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라온은 당당하게 내 것이라고 말하는 멀린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저런 말을 왜 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멀린과의 관계를 들키게 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가면 속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니,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분노를 드러낸 것 같았다.
‘10사도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핑곗거리를 떠올리며 10사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창으로 멀린을 겨누며 이를 바득 갈았다.
“나올 줄 알았다. 미친년.”
10사도는 이전에 멀린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렸는지 그녀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
라온은 10사도가 혈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저 말을 들은 게 10사도라서 다행이군.’
다른 사람이라면 멀린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10사도와 멀린은 이것으로 세 번째 맞붙는 악연이다.
조금 전의 발언은 그저 미친 인간의 헛소리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네년의 수급과 라온 지그하르트를 교주께 바칠 것이다.
10사도는 뇌성이 울리는 창을 휘돌리며 좌측 무릎을 가늘게 굽혔다.
“나는 상관없어. 목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다만….”
멀린이 음습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내 것을 노리면 손이 아니라, 네놈의 모가지가 날아갈 거야.”
그녀의 뒤편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벌집의 형태로 허공을 뒤덮은 초대형 마법진이 장대한 빛을 뿜어냈다.
-어흑….
라스가 멀린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등장부터 대사까지. 하나같이 소름이 끼치느니라!
녀석은 성검련주보다 멀린이 더 두려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쿠우우웅!
10사도가 입매를 비틀며 창대로 하늘을 찔렀다. 고고하면서도 사이한 기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멀린!”
“피나 빠는 주둥이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더러우니까.”
멀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가 새긴 마법진들이 살아 숨 쉬는 듯 호흡하며 가지각색의 마법들을 쏘아냈다.
불꽃과 서리가 춤을 추고, 벼락과 삭풍이 노래를 불렀다. 이름 모를 마법이 별 무리가 되어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두 번은 안 당한다.”
10사도가 창을 두 손으로 가볍게 말아 쥔 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창대에서 치솟은 허여멀건한 강환이 웅대한 물결을 일으키며 천공에서 내리꽂히는 마법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음….’
라온은 10사도가 일으킨 강환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놈도 강해진 건가.’
10사도의 오러가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투명해졌다.
강해질수록 피와 오러의 색이 맑아지는 백혈교의 특성상 저 괴물 역시 성장한 것 같았다.
‘이 짧은 기간에 성장하다니, 위험한 놈이야. 다만….’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멀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을 쏟아내던 마법진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마법의 발동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그 위력까지 증폭된다. 하나하나가 강환급 위력으로 보였다.
콰과과과과광!
마법을 가볍게 뚫고 나아가던 10사도의 걸음이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크윽….”
그는 연달아 떨어지는 마법의 충격에 어깨를 떨며 이를 갈았다.
‘멀린 쪽이 더 멀리 나아갔군.’
백혈교에서 수련만 한 10사도와 달리 멀린은 에덴과 지그하르트 사이를 왕래하는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녀가 더 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왜….’
내가 기분이 좋지?
따지고 보면 멀린이나, 10사도나 적이다. 둘이 싸우다가 함께 사라지는 게 가장 좋을 텐데 멀린이 우위에 서니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라온이 본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때와는 달라. 난 누구도 따라가지 않는다!”
멀린과 10사도를 노려보며 내 의지로 걷겠다고 외친 후 우측으로 달렸다.
“으아아아악!”
“따, 따라온다!”
“살려주세요! 뒤에서….”
“끄헉!”
백혈교도들이 사냥을 하는 것처럼 민간인들에게 따라붙어 살점과 피를 뜯어먹었다.
입가에 피를 묻힌 채 히죽이는 놈들은 악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제, 제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등에 피에 젖은 주교의 손톱이 박히려 할 때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쿠웅!
대지에 깊은 족적이 새겨지며 몸이 벼락을 두른 듯 뻗어나갔다.
찰나의 순간에 여성의 앞으로 짓쳐 들어 진혼검의 요기를 끌어냈다.
붉은 칼날 위로 돋아나는 샛노란 섬광이 혈기를 두른 주교의 손톱과 놈의 목을 동시에 갈랐다.
