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화
버렌은 검신을 휘감은 푸른 광휘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강기인가.’
검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칼날을 두른 바람의 기운이 끝없이 응집되어 그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것 같은 예리함이 전해져왔다.
상대가 누구라도 꺾을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이 어깨를 채우고, 다루지 못했던 초식들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이럴 때야말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지.’
라온은 벽을 뛰어넘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하며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충고했었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라온이 한 말이 틀릴 리가 없다. 상대는 자신보다 한참 전에 마스터에 오른 고수.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방심했다간 단숨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이 정도로….”
수신호위가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가슴에 그어진 검흔을 쓸어내렸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핏물이 멎고, 상처가 꽉 조여들었다. 오러를 이용하여 억지로 지혈한 것 같았다.
“나를 꺾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전력을 끌어올린 건지 그의 검에 맺힌 강기가 핏빛처럼 진해졌다.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
버렌이 자세를 낮추며 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네놈의 목을 베기 전까지는!”
“애송이가!”
수신호위가 좌측으로 쇄도해온다.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자, 그의 상처에서 다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역시 상처를 완벽하게 봉합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법을 뒤로 밟으며 세 걸음 물러섰다. 왼발을 바위에 걸치고, 오른발을 내뻗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칼날에 휘감긴 강기가 다섯 줄기의 바람이 되어 뻗어나간다.
수없이 수련했어도 이루지 못했던 삭풍검의 절기 회풍살이었다.
“크윽!”
멧돼지처럼 달려들던 수신호위가 검막을 일으켰다.
캬아아아아앙!
강기를 가르면서 돌진하려는 것 같았지만, 회풍살에 깃든 바람의 기운이 맹렬한 회전을 일으키며 수신호위의 검막을 깨부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검흔에서 다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놈!”
“아직 멀었어!”
버렌이 검을 두 손으로 잡고, 마차의 바퀴처럼 휘어 내렸다. 검날에 맺힌 강기가 수면에 비친 햇살처럼 늘어나며 수신호위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쩌어어어엉!
수신호위는 이번에도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하고 바닥에 깊은 족적을 새기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이 심한지 그의 왼쪽 무릎이 부르르 떨렸다.
“치사한 놈이….”
“가까이 가서 싸울 필요는 없지.”
삭풍검은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검술이고, 상대는 지금의 나보다 검술이 뛰어나다. 장점을 버리고, 가까이 가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쪽도 급하긴 해….’
현재 광풍진을 유지하고 있는 건 루난이다. 본래 조장 셋이 버텨야 할 중심을 혼자서 견디고 있기에 부담이 심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이놈을 확실하게 죽이는 게 먼저다. 만약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당하면 광풍대는 말 그대로 전멸이니까.
‘조금만 더 버텨줘.’
버렌은 거세게 진동하는 바람의 기운을 내뻗으며 혀끝을 씹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까!’
* * *
“하아….”
루난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들어.’
본래 세 명의 조장이 함께 버텨주어야 할 대광풍진의 중심을 홀로 유지하다 보니,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랫배까지 아려오는 것을 보면 내상도 입은 것 같았다.
중간중간 검진을 으깨려는 마스터의 참격까지 막아야 해서 정말 숨 쉴 틈조차 없었다.
‘그래도 버텨야 해.’
버렌은 이쪽에 있는 마스터보다 강한 자와 싸우고 있었고, 유아와 율리우스도 검진의 빈자리를 채우며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두를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루난이 빠르게 시선을 돌려 도리안의 등에 업혀 있는 마르타를 보았다.
‘나찰녀를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처음으로 생긴 동성 친구가 잠이 든 채로 죽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온몸의 뼈가 부러지더라도 견뎌야 했다.
후우우웅!
루난이 지끈거리는 고통 속에서 마음을 다잡을 때 흑발의 수신호위가 우측으로 쇄도해 검을 내리쳐왔다.
강기가 흐르는 매서운 칼날. 저 검격이 그대로 떨어진다면 광풍대 검사들의 몸이 반으로 갈라질 것이다.
치이익!
머뭇거림 없이 설령보법을 밟았다. 빙판에 미끄러지듯 이동하여 흑발의 수신호위 앞에 멈춰서서 서리의 기운을 응집시켰다.
