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6화
라온은 자연스레 떠오른 장검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물방울로 이루어진 듯 내부가 투명했고, 바다처럼 물살이 퍼지고 있었다.
검은 모양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저 물의 검에서는 카이바르의 마나만이 아니라, 아리스의 오러 흐름이 함께 느껴지고 있었다
치이이잉!
물의 장검이 느릿하게 가라앉으며 다른 검들처럼 심상의 세계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화아아아아아!
마왕 강림 때문에 생겨났던 균열들이 천천히 차오르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라스가 남겼던 분노의 잔해가 녹아내리며 지끈거렸던 두통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심상의 세계가 마왕 강림 이전처럼 회복되었지만, 아직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쿠우웅!
심장이 터지는 듯한 약동과 함께 심상의 세계가 넓어지고, 새로운 검들이 싹을 틔웠다. 상단전의 성장이었다.
‘회복을 넘어서 성장까지 이루다니….’
지금이라면 이전보다 더 완성도 높은 검계현신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계현신이 다가 아니지.’
라온이 심상의 세계에 박힌 물의 검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간검의 묘리도 익혔으니까.’
저 수검에서 아리스의 오러 흐름이 느껴지는 이유는 카이바르와 전투를 치르며 약간이나마 공간검의 묘리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한다면 공간검을 내 방식대로 운용할 수도 있겠어.’
아리스의 공간검은 일반적인 검술 묘리와 궤를 달리한다. 그 신비로운 검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라온은 전보다 더 활기가 차오른 심상의 세계를 모두 살핀 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아지경이 풀리며 푸른 하늘과 라스의 찡그려진 눈동자가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회복만 했으면 됐잖아! 왜 성장까지 하는 건데!
녀석은 심상의 세계가 확장된 것을 알아차렸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 하트까지 도와주다니! 네놈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것이냐!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느니라!
‘운이 아니라, 실력과 노력이지.’
-닥치거라! 본왕에게 매일 찾아오는 억까를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단 말이냐!
라스는 주둥아리 닫으라며 이를 바득 갈았다.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라온이 머리를 들이미는 라스를 쳐낼 때 라바윈이 다가왔다.
“라온 님.”
그는 몸에 오러를 넣어주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아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은은하게 번쩍였다.
“쟤 완전히 회복했어.”
그녀 역시 심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파악한 듯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너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
라바윈은 누가 이기는 것 따위는 상관없이 라온이 회복되었다는 게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대머리에 수염이 가득한 해적 그 자체인 인상과 달리 지그하르트 소속 무인 중에 가장 선한 사람 같았다.
“쯧, 재미없는 녀석.”
아리스는 라바윈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알고 계셨습니까?”
라온이 앉은 채로 아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상단전에서 강렬한 수기가 요동치길래 당연히 회복할 거라 생각했어. 물론….”
아리스가 열기가 차오른 시선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성장까지 할 줄은 몰랐지.”
“저도 의외였습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라온이 아직도 손에 잡혀 있는 드래곤 하트를 아리스에게 넘겨주었다.
대량의 마나가 치유와 성장을 도와주었음에도 드래곤 하트에는 아직도 파악하기 힘든 수준의 마나가 남아 있었다. 최고의 영약이라는 드래곤 하트다웠다.
“저거나 봐.”
아리스는 드래곤 하트를 라바윈에게 맡기고서 라온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전함을 가리켰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라온!”
전함의 선원들은 지금도 목이 터질 정도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쿠베러드도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손이라도 흔들어줘.”
아리스가 먼저 손을 들어 올리며 시원스레 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영웅이지만, 너는 영웅들의 영웅이 되었으니까.”
그녀는 민망한 소리를 하며 등을 돌렸다.
“음….”
라온은 사람들이 아니라, 잘려 나간 카이바르의 목과 머리를 보았다.
제천검으로 파헤친 검흔을 보자, 힘겨웠던 전투와 그걸 이겨낸 순간이 떠올랐다.
죽어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풍경.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승리지.’
-승리고 지랄이고.
선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미소를 지을 때 라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도마뱀 고기 가져갈 거지? 소금기가 쫙 배어서 간이 필요 없을 것이니라!
라스는 무조건 챙겨야 한다며 군침을 삼켰다.
‘음, 어떻게 하려나….’
-이번에도 본왕을 무시하면 진짜 운다! 정말 울 것이니라!
라온은 조금도 무섭지 않은 협박에 그저 웃었다.
‘그러던가.’
* * *
로베트르 가문의 서쪽을 막고 있는 루샤인 산.
화려하면서도 운치 있는 산 지하로 데루스 로베르트가 들어섰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빛 하나 없는 복도를 걸어 공동 중앙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는 단단한 체형의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데루스는 말없이 턱을 주억이고서 노인의 옆에 섰다. 그의 냉랭한 눈동자 아래에는 10살도 채 되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들이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흐으윽.”
“여, 여기가 어디야!”
