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화
붉은 달빛이 연둣빛 잎사귀에 이지러지는 로베르트 가문의 대정원.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던 데루스 로베르트의 등 뒤로 작은 체구의 시녀가 부복했다.
“어떻게 되었지?”
데루스가 고개를 반쯤 돌리며 시녀를 눈에 담았다.
“상황이 조금 꼬였습니다.”
상황이 꼬였다는 말과 달리 쿠바라의 눈빛은 잔잔함 그 자체였다.
“상황이 꼬였다?”
“가주님이 바라시던 대로 오르고스와 광풍대가 충돌했고, 라온 지그하르트는 뒤늦게 그 전투에 참여하여 오르고스를 결계로 가두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 이후에….”
쿠바라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말을 이었다.
“마왕이 강림했다고 합니다.”
“…마왕?”
데루스 로베르트가 등을 돌렸다. 쿠바라를 내려보는 그의 동공이 칼을 맞은 듯 뒤틀렸다.
“지금 마왕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갑자기 왜 마왕이….”
“듣기로는 오르고스의 마기가 신경을 건드려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마왕의 복장. 아니, 외형은?”
“하늘색 머리카락에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미인인데, 멀리서 보아서 남성체인지, 여성체인지는 모르겠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럼 아니로군….”
데루스는 눈꺼풀을 깊게 내리감으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어떻게 됐지?”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독순술로만 파악했다는데, 마왕은 오르고스만 죽이고, 라온 지그하르트는 무시했다는 것 같습니다.”
“무시했다라….”
독순이란 입술로 말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림자들은 기본적으로 독순술을 익히기 때문에 아마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순을 떠나서 그게 합당하기도 해.’
오르고스의 마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림한 마왕이 고작 마스터급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라온을 무시했다는 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 이후에는?”
“마왕과 백혈교주 그리고 성검련주가 부딪치고….”
쿠바라는 글렌과 드래곤 로드가 나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했다.
“음….”
데루스 로베르트가 쿠바라를 내려다보며 검은 가죽 장갑을 매만졌다. 손등의 상처가 살짝 아려왔다.
‘마왕이 결계를 뚫고 나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결계가 비틀어져서 라온 지그하르트가 대륙 어딘가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겠군.
라온은 스스로 배를 갈라서 결계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살아남았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거나, 기절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쿠바라.”
데루스는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 대륙의 그림자에게 잠입한 지역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라온 지그하르트를 찾으라고 전해라.”
라온을 발견하지 못할 확률이 높긴 하지만, 만약 찾을 수 있다면 그 귀찮을 놈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보고할 필요도 없이 발견 즉시 죽이고, 혹시 모르니까 2인 1조로 다니라고 지시하도록.”
지금까지 본 라온 지그하르트라면 죽기 직전에도 발악할 게 뻔하다. 2인으로 다니게 만들어서 무조건 놈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잠깐.”
쿠바라는 질문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물러나려 할 때 데루스가 손을 들었다.
“그 마왕은 어떻게 되었지?”
“글렌과 드래곤 로드가 나타났을 때 사라졌다고 합니다.”
“…알겠다. 가보도록.”
데루스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는 달빛을 가리기 시작한 구름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르고스를 가볍게 죽이고, 백혈교주를 압도하는 마왕이라.”
쓸 수 있는 말이 하나 늘어날지도 모르겠군.
* * *
라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왕도 내부에 있는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 앞이었다.
-하….
라온은 매장 창문에 개구리처럼 달라붙은 라스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꼭 가야 한다는 곳이 여기였어?
“당연한 일 아니더냐!”
라스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은 이날만을 위해서 살아왔느니라! 본왕의 입과 손으로 직접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고 싶었느니라!”
녀석은 말리면 죽일 거라며 푸른 눈을 부라렸다.
-아니, 말릴 생각은 없고.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매장 내부를 가리켰다. 늦은 시간이라 문을 닫으려는지 점장이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지금 안 들어가면 문 닫을걸?
