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0화
라온이 갈매기를 보며 제천검을 쥐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지, 진짜 너야?”
“보고 싶었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다는 한 마디로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는 광녀를 넘어 스토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멀린이었다.
-끄어어억….
라스가 등껍질에 숨는 거북이처럼 몸을 쭈구렸다.
-왜 광녀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녀석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하늘색 눈동자를 떨었다.
-대륙 중앙에서 헤어졌는데, 어떻게 이 해안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거냐고!
‘나도 몰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기에 할 말이 없었다.
“너는… 아.”
멀린에게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우측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에 잡았던 해무족의 기척과 비슷했다.
“일단 급한 불은 끄고 이야기 하자.”
“얼마든지 기다릴게.”
멀린은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어깨에 내려앉았다
“후우.”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우측으로 태화보를 밟았다. 해무족의 기운이 조금 전에 싸웠던 이들보다 훨씬 컸다. 이쪽이 진짜인 것 같았다.
회색 먼지가 낀 듯한 골목을 돌아들어가자, 큼지막한 분수대 옆에 해무족 셋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분수 위로 거대한 안개가 솟구치고 있었는데, 저것으로 도시를 가두고 있는 것 같았다.
“안개부터 태워버려!”
“불에 타지고 않고, 얼지도 않아요!”
“빌어먹을! 오러로 뚫리지도 않아.”
“방어도, 방어인데 공격이 너무 거세. 벌써 여덟이나 당했어!”
도시에 있던 무인과 마법사들이 해무족을 공격하려 했지만, 안개가 너무 두꺼웠고,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 때문에 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공격을 하려다가 해무족의 안개에 찔려서 하나둘씩 죽어갔다.
치이잉.
라온은 제천검을 고쳐 잡으며 해무족의 상태를 파악했다. 좌우에 있는 젊은 놈들은 조금 전에 잡았던 놈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중앙에서 안개를 조작하는 중년의 해무족이 그들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저놈이 수장인 것 같았다.
터엉!
중앙에 선 놈을 노리며 태화보를 운용했다. 해무족의 안개를 파고들려 할 때 주변에 퍼져 있던 해양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몬스터도 조종하는 건가?’
해무족에게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다. 드래곤의 명령 때문에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
라온이 제천검을 어깨 뒤로 젖혔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단전에 가득 찬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마나회로를 질주하며 솟구친 열기가 제천검의 검극 위로 용의 형상을 그렸다.
만화공 백화.
염룡결.
검극에서 뻗어나간 화룡의 숨결이 눈앞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쿠구구구구구!
상단전의 문제 때문에 검술의 정교함은 한참 떨어졌지만, 능력치가 상승한 덕분에 화력 자체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후우우우욱!
염룡결의 열기에 몬스터들은 단 한 마디도 살아남지 못했지만, 해무족들은 안개를 응집시킨 벽을 세워서 불꽃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귀찮게 하는군.”
라온이 시꺼멓게 그을린 대지를 밟으며 안개를 향해 쇄도했다.
치이이잉!
해무족이 조종하는 회색 안개가 날을 세운 칼날처럼 매섭게 갈려서 급소를 노려왔다.
‘보여.’
불의 고리와 분노의 마안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기 때문인지 안개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섬세하게 느껴졌다.
타악!
안개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서 가람보법을 밟았다. 물길을 타고 오르는 연어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안개 속으로 짓쳐들었다.
“죽여라.”
중년의 해무족이 손을 내젓자, 영 옆에 서 있던 젊은 해무족들이 안개로 만들어낸 창과 검을 내질러왔다. 급소를 노리는 게 아니라, 전신을 꼬치로 만들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치이이잉!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더 빠르게 나아가며 서리연을 그었다. 은빛의 칼날과 서리의 칼날이 그림자처럼 이어졌다.
콰드드드득!
섬뜩하게 갈린 칼날이 해무족의 무기를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 막아!”
두 해무족이 뒤늦게 안개로 벽을 세우려고 했지만, 한참 늦었다. 두 자루의 칼날은 이미 놈들이 미간에 닿아 있었으니까.
쩌어어억!
서리연의 냉기에 찔린 해무족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즉사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고 해도 서리연을 견디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제 한 놈… 음?’
