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화
라온은 교역도시 카멜룬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눈을 내리감았다.
‘확실히 7성은 다르군.’
만화공과 글래시아가 7성에 이르자, 오러가 차오르는 속도가 이전보다 배는 빨라졌다.
태화보는 아니지만, 전력으로 보법을 밟고 있음에도 오러가 회복될 정도였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니니까. 속도보다는 회복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
성검련주와 백혈교주는 신주오령의 수장들에게 가로막혀 있지만, 그들의 수하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언제 따라올지 모르기에 항상 싸울 준비를 해둬야 했다.
라온이 이동속도를 유지하면서 성장한 육체와 특성에 적응하고 있을 때 얼음 꽃팔찌 위로 라스가 튀어나왔다.
-야.
라스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으니, 속도를 높이라고 할 게 분명했다.
-당장 속도를 올려라.
‘좀 기다려. 지금은 확인할 게 많으니까.’
예상대로의 말에 미소를 지을 때 라스의 표정이 물기 하나 없이 굳어졌다.
-…그냥 지나가는 건가? 아니,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곧 만나겠어.
라스가 어둑한 밤하늘을 올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라스?’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쏟아부어서 달려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녀석은 입을 다문 채 손가락으로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카멜룬보다 조금 서쪽으로 치우친 곳이었다.
라온이 라스의 건조한 눈동자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라스는 분위기를 읽지 못할 때가 많지만,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해진다.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앞서간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후욱….”
라온이 날숨에 탁기를 뱉어내며 거세게 발을 굴렀다. 7성에 오른 만화공의 열기가 발과 종아리의 마나회로에서 응축되며 태화보에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일으켰다.
급격히 빨라진 속도에 시야가 시꺼멓게 보일 정도였다.
쿠구구구구!
기껏 모아둔 오러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지만, 라스를 믿고 녀석이 지정해준 방향을 따라 계속 달렸다.
“아….”
라온은 전력으로 달린 지 1분도 되지 않아서 허공을 올려다보며 꾹 닫고 있던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저건 뭐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마기가 치솟았다. 그랜드 마스터조차 넘어선 규격 외의 기파. 하늘에 닿은 괴물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흑탑인가?’
저 정도의 마기를 가진 존재는 마족추영회와 흑탑을 제외하고는 없다.
수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족추영회가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으니, 저건 흑탑의 마인이 분명했다.
‘초월에 닿은 흑탑의 괴물이 이 숲에 있다는 건….’
라온이 송곳니로 떨리는 입술을 씹었다.
‘부탑주가 왔다는 뜻이겠지.’
흑탑에 있는 초월자는 탑주와 부탑주 둘. 탑주가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으니, 저놈은 바레네에 있을 날 찾아온 흑탑의 부탑주 오르고스일 것이다.
‘빌어먹을.’
라스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네가 왜 빨리 가라고 했는지 알겠어.’
오르고스의 거대한 마기 때문에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저 앞에 누가 있을지는 뻔했다. 광풍대와 중립세력 그리고 민간인들이 잡혀 있을 것이다.
-네놈도 느꼈으니, 알겠지. 저건 지금의 네가 이길 수 없다. 도망칠 테냐?
라스는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진중한 시선으로 눈을 맞춰왔다.
“도망?”
라스의 하늘빛 눈동자를 보며 차게 웃었다.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도망을 가.”
머릿속에 도망친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딱 하나. 저곳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지 계획을 짜는 게 전부였다.
터어어엉!
라온이 눈 덮인 대지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태화이보를 밟았다. 마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달리는 그의 걸음에는 자그마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 *
쩌저저저적!
바레네에 남은 초월자들의 무학이 하늘과 땅을 가르며 묵빛의 차원이 돋아났다.
넝마가 된 옷에 천을 덧댄 듯한 가지각색의 균열이 벌어지며 도시 전체를 무너뜨릴 것 같은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히던 초월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카멜룬이 있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음….”
성검련주가 장포의 소매를 걷고, 수염 한 올 없는 턱을 매만졌다.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는군. 저 정도 기운이면 흑탑인가.”
그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입맛을 다셨다.
“오르고스….”
희극제는 마기의 주인을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진짜 감정을 드러냈다.
‘왜 저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오늘 일에 관한 천기를 보았을 때 오르고스는 등장하지 않았었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일이라 손끝이 떨렸다.
‘설마….’
또 라온 지그하르트야?
아니, 확실하다. 그놈의 존재가 다시 한번 천기를 비튼 게 분명했다.
“오르고스라면 흑탑의 부탑주로군.”
성검련주는 이곳까지 기운을 퍼뜨린 상대가 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관심을 끄고 흑검을 허공에 띄웠다.
“저쪽은 알아서 하게 놔두고, 다시 시작하지.”
그는 흥을 꺼뜨리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사검마와 악검후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초월자들이 마기를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셰릴과 리메르도 북쪽의 이변을 알아차렸다.
“저, 저쪽이면 설마….”
“아이들이 간 방향이야.”
리메르와 셰릴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용현검주, 사도, 유혼대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어딜 보는 것이냐!”
“이제 끝이로군.”