“그건 절대 안 되느니라!”
라스가 펄쩍 뛰면서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들어갔다.
“아, 죄송해요. 영업 끝났… 아!”
점장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은 불을 끄려다가 말고 멈춰 섰다. 그녀는 라스의 얼굴을 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마법등을 떨어뜨렸다. 유리가 깨지며 청소한 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
“사, 사람 얼굴이 어떻게….”
하지만 점장은 박살 난 마법등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라스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로구나.”
라스는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올리며 입꼬리를 둥실 띄웠다.
‘예전 말했듯이 본왕의 미모는 마계 제일의….’
-지금 그게 중요해? 시간 없다며.
“마, 맞느니라! 주인장 정신 차리거라!”
“죄송합니다!”
점장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동공은 여전히 라스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근데 영업이 끝났다고?”
“아니에요! 고르세요! 다! 모두!”
라스가 실망한 표정으로 눈썹을 내리자, 점장이 양손을 마구잡이로 저었다. 아예 가게를 줄 기세였다.
“정말이냐?”
“그럼요!”
“복 받을 것이니라!”
라스 역시 마왕 주제에 복 받으라는 말을 던지고서 카운터 너머에 있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살폈다.
라스와 점장은 첫 만남부터 궁합이 잘 맞았다.
“으음….”
왕도 내부에 있는 매장이었기에 다른 곳보다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다양했다. 라스는 바로 아이스크림을 고르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느니라.”
-당연히 민트초코 아니었어?
라온이 라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조건 민트초코만 먹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고민을 하는 게 의외였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민트초코만 먹을 수는 없잖느냐! 특히 네놈이 절대 안 먹을 것 같은 아이스크림은 무조건 골라야지!’
라스는 다양한 맛을 먹을 거라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고르는 건 좋은데, 시간 없다며.
“보, 본왕은 미, 민트초코와 파인애플 바닐라, 애플망고 육포, 땅콩 사과 맛을 한 세트씩 고르겠느니라!”
-골라도 지 같은 것만 고르네….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만 들어보아도 하나 같이 정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고급스러운 상자에 아이스크림을 퍼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라스에게 박혀 있었다.
-근데 너 돈 있냐?
‘돈? 도, 돈!’
라스가 기겁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없느니라! 어떻게 해야 하지?’
녀석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마왕의 모습이었기에 인간계의 돈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딴 게 정말 마왕인가….
홀로 세 명의 초월자를 압박하던 마계의 군주가 아이스크림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꼴에 헛웃음이 나왔다.
‘도와다오….’
라스는 부탁한다며 두 손을 모았다. 이번에는 도움을 많이 받아서 돈을 내어주고 싶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돈은 내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데, 그걸 꺼낼 수가 없잖아.
‘아니, 가능하느니라!’
-어떻게?
‘지금 본왕은 네놈의 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니라. 본왕을 강림시킬 때처럼 상상으로 꺼내면 될 것이니라.’
-상상이라….
라온이 눈을 감았다. 도리안에게 받았던 아공간 주머니를 밖으로 꺼내겠다고 상상하며 의념을 일으켰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며 라스의 눈앞으로 아공간 주머니가 떠올랐다.
“오오!”
라스는 냉큼 그 주머니를 낚아채고, 안에서 금화를 꺼냈다.
‘이제 네놈은 필요 없느니라!’
-야….
라온이 라스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나중에 보자고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점장이 포장 상자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담고서 라스에게 내밀었다. 대충 보아도 양이 2배 이상 되는 듯 보였다.
“여기 있느니라.”
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카운터에 금화 세 닢을 내려놓았다.
“하나만 주셔도 제가 거스름돈을 돌려드려야 하는….”
“거스름돈 따위는 필요 없느니라!”
녀석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챙기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에 드는 일 처리였느니라. 가지거라!”
