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글렌이 어둑한 창가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그는 드물게도 짙은 감정 표현을 보이며 허리에 패용한 진천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오르고스와 광풍대….’
채드는 흑탑의 부탑주 오르고스와 광풍대가 부딪친다고 말했지만, 그건 옳은 표현이 아니다.
오르고스를 마주친다면 광풍대는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육황오마의 수장급은 아니지만, 오르고스 역시 무력으로 하늘에 닿은 초월자였다.
라온, 리메르, 셰릴이 함께 있어도 버티기 힘들 텐데, 라온과 광풍대만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다.
‘만나지 않는다는 가정도 의미가 없지.’
오르고스가 노리는 사람은 라온이다. 놈의 수준이라면 광풍대가 카멜룬의 이변을 알아차리고 숨거나, 도망쳐도 찾아낼 것이다.
‘그 반지도 쓰기 힘들 테고.’
오웬 왕국에서 벌어졌던 육황 결투 대련의 우승 상품이었던 체임버의 반지. 라온이 그 반지를 제때 사용한다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지의 권능은 너무도 크기에 내부의 마나만이 아니라, 체임버의 마나까지 필요로 한다. 지금 흑탑주와 싸우고 있는 그녀에겐 그런 여유가 없을 것이다.
우우우웅!
글렌이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진천검의 검병을 두드렸다. 주인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 듯 진천검이 아련한 울음을 흘렸다.
‘그럼 제시간에 갈 방법이 없는 건가.’
채드가 말해주었던 시간대를 생각해보면 카멜룬의 차원문이 복구되지 않는 이상 오르고스와 광풍대가 마주치기 전에 그 장소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글렌이 탁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라온의 어색해하는 눈빛이. 가끔은 당황하여 눈썹이 내려간 모습이 떠오른다.
그 뒤로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얼굴까지 겹쳐지자, 쇠사슬이 매여진 듯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늦겠지. 그래도….’
간다.
이곳에서 생각만 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가진 기운을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라온과 광풍대에게 달려가는 게 옳은 일이다.
“비연회주. 가장 가까운 차원문은?”
글렌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진천검에서 손을 뗐다.
“카멜룬에서 남서쪽으로 디올이라는 중소도시가 있습니다. 오웬이나 발데르보다는 그곳이 조금이라도 가까울 겁니다.”
채드는 미리 준비한 듯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로엔.”
글렌이 어깨를 덮고 있던 망토를 내던지며 알현실의 문으로 향했다. 고뇌를 끝낸 그의 걸음은 오싹하리만큼 고요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
로엔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본래 인자함이 고여 있던 그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따르겠습니다.”
* * *
교역도시 카멜룬과 신주오령의 도시 바레네를 있는 이름 모를 숲.
패잔병처럼 상처투성이인 무인들이 연둣빛 풀잎 대신 하얀 눈꽃이 핀 숲길을 걸어갔다.
도리안은 어깨에 두른 붕대를 매만지며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께 가는 일행이 아니라, 한참 먼 곳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괜찮으시겠지?’
라온이 만들었던 기적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했지만, 이번만큼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그랜드 마스터니까.’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는 익스퍼트와 마스터 이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
아무리 라온이라고 해도 죽음을 염두에 둔 전투를 벌일 게 뻔했기에 배탈이 난 것처럼 속이 아렸다.
‘이기든 지든 무사히만 돌아오면 좋겠는데.’
도리안이 라온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관자놀이를 누를 때 우측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버렌이 본인의 손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내가 마스터가 되다니, 내가 마스터가 되다니, 내가….”
버렌은 아직도 본인이 마스터가 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도리안이 흉터가 가득한 버렌의 손을 보며 옅게 웃었다.
‘마스터가 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닌데.’
버렌은 지그하르트의 직계. 그가 마스터에 오르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물론 그가 저렇게 놀란 건 21살이라는 나이에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딱히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죽을 위기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니니까.’
라온은 수련도 실전처럼 하기에 가문에서도 수없이 죽을 뻔했었고, 실제 임무에서도 매번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무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얻을 걸 얻은 겁니다.’
도리안은 본인의 뺨을 꼬집는 버렌을 놔두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미라처럼 전신에 붕대를 돌돌 감은 루난이 맹한 눈으로 팔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서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루난 님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라온과 아이스크림에만 관심을 가진 루난이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것을 보니, 그녀도 본인이 마스터가 된 게 놀라운 모양이다.
루난 역시 버렌 이상으로 노력해온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마스터가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놀라운 건….’