제천검을 휘돌리며 불길을 일으킬 때 눈앞으로 회색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남아 있던 중년의 해무족이 두 놈을 미끼로 던지고 피할 수 없는 공세를 준비한 것이다.
쿠웅!
라온이 묵직하게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떨쳐냈다. 칼날에 휘감긴 불길이 하얀빛으로 명멸하며 쏟아지는 안개의 해일을 휘감았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제5형 백영섬.
하얗게 물든 칼날이 하늘까지 닿았던 안개의 파도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사그라드는 안개 속에서 놀람이 그대로 드러난 해무족의 눈동자가 보였다.
터엉!
라온은 중년의 해무족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공간을 파고들었다.
“크윽!”
중년의 해무족은 도시를 뒤덮던 안개로 본인의 몸을 휘감아서 회색의 용오름을 일으켰다.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제천검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칼날 위로 피어난 붉은 꽃잎들이 안개의 회오리를 따라 고아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
라스 덕분에 작은 깨달음을 얻었던 화령은 해무족을 두르고 있던 안개의 용오름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아….”
중년의 해무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녹아내린 안개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저벅.
라온이 차분한 걸음으로 해무족에게 다가갔다. 놈이 이를 갈며 마지막 발악을 하려 할 때 제천검을 그어 내렸다.
쩌어어억!
중년의 해무족은 공격하려던 손과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피에 젖은 분수 위로 일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허….”
“해, 해무족 셋을 혼자서 잡다니….”
“그것도 검을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어.”
“젊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무력을….”
해무족을 상대하던 검사와 마법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본인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도 깨지 못한 안개의 결계가 이렇게 쉽게 깨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우우우우웅!
해안 도시 아이카르를 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진다. 다만 전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분지 일만 지워졌다.
지금 같은 일을 3번 더 해야 이곳의 안개를 모두 지울 수 있는 것 같았다.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라온이 부상자들을 항구로 보낸 후 다른 해무족의 기척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
도시의 하늘에서 웅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섬뜩하면서도, 거대한 기파에 손끝이 떨릴 지경이었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저곳에 있는지는 뻔했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해적왕이라는 자리를 수하에게 떠넘기고 자유로이 사는 괴짜가 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라온이 분노의 마안을 운용하여 안개를 뚫고, 안개 속에 있는 아리스를 보았다.
아리스는 눈을 감은 채 상체를 앞으로 굽히고, 검병에 손을 얹고 있었다. 발검의 자세. 믿기 힘들 정도의 집중력과 기파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적색 휘광으로 번쩍인 순간 허공이 길게 갈라진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초고속 발검술. 하지만 중요한 건 발검의 속도가 아니었다.
쩌어어어억!
아리스의 검격은 공간을 뛰어넘어 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는 몬스터와 해무족의 숨통을 갈라버렸다.
끼이이익.
비명 소리에 뒤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해양 몬스터들이 반으로 찢어진 채 경련을 하고 있었다.
파아아아아앙!
아이카르를 뒤덮고 있던 안개 뭉치가 한순간에 터져나가며 청아한 햇살이 드리웠다.
“허….”
라온이 푸른 하늘을 올려보며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이게 검술이라고?’
지금까지 수많은 검술을 봐 왔지만, 이렇게 공간을 뛰어넘는 건 처음 보았다. 검술이 아니라, 마법을 보는 듯 했다.
-공간이니라.
라스가 몬스터들의 시체를 눈에 담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공간?’
-저 도둑 계집은 몬스터들을 기척이 있는 공간을 벤 것이니라. 너희 식으로 말하자면 공간검이라고 해야겠지.’
-공간검….
공간검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용하기는 굉장히 힘들 것 같지만,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무학이었다. 꼭 한 번 배워보고 싶었다.
우우우우웅!
항구에서 배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해적왕의 전선 청풍이 도시에 도착한 것 같았다. 선원들이 움직이는 기척도 느껴졌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았다.
스르릉.
라온이 제천검을 검집에 넣으며 우측을 바라보았다. 멀린이 빙의한 갈매기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아! 맞다! 저 광녀!
라스는 다시 멀린을 떠올리고서 턱을 부르르 떨었다.
“너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라온이 라스와 비슷한 표정으로 한숨을 흘렸다.
“널 찾고 있었거든.”
“지금까지?”
“응. 계속.”
