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마르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먼지 하나 없이 관리 잘 된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여기는 어디… 아.’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맑기 때문일까.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바로 떠올랐다.
‘마스터가 되고 기절했었어.’
신주오령의 결투 대회에서 마스터를 상대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원하던 강기를 뽑아낼 수 있었다.
‘아마 무승부로 끝났겠지.’
기절하기는 했지만, 칼론이라는 건방진 녀석을 확실하게 후려쳤던 건 기억났다.
마르타가 지그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단전 내부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힘이 꿈틀거렸다.
‘꿈이 아니야.’
무학에 대한 깨달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지금이라면 칼론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 녀석이 무슨 말을 할까?’
라온이 마스터에 오른 자신을 보고 무슨 말을 하지 궁금해져서 참기가 힘들었다. 당장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그 녀석 성격에 솔직하게 잘했다고 하지는 않을 테고… 음?’
마르타가 홀로 키득거리다가 눈동자를 굴렸다. 조금 전부터 밖이 시끄러웠다.
‘여긴 치료소겠지.’
깔끔한 내관과 옆에 놓인 약재를 보면 치료소가 분명했다. 새로운 도시답게 돈을 들인 티가 났다.
‘나가볼까.’
오래 잤는지 몸이 가볍다. 바로 움직여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붕대를 대충 풀고, 병실의 문을 열었다.
“끄아아아악!”
“복부부터 막아!”
“아니, 팔이 어떻게 이런….”
“추,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복부에 창상이 세 개가 넘어가요! 이분은 이미 늦은….”
“입 닥치고 치료술에 집중해! 삼왕자님의 신패를 가져온 분들이다! 무조건 살려!”
환자들의 비명과 치료사들의 외침이 난무한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이상하게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들이 익숙했다.
“설마….”
마르타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치료사들이 복부에 치료술을 운용하는 환자의 얼굴을 살폈다.
‘어…?’
도리안이다. 두 팔과 다리가 망치로 내리친 듯 으깨졌고, 복부에는 시꺼먼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관은!”
“고, 곧 온답니다!”
“빌어먹을! 그것들은 돈을 가져다 발라도 엉덩이가 무거워!”
금색 의복을 입은 중년의 치료사가 욕설을 내뱉으며 도리안의 복부에 약재를 바르고, 두 손으로 구멍을 막은 뒤 푸른 기운을 뿌렸다.
“흐윽….”
도리안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호흡이 붙어 있는지 목울대가 움직였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은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도리안의 옆으로 한쪽 안구가 피범벅이 된 버렌, 배에 세 곳이나 구멍이 뚫린 루난, 그리고 왼팔이 시꺼멓게 타버린 마크 괴튼이 있었다.
셋 모두 고통이 심한지 어깨와 목을 잘게 떨고 있었다.
“아흑….”
“크아아아악!”
“끄으으….”
“사, 살을 도려내 주십시오! 견딜 수가 없어….”
다른 광풍대 검사들 역시 이곳저곳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꼭 한참 지난 것처럼 상처가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마, 마기?’
마기에 당한 거야?
마르타가 옆에 있던 벽을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다리에 힘이 빠져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 라온! 라온은 어디에….’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광풍대가 이렇게 다쳤으면 라온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라온을 찾아보기 위해서 기어가는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유아가 보였다.
“유아야!”
“마, 마르타 언니!”
어깨와 허리에 피에 젖은 붕대를 감고 있던 유아가 마르타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발 말 좀 해줘….”
마르타가 창백해진 입술을 떨며 유아의 소매를 잡았다.
“어, 언니가 자고 있을 때 성검련주와 백혈교주가 바레네를 습격했어요.”
“백혈교주….”
백혈교주라는 이름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괴물이 또….’
마르타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으며 고통에 잠긴 광풍대를 돌아보았다.
엄마의 육체를 가져간 것으로 모자라 동료들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저희는 그 둘에게 당한 게 아니에요.”
“뭐?”
“광풍대주님과 천검대주님이 길을 열어주셔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유아는 마르타에게 그녀가 자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그, 그럼 라온은….”
“…거기에 혼자 남으셨어요.”
유아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서글픔과 걱정이 깃든 울음이 치료소를 휘감자, 고통에 발버둥 치던 환자들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고, 잔잔하게 호흡했다.
유아가 본인도 모르게, 모두를 재우는 자장가의 음률을 일으킨 것이다.
“허….”
“이게 뭐야?”
“마취도 제대로 안 먹혔는데….”
치료사들이 유아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한 듯 보였다.
