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화
라온은 카이바르의 목에 박아버린 제천검과 진혼검의 기운을 단순하게 터트리지 않았다.
제천검으로는 염룡결을, 진혼검으로는 중천포를 운용하여 파괴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지금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쌍검술. 초월자인 아리스가 감탄할 정도의 검격이 카이바르의 몸 안쪽에서 폭발했다.
쿠아아아아아앙!
폭풍조차 지워버릴 무시무시한 오러의 파동이 사위로 뻗어나가고, 붉은 소나기 같은 핏물이 떨어져 바다를 적셨다.
“크윽….”
라온은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카이바르의 상처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래도 버틴다고?’
광룡 카이바르는 죽지 않았다. 목의 살점과 뼈가 반 이상 떨어져 나갔지만, 완벽하게 꺾이지 않았다.
고룡에 다가간 놈답게 육체의 강도마저 단단한지, 두 검격을 비늘 안쪽에서 맞고서도 버텨낸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내 잘못이다.’
조금 더 위로 갔어야 했어.
카이바르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검격을 날려야 했기에 몸통 바로 위에 있는 두꺼운 목을 노렸던 게 문제였다.
‘빌어먹을….’
반 정도 남은 목을 완전히 뜯어버려서 카이바르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한 번에 너무 큰 힘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라온이 억지로 팔을 들어 올릴 때 카이바르가 지금까지 중 가장 큰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덫에 걸린 맹수가 살려고 발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끄으으윽….]
카이바르는 이대로 죽지 않겠다는 듯 다급하게 바다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그대로 뛰어들었다.
지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치는 방법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못 간다!”
라온이 이를 악물고, 제천검과 진혼검을 카이바르의 상처 옆 생살에 박아 넣었다.
퍼어어어엉!
그 순간 카이바르의 목이 바다에 들어섰다. 거대한 육체의 꿈틀거림과 압력 때문에 제천검과 진혼검을 놓칠 뻔했다.
‘버티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어.’
라온은 카이바르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설화 흡결을 운용하며 놈의 몸에 달라붙었다.
조금 차오른 기운으로 재차 공격하려 할 때 염룡결과 중천포를 맞아서 반 이상 뜯겨 나간 카이바르의 목에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재생 마법? 아니 회복 마법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피가 멎고, 살이 피어나며, 뼈가 재생된다. 놈은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 이렇게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라온이 카이바르의 상처에서 작용하는 마나의 흐름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 정도 술식이라면….’
진혼검에 글래시아의 냉기를 밀어 넣으며 마법 요혈을 발동시켰다.
찌지지지직!
카이바르의 상처를 치유하던 마나 흐름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갈라지며, 다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진혼검을 쥐고 있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되는군.’
여태까지 카이바르가 사용한 마법들은 죄다 8서클이나, 9서클이었고, 그 숫자가 너무 많아 흐름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전 놈이 운용한 회복마법은 마나가 짙을 뿐 술식의 수준이 깊지 못했기에 마법 요혈로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마법 역장? 네놈이 끝까지!]
‘아직 멀었어.’
라온은 진혼검을 비틀며, 제천검의 칼날 위로 만화공의 열기를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앙!
바닷속에서 시뻘건 불꽃이 피어났다 가라앉으며 카이바르의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크어어어억!]
카이바르가 괴성을 지르며 더 빠르게 헤엄쳤지만, 설화 흡결을 전력으로 운용하며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쩌억!
놈이 다시 회복 마법을 시전 하려 들면 바로 마법 요혈을 이용하여 마나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이, 이놈! 대체 언제까지 방해할 것이냐!]
[네가 죽을 때까지.]
라온이 입술을 짓씹으며 제천검으로 만화공 회천을 일으켰다. 검극에 응집된 열기의 구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카이바르의 살과 뼈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퍼어어어엉!
회천이 폭발하며 카이바르의 상처가 더 깊게 찢어졌다.
이제 뼈가 모두 드러났고, 살도 삼 분지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놈의 목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 상태로 버틸 수 있는 거지?’