도리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크 괴튼이 있는 좌측을 보았다.
‘저 아저씨겠지.’
마크 괴튼은 라온이 하사한 흑선도를 꼭 끌어안은 채 아직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울보셨네. 하긴 나라도 저랬을 테지만….’
아니지. 나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마크 괴튼은 빠르게 마스터가 되었지만, 성장이 멈춰서 남들이 자신을 추월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만 보았다.
처음부터 무시를 받은 게 아니라, 추앙으로 시작했다가 무너졌기에 다른 이들의 비난이 더욱 아프게 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마크 괴튼은 그런 상처와 모욕 그리고 절망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다. 본인보다 한참 어린 라온을 주군으로 모시며 마음을 굳건히 다졌다.
남들은 늦었다고 비웃었고, 아들뻘인 광풍대와 함께 수련하면서도 끝까지 도를 놓지 않았다.
많은 고난과 고통 끝에 결국 본인의 목표였던 마스터 중급에 이르렀으니, 다른 이들이 마스터가 된 것보다 더욱 큰 감동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쭉쭉 나아가길 바랄게요.’
도리안은 마크 괴튼에게 존경심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스터에 오를 수 있으려나.’
솔직히 말해서 마스터가 된다는 생각 따위는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조장 세 사람이 마스터에 오르고, 자신 역시 마스터의 벽에 손을 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떠오르고 있었다.
‘라온님이 아니었다면 마스터가 된다는 상상은 평생 할 수 없었을 텐데.’
훈련생 시절, 하분성, 광풍단, 세피아 상회, 그리고 광풍대까지. 그에게 수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라온이 덕분에 지그하르트의 검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에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갚아야 할 빚이지.’
겁쟁이인 내가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지만, 라온을 위해서는 정말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도리안이 라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라온 님께 이런 말을 하면 검이나 더 휘두르라는 잔소리가 날아올 테지만.’
이제 그분이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대충 보인다니까.
라온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측이 갔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도리안이 라온을 떠올리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버렌이 손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 녀석 다 끝내고 돌아와서 훈련 시킬 생각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
“맞아. 라온을 놀라게 해줄 생각만 하면 돼.”
루난은 마스터가 된 걸 자랑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할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주 못 믿냐고.”
“대주는 리메르 님이잖아….”
“아, 맞다.”
“상관없지. 라온 님이 진짜 대주 같기는 하니까.”
광풍대 검사들도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라온에 대한 불안감을 지웠다.
“그렇죠.”
도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가장 선두에서 걸어가던 데닝로즈와 그녀의 호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왜 멈췄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숲이 끝나고, 들판이 나오면서 카멜룬의 전경이 드러났다.
“뭐, 뭐야!”
도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카멜른의 성벽과 건물들이 뭉개져 있었고, 하늘 위로는 시꺼먼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도시가 망가지고 있었다.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카멜룬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강대한 힘의 파동에 손끝이 떨렸다.
“카멜룬도 습격을 받았다고?”
데닝로즈가 무너지는 첨탑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미친….”
“아….”
버렌과 루난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불에 타는 카멜룬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하지?”
“카, 카멜룬이 아니면 오웬이나. 발카르로….”
“카멜룬을 지키는 곳이 오웬과 발카르잖아. 그쪽도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중립 세력의 무인들 역시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민간인들은 어쩔 줄은 모른 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다.
“으….”
도리안이 떨리는 손목을 붙잡으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카멜룬에 도착해서 라온과 셰릴, 리메르를 기다리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도 습격을 받았을 줄은 몰랐다.
잦아들었던 위기감이 해일이 되어 전신을 엄습했다.
“…….”
데닝로즈는 빛과 어둠이 번쩍이는 카멜룬의 전경을 살피고 뒤를 돌았다. 그녀의 안색이 들판에 깔린 눈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흑탑이 카멜룬을 습격한 것 같아요. 막는 쪽은 발카르 왕국 같은데, 쉽지 않아 보여요.”
그녀는 지금 카멜룬에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불부터 끄세요!”
버렌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무인들이 들고 있는 등불이나 횃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은 굳어 버린 표정으로 횃불과 등불을 껐다. 이제 카멜룬이 생문이 아니라, 사문이 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멈춰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데닝로즈가 카멜룬으로 향하는 들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곳이기에 그녀의 말대로 위험해 보였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죠.”
버렌은 데닝로즈의 말을 듣자마자, 뒤를 돌았다. 그는 이곳으로 오는 중에 봐두었던 작은 언덕 뒤로 걸음을 옮겼다.
