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라온이 아리스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제가요?”
광룡을 잡는 전쟁을 내 싸움이라 받아들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몬스터와 해무족을 치우는 역할을 맡으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에 손만 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둘이서 카이바르의 목을 베자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너 말고 여기에 누가 있어?”
“해적왕님이 계시잖아요.”
아리스의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라바윈을 가리켰다.
“쟤는 선장이잖아. 카이바르의 둥지를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대장 역할을 해야 한다고.”
그녀는 라바윈은 처음부터 몬스터와 해무족을 정리하는 일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 님의 말이 맞습니다.”
라바윈이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역할은 카이바르를 둥지에서 끌어내는 것. 어찌 보면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라바윈 님의 강환이라면 드래곤의 비늘도 가볍게 뚫을 수 있을 텐데….”
“제 주특기는 방어라서 검술의 위력 자체는 라온 님이 더 강하실 겁니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검의 문양은 없지만, 지그하르트의 인사를 하는 듯했다.
“거기다 아리스 님의 판단대로 카이바르가 우리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그 틈을 찌를 수 있는 건 라온 님뿐입니다. 광룡의 목을 날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라바윈만이 아니라, 청풍에 타고 있던 다른 선원들도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도시에 있던 동료들이 죽었기 때문인지 그들의 눈동자가 불길에 타오르는 듯 보였다.
“라온.”
쿠베러드가 앞으로 나오며 입술을 꾹 씹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도 부탁하마.”
그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타오르는 아이카르의 전경을 보며 하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우우우웅!
쿠베러드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인지 진혼검이 청아한 검명을 일으켰다.
“네 검도 해보자고 말하는 것 같은데. 어쩔래?”
아리스가 선택하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하겠습니다.”
라온은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질 건 없어.’
이번 싸움에서는 드래곤과 놈을 지키는 몬스터들을 모두 잡아야 한다. 그저 집중해야 할 일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시원해서 좋….”
아리스가 손을 들어 라온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멈춰 섰다.
“어깨의 그 갈매기는 뭐니? 키우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온은 멀린이 빙의했었던 갈매기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도 참 특이하네.”
아리스는 헛웃음을 흘리고서 선원들을 보며 크게 손뼉을 쳤다.
“다들 출정 준비해. 곧 유칼 마을에서 전선들이 도착할 테니까. 잘 챙겨주고.”
“알겠습니다.”
라바윈이 당차게 대답하고서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복구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치료와 필수적인 건물의 복구를 지시했다.
“수리는 내가 맡으마.”
쿠베러드는 도시 복구를 담당하겠다고 말하며 망치를 들고 앞장서서 도시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도시로 향했다.
“그럼 넌 나와 가자.”
아리스가 손가락을 까딱이고서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십니까?”
라온이 그 뒤를 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미친 도마뱀을 잡으려면 상의를 해야지.”
그녀는 잔말 말고 오라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음….”
뭉개지고, 피에 젖은 방벽 조각들을 보며 기분이 가라앉을 때쯤 훤하게 트인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아리스는 목적지가 바다였다는 듯 바로 물 위로 내려섰다.
‘상의를 하자면서 바다?’
그런 대화인가?
라온은 아리스의 생각을 읽으며 바다에 발을 디뎠다.
“여기가 좋겠네.”
아리스는 항구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떨어진 후 뒤를 돌았다.
“상의한다고 꼭 입으로 대화 필요는 없지.”
그녀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붉은빛을 띤 칼날이 눈에 띄었다.
“출정 준비가 끝나면 바로 출발할 거야. 입으로 무학적 대화를 나누기엔 부족한 시간이니까….”
아리스는 덤비라는 듯 검지를 까딱였다.
“몸의 대화를 해보자고.”
“후….”
라온이 아리스를 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네.’
아리스가 대화를 하자며 바다로 향할 때부터 그녀가 검을 겨뤄보자고 할 거라 생각했었다.
