에게 당장 복귀 명령을 내려! 바로 돌아오라고!”
그날 가주전의 검사들은 알 수 없는 진동 때문에 하루종일 오한에 시달렸다.
* * *
아이카르에 축제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물질적인 피해도 컸으며, 복구가 다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장례식에 온 문상객들이 억지로 웃고 떠들듯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산 자를 축복했다.
하지만 축제와 동떨어져 도서관처럼 조용한 곳도 하나 있었다.
쿠베러드가 임시로 사용하던 전함 내부의 작업실.
라온이 용광로에 프라이팬을 올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는 팬 위에 있는 드래곤 고기를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 익는 건데!’
드래곤 고기는 용광로의 열을 이용하여 굽고 있음에도 전혀 익질 않았다. 용광로의 열 때문에 팬이 먼저 녹을 기세였다.
‘이건 고기가 아니라, 광석 수준이잖아!’
속성 저항력이 워낙에 높고, 육질 안에 마나도 가득 차 있어서 용광로의 불도 견디는 것 같았다.
-집중해라! 육즙 다 빠지느니라!
라스는 요리에 집중하라며 뒤통수를 때렸다.
‘빠질 육즙이 없잖아! 구워야 육즙이 나오든 말든 하지!’
-근처에 헬파이어 쓸 수 있는 마법사 없느냐?
‘9서클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흔하겠냐?’
-하여튼 무능한 인간들이니라.
라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럼 네놈의 불을 써라. 시간은 걸리겠지만, 익을 것이니라.
녀석은 용광로의 불에 만화공의 열기를 더하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고기 먹으려고 무학을 쓰는 건 좀….’
-멍청한 놈 같으니. 무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
‘강해지기 위해서지.’
-그럼 강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음?’
-먹어야 하는 것이니라! 결국 이 고기를 먹는 것은 네놈이 무학을 수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개소리하네.’
라온이 한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 맞으니까! 빨리 열기나 보내란 말이다!
라스는 배고파 죽겠다며 홀쭉해진 뱃살을 두드렸다.
‘에휴….’
라온이 눈살을 찌푸리며 용광로의 불길에 만화공의 열기를 더했다.
화아아아아악!
용광로의 불꽃이 확연하게 커졌지만, 그 크기만큼의 화력은 나오지 않았다.
“흐음….”
라온이 불꽃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불꽃과 불꽃이 닿는다고 위력이 강해지지는 않는다는 건가.’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불꽃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용광로의 불꽃과 만화공의 열기는 비슷하지만 다른 흐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흐름을 맞춘다면….’
만화공의 열기를 용광로의 불꽃에 맞춰서 움직이자, 불꽃의 크기는 줄어들고 그 열기는 배 이상 상승했다.
화아아아악!
프라이팬이 녹아내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드래곤 고기의 표면이 아주 천천히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기가 익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였군. 같은 속성이라고 해도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요리하다가 깨달음 얻지 말라고! 뇌에도 칼이 꽂혀 있는 놈아!
불꽃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있을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탁한 숨을 뱉으며 불꽃에 집중했다. 라스의 말대로 육즙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고기를 굽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앙!
아리스가 양손에 술병을 움켜쥔 채 벽에 등을 기댔다. 평소에도 수영복처럼 자유분방한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술에 취했는지 오늘은 더 심했다.
“너 진짜 그거 먹으려고?”
그녀는 드래곤 고기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예. 꼭 먹어야 할 일이 있어서….”
“나도 특이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너 정도는 아니야.”
아리스가 픽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바다 꽃의 시원하면서도, 청초한 향이 느껴졌다.
“설마요….”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무리 특이해도 아리스만큼은 아니라 생각했다.
“이제 익기 시작하는 거야?”
“네. 용광로의 불꽃으로도 안 되어서 제 열기를 더했습니다.”
“도와줄게.”
아리스가 키득거리며 다가와 용광로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무색의 파동이 번지더니, 내부의 열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더 빠르게 익으면서 입맛을 돌게 만드는 향을 풍겼다.
-지금이니라! 버터를 부어!
라스는 옆에 둔 버터를 팬에 올리라며 빠르게 손짓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버터를 덩어리째로 팬에 올렸다.
버터가 순식간에 녹아서 노란 물이 되었다. 조금만 더 놔두면 아예 팬에 눌어붙을 기세였다.
-버터 물에 고기를 적시거라!
‘내가 왜 이걸 하는 건지.’
머리를 비우면서 버터가 녹은 물에 드래곤 고기를 적시고 있을 때 술병을 내려놓은 아리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다.”
“선물이요?”
라온이 손을 멈춘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정을 떠날 때 약속한 거 있잖아.”
“아!”
맨 처음에 아리스에게 씨 서펜트 하트를 요구했던 게 떠올랐다.
‘이제야 어머니의 인공단전을 만들 수 있겠군.’
드레이크 하트는 진즉에 구했지만, 씨 서펜트 하트를 구하지 못해서 답답했는데, 드디어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실비아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실비아를 좋아하나 보네.”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럴 때는 제 나이 같구나.”
“음….”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할 수 없어서 입을 닫았다.
우우우웅!
아리스가 더 짙은 미소를 그리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기대하며 그녀의 손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지갯빛으로 번쩍이는 뼈가 튀어나왔다. 씨 서펜트 하트가 아니다.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였다.
“자!”
그녀는 가져가라는 듯 드래곤 하트를 내밀었다.
“이걸 왜….”
“네 엄마이자, 내 동생의 단전을 만든다며 그럼 최고로 구해줘야지. 어딜 씨 서펜트 따위로!”
라온은 드래곤 하트를 받지 않은 채 입맛을 다셨다.
내 일이라면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실비아의 단전을 이룰 재료였기에 쉽게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냥 주는 건 아니야.”
어색하게 손을 뻗을 때 아리스가 드래곤 하트를 뒤로 뺐다. 그녀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조건이 있지.”
“조건이라면 어떤….”
씨 서펜트 하트 대신 드래곤 하트를 내어준다면 평범한 조건일 리가 없었다. 위험하거나, 험난한 조건이 분명했다.
‘해적단에 들어오라던가, 몇 년 일을 도와달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리스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 조건은 간단해.”
아리스는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활짝 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모라고 불러! 너 살아 돌아오면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아….”
-빨리 이모라고 부르고, 고기나 뒤집어! 다 타잖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