쩌어어어억!
강기를 견디지 못한 냉기의 방벽이 조각나며 작은 서리의 폭풍을 일으켰다.
‘약해….’
진법을 유지하는 쪽에도 오러와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기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유가 없었다.
“조잡하군.”
흑발의 수신호위는 코웃음을 치며 검에 두른 강기로 서리의 폭풍을 가볍게 갈라버렸다.
폭풍을 가르고 뻗어 나오는 강기를 막기 위해서 뒤로 젖혀둔 설화를 내뻗었다.
쩌어어엉!
강기의 위력은 역시나 압도적이었다. 검기를 으깨버리는 우악스러운 충격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려왔다.
“으….”
참을성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중첩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명이 별로 맛이 없네.”
흑발의 수신호위가 어깨에 검을 걸치며 짧게 혀를 찼다.
“무슨 말?”
“얼굴은 어여쁜데, 입에서 나오는 비명은 지루하다고.”
그의 눈동자가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검술 이상으로 버러지들의 비명을 좋아하거든!”
흑발의 수신호위가 키득거리며 좌측으로 뛰었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던 율리우스를 노리고 있었다.
“이익!”
루난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신호위의 뒤를 쫓았다. 그가 섬뜩한 미소와 함께 율리우스의 머리를 향해 검격을 내리꽂았다. 막대한 압력이 몸을 밀어내는 듯했다.
‘파고들어!’
수신호위의 검과 율리우스 사이에 설화를 끼워 넣었다.
쩌어어엉!
충격이 심하다. 제대로 자리 잡고 운용한 검술이 아니었기에 어깨와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크윽….”
“조, 조장님.”
율리우스가 퍼레진 입술을 떨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충격 때문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앞으로 나왔다.
“이래도 작은 신음뿐이야? 진짜 지루한 여자네.”
흑발의 수신호위는 턱을 모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멍청해.”
“…….”
“그 꼬맹이 앞을 막지 않았다면 그리 심한 내상은 입지 않았을 텐데.”
그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흑발의 수신호위가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핥았다.
“저쪽으로 가볼까!”
그가 거칠게 바닥을 차오르며 유아를 향해 나아갔다.
“마, 막아!”
“절대 내주지 마!”
크레인을 비롯한 검사들이 길을 막으려 했지만, 흑발 수신호위의 강기가 일으킨 파동에 검진이 비틀렸다.
“아악!”
“크헉….”
지쳐 있던 검사들을 뒤로 밀려나며 신음과 피를 토했다.
“비명 좋고!”
흑발의 수신호위는 더 짙은 미소를 그리며 유아의 앞에 섰다.
“어린 아가씨의 비명은 어떨까….”
“꺼져.”
루난이 유아의 앞을 막자마자, 흑발의 수신호위가 기다렸다는 듯 좌측에서 검을 내리쳐왔다.
쩌어어어어엉!
준비를 끝낸 마스터와 자리를 잡지 못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격돌이었기에 이번에도 루난이 뒤로 튕겨 나왔다. 그녀의 꽉 닫힌 입술을 뚫고, 두꺼운 핏줄기가 쏟아졌다.
“루난 언니….”
“…괜찮아.”
루난이 억지로 입매를 말아 올렸다. 지금 자신이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멍하고, 시선이 점차 흐려졌다.
“이래도 비명이 안 터진다고? 너 진짜구나.”
흑발의 수신호위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독종이라는 소리 좀 들어봤지?”
“…….”
루난은 대꾸하지 않고, 흑발의 수신호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평소라면 지루했을 텐데….”
흑발의 수신호위가 본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오늘은 나름 재밌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놈은 섬뜩한 음성을 흘리며 금이 간 검진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놈의 시선이 마르타를 업고 있는 도리안을 향했다.
“저 계집을 찔러주마!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데 친한가 봐?”
흑발의 수신호위의 검이 마르타를 향해 쇄도했다. 진법에 금이 가면서 그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번에는 설령보법을 전력으로 밟아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허억!”
도리안이 입술을 질겅 씹으며 뒤로 물러섰다. 보법을 밟으면서 하체를 굽혀 수신호위의 검로를 벗어나려는 현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수신호위의 검에 맺힌 강기는 도리안이 도주할 범위를 모두 막고 있었다.