‘저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
대화만으로 서로의 무학에 대해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광룡을 상대로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직접 검을 나누는 게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끼룩!”
제천검을 뽑자, 어깨에 있던 갈매기가 알아서 날아올랐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불의 고리가 영혼의 격을 끌어 올리자, 아리스의 단전에서 고요하게 들끓고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오싹할 정도로 거대한 오러와 의념이었다.
‘역시 초월자인가….’
글렌 외에 처음으로 보는 지그하르트의 초월자다.
전력을 다해도 옷자락 하나 건들까 말까 했기에 처음부터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살아 숨 쉬는 듯한 냉기가 마나회로를 날카롭게 질주하는 것을 느끼며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가겠습니다.”
“얼마든지.”
아리스가 자연스레 검을 내렸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고아한 자세와 달리 빈틈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쩌저저적!
라온이 글래시아를 폭발시키며 발을 굴렀다. 발밑의 마나회로에서 뿜어진 냉기가 찰나의 순간 바다와 그 위에 선 아리스의 다리를 얼렸다.
“오?”
아리스가 신기하다는 듯 본인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태화보를 밟았다. 정면에서는 승산이 없기에 우측으로 짓쳐 들며 광아검의 초식을 연달아 내리꽂았다.
치이이잉!
매섭게 갈린 세 개의 투로가 아리스의 목과 심장, 어깨를 동시에 노렸다.
“전투가 익숙하네.”
아리스가 빙긋 웃으며 검을 휘돌렸다. 장난을 치는 듯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나아가던 제천검의 앞으로 반투명한 오러의 방패가 솟구쳤다.
쩌저저정!
광아검의 세 초식이 동시에 막혔다. 멀리서 오러를 일으키는 격검이었다.
‘역시 공간에 집중한 검술이야.’
라스가 말해주었듯이 아리스의 장기는 공간을 이용하는 검술이다. 이 정도로 놀라선 안 된다.
차앙!
라온은 물러나지 않았다. 얼어붙은 바다를 경쾌하게 내디디며 아리스에게 접근했다. 상대에게 거리가 의미가 없다면 물러나서 시간을 때울 게 아니라, 더욱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했다.
“좋은 판단이다.”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눈앞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사나운 검격이 쇄도해왔다. 검기나 검강 같은 게 아니다. 아리스의 의념을 담은 검격이었다.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아래에 젖혀둔 제천검을 쳐올렸다. 칼날에서 타오른 불꽃이 굳건한 방패를 이룬다. 만화공 염주벽이었다.
쩌어어어엉!
염주벽과 공간의 검이 맞물리며 바다가 꺼질 것처럼 출렁였다.
라온은 파도를 밟고 오르며 제천검을 내질렀다. 은빛 칼날 위로 불꽃으로 타오르는 가지가 솟구친다.
가지에서 피어난 청초한 꽃잎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정교함은 떨어졌지만, 그 위력만큼은 상승한 화령이 아리스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
“예쁘군.”
아리스는 옅게 웃으며 검을 본인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우우우우웅!
대기가 거세게 진동하며 마나의 흐름이 뒤틀린다. 아리스에게 쇄도하던 불꽃의 조각들은 그녀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다가 사그라들었다.
“음….”
라온이 바다에 녹아내리는 불꽃 조각들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아예 닿지도 않을 줄은 몰랐는데.’
아리스는 공간의 검을 이용하여 화령의 불꽃이 본인에게 닿을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상상도 못 한 방식의 방어법이었다.
다만 절망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신비로운 무학을 통해 새로운 방어법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젠 내 차례지?”
아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검을 뻗어냈다. 그녀 앞의 공간이 비틀어지며 매서운 기파를 두른 검격이 전신을 향해 쇄도해왔다.
‘밀어내는 거야.’
아리스는 조금 전 공간을 조작하여 화령을 밀어냈다. 공간검의 원리는 모르지만, 비슷한 건 할 수 있었다.
