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16화 (515/653)
  • 제516화

    글렌의 무학과 삶을 집대성한 적색 칼날이 성검련주의 흑검을 깨부순다. 어검으로 일으켰던 잿빛 불길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조각난 칼날은 차디찬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검을 받쳐주던 무형검 역시 적검의 날카로움을 버티지 못했다. 태양 빛처럼 선명했던 무색 기운이 잔잔한 아지랑이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어검술과 무형검. 현세에 있을 수 없는 궁극의 조화를 깨부쉈음에도 글렌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전투의 끝을 고하기 위해 성검련주를 향해 광폭한 빛무리를 일으켰다.

    “그게 네가 쌓아 올린 검인가.”

    성검련주는 핏물이 터져 나오는 양팔을 벌리며 환희에 찬 미소를 그렸다.

    “그런 검술에 죽는다면 그것도 영광이겠지! 오거라! 글렌 지그하르트!”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라는 듯 눈을 부릅뜬 채로 한 걸음 다가왔다. 삶보다 검에 집중하는 괴물. 검술에 미쳤다는 표현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글렌은 성검련주의 의도가 어떠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싸움을 시작할 때처럼 잔잔한 심혼을 유지하며 뇌영검을 뻗어냈다.

    쿠구구구구구!

    검극에 어려 있던 적색 광뢰가 폭발하며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순간 좌측 언덕과 하늘 위에서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모습을 갖추고 있던 백혈교주와 드래곤 로드였다.

    백혈교주는 이쪽의 목숨을 노리고 혈기의 무구들을 쏟아부었고, 드래곤 로드는 검격의 충격을 줄이려는 듯 힘을 분산시키는 용언을 발동시켰다.

    ‘음….’

    글렌은 둘을 무시하며 검격을 뻗어내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나가 더 있었나?’

    성검련주의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기가 밀려왔다.

    백혈교주와 드래곤 로드의 움직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성검련주의 뒤에서 접근한 존재는 읽지 못했다.

    저 거대한 마기를 볼 때 카멜룬을 습격했다던 흑탑주가 분명했다.

    “방해해도 상관없다. 모조리 베면 그만이니.”

    입술을 꾹 씹으며 아직 이름조차 정하지 않은 검의 극의를 펼쳐냈다.

    쿠와아아아앙!

    용언으로 검격의 위력을 감소시켰음에도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호수의 물이 모조리 증발하고, 대지의 지축이 크게 뒤틀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회색 연기가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이 되었고, 땅거죽을 뒤집어엎는 듯한 지진이 세상을 덮쳤다.

    지옥과도 같은 광경 속에서 글렌이 뇌영검을 내렸다. 너무나도 강대했던 검격의 여파인지 찢어진 공간이 봉합되질 않고, 기이한 빛의 균열이 일으키고 있었다.

    균열의 뒤편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성검련주도, 그를 보호하려던 흑탑주도, 기습했던 백혈교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

    글렌이 속으로 숨을 고르며 시선을 내렸다. 새하얗게 파여나간 대지가 살벌한 양의 핏물로 젖어 있었다. 성검련주의 피였다.

    ‘확실하게 베었어.’

    용언 때문에 위력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성검련주의 가슴을 가른 건 분명했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마기의 로브가 성검련주를 감쌌지만, 흑탑주라고 해도 그 충격을 모두 흡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둘은 놓쳤겠지.’

    백혈교주와 흑탑주는 성검련주의 뒤에 있었기에 주술을 이용하여 몸을 빼냈을 게 뻔했다.

    쯧.

    글렌이 짧게 혀를 차며 뇌영검을 가라앉혔다. 붉은 뇌기가 녹아내리며 본래의 진천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검이 무거웠다.

    ‘과하게 힘을 사용했군.’

    조금 전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해도 끝까지 천검에 집중했다면 성검련주를 꺾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온 덕분에 깨달은 무의 진의를 그대로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며 깨달음을 정리했다.

    ‘지쳤어도 남은 일은 끝내야겠지.’

    글렌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달빛 아래에 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내려와라.”

    [음….]

    드래곤 로드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땅에 발을 디뎠다.

