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87화 (487/653)
  • 제487화

    대련장이 뭉개지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마르타가 미끄러지듯 튕겨나왔다.

    비단 같았던 흑발은 회색 모래 먼지와 함께 나부꼈고, 정갈했던 광풍대의 제복은 곳곳이 찢어져 피로 물들었다.

    허나 마르타의 얼굴은 무던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장수처럼 오연한 눈빛으로 칼론을 굽어보았다.

    우우우웅!

    마르타가 손목을 비틀자, 그녀의 검에 맺힌 기운이 더욱더 찬란한 빛을 일으키며 휘몰아쳤다.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는 듯한 색이었다.

    “거, 검강?”

    “미친….”

    “강기다!”

    “나찰녀가 마스터가 됐어!”

    “말만 들었지. 전투 중 각성은 처음 봐….”

    관객들은 마르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형화된 기운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싸우면서 각성을 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에 모두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21살에 마스터면 라온 지그하르트 이후에 최연소 아니야?”

    “나찰녀는 22살이야. 그래도 미친 듯이 빠른 거지만.”

    “지그하르트에는 인간 광산이라도 있는 건가? 뭐 저렇게 인재들이 많은 건데!”

    “마스터가 됐으면 이제 칼론을 이길 수 있는 건가?”

    “그건 힘들지.”

    “맞아. 내상도 입었고, 방금 마스터가 됐잖아. 이기는 건 불가능해.”

    사람들은 칼론이 건재했기 때문에 마르타가 마스터에 올랐어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후우….”

    마르타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육체와 상대에게만 집중했다.

    ‘아직 할 수 있어.’

    타이탄 오러의 가장 큰 장점은 힘과 무게가 아니라 굳건함이다.

    외상은 많았지만, 내상은 심하지 않다. 정신력만 버텨준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후우우웅!

    거센 바람이 대련장에 차오른 먼지를 지우고, 칼론의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롭게 손목을 돌렸다.

    마르타는 칼론의 얼굴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놈 내상이 심해진 건가?’

    강기를 사용하기 전에 입가에서 흘러내렸던 핏줄기가 두꺼워진 것 같았다. 조금 전의 격돌에서 더 심한 내상을 입은 듯 보였다.

    ‘그럼 할 만해.’

    내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만큼 저쪽도 내상을 입었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대단하군.”

    칼론은 아직 건재하다는 듯 가볍게 검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 실수다. 널 만만히 봐서는 안 됐어.”

    “그걸 이제 알았어?”

    “그래. 이제야 알았지. 그러니….”

    그가 검을 뒤로 젖히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돌진형 검식을 사용할 때의 자세였다.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하마!”

    그 말이 귀에 들려오기 전에 칼론이 땅을 박찼다.

    숨 한 번 내쉬기도 전에 강기에 휩싸인 검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물러나기에는 늦었어.’

    각성 때문일까. 육체의 힘은 충만했다. 진각을 밟아 전신에 새로운 울림을 일으키며 검을 단숨에 올려 쳤다.

    후우우웅!

    검은 빠르지만, 그와 함께 움직여야 할 강기의 이동이 늦다. 갓 마스터에 올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쉬움은 가득했다.

    ‘충격에 대비를… 크윽!’

    칼론의 검격과 검을 맞대는 순간 몸이 짓눌려 터질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내상을 입은 게 아니었나?’

    허세를 부린 게 아닌지 칼론의 검에 담겨 있는 예기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워졌다.

    기껏 만들어낸 강기가 뭉텅이로 갈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내장이 터질 것 같아.’

    광폭화의 후유증과 처음 운용하는 강기의 여파, 그리고 칼론의 압력에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무너질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포기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익….”

    마르타는 뼈와 근육이 조각날 것만 같은 통증을 견디면서 대련장 아래로 눈동자를 돌렸다.

    상대를 앞에 두고서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지만 꼭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간신히 시선을 굴려 라온을 보았다. 그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듯 잔잔한 눈동자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표정은….’

    라온과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알 수 있다. 지금 저 녀석은 눈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졌군. 어딜 보는 거냐!”