“끄헉….”
주교는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눈동자를 떨며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버렌!”
“예!”
라온의 외침에 버렌과 3조 검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여성과 뒤에 밀려나 있던 민간인들까지 챙겨서 무너진 성벽으로 데리고 갔다.
치이이이잉!
루난은 마크 괴튼과 함께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주변으로 다가오는 성검련 검사와 백혈교도들을 막아냈다.
오랜 기간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 딱히 대화나 지시가 필요 없었다.
버렌과 루난만이 아니라, 광풍대 모두가 각자 할 일을 완수하며 다시 성벽으로 모여들었다.
‘그래도….’
라온이 전방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이 많아.’
신주오령의 무인들은 희극제의 진법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근처에 있던 귀빈들만 보호할 뿐 멀리 있는 시민이나, 중립 세력의 무인들을 구하지는 못했다.
고립된 사람들을 놔둔다면 천 명 이상이 죽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촤아아아악!
라온은 길목을 막는 백혈교도를 베면서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도 여유가 없군.’
리메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악마 같은 얼굴로 용현검주에게 달려들었다.
“킬리스! 네놈만큼은!”
검에 벼락과 바람만이 아니라, 악의까지 휘감았는데, 꼭 그 소리가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꼴로는 무리다.”
용현검주는 왼손에 든 검을 휘돌리며 여유롭게 리메르의 참격을 막아냈다.
본래 사용하던 팔이 아님에도 검격에 예리함과 현기가 흘러넘쳤다. 팔을 잃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게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
“입 닥치라고 했지!”
리메르가 괴성을 지르며 분노가 가득 차오른 검격을 내리쳤다.
손아귀가 피로 젖고, 얼굴과 팔에 상처가 돋아났음에도 그의 검은 멈추질 않았다.
라온이 진혼검을 매만지며 입술을 씹었다.
‘이건 위험한데.’
리메르가 아직 검계현신을 꺼내 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용현검주 역시 검환을 운용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싸운다면 본 실력을 드러내도 리메르가 밀릴 것 같았다.
‘이쪽을 도와야 하나….’
리메르에게 붙으려고 할 때 뒤편으로 물러난 셰릴이 어디선가 금화 주머니를 꺼내서 리메르의 머리를 향해 내던졌다.
빠아아악!
갑자기 머리통에 금화를 얻어맞은 리메르가 눈을 깜박이며 뒤를 돌았다.
“이 멍청한 새끼야!”
셰릴은 당황한 리메르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녀가 드레스의 밑단을 완전히 찢어 던지며 발을 굴렀다.
“애들 다 죽이고 싶어?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잖아!”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듯한 울림에 리메르의 눈동자에 차오른 붉은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음….”
리메르가 발을 멈추고, 눈동자를 돌렸다. 그는 라온과 그 뒤에 있는 광풍대를 빠르게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그딴 소리 말고, 좀 잘해!”
셰릴이 입술을 씹으며 두 검을 고쳐 잡았다.
“잘할 테니까. 이건 내가 챙길게.”
리메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닥에 떨어진 금화 주머니를 챙겨서 품에 넣었다.
“저 미친 새끼….”
셰릴은 헛웃음을 흘렸지만, 지금의 모습이 낫다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뒤지든 말든 알아서 해!”
그녀는 손을 휘젓고서 사도를 향해 나아갔다. 두 검에서 피어난 색이 다른 강환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사도의 길목을 막고, 놈의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한 호흡에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일어난다. 쌍검술이 어떤 무학인지 보여주는 절묘한 한 수였다.
그 와중에도 뒤편에 있는 멀린과 10사도에 대한 경계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건 셰릴이었다.
쩌어어엉!
하지만 사도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새하얀 백발을 휘날리며 좌측 수도로 백검의 방어를 가르고, 우측 수도로 흑검의 공세를 튕겨냈다.
맨손으로 흑백교검을 막아내고 역공까지 가하는 절세의 무력. 10사도 이상의 강함이었다. 백혈교주가 처음으로 받았던 세 명의 제자 중 한 명 같았다.
쿠우우우웅!