“포옌.”
데닝로즈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뒤편에서 야행복을 입은 호위들이 나왔다.
“흔적들을 지워줘.”
그녀의 지시에 호위들이 입구와 출구 쪽으로 퍼졌다.
“카시아. 너도 도와드려.”
“알겠습니다.”
엔시아의 손짓에 카시아라 불린 호위도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카시아와 암시장의 무인들은 숲의 입구와 출구로 나뉘어서 바닥에 깔린 흔적들을 지웠다.
눈 때문에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버렌이 낮은 숨을 내쉬며 데닝로즈를 바라보았다.
“일단 카멜룬으로 갈 수는 없어요. 발카르의 마법사들이 온 걸 보면 발카르도 좋아 보이지 않고, 남은 곳은 오웬이나. 디올이라는 작은 도시인데….”
데닝로즈는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주며 일행들에게 고를 수 있게 해주었다.
“오웬이나, 디올….”
“다만 두 곳 다 이 숲을 나가야 해서 들킬 가능성이 높아요.”
그녀는 이동 중에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며 눈매를 찡그렸다.
“그, 그럼 일단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어때요?”
도리안이 기어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음, 제 생각에도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가장 나아 보입니다. 흑탑이 카멜룬을 습격했다는 건 노리는 바가 있다는 거니, 이곳까지 오지는 않을 듯한데….”
버렌이 도리안의 의견에 동의하며 데닝로즈를 바라보았다.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데닝로즈가 손가락으로 땅을 비비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왜 그러시죠?”
“라온 님이 흑탑과 문제가 있기에 놈들이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녀는 흑탑은 오마 중 가장 끈질기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도리안이 검집을 잡고 있던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맞아.’
라온은 흑탑의 무인. 그것도 부탑주와 문제가 생긴 상태다. 데닝로즈의 말대로 흑탑이 라온을 노리고 움직일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버티면서 상황을 보다가 오웬에서 구출대가 오면 그때 움직이는 게 최선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버렌이 고개를 끄덕일 때 데닝로즈가 흔적을 지우라고 지시한 그녀의 호위들이 돌아왔다.
“전부 다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부분은 모두 지웠습니다.”
“고마워. 포옌.”
데닝로즈가 포옌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
포옌이 고개를 젓다 말고, 우뚝 멈췄다.
“아, 아가씨. 도망….”
도망치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이 우드득 소리와 함께 180도로 꺾였다.
툭.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쉬던 마스터급 무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에, 엔시아 님!”
엔시아의 호위인 카시아가 빨리 피하라고 입술을 달싹일 때 그녀의 어깨 위로 푸른 화염이 치솟았다.
화아아아악!
카시아가 강기로 화염을 밀어내려 했지만, 푸른 불꽃은 점점 더 짙게 타오르며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일순간의 정적. 그 이후에 퍼지는 건 공포와 비명이었다.
“아아아아악!”
“뭐, 뭐야!”
“이게 무슨….”
“포옌!”
“카시아!”
모두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고, 데닝로즈와 엔시아는 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데닝로즈 님!”
“물러서야 합니다!”
도리안이 데닝로즈와 엔시아를 붙잡고 끌어당기려고 할 때였다.
하늘 위에 거대한 무언가가 떠 있었다.
턱을 부르르 떨면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어둠을 두른 듯 피부가 검고, 안구에 눈동자가 없는 백안의 괴인이 하늘을 계단처럼 밟고 서 있었다.
키고, 덩치고 그리 크지 않다. 평균보다 작다고 생각될 정도.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내 낮은 경지로는 초월자라 불리는 신주오령의 수장이나, 성검련주, 백혈교주와도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차, 창염마군 오르고스….”
데닝로즈의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도리안이 그녀의 팔을 놓쳤다.
‘창염마군….’
오르고스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창염마군이라는 이명은 모를 수가 없다. 초월의 경지에 이른 흑탑의 부탑주. 지금 보니, 검은 피부와 백색의 안구 역시 듣던 대로였다.
오르고스의 백안이 뒤틀린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기에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창염마군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지그하르트로구나.”
그는 이곳에 광풍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단번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말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어디에 있느냐.”
“아….”
오르고스의 말에 도리안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지, 직접 라온 님을 찾으러 왔다고?’
데닝로즈의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놈은 웨더스 마을에서 드레이크를 잡으려던 일을 방해한 라온을 죽이려고 직접 이곳에 온 게 분명했다.