    칼론이 짧게 혀를 차며 더 묵직해진 강기를 내리찍었다. 팔에 힘이 빠진다. 검이 밀려 나가 자신의 어깨를 찌를 것 같았다.

    ‘침착해야 해. 이길 수 있어.’

    마르타는 눈이 뻘게진 칼론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칼론의 기세가 강맹해서 그렇지 지금 보니 그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전보다 두꺼운 핏물이 흘러내렸고, 안색도 창백했다.

    ‘맞아. 인간인 이상 평범할 수가 없어.’

    칼론이 강기를 사용하지 않는 틈에 광폭화를 터트려서 깊은 내상을 입혔고, 강기의 격돌로 인해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상일 수가 없었다.

    ‘저 녀석도 급한 거야!’

    칼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심한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상처가 더 크게 번지기 전에 빨리 끝내려고 무리하는 것이다.

    ‘라온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그런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

    ‘그럼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지.’

    깨달음의 대가로 얻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냈다.

    마나회로와 단전이 터질 듯 아려 왔지만 볼 안쪽 살을 씹으며 두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쿠구구구구구!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으로 광폭화를 운용했다.

    심장이 폭발할 듯 박동하며 지금까지 상상도 해보지 못한 힘이 검날 위로 풀려나왔다.

    “이익!”

    칼론이 눈을 부릅떴다. 이 상태에서 반격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쿠와아아아앙!

    두 검 사이에 어린 강기가 폭발하며 연무장 중심에서 강대한 빛이 뿜어내 나왔다.

    ‘내가 저 자식을 이정도 믿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

    마르타는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에 찬찬히 눈을 내리감았다.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 *

    라온이 바닥을 차고 올라 허공으로 튕겨 나가는 마르타를 안았다.

    전장에 선 장수 같은 모습과 다르게 가벼운 몸이다. 이런 몸으로 칼론과 정면에서 싸웠다는 게 신기했다.

    -가진 기운을 모두 썼군.

    ‘그래.’

    -소고기 소녀는 강해질 것이니라.

    라스는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을 쓰는 건 바보 아니면 변태라며 미소를 지었다.

    ‘바보가 맞지.’

    라온이 말려 올라간 마르타의 입꼬리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힌트 좀 줬다고 이렇게까지 달려들 줄은 몰랐어.’

    마르타가 눈길을 보낼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을 보여주었는데, 그녀는 그 신호를 믿고 전력을 다해서 칼론에 맞섰다. 평범한 이들은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렇게까지 날 믿을 줄이야.’

    세 명의 조장 중에 자신을 가장 신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마르타가 이 정도 믿음을 보여주니, 놀라우면서도 가슴이 따스해졌다.

    “덕분에….”

    라온이 손을 들어 올리자, 연무장을 휘감고 있던 황색 먼지가 사라지고, 칼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대련장에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검을 땅에 떨어트렸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지그하르트는 패하지는 않았어.”

    칼론은 처음 마르타의 광폭화에 당할 때 큰 내상을 입었다.

    마르타가 본능적인 감각으로 마지막까지 그의 상처를 물어뜯었기에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

    심판은 움직이지 못하는 칼론을 보고 당황한 듯 눈을 껌벅였다.

    이런 결과는 예측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올렸다.

    “마르타, 칼론 둘 다 결투 속행 불가능. 무승부!”

    본래라면 칼론의 승리지만, 이 결투 대회는 승자가 남아야 하는 방식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칼론 역시 패배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비겼어! 나찰녀가 칼론을 상대로 비겼다고!”

    “이, 이게 말이 돼?”

    “지그하르트는 정말 괴물만 사는 곳인가?”

    “갓 각성한 마스터가 어떻게….”

    칼론의 승리를 점치던 관중들은 생각지도 못한 무승부에 벙찐 표정이 되어 눈을 꿈벅였다.

    라온이 만화공으로 마르타의 육체를 회복시켜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가 처음이네.’