“뭘 정신 놓고 있어! 빨리 움직여!”
“죄, 죄송합니다!”
금색 의복을 입은 중년인의 호통에 다른 치료사들이 다시 치료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마르타가 훌쩍이는 유아의 어깨를 잡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 자식이 거기서 죽을 리가 없으니까.”
“그, 그렇죠?”
“그래. 나만큼 그 녀석의 기적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믿어.”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고개를 돌렸다. 피나도록 말아쥔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젠장. 젠장! 제에에엔장!’
내가 편안하게 자고 있는 동안 광풍대가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게, 녀석들이 본인의 몸보다도 나를 지켰다는 게, 라온이 모두를 살리고 홀로 전장에 남은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게 분하여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급해져서는 안 된다. 라온이 이곳에 모두를 보냈다면 그의 의도대로 이들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가문에 연락부터.’
모두가 이런 상태가 되어서 치료소로 전송이 되었다고 했으니, 아직 연락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타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광풍대 전체의 부상과 상태를 파악한 뒤 치료소 직원에게 지그하르트로 연락을 해달라 부탁했다.
필요한 약재나 영약은 모두 가져오라고 말한 뒤에 책임자로 보이는 금색 의복의 중년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저 녀석들을 살려만 주세요.”
마르타는 입술을 깨문 채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치료비는 이미 충실하게 받았소.”
금색 의복의 중년인이 피에 젖은 삼왕자의 패를 가리켰다.
“다만 도움은 필요하지. 오러를 모조리 뽑아도 괜찮겠소? 굉장히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다시 오러를 쓰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마르타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중년인의 옆에 붙었다.
“좋소. 이걸 팔에 꽂으시오.”
중년인은 손가락 정도로 두꺼운 바늘로 마르타의 팔을 가리켰다.
마르타는 오른팔에 바늘을 꽂으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라온 꼭 살아서 돌아와라.’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려놓을 테니까.
* * *
라스는 초월자들을 바라보며 오연한 눈빛을 드러냈지만, 그걸 뒤에서 보고 있는 라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야!
“왜 부르는 것이냐.”
그래도 정신은 있는지 라스는 기막을 친 채 대답했다.
-대책 없이 그냥 나가면 어떻게 해!
라온이 라스에게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나랑 너랑 관계가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고!
원래 계획은 결계 속에서 라스와 육체를 교환한 후 모르쇠로 나가는 거였는데, 저 미친 마왕 녀석이 그대로 결계를 벗어나 버렸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거 잘못되면 다 망해!
마왕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들키게 되면 지그하르트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드래곤들에게 살해당할 가능성도 있다.
초월에 오른다면 모를까 아직 그랜드 마스터도 못 됐기 때문에 지금은 무조건 숨겨야 할 때였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본왕과 네놈의 관계를 알 수 없느니라.”
-알 수 없다고?
“지금 본왕은 네놈의 육체가 아니라, 본체 모습을 하고 있느니라. 기운 역시 네놈의 조잡한 오러가 아니라, 서리의 마기를 휘감고 있지. 저 버러지들 중에 본왕 속에 있는 네놈을 찾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
-시간 제한이 걸려 있잖아. 갑자기 변하면….
“현재 이 몸을 유지하는 힘은 네놈의 정신만이 아니라, 본왕의 마기이니라.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건 맞지만, 알아서 조절할 수 있느니라.”
라스는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도 연관 짓지는 않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네 결계는 아직도 저 밑에 있느니라. 본왕이 이곳을 떠날 때쯤 풀어서 시선을 끌 테니,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정말이야?
“본왕이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느냐?”
-…거의 없지.
허세를 부릴 때 빼고는 라스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라스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며 눈동자를 돌렸다.
“네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뭐?
“사실 본왕은 들켜도 아무렇지도 않느니라. 마왕으로서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어….
“하지만 네놈은 다르지. 어떠냐. 정체를 드러낸 뒤에 네놈에게 몸을 돌려줘 볼까?”
녀석은 조롱하듯 반달 같은 눈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
“일주일.”
라온이 입술을 깨물 때 라스가 검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
“이 일이 끝난 이후 일주일 동안 본왕이 원하는 음식을 모두 먹겠다고 맹세하거라.”
-협박이냐?
“네놈에게 배운 것이니라. 필기하길 잘했어.”
라스는 역시 노력은 보답을 받는다며 히죽거렸다.
-으으….
일주일 동안 원하는 음식을 먹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해달라고 했으면 무조건 해줬을 텐데, 생각지도 않은 협박을 당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것이니라.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라스가 손가락으로 밑에 있는 초월자들을 가리켰다.