우우우웅!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설화 척창을 뻗어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검격이 내게 닿을 수 없도록 밀어내며 우측과 좌측에서 밀려오는 검격은 흡결을 운용하여 더 빠르게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라온은 태화삼보를 밟아서 뒤로 물러나며 척창과 흡결을 동시에 거뒀다.
쿠와아아아앙!
밀려나던 정면의 검격과 빨려오던 좌우의 검격이 서로 맞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바닷물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솟구쳤다.
-네놈….
라스가 끝없이 올라간 파도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지, 지금 본왕의 능력으로 저 도둑 계집의 기술을 따라 한 것이냐?
‘맞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에서 튀어나온 검격이 더 빨랐고, 좌우에서 짓쳐 드는 검격이 조금 더 느렸기에 척창과 흡결을 이용하여 검격끼리 부딪치게 만들었다.
머리에서 그렸던 상황을 실제로 이뤄내니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허, 지금 내 검술을 따라 한 거야?”
아리스 역시 놀란 듯 파도 뒤에서 톤이 올라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라온은 대답 없이 분수처럼 치솟은 바닷물을 박찼다. 바다를 가늘게 긁던 제천검을 사선으로 쳐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은검몽.
제천검의 칼날이 바다의 장대함을 담으며 꿈결처럼 아릿한 선을 그렸다.
치이이이잉!
진검과 허초의 구별을 지워버리는 기습적인 초식이었지만, 이번에도 아리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오러를 운용하여 검 자체가 파고들 수 없는 공간을 만들었다.
“아쉽게 되었네.”
“아직입니다.”
라온이 뒤로 젖혀둔 왼손을 벼락처럼 뻗어냈다. 손아귀에 부드럽게 잡힌 진혼검에서 섬뜩한 냉기가 치솟았다.
치이이잉!
붉은 칼날과 그 뒤를 따라 질주하는 냉기의 칼날이 아리스의 어깨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우우우웅!
하지만 서리연의 두 칼날 역시 아리스를 코앞에 두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칼날이 부러질 듯 진동을 일으켰지만, 그녀의 공간을 갈라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예측했던바.’
아리스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다음 수를 이어갔다.
우우우웅!
라온이 밀려 나가던 제천검과 진혼검을 가운데로 모았다. 제천검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진혼검에서 은빛 냉기가 타오른다.
두 검의 검극에서 열기와 냉기가 응집된 광구가 치솟으며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켰다.
염룡결과 중천포. 위력 자체로는 제일가는 두 검술을 쌍검술의 묘리를 운용하여 동시에 터트렸다.
순간 머리가 쪼개질 듯한 통증이 일어났지만, 불의 고리로 버티며 검격을 끝까지 뻗어냈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힘이 폭발하며 라온의 뒤편에 있던 아이카르에 폭풍이 불어닥치고, 바다 전체가 출렁였다.
“후욱….”
라온이 탁기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미친 듯이 날뛰던 파도가 잠잠해지며 아리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
상처 하나 없다니….
아리스의 연한 구릿빛 피부에는 자그마한 상처 하나 없었고, 의복 역시 찢어진 곳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완벽한 방어를 자랑하던 그녀의 공간에 강맹한 충격으로 인한 틈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고작 저거….’
라온이 입술을 깨물 때 아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 순간 공간을 뚫고 그녀의 검격이 솟구쳤다.
“큭….”
라온은 진천검으로 백영섬을 일으켜 아리스의 검격을 간신히 지워낸 뒤 신음을 삼켰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 해야 저 벽을 뚫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해.”
아리스가 어느새 검을 검집에 넣은 채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이야. 검술의 다채로움, 냉기와 열기를 조화시키는 쌍검술, 그리고 세련된 전투 감각까지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어.”
그녀가 방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특히 전투 감각이 발군이야. 내가 본 무인 중에서는 두 번째라고.”
두 번째라고 하기에 첫 번째가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내 검이 어떤 거 같아?”