-그게 네 돈도 아닌….
“지금은 본왕의 돈이니라!”
라스는 점장에게 잘살라고 손을 흔들고 아이스크림 매장을 나섰다.
-그래. 오늘만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라온은 포기하겠다고 중얼거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빨리 먹기나 해.
“저건!”
라스는 아이스크림 매장 반대편에 있는 꼬치구이 식당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야. 너 시간 없다며!
“유령은 조용히 하거라.”
녀석은 말리려는 손을 쳐내고서 꼬치구이 집으로 보법을 밟았다.
“어서오… 헉!”
직접 꼬치를 굽고 있던 중년 점장이 라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무엇이냐.”
“파, 파와 닭다리 살로 만든 꼬치구이입니다. 고기는 돼지도 있고, 소도 있습니다.”
점장은 여성 귀족에게 할 법한 예를 갖췄다. 아이스크림 매장의 점장과 달리 라스를 여자로 보는 것 같았다.
“종류별로 다 내놓거라!”
라스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카운터에 금화 세 닢을 내려놓았다.
-야. 왜 다 세 개씩 쓰는 건데. 하나만 줘도 충분하다고.
‘본왕의 돈이니, 본왕의 마음이니라!’
-아니, 네 돈이 아니잖아!
녀석은 돈 쓰는 맛에 재미가 들린 듯 팁을 마구잡이로 퍼주고 있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점장은 다른 손님에게 나가야 할 꼬치를 라스에게 몰아주고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거라.”
라스는 이번에도 말끔하게 인사를 하고서 꼬치구이 매장을 나왔다. 마왕 주제에 인사성은 밝았다.
-이제 진짜 먹….
“저건 또 무엇이냐!
녀석은 꼬치를 바라보다 말고, 우측에 있던 피자 가게로 달려갔다.
-야이 식충이 마왕 놈아! 시간 없다며!
“하나만 더!”
* * *
글렌은 비틀어진 결계의 내부를 모두 확인하고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 만들어낸 결계로군.’
이 결계를 만든 건 라온이라고 했으니, 그와 광풍대의 핏물로 이루어진 결계가 분명했다.
‘빌어먹을….’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오르고스에게 분노가 일었다. 마왕에게 찢겨 나간 놈을 되살려 다시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정말 이 결계가 비틀어지면서 라온이 튕겨 나갔다면 이 안에 힌트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야 했다.
“음….”
드래곤 로드도 마왕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결계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마법을 발동시켰다.
“생각 이상으로 강한 마왕이었군….”
그는 이 공간 자체에 영향을 주었던 마왕의 기운을 느낀 듯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글렌이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마기가 아니었어.’
마왕은 두 초월자의 공세를 막으면서 이쪽에 대한 경계까지 하고 있었다. 만약 이 대륙에 남아 있다면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마왕이 아니다. 라온과 광풍대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글렌이 다시 결계 내부를 살피고 있을 때 로엔이 다가왔다.
“가주님.”
로엔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었다.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광풍대가 오웬 왕국 내부 치료소에서 회복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광풍대 전원이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말하며 입술을 살짝 떨었다.
“광풍부대주가 그 반지를 이용하여 모두를 보낸 듯합니다.”
“그렇겠지….”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가 부족하여 오웬으로 보낸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 라온은….”
“그곳에 광풍부대주는 없다고 합니다.”
로엔은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북멸왕.”
성검련주가 눈매를 찡그리며 어깨 위에 흑검을 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예전의 당신이라면 부하들이 죽든 말든 나와 검을 부딪쳤을 텐데?”
“입 다물고 있어라.”
“내가 직접 그 어린 것들을 죽이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더이상 날 실망시키지 말라고.”
그의 발밑에서 핏빛에 물든 흑영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다르칸.”
글렌이 뒤를 돌았다. 숨이 말라붙을 정도의 건조한 시선으로 성검련주를 굽어보았다.