라온은 리메르와 셰릴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일주일….
“시간제한을 넘겨서 2주가 되었느니라.”
-야!
“이것도 네놈에게 배운 것이니라.”
-내가 언제 그랬어!
“어? 시간이 또 끌렸느니라. 3주로 늘었….”
-좋아! 3주!
이 이상 가면 한 달이 될 것 같아서 바로 하겠다고 외쳤다.
“콜이니라.”
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하늘의 억까도 막을 수 있겠지.”
녀석은 3주라는 시간이면 하늘이 아무리 방해해도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지상으로 내려서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지금 네 몸으로 가면 되잖아.
라스가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느니라.”
* * *
희극제가 허공에 뜬 존재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저건 또 뭐야.’
저놈이 공간을 뜯어내고 튀어나와서 기껏 준비한 진법이 망가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슨 기운이 저렇지?’
저자가 가진 기운은 신성력처럼 고아하면서, 마기처럼 음울했다.
조화되기 힘든 기질이 한 몸에 흐르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이 공간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햇볕이 이지러지는 바다색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있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미형이었다.
인간을 벗어난 미모와 신비로운 기운,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어.’
눈을 깔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쪽에 호감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저자가 언제 공격해도 대비할 수 있도록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음….”
“허.”
백혈교주는 긴장한 듯 입매를 가늘게 떨었고, 성검련주는 흥분한 도박꾼처럼 눈동자가 뻘게졌다.
“크윽!”
“으으….”
귀살창과 사검마는 사기를 운용하는 무인답게 압도적인 마기를 지닌 라스에게 짓눌린 듯 뒤로 물러섰다.
“…….”
악검후는 평소처럼 담백한 눈빛으로 검병 위에 손을 얹었다.
초월자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라온은 리메르와 셰릴부터 살폈다.
-다행이야.
둘 다 무사해.
리메르와 셰릴 모두 부상을 입은 상태지만, 광풍대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상황만 잘 만들어주면 알아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어?
라온이 라스를 지그시 바라보는 멀린을 확인하고 옅게 웃었다.
-역시 왔군.
‘저, 저 광녀도 온 것이냐?’
라스가 처음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무력이 강해져서 좀 달라졌나 했더니, 가진 기질은 솜사탕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당연하지.
라온 지그하르트에 대한 집착으로 따지면 대륙 제일인 멀린이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본왕이.”
라스는 멀린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냉랭한 눈동자로 초월자들을 굽어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눈 깔라고 했을 텐데?”
“너!”
사검마가 턱을 떨며 손가락으로 라스를 가리켰다.
“마족이로구나! 애매한 기운이지만, 마기가 아니고서는 그런 음기를 가질 수가 없… 컥!”
그가 라스에게 마족이라고 말을 할 때 갑자기 뻑 소리가 울리더니,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가 버렸다. 뺨이 뻘게지며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본왕은 질문 따위를 듣지 않는다.”
라스가 사검마의 뺨을 후려친 손을 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주제를 알고 입을 놀리거라.”
“아….”
사검마가 얻어맞은 뺨을 매만지며 입술을 떨었다.
‘지금 내가 맞았다고?’
전력이 아니라고 해도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맞을 때까지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 진심을 드러낸 성검련주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본왕은 마족 따위가 아니라. 마계의 왕이니라.”
“마, 마왕? 마왕이 왜 이곳에….”
사검마가 경악성을 지를 때 라스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햇볕을 쬐지 않은 것처럼 새햐안 손이 빛살이 되어 나아갈 때 사검마가 움직였다. 그는 라스의 공세를 방어하고, 역공을 준비하기 위해 사기를 운용한 손등을 세웠다.
하지만 라스의 수도는 사검마의 방비를 뱀처럼 파고 들어가서 결국 그의 뺨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뻐어어억!
사검마의 얼굴이 밑으로 꺾이며, 그의 입에서 누런 이빨이 하나 튀어나왔다.
“조잡한 마기가 신경을 건드려서 와보았느니라. 네놈은 더 추하지만.”
“으윽….”
사검마는 믿을 수 없다는 뒷걸음질을 치며 눈동자를 떨었다.
“지, 진짜 마왕….”
사검마가 턱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마왕이 아니고서는 이게 말이 안 돼.’
마족은 인간계에 오는 순간 힘이 떨어진다. 대비하고 있던 자신의 뺨을 칠 정도라면 마왕이 아니고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왜 마왕이….”
귀살창도 긴장한 듯 입술을 씹으며 창대를 들어 올렸다.
