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2화
라온은 폭풍전야처럼 잔잔한 바다를 보며 뒷목을 주물렀다.
‘조용하군.’
카이바르를 사냥하러 가는 여정은 이상할 정도로 평안했다.
해양 몬스터나, 해무족이 습격해올 만도 하건만, 돌고래나 물고기조차 다가오지 않았다.
‘가만 놔둔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카이바르는 인간들이 본인을 죽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면에서 압도할 자신이 있는 게 분명했다.
‘드래곤이라….’
드래곤을 실제로 본 건 라스를 죽이기 위해서 브레스를 뿜어냈던 골드 드래곤 한 마리뿐이다.
먼 창공을 통째로 가리던 괴물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저절로 말라붙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느니라.
라스가 바다를 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본왕에겐 그저 맛난 고기일 뿐이니까.
녀석은 씹는 맛이 끈끈한 드래곤 구이가 당긴다며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 구이! 드래곤 구이!
라스가 드래곤 구이라는 즉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갈매기에게 어죽을 빼앗긴 이후로 살짝 맛이 갔는데 오늘은 유독 심했다.
다만 녀석의 노래 때문인지 긴장이 풀리고, 드래곤을 잡을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여튼….’
라온이 라스를 보며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아리스와 쿠베러드, 라바윈이 다가왔다.
“그래. 인상 구기지 말고 웃어.”
아리스가 잘하고 있다며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긴장하면 제 실력이 안 나오는 법이니까.”
“저 아이는 너랑 다르다. 알아서 잘할 것이야.”
쿠베러드가 건드리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영감은 내 말에만 트집을 건다니까.”
아리스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작업은 끝나셨습니까?”
“아니, 계속 진행 중이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작업을 하고 왔는지 쿠베러드의 이마와 어깨에서는 더운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테니까.”
그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며 이마를 적시고 있는 땀을 닦아냈다.
“그렇겠죠. 주변의 해양 몬스터가 모조리 모여 있을 겁니다.”
라바윈은 잠을 자지 않고 준비해도 부족할 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다들 열심히 준비하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리스가 빨리 일하라고 외치며 라바윈과 쿠베러드의 등을 두드렸다.
“놀고먹기만 하는 녀석이….”
“나는 그게 준비야. 광룡을 쳐죽일 검술을 갈고 닦는 중이라고.”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튼 말은 잘한다니까.”
쿠베러드가 인상을 찌푸리다가 라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이 녀석과 같다. 준비와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예?”
“몬스터와 백무족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넌 카이바르가 나올 때까지 절대 움직여선 안 된다.”
그는 이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잠깐 조금 돕는 정도라면….”
“네 역할은 따로 몬스터 따위가 아니지 않느냐.”
“맞는 말이야.”
아리스가 낮은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오직 광룡을 상대하는데 모든 정신과 체력을 집중해야 해. 잔챙이들 처리는 동료에게 맡겨야지.”
그녀는 동료라는 단어를 말하며 쿠베러드와 라바윈의 어깨를 잡았다.
뒤에 서 있던 다른 선원들도 아리스의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대를 보는 것 같네.’
아리스와 다른 선원들의 관계는 자신과 광풍대처럼 신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던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본왕의 수하들을 보고 싶군.
라스 녀석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광풍대의 이름을 부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해무족은 조금 걱정되는군.”
쿠베러드가 크게 혀를 찼다.
“그렇지요. 놈들만 없어도 싸움이 훨씬 쉬워졌을 겁니다.”
라바윈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무족….’
라온이 이전에 죽였던 해무족을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이상한 말을 했었지.’
놈은 죽을 때 인간이 이 대륙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지독한 혐오를 드러냈었다.
해무족이 인간을 그렇게 싫어한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의문이었다.
“혹시 해무족이 인간을 싫어했습니까?”
“응? 해무족이?”
아리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무족을 죽일 때 우리가 이 대륙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라온은 모두에게 해무족에게 들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게 카이바르 놈이 항상 하는 말이야. 아마 그 광룡에게 세뇌되었겠지.”
아리스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카이바르는 왜 인간을 싫어하는 거죠?”
“나도 몰라. 다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그녀는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라며 입매를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력이 애매하네요. 이럴 때 시프 님이 계시면 좋을 텐데….”
라바윈이 아쉽다는 듯 햇볕에 반짝이는 민머리를 매만졌다.
“시프?”
“모르는 것이냐?”
쿠베러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내 아들이야.”
아리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예? 결혼을 안 하셨는데, 아들이 있으셨습니까?”
“말했잖아. 연애는 계속했다고.”
그녀가 손을 펼치며 피식 웃었다.
“나도 가문에 별 관심이 없지만, 너도 참 대단하다. 그 녀석 꽤 유명한데. 지그하르트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아!”