    “오마의 편에 서겠다는 건가?”

    글렌의 냉랭한 시선에 드래곤 로드가 어깨를 떨었다.

    “그, 그게 아니오!”

    드래곤 로드가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인간의 파벌 따위는 중요하지 않소!”

    그가 지팡이를 들어서 아직도 비틀어져 있는 공간의 균열을 가리켰다.

    “북멸왕. 방금 당신의 검은 너무도 위험했소. 내가 위력을 줄이지 않았다면 저 균열이 끝없이 벌어졌을 수도 있소.”

    “…….”

    글렌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드래곤 로드의 말대로 갈라진 공간의 틈은 아직도 붙지 않았다. 기이한 스파크를 터트리며 조금씩 크기를 늘려가고 있었다.

    [닫혀라.]

    드래곤 로드가 용언을 외우고 나서야 뜯겨나갔던 공간이 붙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침없이 퍼지던 스파크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당신의 힘은 위험하오. 이젠 공포가 느껴질 정도지.”

    그의 시선에는 이전에 없던 두려움이 돋아나 있었다.

    “그에 따라 가진 시간은 더 줄어들었겠지만, 그건….”

    “로드.”

    글렌의 건조한 어투에 드래곤 로드가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모든 업보와 죄는 내가 가져갈 테니,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리고….”

    그가 드래곤 로드의 흔들리는 동공 앞으로 진천검을 들어 올렸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방해한다면 전쟁을 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그, 그게 무슨….”

    드래곤 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지금 우리 드래곤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음….”

    드래곤 로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글렌의 눈빛은 진심을 말하는 듯 오싹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지금….’

    누가 보아도 지친 티가 나는 지금이라면 글렌이라는 인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

    움직일지 말지를 고밀할 때 글렌이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해볼 텐가? 나는 상관없다.”

    글렌은 올 테면 와보라는 듯 검 위로 시뻘건 뇌전을 일으켰다.

    드래곤 로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검술. 드래곤 최강의 무기 브레스조차 닿을 수 없는 그 검을 떠올리자, 등골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럴 생각 없소. 다만 알아주시오.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것을.”

    “그게 너희에게만 관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아니었다면 좋았겠지.”

    “음….”

    그는 할 말이 없는지 낮은 신음을 흘리고서 금색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후우….”

    글렌이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을 때 푸른 빛과 함께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가 나타났다.

    “흑탑주가 이쪽에 왔었지?”

    체임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로브 이곳저곳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내렸고, 그 거대했던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인의 정체성이라던 챙이 큰 모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당했군.”

    “그놈이 프레이야의 로브를 얻었거든.”

    “프레이야의 로브?”

    “그래. 암시장이 숨기고 있었는데, 그게 넘어갔어.”

    그녀는 좋지 않은 물건을 빼앗겼다며 입술을 비틀었다.

    “프레이야의 로브라….”

    글렌이 턱을 매만지며 눈을 내리감았다.

    ‘아까 그것인가.’

    흑탑주가 죽어가던 성검련주를 감쌌던 마기의 로브가 아무래도 프레이야의 로브였던 것 같다.

    “미안해. 막았어야 했는데….”

    체임버는 묵검존을 보자마자 도망치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다.”

    글렌이 여유가 없는 체임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상성이 최악인 흑탑주에게 새로운 아티팩트까지 생겼으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한 일이다.

    그녀 덕분에 광풍대가 살았기에 타박하고 싶지 않았다.

    “어?”

    체임버는 그 반응이 놀라웠던지 어깨를 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에게 이동을 부탁할까 했지만, 체력과 마나 모두 부족해 보여서 그만두었다.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라온과 광풍대의 생사다. 잠깐 사이에 차오른 오러를 다리의 마나회로에 태우며 태화보를 밟았다.

    전력으로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웬 왕국이 보였다. 그대로 성벽을 뛰어넘으려고 할 때 성문 앞에 서 있는 로엔이 눈에 들어왔다.

    “로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엔은 글렌을 믿고 있었던 듯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라온과 광풍대는?”

    “일단 광풍대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대부분 후유증도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사실….”

    그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보고했다.

    “그럼 라온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겠군.”