“아….”
루난이 턱을 떨었다. 죽을 때 느낀다는 주마등처럼 마르타를 향해 나아가는 검이 느릿하게 보였다.
‘막아야 해. 막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쌓인 충격이 한 번에 터졌는지 시야가 허옇게 물들었다.
‘막는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그리고….’
왜 막아야 하는지.
지금까지 내가 왜 방어만 해왔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흐릿해질 때 백지로 물든 세계에서 등 하나가 보였다.
어른이 아닌 아이의 작은 등. 그리고 지금까지 잊지 못한 등이었다.
‘라온.’
수련생 시절. 시리아의 공포에 다시 사로잡힐 뻔했을 때 처음으로 그를 물리쳐 주었던 등은 아직도 뇌리가 깊게 남아 있었다.
‘맞아. 난….’
라온처럼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서 방어 위주의 검술을 수련했고, 진법에서도 버티는 역할을 맡았다.
정이 든 동료를 구하고, 언젠가 오빠의 마수를 이겨내기 위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니까….’
아직 포기해서는 안 돼.
어린 라온의 등이 지금의 라온의 모습으로 변하는 순간 뇌리에서 푸른 폭풍이 몰아쳤다.
흐릿한 세상이 제 모습으로 돌아오며 마르타와 도리안을 동시에 가르려는 흑발 수신호위의 검이 보였다.
루난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단전을 터트릴 것처럼 요동치는 서리의 기운을 그대로 뻗어냈다.
쿠와아아아아!
찰나의 순간에 마나회로를 질주하며 뻗어나간 냉기가 마르타와 흑발 수신호위 사이에 가시 같은 형태의 빙벽을 일으켰다.
산을 통째로 얼린 듯한 웅대한 크기였다.
쩌저저저적!
그 압도적인 규모에 흑발 수신호위도, 진법을 두드리던 검귀와 혈귀들도 멈춰 섰다.
루난이 설화에 맺힌 서리의 기운을 빙벽의 정상을 향해 쏘아냈다.
쩌저저저적!
둥글게 응집된 강기가 빙벽에 닿자마자, 수많은 균열이 돋아나며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과광!
터져나간 빙벽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은빛 강기가 되어 적들의 심혼을 가르는 서리의 소나기를 뿌렸다.
“커헉!”
“끄아아아악!”
“이, 이게 무슨!”
“피, 피해! 전부 강기야!”
“어억….”
루난이 만들어낸 서리 폭풍은 백혈교와 성검련의 무인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사신의 선고장이 되었다.
반면 광풍대 검사들과 민간인들에게는 작은 조각조차 흐르지 않았다.
“크윽!”
흑발 수신호위 역시 쏟아져 내리는 서리의 조각들을 치우느라 바빴다. 주변으로 퍼진 안개 때문에 그의 손까지 느려졌다.
“이게 말이 돼? 각성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어?”
마지막 서리 조각을 치우며 잠시 숨을 돌릴 때 루난이 허연 안개를 가르고 공간을 파고들어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흑발의 수신호위가 살기 짙은 미소를 흘리며 검을 내리쳤다. 방심 따위는 하지 않았는지, 검을 내지르는 자세에 빈틈이 없었다.
“죽어!”
하지만 그가 뻗어낸 강기가 루난을 가른 순간 그녀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이, 이게 무… 커헉!”
흑발의 수신호위가 입을 떡 벌린 순간 좌측에서 튀어나온 루난의 검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 좋아한다며.”
루난은 흑발 수신호위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비틀어서 뽑았다. 막을 수 없는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너, 너….”
“네 비명이나 들으면서 가.”
“망할….”
흑발의 수신호위는 눈에 핏줄을 가득 세운 채 쓰러졌다. 좋아한다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으윽….”
루난이 피를 토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도 멍하고, 몸은 무겁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피내음이 흐르는 숨을 뱉으며 우측을 보자, 버렌이 상대 마스터의 목을 가르고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힘이 다한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루난이 턱을 들어 올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 * *
“크윽….”