-육체 내부와 외부에 짙은 마나를 둘러서 목이 꺾이지 않게 조절한 것이니라.
‘아….’
카이바르의 발버둥을 견디면서 공격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것조차 몰랐다.
-저 끈질김만큼 육질도 끈끈했으면 좋겠구나.
라스는 이 순간에도 헛소리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너는 진짜….’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끝이 보이느니라!
녀석은 드래곤 구이를 먹을 생각에 처음으로 응원을 하고 있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힘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우우우우웅!
라온은 다시 재생 마법을 발동시키는 카이바르의 마나를 끊어버리고, 제천검으로 놈의 살을 그었다.
오러가 많지 않아서 칼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 억지로 밀어붙였다.
피이이이잉!
카이바르의 머리 쪽에서 냉기로 이루어진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고등급 마법이 아니었기에 진혼검의 마법 요혈로 막을 수 있겠지만, 회복 마법을 끊기 위해서 진혼검을 뺄 수는 없었다.
‘몸으로 견뎌야 해.’
라온은 찰나의 순간에 가람보법을 체술로 전환했다.
육체를 바람에 휘청이는 갈댓잎처럼 움직이며 쇄도해오는 마법들을 회피했다.
찌지지직!
옷이 찢어지고, 살이 파여 나가 핏물이 번졌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다.
‘체력까지 떨어지고 있어.’
빨리 끝내야 해.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제천검의 칼날 위로 글래시아의 냉기를 일으켰다.
찌지지지직!
카이바르의 살과 비늘이 거의 남지 않았다.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크으으으으!]
카이바르가 탁한 신음을 흘리며 멈춰 섰다. 놈은 이쪽을 보며 아리스의 검흔이 새겨진 아가리를 벌렸다.
[꺼져라!]
바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퍼져 나온 용언. 설화 흡결과 육체의 힘으로 버티고 있음에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다.
역시나 용언. 무시무시한 강제력을 발휘하는 힘이지만, 놈도 많이 지쳤기에 아리스에게 쏘아낼 때보다 그 위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버틴다. 버텨야 해!’
이대로 밀려 나간다면 카이바르는 육체의 상처를 모두 회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목숨을 바쳐서 싸웠던 동료들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쿠구구구구구!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영혼의 격을 끌어 올렸다. 지금까지 쌓았던 위업과 마왕의 감정들이 하나의 의념이 되어 육체에 가해지는 강제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절대 떨어지지 마!’
라스는 용언과 언령에서 버티는 방법은 본인에게 반대의 의념을 두르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의념을 맹세처럼 읊으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튕겨 나가라!]
카이바르의 용언이 이어졌다. 놈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에 마법의 위력이 더 강해졌다.
‘누구 마음대로!’
라온이 볼 안쪽 살을 피나도록 씹으며 버텼다.
[좀 가란….]
[너 푸른 마왕을 두려워하고 있지?]
카이바르의 용언이 이어지려고 할 때 라스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푸른 마왕이 대륙 중앙에 나타났는데, 여기서 인간이나 죽이고 있다는 건 그자를 두려워한다는 거잖아!]
라온은 카이바르를 자극하여 용언을 막은 후 쌓아둔 기운을 터트릴 준비를 마쳤다.
[또 당할 줄 아느냐! 멈춰라!]
하지만 카이바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용언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후 마법을 쏟아냈다. 이 와중에 저 수준의 마나를 운용하다니, 적임에도 대단한 놈이었다.
‘그래도….’
버텨야 해.
마음속으로 악을 지르며 움직이지 않는 육체에 의념을 휘감았다. 굳어버린 팔다리에 활력을 일으키며 제천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어,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가!]
카이바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길쭉하게 찢어진 눈동자를 떨었다.
[약자에게나 강한 척하는 쓰레기 도마뱀. 여기까지다!]
라온은 흔들리는 광룡의 눈을 보며 제천검을 더 깊게 찔렀다. 물에 잠긴 칼날에서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열화의 광휘를 일으켰다.
만화공 백화.
염룡결.