라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 글렌의 손자 중에 그런 천재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나도 몰라.”
아리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
“걔 나이가 몇인데, 내가 신경을 써. 누구한테 얻어맞지 않게 잘 키워놨으니, 알아서 하겠지.”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러 가지로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그럼 다시 일들 하자고!”
아리스가 손뼉을 치면서 모여든 선원들을 작업장으로 돌려보냈다.
라온이 갑판에 등을 기댄 채 뒤를 돌아보았다.
청풍의 선원들만이 아니라, 따라오고 있는 전함들의 선원들까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이나, 청년도 많군.’
광룡에게 몰살당한 사람들은 잡일을 자처하며 전함의 선원이 되었다고 했다. 본인들이 죽더라도 가족과 마을의 복수를 원하는 것이다.
성별도, 나이도, 사연도 제각각인 사람들은 광룡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굳건하게 다지며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다.
“후….”
라온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쉴 때 옆으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히, 힘내세요.”
힘내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남아와 여아가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너희는….”
두 아이 모두 도시 복구에 앞장서서 움직였기에 본 기억이 있었다.
“모린입니다. 얘는 누안이라고 하고.”
모린이라는 남자아이가 본인과 여아를 소개했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지?”
둘 다 아주 작은 오러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직 한참 어리다.
유아나 율리우스 정도로 어려 보이기에 배에 탄 이유를 모르겠다.
“저희 마을이 그 개 같은 광룡 놈에게 당했거든요. 제 손으로 복수하고 싶어 태워달라고 부탁했어요.”
모린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안도 마찬가지예요. 이 녀석은 그때의 충격 때문에 아직도 말도 못 하지만….”
그는 누안이 더 심하게 고통받았다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아이는 카이바르가 죽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싶다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라온이 씁쓸한 눈으로 분노에 타오르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래서였군.’
두 아이는 본인의 마을이 무너졌기에 광룡에게 습격당한 아이카르를 누구보다 열심히 도와주었던 것 같다.
“저는 그럴 힘이 없지만 라온 님과 아리스 님은 가능하잖아요. 꼭 부탁드릴게요. 그 광룡을 죽여주세요.”
“…….”
모린과 누안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고서 갑판 아래에 있는 작은 작업실로 들어갔다.
-으흑….
라스가 아이들을 보며 코를 훌쩍였다.
-기특하느니라! 본왕이 보호해주고 싶으니라!
녀석은 당장 카이바르를 잡아서 비늘을 벗기고 싶다며 손을 휘저었다.
‘슬프게도 기특하네.’
라온이 문이 닫힐 때까지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 진심이야.’
전부 진심을 다 해서 드래곤을 잡으려 하고 있었고, 그 결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단순히 명상만 해서는 안 되겠네.’
-어쩔 수 없구나!
라온이 심상 속에서 드래곤을 잡는 연습을 하려 할 때 라스가 펄쩍 뛰며 옆으로 다가왔다.
-본왕이 도마뱀을 잡기 위한 특별 강의를 해주마!
* * *
이틀간의 항해 후.
청풍이 목적지인 카이바르의 둥지 앞에 도달했다. 그 뒤를 따르던 전함들도 약속한 것처럼 멈춰 섰다.
“많군요.”
라바윈이 전방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상상 이상이야….”
쿠베로드가 주름이 진 손을 부르르 떨었다.
“미쳤군.”
“이래서 건드리지 않았던 건가.”
“망할 놈의 광룡….”
두 사람만이 아니다. 청풍의 선원들과 다른 전함에 타고 있던 무인들까지 동요하는 게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라온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저렇게 많을 거라곤 누구도 몰랐을 테니까.
배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평선 앞으로 섬 하나가 솟구쳐 있었다.
당연하게도 저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섬이 아니다. 본래 이곳에 섬 따위는 없으니까.
저건 광룡의 가디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몬스터들의 섬이었다.
샤크몰, 세이렌, 레인 리저드, 발락스, 블로 피쉬 같은 중소형 몬스터만이 아니라, 씨 서펜트나, 루나 웨일, 만타쿤 같은 초대형 몬스터들까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어부들이 만선일 때 바다 반 고기 반이라고 표현하듯 지금은 바다 반 몬스터 반인 괴이한 상황이었다.
‘해무족도 있군.’
거기에 몬스터들 사이사이에 해무족들까지 끼어 있어서 더욱 큰 위압감을 전해주었다.
특히 중앙에 있는 해무족 노인에게서는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저자가 해무족의 수장인 것 같았다.
‘쉽지 않겠어.’
라온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아리스가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왜들 그렇게 놀라.”
아리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양손을 펼쳤다.