마크 괴튼이 왼쪽 허리를 가른 검흔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수신호위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낙화도 마크 괴튼. 시작은 천재라 불렸지만, 평생 마스터 하급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태한 둔재.”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음 따위는 없다. 그저 사실을 읊는 담담한 어조였다.
“용병이 되어 떠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군.”
“나도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마크 괴튼이 수신호위 대장의 코에 새겨진 검흔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지울검 발벤.”
콧잔등을 지나는 검흔과 철벽처럼 굳건한 검술을 보면 상급 용병이었던 지울검 발벤이 분명했다.
“맞다.”
발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지 않나. 이름난 기사였던 네가 용병으로 추락하고, 방어만 잘하던 용병인 내가 성검련주의 검사가 되다니 말이야.”
“별로.”
“예전에 네 도법을 보았을 때는 절대 막을 수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한 손으로 밀어낼 정도로 가볍군. 슬플 정도야.”
“입 닥쳐. 그리고 난 용병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검사다.”
“아, 그래. 그렇군.”
그는 마크 괴튼의 제복에 새겨진 지그하르트의 문양을 보고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도 급했나. 너처럼 나태한 인간을 고르다니 말이야.”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뱉지 마라!”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네가 나태한 건 사실이고, 내 검을 뚫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으음….”
마크 괴튼이 입술을 씹었다. 발벤의 말대로 그의 검은 철벽처럼 단단했다. 벽란도법을 모두 사용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조금 상황이 어그러졌지만….”
발벤이 슬쩍 뒤편을 보면서 턱을 매만졌다.
“딱히 달라질 건 없어. 광풍대는 널 죽이고 처리하면 그만이지. 거기다….”
그가 라온과 클라우드가 떠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클라우드 님도 돌아올 테니까.”
“그건 틀렸어.”
마크 괴튼이 더운 숨을 뱉었다. 허리에 맺힌 핏물을 털어내며 허리를 폈다.
“네가 날 죽일 수도 있겠지. 내 뒤에 있는 아이들도 네게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발벤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 님만큼은 다르다. 그분은 네 주인을 베고 돌아올 거야.”
“크하하하하하!”
물처럼 잔잔하던 발벤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광소를 터트렸다.
“멍청해. 괜히 낙화도가 된 게 아니라니까.”
발벤이 입매에 비웃음을 내걸며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드 님이 누군인지 들었을 텐데? 그분은 련주님의 제자다. 셀 수 없이 많은 무학을 익혀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지. 몇 번 보지도 않고 타인의 검술을 더 월등한 경지로 구현할 수 있는 천고의 재능까지 지닌 분이다. 고작 마스터에게 지는….”
“그딴 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뭐?”
“설사 네 주인이 초월에 닿았다고 해도 라온 님은 지지 않는다. 그리고 재능 역시 그분이 위야.”
마크 괴튼의 눈동자는 압정에 박힌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라온 님은 금방 돌아온다고 하셨고, 그분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라온의 말은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강해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하셨고, 그 말대로 행하셨으니까.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온 말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어설픈 마스터인 자신의 힘만을 원했었다.
딱 한 명 라온만 제외하고.
그는 힘을 이용하기는커녕 처음에 한 말처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수련을 도와주었고, 실제 그 결과가 나타났다.
가족도, 친구도, 나 자신도 포기했던 목표를 다시 끌어 올려준 라온은 내게 신 그 자체였다.
쿠구구구구!
라온과 함께 했던 수련을 떠올리자, 피로와 고통으로 가득 찼던 몸에 새로운 활력이 차올랐다.
“내가 말을 실수했군.”
“그럴 줄 알았다. 라온 따위가 클라우드 님을 이기는 건….”
“아니, 그 뜻이 아니다.
마크 괴튼이 천천히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빛이 맴돌았다.
“라온 님께서는 내게 부탁한다고 하셨다. 나도, 내 뒤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그분이 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해.”
발을 구르며 도를 들어 올렸다.
“오라!”
“이 쓰레기가.”
발벤이 입매를 비틀며 우측으로 젖혀둔 검을 내질렀다.
쩌어어어엉!
어깨까지 울리는 충격. 그의 검은 더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지 않았다. 공격도 굳건해져서 도강을 밀고 들어올 정도였다.