용현검주의 검에서 갈색 화룡이 치솟고, 사도의 수도에서 무색의 강환이 뻗어 나왔다.
막대한 공세에 대지의 거죽이 벗겨지고,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아!
리메르와 셰릴은 다가오는 강맹한 기파를 보며 각자의 검에 가진 기운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셰릴의 흑백교검에서 빛과 어둠을 가르는 섬광이 치솟았고, 리메르의 검에서는 시뻘건 뇌기와 바람의 기운이 명멸했다.
두 사람은 응집시킨 기운을 그대로 부딪치지 않았다. 쇄도해오는 기운을 향해 유연한 형태의 검세를 휘둘렀다.
검날이 휘어지며 일으킨 탄성을 이용하여 반대편으로 땅을 박찼다. 적의 기운을 이용하여 추진력을 얻은 후 성벽으로 도망친 것이다.
“천검대 산개! 전력을 다해서 가문으로 복귀하라!”
셰릴은 지금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천검대를 분산시켜서 시선을 끌게 한 후 성벽을 넘었다.
“괜찮겠지?”
그녀는 눈썹을 가늘게 내린 채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몰라. 그래도 가야 해.”
리메르는 멍하니 선 용현검주를 힐끔 돌아보고서 입술을 꾹 씹었다.
‘빌어먹을….’
가슴이 외친다. 당장 돌아가서 놈의 목을 베고, 그 녀석들의 복수를 하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생각할 때였다.
‘이 목을 바쳐서라도 복수해줄 테니까. 기다려라.’
리메르가 누군가에게 다짐하며 더 속도를 높일 때 허공에서 칠채의 빛이 번쩍이며 가면의 턱 부분이 깨져나간 멀린이 나타났다.
“라온!”
멀린은 몇 겹의 증폭 마법을 두르고 카멜룬을 향해 빛살이 되어 날아갔다.
“빌어먹을!”
백혈교주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녀는 흑단 같은 머리칼을 뒤로 쳐내며 북쪽을 향해 튀어 나갔다.
“어딜 가는 거냐!”
귀살창이 아직 끝내지 못한 싸움을 하자며 적마를 탄 채 그 뒤를 쫓았다.
“흐음….”
성검련주가 흑검의 검병을 쓸어내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쫓는 건가.’
지금 떠난 이들은 모두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대를 살리기 위해서 움직인 것 같았다.
‘저 흡혈귀가 움직일 정도라는 거지.’
새로운 그릇이라도 되는 건가.
성검련주가 흑검을 띄우며 북쪽을 향해 기감을 뻗어냈다. 클라우드는 죽지는 않았지만, 폐인이 되기 직전이었고, 라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에 불에 탄 시체들이 많았는데, 라온을 노리다가 당한 것 같았다.
‘클라우드를 잡고, 살수들까지 처치한 건가.’
라온의 재능과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자들의 행동에 흥미가 동했다.
“켈린. 클라우드를 챙겨라.”
성검련주는 유혼대에게 지시를 내린 후 흑검에 올라탔다.
“전리품 하나만 챙기고 오도록 하지.”
그는 가볍게 손짓하고서 흑검을 탄 채로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보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 무시무시한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어딜 가는 것이냐!”
“…….”
사검마가 악을 지르고, 악검후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후우….”
희극제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 망할 놈은 언제까지 방해할 셈이지?’
이대로 상황이 끝난다면 바라던 대로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카멜룬 근처에 있는 오르고스가 라온과 광풍대를 처리하고 신주오령을 습격해온다면 위험할 테지만, 저 인근에는 발카르와 오웬이 있다.
두 곳에서 지원이 달려오고 있을 테니, 오히려 이곳에 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우리도 가보죠.”
결정을 내린 희극제가 악검후와 사검마에게 손짓을 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봐야겠어요.”
* * *
도리안이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다.
고통은 이미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아….”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르고스가 턱을 모로 트는 모습이 보인다.
안 그래도 기괴했던 모습이 더 무섭게 다가왔다. 신경이 돋은 백안이 광풍대를 훑어 내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자신에게 박혔다.
다시 한번 느껴진다. 저건 인간도, 괴물도 아니다. 천재지변. 지금의 광풍대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고오오오!
오르고스와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 도리안이 자연스레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리안!”
“멈춰.”
“이 자식!”
“나를 보란 말이다!”
광풍대가 검진을 일으키며 오르고스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마인들이 길을 막아섰다.
“빌어먹을….”
버렌이 구멍이 뚫린 어깨를 꽉 잡으며 이를 바득 갈았다. 부탑주 하나도 상대할 수 없는데, 마인들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머리에 그려졌지만,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오르고스는 다른 이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도리안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말한다면 살려주마. 넌 누구냐.”
그는 가장 먼저 라온의 이름을 입에 담은 도리안에게 흥미가 있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마, 말했잖아.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도리안은 통증 때문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음에도 끝까지 라온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널 바로 죽이지 않기를 잘했구나.”
오르고스가 검지를 까딱이자, 도리안의 왼쪽 다리가 비틀어졌다.
“아아아아악!”
도리안은 공중에 떠 있어서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에 그저 비명만을 질렀다.