멀린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살다 갈매기가 미소를 짓는 것을 다 보게 되었다.
“진짜 운도 좋네.”
대륙의 끝에서 마주치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되니 정말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응? 운 아니야.”
멀린이 잔잔하게 고개를 저었다.
“운이 아니라니?”
“지금 천 마리 이상의 동물을 움직이고 있거든.”
“어…?”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 했다.
“처, 천 마리라고?”
“여기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퍼뜨려놨어.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지.”
멀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며 헤헤 웃었다.
-처, 천 마리….
라스의 입에서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본왕이 말했지 않느냐! 저거 위험하다고! 얼마 전에 만났던 놈들보다 쟤가 가장 위험하느니라!
녀석은 빨리 도망치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으음….”
라온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 마리를 움직이는 게 가능해?”
아무리 멀린이라고 해도 천 마리가 넘는 동물에 빙의해서 대륙 전체를 돌아다닌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거든. 내 본체는 가수면을 취하고, 정신을 나눠서 동물들에게 담았어.”
“하….”
라온이 길게 헛바람을 내쉬었다.
‘얘 진짜 뭐지?’
날 찾으려고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다고?
멀린은 매번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마법을 개발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아주 가볍게 내뱉었다. 누가 들으면 마법을 만드는 게 요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거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대로 되어서 다행이야.”
“지지 않는다니?”
“널 찾는 거.”
멀린은 부끄럽다는 듯 날개를 배배 꼬았다.
“음….”
라온이 눈을 질끈 감고서 처음에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그 마법 위험하지는 않아?”
가수면 상태라면 무방비나 마찬가지인데, 괜찮을지가 걱정되었다.
“우후후.”
멀린이 날개로 부리를 살짝 가렸다.
“내 걱정해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행복하지만, 걱정 안 해 줘도 돼. 숨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한 열기로 번들거렸다.
“내가 죽더라도 넌 찾아야지. 이렇게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멀린은 다른 건 다 상관없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으윽….
라스가 어깨를 떨며 작게 훌쩍였다.
-진짜 미친 인간 그 자체이니라….
‘그건 반박할 수가 없네.’
-본왕의 인생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맛난 음식을 먹으러 왔는데, 도시는 망가지고, 왜 저 스토커 광녀가 따라붙는 건데!
‘마생이겠지.’
라온이 라스를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솔직히 멀린이 무섭기는 하지만, 도움 받은 게 많아서 마냥 두려워 할 수는 없었다.
“상처는 어때?”
“몸?”
“10사도의 창에 찔렸잖아.”
“아, 맞다.”
멀린은 본인이 다쳤다는 것도 잊었는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꽤 많이 만났는데도, 저 광기만큼은 정말 적응이 되질 않았다.
“네 걱정을 두 번이나 받고, 오늘을 행복해서 잠을 못 잘지도 모르겠어.”
멀린이 부끄럽다는 듯 날개를 들어 뺨을 만졌다.
“아….”
그녀가 방긋 웃다가 몸을 떨었다.
“왜?”
“감정이 격해져서 마법이 풀릴 것 같아.”
“그게 무슨….”
“지금 2주 넘게 이 마법을 운용하는 중이라 마나가 다 떨어지기도 했고.”
“2주 넘게?”
저 말이 정말이라면 내가 실종된 이후로 마법을 만들고 나서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너는 진짜….”
“라온 이 아이한테는….”
멀린이 뒷말을 하다가 갑자기 부리를 움찔거렸다. 눈동자가 바뀐다. 그녀는 갈매기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말해주지 못한 채 사라졌다.
“끼룩.”
갈매기가 도약을 하듯 성큼 다가왔다.
“끼루륵!”
본인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듯 날갯짓을 해댔다.
“뭔데.”
라온이 점점 가까워지는 갈매기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난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 * *
갈매기는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떠나지 않고, 어깨에 내려앉았다.
라온은 어쩔 수 없이 갈매기와 함께 도시를 살폈다. 잘 닦여 있던 도로와 건물들이 무너지고, 하늘로 검은 연기가 타오르는 모습은 지옥 그 자체였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해안 도시는 죽음의 항구가 되어 있었다.
도시만 망가진 게 아니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시체들이 가득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주민들이 죽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군.’
주변에서 인간의 생기 자체가 느껴지질 않았다.