“다들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설마 여기까지 와서 쫀 거야? 광룡이 무서워?”
경쾌한 음성과 달리 그녀의 발밑에서는 무거운 기운이 스멀스멀 타올랐다.
고오오오오!
수많은 몬스터들의 존재감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아리스의 패기에 두려움이 휩싸여 있던 선원들의 눈빛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리의 목적은 저딴 몬스터 뭉치가 아니야. 광룡이다. 저런 것에 쫄아서는 아무것도 못 해.”
아리스의 나지막한 외침에 가라앉았던 군기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싸워라. 죽더라도 검과 창을 찔러서 내 앞에 길을 열어.”
그녀가 자신감 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광룡의 목을 베고, 너희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테니까.”
“우와아아아아아!”
선원들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다가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을 터트렸다.
더이상 그들에게 두려움 따위는 비치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광룡을 죽이겠다는 열망뿐이었다.
“가자.”
아리스의 지시에 청풍이 고고한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라 전함들이 초승달처럼 펼쳐지며 몬스터들의 산을 바라보았다.
전함과 몬스터가 마주 보는 기묘한 광경. 화살을 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라바윈이 상갑판으로 올라왔다.
“지금부터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부탁해.”
아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내려갔다.
“포문 개방!”
라바윈의 외침에 전선들의 뱃머리가 길쭉하게 열리고, 두터운 철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베로드와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법포였다.
“발포!”
철포의 주둥이에서 오색의 빛이 응집되며 강대한 섬광을 쏘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
열두 척의 전함에서 동시에 쏘아진 빛의 포탄이 몬스터들의 산을 휩쓸었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며 몬스터들의 섬이 반파된 듯 무너진다. 놈들에게서 흘러나온 붉고 푸른 핏물이 바다에 끝없이 뿌려졌다.
“발포!”
라바윈이 두 번째 포격을 명령하자, 다시 한번 마법포가 찬란한 불을 뿜었다.
콰과과과광!
첫 발사 이상의 충격에 몬스터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녹아내린다.
만타쿤의 몸이 무너지고, 세이렌 수십 마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하지만 아직 몬스터의 산은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발포!”
라바윈이 세 번째 포를 발사시켰을 때 정신을 차린 해무족들이 움직였다.
우우우우웅!
몬스터들 주변으로 회색 안개가 차오르며 포탄의 앞에 두꺼운 벽을 세웠다.
쿠와아아아아아앙!
더욱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죽은 몬스터들의 숫자는 현저히 적어졌다. 안개 때문에 충격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우우우!
늑대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울리며 회색 안개가 더욱 짙게 퍼져나가며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음….”
라온이 안개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움직이고 있군.’
해무족의 회색 안개가 바다로 퍼져나감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물속에서 움직이며 배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라바윈 역시 그 기척을 느낀 듯 표정을 굳히며 검을 들어 올렸다.
“전선 원진!”
“전선 원진으로!”
열두 전함의 선원들은 그의 명령에 복명복창하며 배를 움직였다.
청풍이 중앙에서 자리를 잡아주었고, 다른 전함들은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듯 원을 그리며 전열을 갖췄다.
바다에서 배로 만드는 방어진이었다.
“발포!”
라바윈의 외침에 배와 바다에 거대한 울림이 일어나며 네 번째 마법포가 벼락을 터트렸다.
쿠와아아아아앙!
배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꿰뚫리고 그 뒤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반죽처럼 찌부러졌다.
“다시 발포!”
다섯 번째 섬광이 폭발하며 몬스터들을 다시 한번 학살했지만, 마법포가 그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주둥이가 으깨졌다.
“크으….”
쿠베러드가 철포를 살피며 어금니를 씹었다.
“벌써 찌그러지다니!”
그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 본인의 뺨을 쳤다.
“그 정도면 충분해. 저장해둔 마나도 모조리 썼으니까.”
아리스는 괜찮다며 쿠베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포를 버려라!”
라바윈의 지시에 마법포를 지키던 무인과 마법사들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다른 전함의 무인들도 갑판에 자리를 잡고 긴장이 흐르는 숨을 내쉬었다.
회색 안개가 커튼처럼 내려오며 바다가 다시 잠잠해진다.
아이카르를 뒤덮었던 안개처럼 기척을 죽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고요하다. 전쟁 중이 아니라, 평화로운 밤바다처럼 오싹한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퍼어어엉!
그 잔잔함이 이어지기 무섭게 안개를 뚫고 몬스터들이 튀어 올렸다.
쩌어어어억!
라바윈은 이미 예측한 듯 수평선을 따라 검을 뻗어냈다. 칼날에 깃든 푸른 오러가 만월을 그리며 열두 척의 전선을 향해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일검으로 백이 넘는 몬스터를 베는 무시무시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재차 배 위로 뛰어들었다.