파아아앙!
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졌는데, 피비린내가 난다. 누군가가 죽은 것이다.
“두 번째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어디에 있느냐.”
오르고스의 질문이 이어진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가 터져나갔다.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놈의 백안이 이쪽을 향할까 봐 겁이 나면서도, 걱정되었다. 누군가가 라온의 위치를 말할까 봐.
퍼어어엉!
또 누군가가 죽었다. 광풍대인지, 중립 세력인지 혹은 민간인인지 알 수 없다.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뚝뚝.
오르고스의 발밑으로 핏물이 떨어진다. 이곳에서 젖은 피가 아니다. 자신들보다 먼저 카멜룬으로 갔던 사람들의 피 같았다.
‘라온 님이 죽을 거야.’
생사의 길을 수없이 넘어봤기에 알 수 있다. 지금 라온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면 이쪽은 살지언정 라온은 무조건 죽는다.
아무리 그가 천재라고 해도 하늘에 닿은 괴물 앞에서는 살 수 없다.
‘그, 그렇다면….’
나서야 해. 지금이 그 사람을 대신해 죽을 때야.
라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다짐했던 결심을 지킬 순간인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픈 게 싫고,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살아남는다면 평생을 후회할 게 뻔했다. 그게 죽는 것보다 싫었다.
“마지막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어디에 있느냐.”
오르고스가 모두를 죽일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 위로 오싹한 빛의 화염이 타올랐다.
찌이익!
도리안이 어금니로 혀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겁이 나서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고통으로 두려움을 비웠다.
뇌리에 그리는 건 라온에 대한 고마움만이 아니다.
첫 만남. 날카로운 눈동자 속에 외로움과 쓸쓸함을 담고 있던 병약한 꼬마를 떠올렸다.
이젠 외로움을 벗고, 동료를 가족처럼 여기는 그 아이를 생각하며 공포에 질려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쿠웅!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기수식처럼 검을 말아쥐고, 눈 덮인 대지에서 거세게 발을 굴렀다.
“내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지끈거리는 단전에서 억지로 오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다!”
버렌과 루난 그리고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오르고스에게서 도리안으로 향했다.
“…….”
오르고스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뿌드드득!
뼈가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도리안의 팔이 비틀어져서 돌아갔다.
“끄아아아아악!”
도리안이 뭉개진 오른팔을 잡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건방진 놈이로다.”
오르고스의 손짓에 도리안의 몸이 붕 떠서 하늘로 솟구쳤다.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벌레가 지금 무엇이라 한 것이냐.”
“느, 늙은이 귀가 먹혔어?”
도리안의 일그러진 눈동자에는 공포와 시원함이 동시에 비치고 있었다.
“내가. 백검룡. 라온 지그하르트다!”
“하.”
오르고스의 헛웃음을 흘리며 이번에는 도리안의 왼쪽 어깨를 분질렀다.
“아아아아악!”
도리안이 뒤로 날아가 땅에 박혔다. 내상까지 심하게 입었는지 그의 입에서 살벌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도 헛소리를 한다면 목을 돌려주마.”
진심이라는 듯 오르고스의 백안에 얇은 신경이 올라왔다.
“내, 내가 라온….”
도리안은 망가진 두 팔을 휘청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입에 고인 검은 핏물을 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그하르트….”
“내가 라온 지그하트다!”
버렌이 도리안의 앞을 막으며 포효를 내질렀다. 그도 왜 도리안이 나섰는지 아는 것이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야.”
루난도 도리안의 앞을 막고 설화를 뽑아들었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요.”
마크 괴튼이 가장 먼저 죽겠다는 듯 세 사람의 앞에 서서 흑선도를 세웠다.
“벌레 놈들이.”
오르고스의 가벼운 손짓에 버렌의 어깨가 날아갔고, 루난의 배에 구멍이 돋아났으며, 마크 괴튼이 흑선도를 부러뜨린 채 대지에 처박혔다.
“커흑….”
“아….”
셋 다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에 죽은 피를 뱉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대로 누워 있지 않았다.
버렌과 루난은 살을 헤집은 상처를 손으로 움켜쥔 채 몸을 일으켰고, 마크 괴튼은 반 토막이 난 도를 양손에 쥐며 이를 갈았으며, 가장 큰 부상을 입은 도리안도 바위에 등을 기댄 채 피내음을 섞인 숨을 내뱉었다.
죽음을 각오한 네 사람의 앞으로 광풍대가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모두가 외쳤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다!”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506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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