“도리안!”
“이 개자식아!”
“죽여 버리겠어!”
참지 못한 광풍대가 길을 막은 마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오러와 마기가 부딪치며 하얀 대지 위로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다.
버렌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후 뒤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도망치세요! 우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는 이 순간에도 민간인과 중립 세력의 무인들을 생각하며 빨리 도망치라 외쳤다.
“아….”
“가고 싶지만 발이….”
“모,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분노로 마음을 다잡은 광풍대와 달리 중립 세력 사람들과 민간인들은 오르고스의 압도적인 기세에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넌 누구냐.”
오르고스는 그런 버렌과 광풍대를 비웃으며 다시 도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느, 늙은이. 눈깔이 없다고 귀도 막혔냐고….”
도리안은 오르고스를 볼 힘도 없는지 허공을 올려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라온이다. 내가 백검룡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그렇군.”
오르고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고무공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도리안의 복부에 시꺼먼 구멍이 뚫렸다.
“어어억….”
도리안은 이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핏물과 침을 뱉으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생각보다 끈끈한 관계로구나.”
오르고스의 손짓에 도리안의 배에서 흘러나오던 핏물이 멎었다.
“그놈이 내 수하들을 꽤나 베었지.”
그의 입매 위로 사이한 웃음이 차올랐다.
“그놈 앞에서 너희를 불태운다면 나름 재미있겠어.”
“노괴야! 나를 보아라! 약한 놈은 그만 건드리고 나를 치란 말이다!”
버렌이 가슴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왔다.
“네가 봐야 할 사람은….”
“그 눈이 마음에 안 드는구나.”
“뭐?”
오르고스의 입매가 뚝 떨어지자, 버렌의 오른쪽 눈이 터져나갔다.
“아아아아악!”
버렌이 피가 흐르는 안구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
이번에는 루난이 배에 터진 출혈을 억지로 막으며 앞으로 나왔다. 애검 설화를 든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나야.”
“보채지 않아도 된다. 너희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내릴 생각은 없으니까.”
오르고스가 루난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손가락을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인연을 쌓은 것을 후회하면서 죽어가거라.”
“아….”
루난이 비틀거리다가 우측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가 맹수의 이빨에 물린 듯 두껍게 뜯겨 나가 있었다.
“흐아아아아!”
마인의 목을 베고 포위망을 벗어나 마크 괴튼이 포효를 지르며 오르고스에게 달려갔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부러진 도를 들고 내달렸다.
“두려움이 없는 눈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군.”
오르고스가 입매를 비틀며 손가락을 튕기자, 마크 괴튼의 제복 위로 푸른 불꽃이 치솟았다.
화아아아아!
작은 불꽃은 광풍대의 제복을 순식간에 태우고, 그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살점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나고 있음에도 마크 괴튼은 물러서지 않았다.
“들어보았을 텐데, 창염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오르고스가 고개를 젓자, 마크 괴튼의 어깨를 태우던 불꽃이 순식간에 불어나 그의 팔을 휘감았다.
“끄으으윽….”
마크 괴튼의 걸음이 천천히 멎는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그가 피에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오르고스가 다시 절망에 빠진 광풍대를 굽어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그 눈이다. 결국 인간의 연이라는 것은 공포 앞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말을 멈춘 그의 백안 위로 천천히 일어서는 광풍대가 비치고 있었다.
도리안이 으깨진 팔로 땅에 박은 검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켰고, 버렌의 비어버린 안구에서 더욱 진한 기세가 피워냈으며, 루난이 다리의 상처를 얼리며 보랏빛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마크 괴튼 역시 몸이 불타는 고통에 전신에 핏줄이 섰음에도 다시 일어서서도 반 토막 난 도를 세웠다.
라온 지그하르트라 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세와 의지는 전보다 더 굳건한 뿌리를 내렸다.
“정말이지….”
오르고스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다.”
그는 라온 앞에서 목을 따겠다는 말을 잊은 듯 살기 가득한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크 괴튼의 팔을 태우던 불꽃보다 훨씬 거대한 창염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재가 되어라.”
오르고스가 광풍대를 향해 창염을 뿌릴 때였다.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시꺼먼 비수가 날아들었다.
뿌드드드득!
비수는 오르고스에게 닿지도 않은 채 우그러들었지만, 그의 집중력이 잠시 풀렸다.
창염의 궤도가 비틀어진 찰나의 순간 광풍대의 눈앞으로 성스러울 정도로 투명한 은백색 서리의 벽이 솟구쳤다.
쿠와아아아아아!
무엇이라도 태워버린다는 창염은 서리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 주변만 시꺼먼 재로 만든 채 사라져 버렸다.
“이, 이 벽은….”
도리안이 광풍대를 에워싼 냉기의 벽을 보고 입술을 떨었다. 아리안 가문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냉기의 벽. 절대 잊을 수 없는 라온의 무학이었다.
“늦었구나.”
오르고스의 시선이 벽 위로 올라갔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피어났다.
“라온 지그하르트.”
창염조차 녹이지 못한 백은의 장벽 위. 눈동자에 핏빛 광휘가 깃든 검사가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507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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