“어딜!”
라바윈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아끼지 않고 오러를 뿌렸다.
해일처럼 뻗어나간 검격에 전함으로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우우우웅!
배로 올라가는 몬스터들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초대형 몬스터 만타쿤과 루나 웨일, 씨 서펜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타쿤이 시야를 가린 채 돌진해오고, 루나 웨일이 아이스 웨이브를 쏟아내며, 씨 서펜트가 독을 뿜어냈다.
치이이잉!
라바윈이 허공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강기가 파도처럼 퍼지며 만타군과 놈들을 보호하던 안개가 사정없이 찢어졌다.
퍼어어엉!
만타쿤의 시체가 배 옆으로 떨어지며 루나 웨일이 뿜어낸 아이스 웨이브를 막아냈다.
두 공격은 막아냈지만, 씨 서펜트의 독 구름은 청풍의 반대편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막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그때 다른 전선에 타고 있던 선장들이 모였다. 그들은 오러와 마법으로 벽을 세워서 씨 서펜트의 독기를 차단했다.
‘다행이군.’
라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까지는 라바윈과 마법포, 각 전함의 선장들 덕분에 피해가 전무 했지만,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후우우우웅!
회색 안개가 크게 출렁이더니, 날카롭게 응집된 칼날의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해무족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치이이잉!
라바윈이 검을 들어 올렸다. 도 이상으로 두꺼운 검날에서 푸른 광휘가 뿜어져 나와 웅대한 검막을 일으켰다.
쩌저저저정!
열두 척의 전선을 향해 쏟아지면 안개의 칼날 비가 모조리 튕겨 나가 바다에 잠겼다. 그랜드 마스터이자, 총사령관다운 신위였다.
후우우우웅!
안개가 다시 한번 요동친다.
이번에는 배 전체를 노리는 게 아니라, 라바윈 개인을 향해 안개의 파랑을 일으켰다. 움직임 자체가 거대하다. 해무족 수장의 기운이었다.
쿠와아아아앙!
라바윈의 강환과 응집된 안개가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쯧.”
라바윈은 몰아치는 충격파를 지워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해무족의 수장을 직접 막으려는 것 같았다.
“백병전을 준비하라!”
그의 외침이 나오기 무섭게 바다에서 몬스터들이 솟구쳤다.
“막아!”
청풍만이 아니라, 다른 전선에 타고 있던 무인 모두가 검을 뽑아 들고, 갑판에 내려선 몬스터들의 목을 쳤다.
하지만 해양 몬스터들은 끝없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몸짓 한 번에 전함을 박살 낼 수 있는 루나 웨일이나, 만타쿤, 씨 서펜트까지 쇄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키아아아악!
근접해온 만타쿤이 몸통으로 달려들려고 할 때 쿠베러드와 장인들이 움직였다.
“쏴라!”
그의 외침에 전함에 고정되어 있던 작살과 갈고리가 질풍처럼 뻗어나갔다.
뻐버버벅!
날카롭게 갈린 대형 무기들이 몬스터들의 거죽을 뚫고 살집에 단단하게 박혔다.
끼아아아아!
몬스터들이 작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쳤지만, 대륙 장인이 직접 만든 무기들은 자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았다.
“지금이다!”
대형 몬스터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전선에 타고 있던 무인과 마법사들이 검격과 마법을 쏘아내 대형 몬스터들의 급소를 찔렀다.
끼이이익!
만타쿤이 추락하고, 루나 웨일이 기울어진 채 가라앉았다.
하지만 씨 서펜트는 갈고리와 창에 꿰뚫린 채로 물러서서 독니를 드러냈다. 검게 물든 독 구름이 다시 한번 뻗어 나왔다.
“저건….”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나서려고 할 때 아리스가 팔을 잡았다.
“아직 아니야.”
아리스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막을 펼쳐라!”
쿠베러드의 외침에 전선의 앞머리에 노란색 철판이 펼쳐지며 밀려들던 독 구름을 차단했다.
철은 녹이 슨 것처럼 시꺼멓게 변했지만, 배 안쪽에는 어떠한 피해도 생기지 않았다.
“다시 쏴라!”
그는 재차 무기의 발포를 명했고, 장창과 갈고리가 씨 서펜트의 눈과 목을 꿰뚫었다.
카아아악!
씨 서펜트는 고통에 발버둥 치다가 독으로 밧줄을 녹여버리고서 바다로 도망쳤다.
“후우….”
쿠베러드가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쪽을 보며 어떠냐는 듯 웃었다.
라온이 마주 미소를 지을 때였다. 처음 몬스터들의 산이 세워져 있던 바닷속에서 거대한 거품이 들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