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23화 (522/653)
  • 제523화

    쿠와아아아!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며 솟구친 건 광룡 카이바르가 아니라, 씨 서펜트였다.

    다만 평범한 씨 서펜트와는 달랐다. 쿠베러드의 무기에 얻어맞고 도망친 놈보다 머리와 몸통이 두 배가량 큰 킹 씨 서펜트였다.

    놈은 바다의 악마라는 이명을 가진 몬스터답게 강대한 위압감을 뿌렸다.

    라온이 장창보다도 길쭉하고 두꺼운 킹 씨 서펜트의 독니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맞아. 저놈이 있다고 했었지.’

    라바윈이 적들의 전력에 대해 말해줄 때 킹 씨 서펜트가 있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몬스터들이 밀리니 숨어 있던 놈이 직접 움직인 것 같았다.

    “아….”

    “키, 킹 씨 서펜트!”

    “무슨 몬스터의 크기가 저 모양이야!”

    선원들은 킹 씨 서펜트의 크기에 놀란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커도 몬스터일 뿐이다! 자리를 지켜라! 이길 수 있어!”

    쿠베러드는 킹 씨 서펜트의 거대한 몸집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주름진 손을 들어 올리며 당황한 선원들을 격려했다.

    후우우웅!

    킹 씨 서펜트가 가볍게 꼬리를 움직였을 뿐인데, 매서운 파도가 몰아친다. 열두 척의 전함이 만들어낸 방어진이 깨질 것처럼 출렁였다.

    “쏴라!”

    쿠베러드의 지시에 선원들이 움직였다. 아직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는지 움직임은 느렸지만, 정확하게 대 몬스터용 무기를 쏘아냈다.

    피아아아앙!

    쿠베러드가 만든 작살과 갈고리가 킹 씨 서펜트의 두꺼운 비늘을 뚫고, 살에 꽂혔다.

    푸른 핏물이 쏟아졌지만, 상처는 깊지 못했다. 크기가 큰 만큼 살과 거죽이 두꺼운 것 같았다.

    “키아아아아아!”

    킹 씨 서펜트가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비늘이 두껍게 차올라 꼭 철퇴 같은 모양새였다.

    “음….”

    라온이 전함에 비치는 킹 씨 서펜트의 꼬리 그림자를 보며 제천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저건 못 막아.’

    라바윈이 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만, 지금 그는 바다 위에서 해무족의 수장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 저것을 막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천검을 뽑으며 킹 씨 서펜트의 꼬리를 막으려고 할 때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출정할 때 영감이 말했지? 우리는 오직 광룡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여긴 우리의 전장이 아니야.”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팔짱까지 꼈다.

    “킹 씨 서펜트의 공격이 온다!”

    “준비해!”

    “마법사들은 위치로!”

    아리스와 생각이 똑같은지 전함에 타고 있는 모든 선원들을 이쪽을 보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본인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결국 킹 씨 서펜트가 칼날 꼬리를 내리친다. 그저 단순한 몸짓이었지만, 그 안에는 태산 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후우우우웅!

    킹 씨 서펜트의 꼬리가 청풍을 쪼개려는 순간 열두 척 전함의 중심에서 반투명한 빛이 뿜어졌다. 마나의 흐름으로 볼 때 실드 마법을 극대화한 것 같았다.

    쿠와아아앙!

    마법사들이 배에 저장시켜두었던 마나의 막과 킹 씨 서펜트의 꼬리가 부딪치며 폭풍 같은 충격이 사위를 휩쓸었다.

    “키이이이이!”

    킹 씨 서펜트가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지만, 전함들을 지키던 실드도 얇은 유리창처럼 깨져나갔다.

    “크윽….”

    “고작 한 번인가….”

    “빌어먹을!”

    마법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단 한 번의 충격에 실드가 깨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지금이다. 모조리 쏟아부어라!”

    쿠베러드는 지금이 킹 씨 서펜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무기를 쏘아내라 지시했다.

    방어진이 깨진 전선들이 몸체를 돌리며 킹 씨 서펜트를 향해 장전해두었던 작살과 갈고리, 해창을 쏘아냈다.

    파아아아아아앙!

    수십 개의 무기들이 빛살처럼 나아가 킹 씨 서펜트의 몸체에 박혔다.

    수많은 무기가 꽂히며 상처가 크게 벌어졌지만, 놈의 크기도 어마어마했기에 죽을 정도도, 힘이 빠질 정도도 아니었다.