‘드래곤의 마법 때문이겠지.’
광룡이라는 놈의 9서클 마법이 연달아 떨어진 통에 도시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고, 수비대 역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고 죽어나갔을 것이다. 마법에서 살아남은 무인들도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겠다고 발버둥치다가 몬스터와 해무족에게 쓸려나갔을 게 뻔히 보였다.
뿌득.
라온이 항구 방향으로 몸을 돌리다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무너진 건물 아래에 붉게 물든 토끼 인형과 인형 주인의 손이 보였다. 작고, 어린 손을 보자 심장에 철사를 조인 것처럼 갑갑해졌다.
‘망할….’
본래 이 싸움은 나의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아리스를 도와주고 이득만 얻어서 가문에 복귀하면 그만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망가진 도시와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을 보니,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현실감이 들었다.
“이딴 짓을 그저 인간을 미워해서 하는 거라고?”
라스에게 받은 감정 때문인지, 드래곤에 대한 악의 때문인지 영혼에 달라붙은 분노가 들불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도마뱀들의 내로남불은 옛날부터 유명했느니라.
라스가 도시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모르느냐?
‘아….’
-도마뱀들은 성룡끼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며 드래곤이 인간이나, 타 종족을 학살하고 다녀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다가 정작 그 도마뱀이 뒈지면 움직이느니라.
녀석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비웃음을 그렸다.
-대륙 수호는 지랄이고, 그저 더러운 종족일 뿐이니라.
‘그러네.’
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들을 아끼는 라스나, 그저 잠을 자길 원하는 슬로스 같은 마왕보다 대륙의 수호를 외치는 드래곤이 더 악마로 보였다.
‘이걸로 확실히 마음을 정했어.’
지금부터 이 싸움은 내 싸움이다. 인간들을 학살하는 드래곤을 죽이고, 영혼의 격을 높이며, 실비아의 단전을 만들 씨 서펜트 하트까지 챙기기 위한 전쟁이었다.
확실하게 마음을 다지니, 탁하게 끓어오르던 속이 가라앉았다.
“살리지는 못했지만, 복수는 해주마.”
라온은 피에 젖은 토끼 인형을 어린 손에게 쥐어주고 시뻘건 얼룩이 새겨진 거리를 떠났다.
뒤늦게 항구에 도착하자, 아리스와 라바윈 그리고 선원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에 침입한 몬스터와 해무족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다만 피해가 워낙에 커서….”
라바윈은 도시 뒤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남은 인원은?”
아리스가 짧게 혀를 차며 물었다.
“도시 수비대는 전멸이고, 본래 함께 움직이기로 한 인원은 3분지 1만 남았습니다. 거기다….”
라바윈은 시선을 푹 내리며 말을 이었다.
“유칼 마을에서 오기로 했던 함대 역시 해무족과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광룡 사냥이 어려워지게 되었다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라온이 라바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반이나 죽은 건가.’
본래 아리스는 이곳 아이카르에서 산하 함대와 해적들을 모아 드래곤 사냥을 떠나기로 계획을 짰었다.
그런데 물자와 인원이 모인 두 도시가 모두 습격을 받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는 놈의 둥지랑 반대에 위치한 곳인데, 습격을 한 것을 보면….”
아리스가 바다를 노려보며 미간을 구겼다.
“우리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군.”
그녀의 말이 맞다. 카이바르의 둥지와 이 도시의 위치는 상당히 떨어져 있고, 방향도 다르다. 이곳과 지원군이 오는 유칼이 습격당한 것을 보면 광룡은 이쪽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획과 달라졌으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라바윈이 한숨을 내쉬며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빛에 걱정이 차올라 있었다.
“뭘 그리 걱정이 많아. 미친 도마뱀이 이 도시를 습격한 이유가 뭐겠어.”
아리스가 옅게 웃으며 양 팔을 펼쳤다.
“놈이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놈을 사냥하겠다는 의지가. 그리고 인간이 무섭다는 것이지.”
“음….”
그녀의 당당한 외침에 무인들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돋아났다.
“인간을 두려워하는 도마뱀 따위를 피할 필요는 없잖아.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아리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출정한다. 광룡의 목은….”
그녀의 시선이 뒤편의 라온에게 이어졌다.
“나와 라온이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