리메르 역시 셰릴 덕분에 맹목적인 분노에서 깨어났지만, 용현검주를 꺾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풍뢰가 명멸하는 거센 검격으로도 대해의 파도처럼 부드럽게 출렁이는 용현검주의 검로를 깨부수지 못했다.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잡으며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이쪽을 도와야 하나.’
사람들이 빠르게 죽어가고 있지만, 리메르와 셰릴 쪽이 더 급해 보였다. 두 사람의 전장에 끼어들려고 할 때 셰릴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괜찮아.”
셰릴은 반대편에 선 사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금방 처리하고 갈 테니까. 넌 네 할 일을 해.”
“맞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나가 있어!”
리메르도 멍청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했다고 말하며 옅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등을 보았다. 글렌의 등처럼 목숨을 맡겨도 될 것처럼 넓어 보였다.
“제가 먼저 돌아오지요.”
라온은 리메르와 셰릴에게 고개를 숙인 후 광장을 향해 대지를 박찼다.
치이이이잉!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성검련의 검귀들 사이로 파고들어 서리연을 그었다. 진혼검에 맺힌 투명한 이슬이 푸른 창날이 되어 검귀들의 심장을 모조리 뚫어버렸다.
‘아직이야.’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서 중앙에 자리를 잡은 중립 세력의 무인들도 많았다. 그들까지 데리고 가야 했다.
라온이 진혼검을 검집에 넣으며 태화보를 밟았다. 광장 우측으로 쇄도하며 성검련 무리들의 중심에 섰다.
왼쪽 발목을 비트는 힘을 허리와 손목까지 이어서 제천검을 휘돌렸다. 은빛 칼날 위로 피어나는 화염의 꽃송이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만화공 백화 화령.
열화의 강기를 두른 붉은 이파리들이 화염의 꽃 무리가 되어 성검련의 검귀들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그야말로 불꽃의 폭풍. 그 장엄한 광경에 중립 세력도, 백혈교와 성검련도 잠시 말을 잊었다.
우우우우우웅!
그 뒤를 잇는 건 왼손의 진혼검이다. 검집과 붉은 칼날이 맞물리며 터져나간 혈우가 백혈교도의 신경을 찢어발겼다.
“아악….”
“끄헉….”
“억!”
칼이 박혀도 웃으면서 죽어가는 백혈교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지금입니다!”
라온의 외침에 멍하니 있던 중립세력의 무인들과 민간인들이 무너진 성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좁아.’
성벽을 부쉈다고 해도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 빠져나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성벽을 더 무너뜨리고 싶었지만, 좌우에서 성검련 검사와 백혈교도가 밀고 들어와서 여유가 없었다.
‘길목을 막아야…음?’
어쩔 수 없이 뒤를 막아주려고 몸을 돌릴 때 검은 로브를 두른 거한이 떨어져 내렸다. 유리아다. 솥뚜껑만 한 주먹이 빨갛게 물들며 사람들을 쫓던 백혈교도의 머리를 사정없이 터트렸다.
오러가 아니다. 마법의 흐름이 담겨 있는 주먹이었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유리아는 길목을 차단할 테니, 사람들을 보호해 달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유리아의 눈동자를 보았다. 황소처럼 눈이 맑다. 덩치와 잘 어울리는 눈이었다.
“알겠습니다.”
유리아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주고서 성벽으로 달려갔다. 10사도와 멀린이 싸우는 상공을 보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멀린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그린 마법진에서 시뻘건 화염구가 떨어져 내렸다.
‘저 마법을 이용하라는 건가.’
동료가 아니건만, 이젠 눈빛만 보아도 멀린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치이이잉!
제천검과 진혼검 위로 물줄기가 흐르는 듯한 매끄러운 오러를 운용하며 유검을 펼쳐냈다.
멀린이 떨어뜨린 마법들이 검의 궤적을 따라 성벽으로 쏘아졌다.
쿠와아아아앙!
돌과 쇠를 부수는 술식이 들어갔는지 성벽이 폭삭 주저앉으며 두 배는 넓은 통로가 생겨났다.
“저쪽으로!”