카이바르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만화공의 검술이 해저 속에서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쿠와아아아아아!
화룡의 숨결이 수룡의 목을 물어뜯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던 놈의 뼈와 살을 으깨버렸다.
[크어어어억!]
하지만 카이바르는 목과 몸통이 분리되었음에도 죽지 않았다. 턱 아래에 있는 가는 목에서 거대한 마나가 움직이며 놈의 숨을 억지로 붙여놓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인가?’
라온이 부러진 카이바르의 목에 제천검을 박아 넣었다. 놈의 목을 타고 달리며 아리스가 새겼던 검흔을 따라 제천검을 그으며 달려 올라갔다.
쩌저저저적!
카이바르의 목을 타고 질주한 후 가장 짙은 마나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턱 밑의 비늘을 향해 서리연을 찔러 넣었다.
파아아앙!
놈의 살이 찢어지며 무지갯빛 마나를 휘감은 둥그스름한 뼈가 드러났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생명이라는 마나의 응집체였다.
[그, 그만!]
육체의 재생에 집중하던 카이바르가 비명을 질렀다.
[내, 내가 잘못했다! 그만해다오! 제발!]
[…정말인가?]
라온이 드래곤 하트를 손에 움켜쥔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다시는 인간을 죽이지 않으마. 아니, 절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
카이바르는 앞으로 둥지에서 나오지 않겠다며 살려 달라 외쳤다.
[좋은 생각이다. 다만….]
라온이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드래곤 하트를 부러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넌 그 말을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했어야 했어!]
얼마 남지 않은 오러와 근력을 모두 발휘하여 카이바르의 살에 파묻힌 드래곤 하트를 그대로 뽑아버렸다.
푸카아아아악!
카이바르의 살과 핏줄이 폭발하듯 터지고, 바다가 붉게 변한 것처럼 핏물로 젖어들었다.
‘허억….’
라온은 드래곤 하트를 손에 쥔 채 바다로 가라앉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끄어어어어어….]
카이바르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낮은 신음을 흘리며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나, 나는….]
놈은 유언조차 내뱉지 못하고, 눈동자의 빛을 잃었다. 더는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질긴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하아….’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팔다리에 힘이 없다. 기절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못 나가면 이대로 죽….’
생을 잃은 카이바르의 몸체에 등이 닿는 게 느껴졌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노을빛 머리카락이 출렁이는 아리스와 머리가 반짝이는 문어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는 않겠네.’
라온은 전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긴장을 풀었다. 이쪽으로 헤엄쳐 오는 아리스와 문어. 아니, 라바윈에게 손을 흔들었다.
‘끝났습니다.’
* * *
“크윽….”
쿠베러드가 갑판의 난간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카이바르는 아리스와 라온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맞은 후 드래곤의 자존심조차 버리고, 바닷속으로 도망쳤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일단 물러나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라온은 카이바르의 살에 검을 박아 넣고 놈을 따라갔다.
태풍을 맞은 듯 솟구치는 해일에 두 척의 전함이 뒤집혔다. 라온과 카이바르는 바닷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무시무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스와 라바윈이 약간의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라온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들어갔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죽는다면 발칸 녀석을 볼 낯이 없다. 제발….’
쿠베러드가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한 바다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살아서만 돌아와 다오!’
본래 이 싸움은 라온의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라온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지그하르트로 돌아갔어도 되었다.
미래가 창창한 어린 녀석에게 이 처절한 싸움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에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으….”
“라온 님.”
누란과 모린은 라온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듯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두 아이만이 아니다. 모든 전함의 선원들도 라온과 아리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파아아아아!
크게 출렁이는 물결 소리만이 침묵을 지우고 있을 때 바다의 중앙이 폭발한 것처럼 솟구치며 카이바르의 머리가 드러났다. 입술과 눈꺼풀 부근에 깊은 검흔이 새겨져 있었지만, 아직 건재해보였다.
“카, 카이바르….”
“으아아아악!”
“도, 돌아왔어!”
“그럼 다른 분들은….”
“아아….”