    “끼아아아아아!”

    오히려 성질만 건드렸는지 킹 씨 서펜트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작살에 연결된 밧줄들이 당겨지며 전함들이 침몰할 것처럼 흔들렸다.

    “주, 중심을 잡아라!”

    “배를 고정 시켜!”

    각 전함의 선장들은 배와 배를 마나의 선과 쇠사슬로 연결하여 버티려고 했지만, 킹 씨 서펜트 힘이 너무 강했다.

    쿠구구구구!

    열두 척의 배들이 킹 씨 서펜트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바, 밧줄과 쇠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안 된다!”

    쿠베러드는 작살의 줄을 끊자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줄이 끊기면 저놈이 마음대로 활개를 쳐서 다 죽을 것이다!”

    그는 이번이 첫 싸움이 아니었는지, 전장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킹 씨 서펜트는 바다의 악마라는 악명답게 작살에 육체를 제어 당하고 있음에도 억지로 꼬리를 들어 올렸다.

    놈은 막을 새도 없이 가장 우측에 있던 전함을 향해 꼬리를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전함이 반으로 쪼개지며 물에 젖은 종이처럼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모, 몬스터들이 온다!”

    “제기랄! 왜 하필 여기야!”

    “살려줘!”

    즉사를 피한 선원들이 바닷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다.

    하지만 다른 배에서 뻗은 구원의 손길보다 몬스터들의 손톱이 더 빨랐다.

    키아아아아!

    샤크몰이나, 레인 리저드처럼 바다가 제집인 해양 몬스터들이 선원들의 살을 찢고, 뼈를 으깼다.

    “쏴라!”

    쿠베러드는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재장전한 무기들을 쏘아냈다.

    표적이 너무도 크기에 이번에도 작살과 갈고리는 킹 씨 서펜트의 몸에 박혔지만, 놈은 푸른 피만 쏟아낼 뿐 쓰러지지 않았다.

    “키아아아아아!”

    킹 씨 써펜트가 괴성을 지르며 독니에서 검은 구름을 뿜어냈다. 좌측의 전함을 향해 나아가는데, 처음에 쫓아냈던 씨 서펜트의 독 구름보다 더 크고, 속도도 빨랐다.

    우우우웅!

    전함의 노란 철판이 독 구름을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뚫린다. 결국 전함 자체가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뛰, 뛰어내려! 이대로 있다간 독에 죽는다!”

    “크으윽!”

    “빌어먹을!”

    선원들은 배가 녹기 전에 바다나, 다른 배에 뛰어내렸다. 독을 피하기는 했지만, 방어에 균열이 뚫리며 몬스터들이 더 날뛰기 시작했다.

    “큭….”

    라온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아보다 어린아이가 샤크몰의 손톱에 찔려 죽어가고, 글렌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살점이 뜯긴 채 쓰러졌다.

    수많은 가치보다 복수를 중요시하여 이곳까지 달려온 전사들의 삶이 저물고 있었다.

    이번 여정을 걸으며 저들 모두와 얼굴을 마주쳤기에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지만, 참기 힘드네요….”

    암살자 라온이라면 무리없이 버텼겠지만, 현생의 삶을 살며 사람의 가치에 대해 알았기에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참아.”

    아리스가 지금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참아야 해.”

    그녀의 입술이 추위를 타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서글픔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보다 더 심하시겠지.’

    나는 지금 죽어가는 이들과 항해를 시작하고 나서야 만났다.

    하지만 아리스에게는 저들은 직접 받아들인 수하들이다. 그녀가 더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도둑 계집이 제법이구나.

    라스가 아리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본왕은 부하들을 버리는 놈들을 증오하지만, 이것만큼은 저 도둑 계집이 맞느니라.

    ‘…….’

    -도마뱀이 본왕에게는 고기일 뿐이지만, 너희 인간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지. 대비하지 않고 있다간 한순간에 전멸할 것이다.

    ‘알고 있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제천검의 검병을 잡던 손을 내렸다.

    “아악….”

    청풍의 위에서도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쿠베러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누안이 발라스의 녹이 슨 창에 어깨를 찔렸다.

    “누안!”

    모린이 누안을 구하기 위해서 들고 있던 망치를 던지며 달려들었다.

    “크억!”

    하지만 그 역시 아직 무학을 제대로 쌓지 못했기에 허벅지에 창을 맞으며 바닥을 굴렀다.