“후우….”
악검후 역시 언제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숨을 고르며 손가락으로 검병을 말아쥐었다.
“크하하하하하!”
성검련주가 이마를 잡고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럼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나? 마왕이여?”
그의 물음에 라스가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혹시 검을 쓰나?”
“쓰지 않는다.”
“쳇.”
성검련주는 그것으로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물러섰다.
-허….
라온이 한숨을 내쉰 성검련주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거 진짜 뭐하는 놈이야.
검에 미친 귀신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마왕에게도 관심이 없을 줄은 몰랐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마왕?”
어딘가 오싹한 목소리가 라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뭔가 냄새가….”
멀린이다. 그녀가 가면을 살짝 든 채로 산책을 나온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라스에게 다가갔다.
“라온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윽….”
라스가 처음으로 흠칫 놀라서 어깨를 쭈그렸다.
-이 녀석은 진짜….
라스가 멀린을 무서워하는 건 연기가 아니었다. 성검련주, 백혈교주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녀석이 멀린에게 쫄아서 몸을 말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마왕이라고?”
백혈교주가 입매를 비틀며 라스의 전신을 살폈다.
“그걸 스스로 밝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라스가 백혈교주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소고기 소녀의 어미가 저 육체의 주인이라고 했었지.’
-그래.
녀석은 예전에 마르타가 말해줬던 사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너 설마….
“어이 기생충.”
라스가 백혈교주에게 손을 뻗었다.
“그 몸을 내놓거라.”
“뭐?”
“그 육체를 내놓고 꺼지라 말했느니라.”
“가득이나 짜증나는데, 미친 마족놈까지 난리로군.”
백혈교주가 이를 바득 갈며 손 위로 무색의 기운을 일으켜 라스를 향해 내질렀다. 피가 굳은 대지를 깎으며 나아간 기운이 라스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주제를 모르는 기생충이로구나.”
라스가 차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털어냈다. 새하얀 손아귀 위로 푸른 빛이 일렁이는 순간 짓쳐 들던 백혈교주의 혈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얼어? 혈기가?”
백혈교주가 얼어붙은 채 모빌처럼 떠 있는 혈기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조잡하구나. 네 존재 자체처럼.”
라스가 턱을 모로 틀며 비웃음을 흘리자, 얼어붙은 혈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마왕의 피는 어떨지 궁금했는데, 잘 됐어.”
백혈교주가 양손을 펼쳤다. 안색이 굳어진 그녀의 어깨 위로 투명한 혈기가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렸다.
치리리링!
차가운 검명이 두 사람의 긴장을 갈랐다.
성검련주가 백혈교주의 옆으로 붙으며 라스에게 검을 들어 올렸다.
“네놈도 끼는 건가?”
“조금 전의 그 빙결 능력이 내 검술을 막을 수 있을지 흥미가 생겼거든. 거기다 마왕은 대륙의 공적이니까.”
그는 그 무엇보다도 재밌을 것 같다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흑탑을 동료로 받았으면서 말은 잘하는군.”
악검후가 발검술 자체를 취하며 인상을 구겼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다만 너희도 마왕을 잡는 걸 방해하지는 않겠지?”
성검련주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
“음….”
희극제는 대답이 없었고, 귀살창은 상황을 보려는 듯 물러났다.
스르르릉.
사검마는 라스의 빈틈을 노리려는 듯 악독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라스!
라온이 다급하게 라스를 불렀다.
-도망 안 치고 뭐 해! 아까처럼 결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마족은 인간계에서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백혈교주와 성검련주 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물러서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예전에 네놈이 말했지. 완벽한 상태로 싸우고 싶다면 연무장에서 대련만 하면 그만이라고. 그 말 그대로다.’
-뭐?
‘안전한 싸움만 하는 겁쟁이는 왕이라 불릴 수 없느니라.’
라스가 허리를 펴고 성검련주와 백혈교주를 바라보았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녀석의 존재감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왕은 길을 비켜 가지도, 돌아가지도 않느니라. 등 뒤에 백성들을 이끌고 그저 뚫을 뿐이니라.’
-아….
‘네놈도 그 땅의 왕이 되고 싶다면 잘 보고 있거라.’
라스의 말에서 녀석의 진심이 느껴졌다. 매번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는 건 저런 자존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본왕은 오늘 저 기생충의 머리통을 뽑을 것이니라. 방해하려거든 목숨을 걸어라.”
라스가 백혈교주를 가리키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 위로 분노의 불길이 명멸했다.
“오라!”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510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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