    광풍대 세 조장의 실력은 비슷해 보이지만, 연상인 마르타가 항상 한 끗 정도 앞서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가장 먼저 마스터의 벽을 뚫어냈다.

    ‘수고했다.’

    마르타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알고 있기에 그녀의 머리를 툭 쳐준 뒤 대기하고 있던 치료사에게 맡겼다.

    자리로 돌아와서 광풍대를 보았다. 버렌은 기쁨과 분함이 모두 느껴지는 얼굴이었고, 루난은 드물게도 반짝이는 눈으로 마르타를 바라보았다.

    라온은 두 사람의 눈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함을 안다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동료의 성공을 축하만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함을 가진다면 분명 더 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이 자리에 앉으며 신주오령의 주인들이 앉아 있는 단상 위를 올려보았다.

    사검마는 이 상황에 짜증이 나는 듯 인상을 가득 구겼고, 귀살창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악검후의 눈동자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들거린다. 마르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희극제를 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이 정도로는 희극제의 정신력에 충격을 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다음은….’

    라온이 뒤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루난에게 손짓을 했다.

    “루난.”

    아직 비어 있는 대련장을 가리켰다.

    “네 차례야.”

    “응.”

    루난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고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마르타가 남기고 간 온기를 느끼려는 듯 차분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심판이 루난에게 신분을 묻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흑의를 입은 남성이 올라왔다.

    짧게 자른 금발을 뒤로 넘기고, 수염을 정리한 깔끔한 인상의 무인이었다.

    ‘마스터 최상급….’

    전해지는 기파가 범인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조금 전 칼론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흑련의 리크리.”

    그는 본인을 소개하며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툭 쳤다.

    ‘사흑련….’

    라온은 리크리의 소개를 들으며 눈매를 찡그렸다.

    ‘신주오령이 벌써 나오는 건가?’

    사흑련은 그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사검마가 수장으로 있는 무력 단체였다.

    어떤 무기를 쓰고, 어떤 추잡한 짓을 해도 싸워서 이기기만 한다면 인정하는 것이 저들의 방식이었다.

    “리크리? 리크리면 제살검이잖아!”

    “그래! 사검마의 제자!”

    “장검을 기가 막히게 쓴다고 하더군. 웬만한 무인들은 접근조차 못 하고 끝난다고 들었어.”

    “이건 이미 승부가 났네.”

    “제살검이 벌써 나오다니….”

    관객들도 제살검 리크리에 관해 알고 있는지 그가 너무 빨리 등장했다며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야.’

    이건 힘들겠어.

    리크리의 무력은 마스터 최상급. 루난이 마르타처럼 각성한다고 해도 결투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

    라온이 루난을 말리려다가 멈춰 섰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의 맹함이 아니라, 풀잎에 떨어진 새벽이슬처럼 청아한 빛을 띄고 있었다. 지더라도 마르타처럼 끝까지 싸우려는 것 같았다.

    ‘그래. 해봐라.’

    지더라도 얻을 게 있을 테니까.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고 무조건 의미 없는 대련은 아니다.

    희극제가 이 결투를 친선이라고 명했으니, 바로 승부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위험도 없으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심판이 빠르게 연무장을 정비한 뒤 루난과 리크리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지그하르트의 루난, 사흑련의 리크리의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이 일에 익숙해진 듯 전보다 더 빠르게 손을 내리고 물러섰다.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리크리의 오른손에 서늘한 빛이 어린다. 극쾌의 발검술. 섬광처럼 뽑혀 나오는 검날에 우악스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우우우우웅!

    루난은 리크리의 움직임을 예측한 듯 비에 젖은 풀잎처럼 몸을 숙인 채 설화를 뻗어냈다. 백색의 칼날이 은빛으로 물들며 두터운 서리의 기운이 응집되었다.

    쩌어어어어엉!

    서리가 모여든 오러의 방패가 사기 짙은 칼날을 막으며 수십 조각으로 깨져나갔다.

    치이이잉!

    갈라진 냉기의 조각들은 루난의 손짓을 따라 리크리를 향해 쏟아졌다. 방어와 반격의 일체화. 재기 넘치는 검식이었다.