전함의 선원들은 전투를 치르며 더 흉악해진 카이바르의 얼굴을 보며 겁에 질린 듯 주저앉았다.
“아….”
쿠베러드 역시 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럼 라온과 아리스가….’
죽었다는 건가?
카이바르가 다시 올라왔다는 건 라온과 그를 구하러 갔던 아리스와 라바윈 모두가 죽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죽는다는 절망보다 허무하게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속이 아려왔다.
“미안하다….”
쿠베러드는 모린과 누란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죽더라도 두 아이에게 고통에 없기를 바라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카이바르는 공격은커녕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고개를 돌리자, 카이바르의 목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놈의 목에는 거친 붓으로 선은 그은 것처럼 사나운 검흔이 새겨져 있었고, 중간쯤에 폭발이 난 것처럼 파헤쳐진 상처가 있었다. 드래곤 하트가 있는 부위였다.
“서, 설마!”
쿠베러드가 벌떡 일어나자, 반대로 카이바르의 얼굴과 목은 힘을 잃고 기울어졌다.
퍼어어어엉!
카이바르의 목이 뜯겨 나간 채 바다 위로 떠올랐고, 배가 뒤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일어난 후 수평선을 가릴 듯한 카이바르의 몸통까지 솟구쳤다.
라온과 아리스, 라바윈은 목을 잃은 카이바르의 몸통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 목이 아예 떨어져 나간다는 건….”
“죽었다는 거지.”
“주, 죽었어! 광룡이 죽었다고!”
선원들은 주저앉은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이제 다 끝났어!”
사람들은 광룡을 죽인 승리의 환호와 함께 죽은 자들을 위로할 진혼의 함성을 터트렸다.
쿠베러드는 바다를 들썩이게 만드는 인간들의 포효를 들으며 라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 * *
“허억….”
라온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짠물을 뱉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잘 끝나서 다행이야.’
카이바르는 그 악명만큼 강하면서도, 끈질긴 놈이었다. 최강의 종족이라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도망칠 정도의 녀석이었기에 체력과 정신이 조금만 흐트러졌어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수고했다.”
아리스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끝을 내려고 했는데, 결국 네 손에서 끝났구나.”
그녀는 아쉬움이 아닌,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라온 님!”
라바윈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이 라바윈!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제게 주인이 없었다면 평생 라온 님을 따랐을 겁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먹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아리스 님이 다 양념을 쳐주신 덕이죠.”
라온이 힘없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겸손 떨 필요 없어. 저건 네가 한 것이다.”
아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반 토막 난 광룡 카이바르의 시체를 가리켰다.
라온은 생기를 잃은 카이바르의 눈을 보고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흐흐흥!
빠르게 체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숨을 고르는데, 라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닷물에 잠겨 있으니, 간은 따로 할 필요도 없겠느니라!
라스는 돌아가서 바로 구우면 될 것 같다며 히죽였다.
‘진짜 질린… 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라스를 밀어낼 때였다.
고오오오오!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던 카이바르의 드래곤 하트에서 거대한 마나가 밀려들어왔다.
그 순도 높고 광대한 마나는 순식간에 전신의 마나회로로 퍼지며 하단전과 중단전에 기운을 불어넣고, 상단전으로 흘러들어 갔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눈꺼풀을 내리 감고, 심상의 세계에 집중했다.
심상의 세계를 냉랭하게 얼려놓았던 라스의 순수한 수기에 지워지고, 끝이 보이지 않던 시꺼먼 구멍에 푸른 물이 차오른다. 금이 갔던 땅이 차오르고, 대지에 박혀 있던 검들이 새로운 빛으로 번쩍였다.
끊임없이 뇌리를 자극하던 냉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자, 몸을 억죄는 듯한 쇠사슬이 모두 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우우우우웅!
라스를 강림 시킨 이후 사라졌던 신검과 마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보는구나.’
찬란하면서도 섬뜩한 검날을 보며 미소를 지을 때 막혀가던 구멍에서 물로 이루어진 듯한 푸른빛의 검이 떠올랐다.
‘저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