    “그게….”

    로엔이 처음으로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떨었다.

    “무슨 일 있었나?”

    “그에 대한 건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본가?”

    “예.”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글렌에게 다가갔다.

    “라온 님을 데리고 간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모든 사정을 들은 글렌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 * *

    “음….”

    라온은 심장을 옥죄이는 듯한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실이 아니다. 검계를 이루기 위해 수없이 살폈던 심상의 세계였다.

    검이 꽃처럼 싹을 틔우고, 불길과 냉기가 조화와 반목을 이루던 나만의 공간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심하네.”

    너무 많이 뜯겨 나갔잖아.

    냉기와 열기가 타오르는 심상의 세계 중심에 시꺼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구멍에서 뼈조차 얼려버릴 듯한 같은 극한의 냉기가 올라왔다.

    다만 구멍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는데, 그 주변을 막고 있는 바다색 기운 때문인 것 같았다.

    ‘이 기운은 뭐지?’

    라온이 구멍 주변을 가두고 있는 기운을 보며 눈매를 찡그릴 때 뒤에서 익숙한 비명이 들려왔다.

    “안 되느니라!”

    고개를 돌리자, 별관의 식탁에 앉아 있는 라스가 보였다. 솜사탕 형태가 아니다. 녀석은 본체의 모습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뭘 하는… 아.’

    식탁 위에 널려 있는 꼬치구이와 피자, 빵, 아이스크림을 보자, 라스가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녀석은 몸이 바뀌어서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이 세계에서나마 맛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빌어먹을이니라! 먹어도 아무런 맛이 안 나느니라!”

    라스는 입에 음식들을 쏟아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라스 맞네.’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모습으로 초월자들을 압도했던 게 아직 생생한데, 가짜 음식에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친숙한 라스가 확실했다.

    “라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라스의 맞은 편에 앉았다.

    “분해 죽겠느니라!”

    라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이를 바득 갈았다.

    “잊을 수가 없느니라! 그때 먹지 못한 것들이 계속 머리에 굴러다니고 있느니라!”

    녀석은 그 말을 하고서 다시 음식을 먹었다. 물론 맛이 안 난다며 다 뱉었지만.

    “그러게 내가 빨리 먹으라고 했잖아.”

    “그런 기회가 또 언제 온다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 그러다가 다 놓쳤지.”

    “끄으응….”

    라스는 할 말이 없는 듯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훌쩍였다.

    “라스. 그보다 저 구멍 내 심상이 잘려 나간 거 맞지?”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툭툭 친 후 중앙에 돋아난 검은 구멍을 가리켰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것이냐. 심상이자, 네놈이 그동안 쌓았던 영혼의 격이 녹아내린 것이니라.”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보니까 너무 커서….”

    라온이 구멍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각오는 했지만, 균열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다. 많은 것을 잃을 거라는 라스의 말이 따갑게 다가왔다.

    “저것도 중간에 멈춘 것이니라.”

    “멈췄다고?”

    “그렇느니라. 누구인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네 상단전에 의념과 오러를 넣어준 덕분에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이니라.”

    라스가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색 기운을 가리켰다.

    “음….”

    라온이 그 기운을 살피며 입술을 질근 씹었다. 상단전에 의념과 오러를 넣어줄 정도라면 그랜드 마스터의 극이나, 초월자일 텐데, 누구의 기운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깨어나 봐야 알 수 있겠군.”

    한숨을 내쉬며 다시 구멍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씁쓸하네.’

    심상의 세계가 잘려 나간다는 건 내가 정성 들여 키운 밭을 멧돼지가 망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능력치와 육체에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업을 쌓아 높이 세웠던 영혼의 격이 깎여나간 것이기에 더 아프게 느껴졌다.

    “후회하는 것이냐?”

    라스가 피자의 꼬투리를 버리며 물었다.

    “전혀.”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후회는 절대 안 하지.”

    오르고스는 집요한 놈이라, 만약 살아남았다면 끝까지 광풍대를 따라왔을 것이다.

    라스가 아니라, 다른 마왕의 힘을 빌려서라도 거기서 끝을 냈어야 했다.

    “새로운 격을 쌓으면 그만이야.”