    유아보다 어려 보이는 두 아이는 가족과 마을을 무너뜨린 광룡이 죽는 꼴을 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곳에 왔다고 했었다.

    그 꿈을 이루기도 전에 죽을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

    쿠베러드는 이제 전략 지시가 의미 없다고 생각한 듯 대형 망치를 집어 들고 아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손이 지쳐서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발라스가 창을 찔러넣었다.

    퍼어억!

    쿠베러드의 허리에 녹슨 창이 박혔다. 다만 그는 그 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 뒤로는 못 간다!”

    전함의 갑판 위가 난전이었고, 몬스터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손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쿠베러드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라온과 아리스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으….”

    라온이 이를 갈며 아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검병에 손을 얹은 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참아. 조금만 참으면….’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억지로 속을 다스릴 때 킹 씨 서펜트가 고개를 쳐들었다.

    놈의 힘이 너무도 강했기에 갈고리에 걸린 밧줄과 쇠사슬이 끊어지고, 전함들이 요동쳤다.

    “키아아아아아!”

    킹 씨 서펜트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시꺼멓게 물든 목구멍에서 독기가 쏟아져 내린다.

    저게 이대로 떨어진다면 배 전체가 녹아내릴 것이다.

    “…….”

    아리스는 이번에도 나설 생각이 없는지 눈까지 내리감았다.

    퍼어어어어엉!

    독 구름이 배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허공에거 거대한 오러가 폭발했다.

    쿠우우우웅!

    킹 씨 서펜트의 머리가 반절이상 날아가며 바다로 추락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큰 파도가 번졌다.

    쩌어어어억!

    사나운 파도와 함께 열 척의 전선 위로 강대한 검풍이 몰아치며 몬스터들을 모조리 갈라놓았다.

    라바윈이다. 해무족의 수장과 킹 씨 서펜트의 머리를 깨부수고 돌아온 그가 아리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늦었어.”

    아리스는 낮은 숨을 내쉬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라바윈이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험난한 싸움을 하고 온 듯 전신이 상처 투성이였다.

    “다시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그는 쿠베러드의 허리에 박힌 창을 뽑고, 가볍게 지형을 해준 후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킹 씨 서펜트는 죽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먼저 구해라!”

    그는 인명구조를 우선시 하면서 바다에 몰려든 해양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쿠구구구구구!

    전함의 선원들이 밧줄을 던지며 물에 빠진 선원들을 구할 때 킹 씨 서펜트가 빠진 바닷속에서 다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오히려 킹 씨 서펜트가 처음 나왔을 때보다 더 거대한 흐름이 일어났다.

    퍼어어어엉!

    해수면이 폭발할 듯 터지며 전함과 비슷한 크기의 다리가 솟구쳤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빨판이 달려 있는 여덟 개의 다리와 칼날이 박힌 것처럼 뿔이 돋아 있는 머리통. 초대형 해양몬스터 크라켄이었다.

    “아….”

    라온이 크라켄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여기서 크라켄이?’

    이번에야 말로 카이바르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왜 크라켄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몬스터들이 다 죽고 있는데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크라켄은 내가 맡는다! 전 전함은 몬스터들을 처리해!”

    라바윈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오러를 끌어 모았다. 그가 검환으로 크라켄의 다리를 찢으려던 순간이었다.

    ‘어…?’

    크라켄 아래의 깊은 바닷속에서 어마어마한 냉기가 일렁였다.

    굉장히 은밀했다. 불의 고리와 글래시아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라온.”

    아리스가 팔짱을 풀고,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눈빛이 섬뜩한 빛으로 번쩍였다.

    “온다.”

    라온이 빠르게 고개를 그덕였다.

    ‘내 감각이 옳았어.’

    바다 깊은 곳에서 광룡 카이바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놈은 크라켄과 다른 해양몬스터를 미끼로 던지고 냉기의 숨결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전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리스와 라스가 옳았다. 만약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치이이잉!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뽑으며 크라켄을 향해 달렸다. 아리스는 이미 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

    크라켄을 잡으려고 나아가던 라바윈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크라켄에 집중하느라 해저의 냉기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설마….”

    “모든 전함을 데리고 후퇴해!”

    아리스가 고갯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라온이 라바윈에게 수고했다는 눈빛을 보내고서 태화보를 밟았다.

    우우우우우웅!