라온은 광장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을 방금 무너진 성벽 쪽으로 보냈다.
출구가 두 곳이 생기면서 굼벵이처럼 지체되어 있던 탈출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카멜룬으로!”
신주오령의 도시 바레네와 카멜룬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곳까지만 간다만 모두 안전하다고 해도 좋았다.
‘광풍대면 충분하겠지.’
이곳에서 고수들을 막는다면 광풍대와 중립세력의 무인들만으로 민간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응.”
버렌과 루난, 광풍대 검사들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질문 따위 없이 명령을 받자마자 민간인들을 보호하며 성벽을 떠났다.
신뢰가 이어지는 모습이었기에 자연스레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나는….’
라온이 다시 리메르와 셰릴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할 때 달빛 아래에 떠 있던 비행전선 검익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이쪽으로 오는 건가?’
그 말을 하기 무섭게 검익의 우측 포대에서 초승달 같은 섬광이 쏘아져 왔다.
“크윽!”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동시에 쳐올렸다. 진혼검의 칼날이 불길의 방패를 두르고, 제천검의 검극에 시뻘건 광채가 휘감겼다.
쩌저저저정!
염주벽으로 충격을 막고, 적섬으로 베고 나서야 검익이 쏘아낸 막강한 파동이 사그라들었다.
“후우….”
이건 안 되겠어.
셰릴, 리메르와 합류한다면 사도나, 용현검주 둘 중 하나는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뒤에 있는 광풍대와 중립 세력 그리고 민간인 모두가 죽게 될 것 같았다.
‘선택인가….’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지.
라온은 검익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섰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다.
암살자로 살 때와는 정반대의 선택. 실비아가 바라던 지그하르트 검사의 마음가짐이 긴 여정을 통해 작은 꽃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사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될 상대는 흑탑이라 생각했다.
생포를 원하는 에덴, 백혈교와 달리 부탑주가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오지 않았다.
검익을 노려보면서 도시를 빠져나가려 할 때 단상을 채우던 회색 연기를 가르고 사검마와 귀살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고오오오오오!
사검마가 하늘을 찌른 검에서 시꺼멓게 물든 흑해가 치솟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혼이 지워질 것 같은 해일이 광장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쿠구구구구!
귀살창은 피부가 붉게 타오르는 적마를 타고 있었는데, 어깨와 함께 뒤로 젖힌 방천화극에서 태양처럼 거대한 화염구가 돋아나 있었다.
마창(魔槍)이며, 마창(馬槍). 왜 마창회를 이끄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무학이었다.
둘 모두 강기나, 강환 같은 정립된 경지가 아니라, 의념을 담은 초월의 무학을 운용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고, 뇌리가 울렸다.
“좋군.”
성검련주는 두 초월자의 공세를 받으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그는 가볍게 단상을 박차오르며 손에 든 검을 떨궜다. 그 순간 그의 검이 살아 있는 듯 약동하며 귀살창의 태양극과 사검마의 흑해를 향해 쇄도했다.
쩌어어어어억!
비상하듯 솟구친 검이 사검마의 해일을 가르고, 귀살창의 태양을 뚫었다.
강기도, 강환도 두르지 않았다. 그저 연한 빛을 두른 검이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
라온이 성검련주의 검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저건 비검 따위가 아니야.’
어검이다.
어검. 검을 본인의 의지대로 조종한다는 전설의 경지로 성검련주의 검은 그의 의지를 따라 초월자들의 의념을 갈라버렸다.
‘저게 실제로 존재하는 경지였다니….’
그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무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본왕이 말했잖느냐.
라스가 코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특이하다고. 너희 영감이랑은 다른 길로 갔느니라.
‘그 정도가 아니잖아.’
어검은 단지 특이하다고 할 무력이 아니다. 저건 전설 그 자체였으니까.
라온 홀로 사검마와 귀살창을 몰아붙이는 성검련주를 보며 입술을 꾹 씹었다. 자연스레 불의 고리가 요동치며 어검의 흐름을 살피기 시작했다.
‘경지가 너무 높아서 보이지 않아. 하지만….’