“공간을 이용한 검술 같습니다. 도저히 뚫을 길이 안 보이더군요.”
“맞아. 공검을 극대화한 거지.”
아리스가 이마에 닿은 주홍빛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공간검이 습득하기 어려운 검술이라 대부분 보고 놀라기만 하는데, 따라 하는 녀석은 처음 봤어.”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웠던지 흥미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예?”
“내 검술 배워볼래?”
“제가 배울 수 있습니까?”
“기본만 알려주는 거지만, 네가 잘하면 익힐 수 있겠지.”
“그러면….”
“아, 그전에 내 마지막 검도 보여줘야겠지.”
그녀가 다시 검병을 움켜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검계현신.”
* * *
라온과 아리스는 검의 대화를 나눈 이후 유일하게 멀쩡한 식당으로 향했다.
다른 선원들을 이미 밥을 먹고 출정 준비를 하는지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유칸. 지금 남아 있는 거 있어?”
아리스는 점장을 알고 있는 듯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식재료가 다 망가져서 어죽밖에 안 될 듯합니다….”
점장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거면 됐어. 두 개만 얼큰하게 끓여줘.”
아리스는 계속 육포만 먹다 보니 어죽 정도면 진수성찬이라며 손을 저었다.
-어죽?
라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지금까지 육포와 나딘빵만 먹었는데, 그게 어디냐! 빨리 가져오거라!
녀석은 보이지도 않는 점장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아리스 님.”
라온은 아리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지막에 보여주셨던 검계는 단발입니까?”
아리스의 검계는 바다를 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였지만, 딱 한 번의 휘두름만 행하고 사라졌다. 여러 가지 검계를 보았지만, 일격의 검계는 처음이었다.
“맞아.”
아리스는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조금 따라 했지.”
“가주님을?”
“아버지의 검계 천의무봉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해지거든.”
그녀가 글렌의 검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허공으로 굴렸다.
“저도 봤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의 말대로 글렌의 검계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격의 위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니, 위력이라기보다 격 자체가 압도적으로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난 세 번 휘두르는 것도 귀찮더라고. 그래서 일격의 검계를 만들었지. 검사의 승부는 일 합에 끝내야 멋있잖아?”
아리스는 본인의 검계가 마음에 든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라온이 시선을 내려서 낡은 탁자를 보았다.
‘역시 검계는 검사의 삶을 담는군.’
아리스는 본인의 성격처럼 시원시원한 검계를 지녔다. 검계가 그 사람의 인생을 비춘다는 건 역시나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검계 정도면 카이바르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제 도움은 필요 없어 보이는데….”
“힘들 거야.”
아리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광룡 새끼 에이션트 되기 직전일 정도로 나이를 처먹었으니까.”
“네…?”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혈기 왕성한 성룡도 아니고, 고룡에 가까워지는 놈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나이 먹고 그 지랄을 한다는 게 안 믿기지? 하지만 사실이야.”
아리스는 드래곤도 나잇값 못 하는 것들이 있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제 왜 네가 필요한지 알겠지?”
“예….”
드래곤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는 생물의 정점이다. 에이션트가 되기 직전일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면 아리스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너 애인은 있니?”
“예?”
라온이 어벙하게 눈을 껌벅였다. 에이션트 급 드래곤 이야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애인이라는 단어를 꺼내니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니, 21살에, 그 얼굴에, 그 무력에, 그 명성이 있는데 애인 하나는 무조건 있어야지!”
“어….”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아리스는 가장 입이 가벼운 사람들이 할 법한 말을 내뱉었다.
“어, 없습니다. 지금은 연애를 할 때가 아니라….”
“연애에 때가 어디 있어. 옛날 같으면 넌 이미 결혼했을 나이라고.”
“아리스 님도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라떼는 한창 전쟁 중인 시절이라 바빴거든!”
“저도 나름 여러 전장을 다녀서 바빴습니다.”