“엄마! 아빠!”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아이들은 본인들이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어깨를 떨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210 정도인가?”
데루스는 아이들의 비명 따위에는 감흥 없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그 숫자를 셌다.
“예. 정확하게 213명입니다.”
노인은 낮게 고개를 숙이며 정확한 아이들의 숫자를 말해주었다.
“평소보다 많군.”
“이번에 육황오마와 신주오령 그리고 마왕과 드래곤까지 나온 덕분에 부모를 잃은 아이가 많았습니다. 조금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걸렀습니다.”
그는 사람을 채소나 과일 고르듯 말하며 눈매를 얇게 찌푸렸다.
“확실히 근골들이 괜찮군. 암살자로 써먹기엔 충분해. 무인으로 키우기에 괜찮은 것들도 있고.”
데루스 로베르트는 겁에 질려서 입술이 퍼레진 아이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평소처럼 세뇌부터 진행하고, 이상 없는 것들에게는 레이지 웜까지 먹이도록.”
“알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 소속 교관들이 나와서 아이들을 끌고 갔다.
“다시 이 일을 맡겨서 미안하네.”
데루스가 끌려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노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멍청한 것들을 올려드렸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황송하다는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것이라 말할 때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번들거렸다.
“그럼 부탁하지.”
데루스는 노인에게서 등을 돌려 기둥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는 집무실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는 방으로 들어가 어둑한 색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우우우우.
책장 아래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평소의 시녀 복이 아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쿠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 지그하르트에 관한 소식은?”
데루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여전히 없습니다.”
쿠바라가 부복하며 시선을 들었다.
“지그하르트 내부에서도 별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녀는 지그하르트 영역에서 라온의 이름 자체가 사라졌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죽은 건가….”
데루스는 한참 동안 텅 빈 공동을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수화객 공장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시리스의 실패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선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수화객의 지능과 폭발력을 성장시키는 연구입니다.”
“그쪽에 인원과 자금을 2배로 보내도록.”
“2배 말씀이십니까?”
“조금 과한 투자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게 싸게 먹힐 거다.”
그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대륙에 전쟁의 불씨가 다시 붙을 날이 머지않았어.”
데루스가 빈 잔을 조용하게 내려놓으며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그날, 수화객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 * *
라온은 여덟 척의 전선과 함께 출항했던 아이카르의 항구로 돌아왔다.
반으로 나뉜 카이바르의 시체를 챙겨오느라 복귀할 때는 나흘이 걸렸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광룡을 죽이고 전쟁이 끝났기에 선원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라온이 갑판에 선 채로 항구를 바라보았다. 복구 중인 장벽 앞으로 아이카르에 남았던 주민들이 보인다.
이미 드래곤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사람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무 멀고, 파도가 강해서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환호를 내지르며 울고 웃고 있다는 건 보였다.
“우오오오오오!”
“아이카르다!”
“이제 다 끝났어!”
청풍과 다른 전함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함성을 터트렸다.
-우아아아아아아!
라스도 팔찌에서 튀어나와 항구를 향해 포효를 질렀다.
-드래곤 구이다! 드디어 육포와 나딘빵에서 해방되었느니라!
물론 그 의미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천천히 나아가던 전함들이 항구에 정박하자, 아이카르의 주민들이 귀가 떨어질 듯한 함성을 내질렀다.
“자, 꺼내!”
아리스가 먼저 전함에서 내린 후 손뼉을 치자, 마법사들이 배로 끌고 오던 카이바르의 시체를 들어서 항구에 내려놓았다.
축소 마법이 풀리며 그 거대한 육체가 제 모습을 드러내자, 복구하던 장벽이 다시 무너지고, 항구의 입구가 주저앉았다.
“어억….”
“이, 이게 광룡 카이바르?”
“미친….”
“무슨 생물이 도시만한 건데!”
아이카르의 주민들은 카이바르의 시체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한 크기에 모두가 경악했다.
“이, 이걸 정말 잡은 겁니까?”
“말이 안 돼….”
“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얘가 다 했어.”
아리스가 카이바르의 머리통을 밟은 채로 라온을 가리켰다.
“난 길만 열었고, 이 녀석이 목을 베었 거든.”
그녀는 라온을 칭찬해달라며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역시 백검룡!”
“이제 검룡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그렇지 않나? 광룡을 잡았는데.”
“맞아. 여기 오기 전에는 그랜드 마스터도 이겼다며 새로운 이명이 필요하겠어.”
선원들과 주민들은 라온에게 새로운 이명을 지어주자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오늘은 축제부터 열자고!”
아리스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빨리 술을 준비하라 외쳤다.
저렇게 보여도 아리스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축제를 열어 승리를 축하하고, 동료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 같았다.
라온은 청풍에서 내려서 카이바르의 시체를 살폈다.