    바다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수면 전체가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바다가 얼어붙으며 물속에 잠겨 있던 해양 몬스터들의 호흡이 사라진다. 조금만 닿아도 영혼이 얼어붙는 죽음의 숨결. 저게 이대로 뿜어져 나온다면 몬스터만이 아니라, 인간들도 전멸이었다.

    치이이이잉!

    아리스가 허공을 밟은 채 발검한다. 무색으로 명멸하는 오러와 의념이 공간을 비틀었다.

    쩌어어어억!

    그녀가 쏟아낸 공간검이 솟구치는 카이바르의 냉기 숨결을 반으로 갈라냈지만, 아직 그 여파가 남아 있었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 모두에 만화공을 휘감았다. 두 자루의 칼날에서 동시에 뻗어나가는 화룡의 숨결이 세상을 집어삼키려던 냉기의 숨결과 맞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냉기와 열기가 해수면에서 격돌하며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바다 전체로 허연 수증기가 돋아난다. 해무족의 안개 그 이상이었다.

    “크윽….”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냉기의 숨결은 드래곤 최강의 공격답게 높은 수속성 저항력을 뚫고 들어왔다. 뼈와 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버틴다!’

    여기서 버티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내가 이곳에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불의 고리를 통해 증폭한 만화공의 기운을 모조리 뿜어냈다.

    가라앉던 칼날 위의 불꽃이 새의 날개처럼 펼쳐지며 솟구치던 냉기를 모조리 녹여버렸다.

    화아아아아아!

    결국 카이바르의 냉기의 숨결은 단 한 명의 인간도 죽이지 못하고, 오직 크라켄과 몬스터만을 얼린 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아직 카이바르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놓고 마법을 폭발시키려는 듯 바닷속에서 강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모두 물러나라!”

    라바윈의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요동치는 바닷속에서 수십 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잉!

    아리스가 바다를 향해 검을 겨눈다. 붉은 칼날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바닷속에서 올라오던 마법들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쿠구구구구구!

    튀어나오기 전에 베었음에도 카이바르의 마나의 순도가 워낙에 강력했기에 바다 안쪽에서부터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두 검을 내뻗었다. 칼날 위로 피어난 은빛 나무 위로 자라난 얼음꽃이 수백 개의 꽃잎이 되어 퍼져나간다.

    서리의 기운으로 펼쳐낸 화령이었다.

    쩌저저저적!

    냉기의 조각들은 벚꽃처럼 가라앉으며 해수면을 얼려서 카이바르의 일으킨 마나 폭발의 위력을 현저하게 감소시켰다.

    “후욱….”

    라온이 거친 숨을 내쉬며 얼어붙은 채 터져나간 크라켄을 바라보았다.

    ‘참아서 다행이야.’

    만약에 킹 씨 서펜트나, 크라켄에게 정신을 팔았다간 놈의 브레스나 마법에 전멸당했을 것이다.

    아리스와 라스의 조언대로 끝까지 버틴 덕분에 광룡 놈의 야비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잘했어.”

    아리스가 믿고 있었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도 못 하면 이곳까지 온 의미가 없죠.”

    라온이 탁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라바윈의 지시에 따라 전함들은 한참 뒤로 물러나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파도가 아니, 이 바다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킹 씨 서펜트나 크라켄과는 차원이 존재감. 온 세계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퍼어어어엉!

    해수면으로 달이 떠오르는 듯 웅대한 그림자가 퍼지더니, 호수에 이지러지는 햇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아….”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게 광룡 카이바르.’

    비늘은 바다를 두른 듯 신비로운 빛으로 번쩍였고, 그 비늘이 둘러싸고 있는 목은 이곳에 있는 범선을 합친 것처럼 두꺼웠다. 왕성의 대로처럼 길쭉하여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천공에 닿은 듯한 목 위로 어류의 지느러미가 칼날처럼 세워져 있었는데, 꼭 예술 작품처럼 고고한 위용이 있었다.

    쿠구구구구!

    카이바르가 목을 굽히며 놈의 머리가 드러난다. 강기도 버틸 듯한 두꺼운 비늘 위로 솟구친 마름모꼴 눈동자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밤이 찾아온 듯 세계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특이한 건 뿔이었는데, 첨탑을 세운 듯한 오른쪽 뿔과 달리 왼쪽 뿔은 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다만 그게 더욱더 놈의 광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게….”

    광룡 카이바르인가.