찌지직!
억지로 근력을 폭발시켜서 발벤을 밀어낸 후 벽란도법을 연달아 쏟아냈다. 폭죽 같은 불똥이 허공을 가득 채웠지만, 발벤은 정말 바위가 된 것처럼 뚫리지 않았다.
“실력이 없는 놈은 입을 털 자격도 없어.”
발벤이 비웃음을 그리며 손목을 휘돌렸다. 그의 검세가 바닥에서부터 공간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어?’
마크 괴튼은 발벤의 검격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 형태는….’
발벤의 검술은 얼마 전 라온과 대련할 때 그가 보여주었던 투로와 유사했다.
[마크 경의 공격은 강해요. 심리전만 잘 걸면 마스터 중급도 벨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의 특성상 방어의 고수를 만나면 밀릴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거죠?]
[그럼 저도 방어를 굳히면서….]
[도는 그런 무기가 아닙니다. 무조건 뚫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라온은 직접 시범을 보이듯이 거친 검격을 내리쳐서 벽란도로 이룬 도막을 뚫어버렸다.
비슷한 오러를 사용했지만, 그의 검은 무엇이든 가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무조건 뚫어야 해. 못 뚫으면 죽는 거다!’
라온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도를 들어 올렸다. 발목, 허리, 어깨 그리고 손목까지. 몸 전체를 하나의 검처럼 세우며 벽란도를 내리쳤다.
하지만 발벤의 검막은 이번에도 뚫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리쳤다. 숨이 차오르고, 단전이 지끈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끝없이 도를 그었다.
“이, 이놈!”
멈추기는커녕 점점 강해지고 빨라지는 공세에 발벤의 얼굴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러다가 네놈이 먼저 죽을 것이다!”
“흐아아아아!”
마크 괴튼은 기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온의 조언대로 적을 뚫지 못하면 먼저 죽겠다는 의지였다.
목숨을 건 전투, 주인이 맡긴 중대한 지시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금까지의 거죽을 벗고 튀어나왔다.
머리가 맑아지고, 손이 가벼워진다. 죽기 전에 찾아온다는 회광반조일지도 모르겠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가장 크게 타오르는 것처럼 다시 육체와 단전에 힘이 차오른다.
웃음이 나온다. 한 번 더 도를 휘두를 힘이 생겼으니까.
“크아아아아!”
마크 괴튼이 대지를 울리는 기합을 내질렀다. 육체와 오러 그리고 정신을 모조리 쏟아내 밤하늘을 둘로 나누던 도를 내리찍었다.
칼날에 휘감긴 강기가 달빛이 차오른 듯 명멸했다.
“느려!”
발벤은 입술을 깨물며 땅을 박찼다. 매서운 강기에 휘감긴 검날이 마크 괴튼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어?”
하지만 그의 검은 마크 괴튼의 심장이 아니라, 어깨를 찔렀다.
‘이, 이게….’
발벤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손목이 바람을 탄 종이배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끝없이 쏟아지던 마크 괴튼의 도격을 막아내느라, 그의 손과 손목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오오오오!
마크 괴튼은 어깨의 살점이 뜯겨나갔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발을 구르고, 도를 내리친다. 벽란도의 절기 섬천벽뢰. 도극에 맺힌 뇌기가 세상을 가르는 우레가 되어 떨어졌다.
치이이이잉!
발벤이 검을 뽑아 방어를 굳히려 했지만, 섬천벽뢰가 더 빨랐다.
캬아아앙!
검이 물어뜯긴 듯 깨져나가고, 그의 몸에 벼락을 새긴 듯한 상흔이 돋아났다.
“비, 빌어먹….”
발벨은 본인의 몸에 새겨진 벼락 줄기 모양의 상흔을 바라보다가 뒤로 넘어갔다.
“아….”
마크 괴튼이 도를 땅에 박으며 몸을 기댔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벽을 깨고 마스터 중급에 올랐다는 것을. 라온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버림받았던 십수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크 괴튼은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주었던 라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을 향해 포효를 터트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그간 무능하고 나태했던 자신을 떠나보내는 작별 인사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주인에게 바치는 감사의 울음이었다.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98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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