4일 동안 바닷속에 잠겨 있었음에도 놈의 육체는 여전히 탱탱했다. 뼈와 살 속에 아직 자연의 마나가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말했잖느냐! 육질이 끈끈하다고! 딱 맞게 절여졌을 테니, 지금 먹어야 하느니라!
라스는 빨리 고기를 구워먹자며 침을 질질 흘렸다.
‘알겠어. 말해 볼게.’
라온이 드래곤 구이를 먹어보자고 말하기 위해서 아리스에게 다가갈 때였다.
우우우우웅!
항구 위로 샛노란 빛이 출렁이며 우아한 자태를 코트처럼 두른 금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어떠한 술식도 없이 허공에 떠 있었는데,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저건….’
어느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초월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였다.
-저놈 그놈이니라.
라스가 노인을 노려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놈?’
-본왕에게 브레스를 쏘았던 빤짝이 드래곤. 그놈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니라!
‘아….’
라스가 백혈교주와 성검련주와 싸우고 있을 때 다짜고짜 브레스를 날렸던 골드 드래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
싸울 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과 아리스, 라바윈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 아려왔다.
“결국 이리 되었군.”
골드 드래곤이 고요하게 땅에 발을 디뎠다. 그는 뜯겨나간 카이바르의 목을 보며 길게 혀를 찼다.
“꼭 이리 했어야 했나.”
드래곤의 건조한 시선이 아리스를 향했다. 공기에 무게가 생긴 듯 어깨가 짓눌린다. 축제에 들떠 있던 항구의 분위기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뭘?”
아리스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등 뒤로 보내며 턱을 모로 틀었다. 그녀는 저 노인이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뭘 이랬어야 했는데?”
“적당히 끝낼 수도 있었지 않나.”
드래곤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그 말은 요 미친놈에게 먼저 했어야지.”
아리스가 발끝으로 카이바르의 시체를 툭툭 걷어찼다.
“얘가 인간을 학살하기 전에 너희가 막았다면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걸?”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서 올라갔다. 열이 차오르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드래곤은 독립적인 존재다. 마왕 강림이나, 균형이 무너질 상황이 아니라면 로드인 내 말에 따를 의무도 없다.”
“그건 당신이 무능한 거고.”
아리스가 드래곤의 지팡이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음….”
라온은 노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노인이 드래곤 로드라고?’
강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드래곤 로드일 줄은 몰랐다. 스멀스멀 피어나던 위기감이 더 짙은 악취를 풍겨왔다.
“드래곤은 세계의 존립을 위해서 힘을 쓰고 있다. 단순한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지. 카이바르는 고룡에 다가가고 있던 지혜로운 자다. 인간을 죽였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드는 드래곤은 대의만을 생각한다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하하하하하!”
아리스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폭소를 터트렸다.
“대의? 그저 광기만 두른 미친 도마뱀이 무슨 대의야. 대륙의 중립자? 대륙의 수호자? 다 개소리야. 너희들은 가진 힘을 주체 못 하는 덩치만 큰 아이들일 뿐이다.”
그녀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는 어려운 말이겠지.”
“입만 열면 개소리를 조잘대네?”
“이미 죽은 동족에 대한 복수는 하지 않겠다. 처음에 말했던 대로 우리는 독립적인 종족이니까. 다만….”
드래곤 로드가 낮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와 시체는 내가 가져가겠다.”
그는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를 내놓으라며 손을 뻗었다.
-저 도마뱀 새끼가 뭐래! 소금에 재워둔 고기는 본왕의 것이니라!
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본왕을 강림시켜라! 당장 목을 꺾어주겠느니라!
녀석은 빨리 몸을 넘기라며 발버둥쳤다.
고오오오!
라온은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고 제천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지랄이 풍년이다.”
아리스가 비웃음을 흘리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카이바르의 시체는 우리 전리품이야. 무엇 하나 넘겨줄 생각 없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드래곤 로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폭발적인 마나의 파동이 번지며 하늘과 바다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동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대륙의 위기를 막기 위한 조치다. 원망하지 말라.”
카이바르와 달리 완벽하게 고룡의 위에 오른 드래곤 로드의 마나 파동이 아이카르를 휘감았다.
벼락과 날씨를 조종하는 골드 드래곤의 무지막지한 기파에 팔과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치사한 도마뱀이….’
드래곤 로드는 동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위기를 막기 위한 조치라 말하면서 복수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드래곤이 아니라 뱀 같은 놈이었다.
“이건 애를 팼더니, 어른이 나온 겪이네.”
아리스가 카이바르의 시체를 다시 발로 차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게 아니라….”
“그럼 우리도 어른을 부를 수밖에.”
“그게 무슨 말이지?”
드래곤 로드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너 쟤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
아리스가 손가락을 들어서 라온을 가리켰다.
“음….”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드래곤 로드가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힐 때 아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쟤 할아버지한테 너희 종족 다 뒈지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해봐!”
“아….”
아리스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양팔을 펼쳤고, 드래곤 로드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