성검련주의 의념과 오러가 신묘한 울림을 일으켜서 검을 조종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왜 어검이 전설이라는 건지 알겠어.’
사람이 검을 쥐고 있다면 신체구조상 이룰 수 없는 초식이 존재한다.
왼쪽으로 검을 그어 내린 후 다시 왼쪽에서 검을 긋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어검은 가능해.
인간에 손에 잡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떠 있기에 본래라면 만들 수 없는 초식을 성립시킬 수 있다. 위력만이 아니라, 검형에 있어서도 어검은 위대한 무학이었다.
‘계속 보고 싶어….’
어검을 보고 있으니, 머리에 새로운 영감이 떠오른다.
더 강해질 길이 열릴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을 구할 때였다.
라온은 마지막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 * *
쿠구구구궁!
성검련주는 어검으로 사검마를 몰아붙이면서, 직접 달려드는 귀살창을 수도로 쳐냈다.
두 초월자가 잠시 대지로 내려섰을 때 무너진 성벽을 빠져나가는 라온의 등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군.’
혈검주에게 들었던대로 대륙을 울릴 재능이다. 당대 성검련 검사 중 최고의 자질을 지닌 막내 제자 클라우드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저 아이만큼은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성검련주가 뒤편으로 손짓을 했다.
“클라우드.”
“예.”
성검련주의 뒤에 물러나 있던 젊은 무인이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잡아오거라.”
“생사는….”
“당연히 살려서. 수신호위들을 데리고 가도록.”
“알겠습니다.”
클라우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짓하자, 검익에서 푸른 장포를 걸친 검사들이 내려왔다.
“가자.”
그가 칼날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며 무너진 성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딜 보는 것이냐!”
“나보다 건방진 새끼는 처음인데! 더럽게 열받아!”
사검마와 귀살창이 다시 흑해와 태양구를 일으켰다. 이전보다 더 압축된 힘이 몰아쳤지만, 성검련주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온을 데리고 가면 글렌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 * *
라온은 설화의 감각을 펼치며 가장 후미에 서서 움직였다.
“우리 정말 이대로 가도 돼요?”
마르타를 업고 있는 도리안이 입술을 떨었다.
“대주님이랑 천검대주님이 아직 저곳에 계신데….”
크레인도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천검대주님과 우리 대주다. 믿어.”
버렌은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돌아올 거야.”
루난 역시 두 사람을 믿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조원들의 불안을 지우는 버레과 루난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많이 컸네.’
예전 같으면 다른 조원들처럼 불안에 떨 녀석들이 괜찮다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게 대견했다.
나중에 돌아가면 따로 훈련이라도 시켜줘야 할 것 같았다.
“조장들의 말이 맞다. 지금부터 우리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라온이 두 사람의 말에 동의하며 사람들을 호위하는데 집중하라고 말을 하려 할 때 성벽 쪽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튀어나왔다.
“전투준비!”
광풍대에 검진을 펼치라고 외치고 뒤를 돌았다. 바로 두 검을 뽑았을 때 푸른 장포를 입은 젊은 무인이 시선에 비쳤다.
‘저놈은….’
처음부터 성검련주의 뒤에 붙어 있는 놈이다. 젊어 보이지만 느껴지는 기파는 자신보다 한참 위였다.
“푸른 별이 박힌 검….”
데닝로즈의 떨리는 손이 남자의 장포를 가리켰다.
“성검련주의 제자에요!”
그녀는 나이로 볼 때 막내제자 같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나이에 비해 과한 무력이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성검련주의 제자인 것 같았다.
라온이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끌어낼 준비를 마쳤을 때 성검련주의 제자가 눈앞에서 멈춰 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는 련주님의 지시에 따라 나와 함께 가줘야겠다.”
그는 움직이면 죽인다는 듯 허리에 찬 검을 툭 쳤다.
“싫다면?”
“나와 돌아가는 것 외의 선택지는 죽음 뿐이다.”
성검련주의 제자는 의미 없는 반항을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 더 있지.”
라온의 눈동자 위로 서슬 퍼런 뇌기가 번쩍였다.
“네놈의 머리만 돌려보내는 게.”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96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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