    아리스가 말했듯이 카이바르의 크기는 인간이 어찌할 수준이 아니었다. 강기를 끝없이 펼쳐도 목을 베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으음, 저 도마뱀 어디서 본 듯한데….

    라스가 카이바르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무시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집중해.”

    아리스가 낮은 숨을 내쉬며 검을 다잡았다. 그녀도 긴장한 듯 눈매를 찡그리고 있었다.

    -어쨌든 고놈 참 살이 실하게 올랐느니라.

    예상대로 라스의 헛소리가 시작되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친 소리였지만, 덕분에 긴장은 풀렸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카이바르가 태양을 향해 포효를 터트렸다. 바다가 짓눌리듯 수면이 내려앉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솟구치며 태양을 지워버렸다.

    너무도 큰 굉음에 고막이 터진 듯 일순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벌레 놈들이!]

    태양을 노려보던 카이바르의 머리가 아래로 향한다. 파충류의 매서운 눈동자가 라온과 아리스를 향해 굽어졌다.

    “음….”

    라온이 손끝을 떨었다.

    ‘용언인가.’

    저 음성 자체에 용언의 힘이 깃들었는지 심장을 옥죄이는 듯한 공포가 스며든다.

    다만 다른 마왕이나, 글렌의 기세를 견뎌보았기 때문인지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벌레가 겁나서 기습이나 하던 도마뱀이 뭐라는 거야!”

    라온이 떨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뇌까렸다.

    “라온?”

    […….]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카이바르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광룡이니 뭐니 하더니, 실제로 보니 찌질한 도마뱀일 뿐이었잖아.”

    라온의 입에서 라스가 튀어나온 듯 거만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이 세계에 위협을 불러오는 벌레들에게 정당함 따위를 챙길 필요는 없다.]

    카이바르의 눈동자에 혐오와 살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네놈이겠지. 도시를 붕괴시키고, 자연을 망가뜨리는 건 네가 한 짓이다!”

    라온은 어금니를 힘주어서 씹었다. 무너진 아이카르에서 수많은 시체를 보았는데, 저딴 말을 하는 것에 분노가 차올랐다.

    [인간. 그놈과 눈이 비슷하군.]

    카이바르 역시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는 듯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놈?”

    [알고 있느냐.]

    놈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던 목을 뒤로 뺐다. 그것만으로 가려졌던 태양이 내려오고, 폭풍이 밀려났다.

    [오직 인간만이 마계의 마왕을 이 땅에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을.]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인간의 좋지 못한 감정이 마왕을 소환한 이야기는 많이 보았고, 옆에는 실제 그 대상이 있었지만, 놈의 말대로 다른 종족이 마왕을 불렀다는 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어쨌다고!”

    아리스 역시 다른 말을 들어보지 못한 듯 눈매를 찡그렸다.

    [오직 인간의 더러운 감정만이 이 대륙의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마왕을 불러낼 수 있다. 그렇기에 네놈들은 이 대륙의 해충이나 마찬가지다.]

    카이바르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기자 웅웅 거리며 진동한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마왕은 전 차원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놈이다.]

    -저 건방진 도마뱀이 뒤질려고!

    라스가 카이바르를 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직접 마왕이라도 본 듯 말하네. 내가 보기에는 네놈이 마왕보다 더 필요 없는 존재다.”

    라온은 라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건 네놈이 마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카이바르의 눈동자가 오싹한 냉기를 뿜어냈다.

    [마왕. 푸른 마왕은 대륙의 균형을 위해 움직였던 나의 동족을 죽이고….]

    놈이 그때를 떠올리는 듯 이빨을 바득 갈았다.

    [그 시체를 구워서 씹어먹었다. 그 순수한 악의, 그 야만스러움을 보지 못했다면 입을 닫아라!]

    “아….”

    라온이 턱을 덜덜 떨며 눈동자를 우측으로 굴려서 라스를 바라보았다.

    ‘저 드래곤이 광룡이 된 이유가….’

    요놈 때문이었어?

    카이바르의 주둥이에서 허연 숨이 흘러나왔다. 분노로 인해 냉기가 저절로 뿜어지는 것 같았다.

    [놈은 동족을 구하려던 내 뿔을 부러뜨리고서 살집을 더 키워서 오면 먹어준다며 조롱까지 해댔다! 그런 놈을 소환하는 인간 따위는 모조리 죽어야 한다!]

    라온은 그 말을 듣고 확신의 턱짓을 했다.

    ‘얘 맞네.’

    이 식충이 마왕 때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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