“그리 보채지 않아도 죽여줄 것이다.”
“그래. 그 표정. 그걸 바라고 있었….”
“오웬!”
그가 입매를 비틀어 올릴 때 멀린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맞아. 오웬이야! 오웬에서 냄새가 나!”
멀린은 라온의 냄새가 오웬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중얼거리며 결계를 빠져나갔다. 그리곤 단숨에 떠올라 오웬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글렌은 성검련주에게 검을 겨눈 채로 입매를 꾹 내렸다.
‘저 여자….’
라온을 에덴의 지부로 납치했고, 지금도 기이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정신 나간 인간이지만, 라온의 결계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도 그녀였다.
“로엔. 천검대주와 광풍대주를 데리고 오웬으로 가도록.”
“알겠습니다.”
글렌은 로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멀린이 날아간 방향으로 태화보를 밟았다. 그의 신형이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다.
“이런 미친! 어딜 도망치는 것이냐! 글렌 지그하르트!”
성검련주가 이를 바득 갈고서 글렌의 뒤를 쫓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귀살창이 창대를 던지며 헛바람을 흘렸다.
“난장판이로군.”
암검후가 검병에서 손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희극제는 글렌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관자놀이를 깊게 짚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마왕.’
얼마 전 라온 지그하르트의 천기를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책자에 새겨진 악마의 형상이 오르고스를 죽였던 마왕의 얼굴과 겹쳐서 보이는 듯했다.
‘혹시…?’
* * *
라스는 두 팔에 아이스크림과 여러 가지 음식을 꼭 안은 채 인적이 멎은 왕도의 뒷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곧 바뀔 시간이니까. 여기서 먹고. 네 모습을 찾는 게 나을 것이니라.”
-알겠으니까. 빨리 먹는 게 좋지 않을까?
라온은 라스가 들고 있는 음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느니라!”
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과 음식을 내려놓았다.
“뭐부터 먹어 볼까?”
-일단 음식을 먹어야지. 아이스크림은 후식이잖아.
“역시 네놈은 먹을 줄을 모르느니라. 이럴 때는 아이스크림부터 먹는 것이니라!”
-이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건데….
라온이 히죽이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화아아아아!
라스가 떨리는 손으로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새하얀 김이 올라오자, 녀석의 눈동자도 똑같이 하늘거렸다.
“드디어 본왕의 손과 입으로 이 예술을 먹어 보는구나. 오래 기다렸… 어?”
다만 라스가 아이스크림으로 손을 가져갈 때 녀석의 팔에 맺혀 있던 퍼런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너 아까 치료할 때 싸울 때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다고 했잖아. 거기다 내 부담까지 가져가서 시간이 더 짧아진 거 아니야?
“아악!”
그게 맞는지 라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 안 돼! 안 된다고! 딱 한 입만! 다 사놓고 먹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프지않느냐!”
녀석은 이럴 수는 없다며 억지로 손을 뻗었다.
“이 빌어먹을 하늘아! 억까 좀 그만하란 말이다아아아아아아!”
라스가 손으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잡은 순간 전신에 휘감긴 푸른 서리가 빛의 폭발을 일으키며 라온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이이익!
제천검에 찔린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안색이 창백했다.
“오늘은 억까가 아니라, 네 식탐 때문이잖아. 이게 분노인지, 탐식인지.”
라온이 손에 잡힌 아이스크림의 차가운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빨리… 하라니까….”
하지만 곧 그 역시 라스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캬앙.
꺼멓게 물드는 시야 속에서 제천검과 아이스크림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땅에 떨어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녹아내릴 때쯤 골목 사이에서 노인과 여성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 뭐가 있다는 것이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니까.”
“주정뱅이들이 주먹질이나 하고 있… 음?”
노인은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그는 라온의 얼굴과 제천검을 살피고서 눈을 부릅떴다.
“라온 지그하르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513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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