    “말은 쉽게 하는구나.”

    “정말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라온은 라스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덕분에 많이 배웠으니까.’

    라스의 전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면서 새로운 냉기의 운용법을 깨달았다. 초월자들의 무학까지 눈에 익혀두었으니, 잃은 것 이상으로 얻은 것도 많았다.

    지금은 잠시 약해졌겠지만, 앞으로 더 높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음, 네놈이 깨어났기 때문인지 본왕도 사라지는군.”

    라스가 흐릿해지는 몸을 가리키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 잊지 않았지? 3주이니라! 3주! 기억하거라!”

    녀석은 절대 잊지 말라며 손을 휘젓고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라스가 사라진 심상의 세계를 둘러보았다.

    아직 검은 많지만, 신검과 마검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구멍 때문에 잠시 사라진 걸지도 모르겠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저 구멍이나 채워볼까.’

    심상의 세계는 나 자신의 삶과 같다. 명상과 불의 고리 운용을 통해 어지럽혀진 공간을 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 * *

    심상의 세계를 정돈하고, 구멍을 조금씩 메우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누구지?

    -…리라!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좀 일어나란 말이다!

    소리를 따라가자, 눈앞에 훤하게 밝아졌다.

    “어…?”

    라온이 멍하니 눈을 꿈벅였다. 심상의 세계가 사라지고, 낡고, 축축해 보이는 목제 천장이 보였다.

    그 앞으로 라스의 둥실둥실한 머리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야 일어나다니! 이 한심한 놈!

    라스는 슬로스 같은 잠탱이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쳤다.

    ‘무슨 소리야. 너랑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냐! 네놈은 2주 넘게 누워만 있었느니라!

    ‘2주?’

    라온이 몸 상태를 확인하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심상의 세계에서 집중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워낙에 많은 기운을 소모하고, 높은 수치의 분노까지 받았으니까.

    -네놈 또 약속을….

    ‘말 안 해도 알아.’

    라스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있다. 전에 3주 동안 먹고 싶은 것을 먹어준다는 약속 때문임이 분명했다.

    ‘3주 약속 때문이지? 그거 연장해줄게.’

    -이젠 해줘도 소용없느니라!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녀석이 더욱 인상을 구겼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

    ‘어?’

    -지금 우리는 바다에 있단 말이다!

    라스가 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왜 바다에 있어?’

    오웬 왕국에서 쓰러졌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바다에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본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음….’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방 같은데, 바닥이 조금씩 출렁이고 있었다. 정말 배 안인 것 같았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진혼검과 제천검 모두 보이지 않았다.

    ‘검은 누가 가져갔지? 아니, 그보다 바다라니….’

    마른 입술을 축이며 방을 나섰다. 앞에 작은 방문들이 여러 개 있었다.

    중앙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푸른 하늘과 그에 못지않게 푸른 바다가 보였다.

    네 방향 어디에도 육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망망대해였다.

    “정말 바다잖아….”

    “이제야 정신이 들었어?”

    등 뒤에서 걸걸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바다에 비친 노을빛 머리카락과 갈색 피부가 인상적인 여성이 내려섰다.

    “당신은 누. 아니,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왜긴 왜겠어.”

    그녀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너 납치된 거야.”

    “납치?”

    라온이 뒤로 물러서며 여자를 살폈다. 시원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미녀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순간에 파악되지 않는 무력. 그랜드 마스터조차 넘어선 초고수라는 뜻이었다.

    “당신 누구야.”

    “내가 누굴까?”

    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네 몸값을 지그하르트에 받으면….”

    “장난은 그쯤 해라. 아리스 지그하르트.”

    그녀가 몸값으로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중얼거릴 때 우측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는 백발과 어울리지 않는 강철 같은 근육질의 노인이 눈매를 찡그리고 있었다.

    “쿠베러드 님?”

    삼왕자의 소개로 만나서 진혼검을 만들어 주었던 대륙장인 쿠베러드였다. 그가 오랜만이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

    라온이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노을빛 머리카락의 여성을 보았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그 아리스?”

    지그하르트에서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글렌의 장녀가 이곳에 있었다.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516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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