“난 전쟁 중에도 연애는 했어. 싸움 속에서 사랑이 꽃피는 법이거든. 광풍대에 누구 있지?”
그녀는 꼭 들어야겠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음, 아리스 님. 저희가 카이바르를 잡으면 드래곤 측에서 간섭해올 일은 없습니까?”
라온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말을 돌렸다. 물론 그녀가 대답해줄 만큼 의미 있는 질문을 꺼냈다.
“드래곤은 종족이라기보다 하나하나가 독립체야.”
아리스는 그 질문에 넘어간 듯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카이바르가 죽어도 드래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로드가 경고 정도는 할지도 모르겠네. 근데 그러면 우리도 뒷배를 부르면 그만이라.”
“뒷배요?”
“우리 아버지이자, 네 할아버지가 있잖아.”
“알아서 하라면서 안 오실 거 같은데….”
“무조건 와. 네가 부르면.”
아리스는 그런 건 걱정 말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음, 그런데 몸은 괜찮으신지….”
라온이 짧게 입술을 씹었다. 글렌의 앞에 성검련주와 백혈교주를 놔두고 가서 계속 마음이 쓰였다.
“몇 번을 말해. 괜찮다니까.”
아리스는 아침 체조를 할 정도로 튼튼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녀가 다시 상체를 들이밀었다.
“네 여친이 누구냐고.”
“…….”
라온은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친척 같군.’
오랜만에 친척끼리 만나면 애인은 있는지, 직업을 잘 구했는지를 묻는다고 들었는데, 그걸 직접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리메르는 철없는 형, 셰릴은 퉁명스럽지만 잘 챙겨주는 누나 같았다면 아리스는 처음으로 친척의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정말 없어요.”
라온이 고개를 저을 때 점장이 어죽을 가지고 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테이블에 접시가 나오자마자, 라스가 군침을 흘렸다.
-드디어 본왕이 음식을 먹는….
“끼룩!”
녀석이 기뻐하며 방방 뛸 때 조용히 있던 갈매기가 접시에 달려들었다. 녀석은 뜨끈한 어죽을 꿀떡꿀떡 넘기며 배를 채웠다.
아무래도 부탁이 물고기를 먹게 해달라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보, 본왕의 식사가!
라스가 턱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 저놈의 털을 모조리 뽑아서 삶아라! 그거라도 먹어야겠느니라!
녀석은 분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렸고, 갈매기는 끝없이 어죽을 삼켰다.
“난 네가 누굴 만나든 찬성이야. 그러니까 조금 끌리는 애라도 알려줘 봐. 아, 혹시 이상형을 말하면 소개해줄 수도 있….”
아리스는 갈매기가 어죽을 먹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애인을 물었다.
“후….”
라온이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신없네….
* * *
이틀 후.
아이카르의 앞바다에 해적왕의 전함 청풍이 돛을 펼쳤다.
귀여운 해골 문양의 해적기가 바람을 타고 펄럭이며 진중한 울림을 일으켰다.
“상황은 바뀌었지만,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청풍의 갑판 위에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아리스가 등을 돌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 입매를 굳게 다문 선원들이 비쳤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내가 해적단을 조직하고 난 이후로 가장 큰 전쟁이겠지.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칠 거다. 그래도….”
아리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선원들의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간다. 피를 밟아서라도 나아가 광룡의 목을 벨 것이다. 허나 그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희가 길을 열어줘야 그 위업을 이룰 수 있다.”
그녀가 허리춤의 검집을 툭 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믿겠다.”
“예!”
단호하면서도, 단순한 한마디에 라온과 선원들은 뒷짐을 진 채로 서서 바다가 뒤흔들릴 정도의 포효를 내질렀다.
“가자.”
아리스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우우우우웅!
청풍이 웅장한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나아간다. 그 뒤로 배치된 전선들이 매처럼 날개를 펼치며 잔잔했던 바다의 적막을 깨부쉈다.
고작 열두 척의 전선. 광룡을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물길을 나아가는 전사들의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