    하지만 리크리는 마스터 최상급답게 강기의 막을 운용하여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얼음 조각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익스퍼트 최상급치고는 나쁘지 않군. 하지만….”

    리크리의 검이 바닷속 산호처럼 가늘게 흔들리다가 벼락처럼 뻗어 나왔다. 강기가 맺힌 극쾌의 찌르기였다.

    “윽.”

    루난이 뒤로 물러서며 칼날이 휘감긴 서리로 새로운 방패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리크리의 검이 빨랐다.

    빠드드드득!

    얇고 날카로운 칼날이 루난이 일으킨 반쪽짜리 서리의 막을 가르고, 그녀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콰아앙!

    리크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루난의 앞으로 이동하여 그녀의 복부를 거칠게 걷어찼다.

    “…….”

    루난은 끝까지 신음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련장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루, 루난 장외!”

    심판도 리크리가 이 정도로 진심을 담을 줄은 몰랐던지 떨리는 음성으로 루난의 패배를 말했다.

    라온은 살짝 짜증이 돋은 듯한 리크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루난에게 다가갔다.

    “…미안.”

    루난은 너무 쉽게 패해서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충격이 심할 텐데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안쓰러웠다.

    “넌 할 만큼 했어.”

    마스터 최상급이 강기를 사용했는데, 삼 합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쉬고 있어.”

    만화공으로 루난의 상처를 지혈해 준 뒤 치료사를 불렀다.

    “부탁합니다.”

    치료사에게 루난을 맡긴 후 광풍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버렌. 봐서 알겠지만….”

    “그래. 내가 올라가자마자, 뭘 할 새도 없이 끝내버리겠네.”

    버렌도 상황을 파악한 듯 눈매를 찡그렸다. 루난이 당한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쉽게 되었군.”

    리크리가 라온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 손으로 백검룡을 꺾어보고 싶었는데, 나올 수가 없다니 말이야.”

    그는 도발하듯 장검으로 대련장 바닥을 긁었다.

    한참 떨어지는 하수를 상대로 검강까지 써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쓰레기였다.

    ‘딱 좋네.’

    언제 나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 멍청이가 알아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이 대련장에 오르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그럼 그 기회를 주지.”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광풍대 부대주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름을 밝히고, 리크리 앞에 섰다.

    “뭐…?”

    리크리는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너는 못 나올 텐데? 분명 가문의 대표자는….”

    “맞습니다.”

    지금까지 단상 위에서 지켜만 보던 희극제가 일어섰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각 단체의 대표로 오신 분들은 참여할 권한이 없….”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라온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흑룡포를 툭 쳤다. 지그하르트의 신패가 박혀 있던 우측 가슴이 텅 비어 있었다.

    “전 지그하르트의 대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당신의 비서가 찾아왔을 때도, 회의장에서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본래 지그하르트의 대표는 내가 아니라, 광풍대주라고.”

    그 말을 하며 우측을 가리켰다. 관객석에서 지루한 듯 하품하는 리메르의 가슴팍에 지그하르트의 신패가 꽂혀 있었다.

    “회의장에서는 지그하르트의 대표가 아니라고 따져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 그건….”

    희극제는 리메르의 가슴팍에 있는 문양을 보고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 하지만 아무리 임시라고 해도 대표의 자리에 앉았고, 회의에도 참여했으니….”

    “그 대표가 뭐가 그리 중요한 건지 모르겠군요. 21살짜리 애송이가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음….”

    무섭냐고 도발하자, 희극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사실 맞는 말이지. 지그하르트의 대표는 광검이잖아.”

    “그래. 마흔 근처도 아니고, 21살짜리의 참가를 막는 것도 이상해.”

    “겁나는 거 아니야?”

    “겁날만하지. 21살에 마스터 최상급이잖아. 여기서 백검룡이 우승하면 신주오령이 망신만 당하는 건데.”

    관객들도 왜 대표가 참여할 수 없는 조건이 생긴 건지 이유를 알아차리고서 비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신주오령 분들은 불만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라온이 희극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진한 미소를 그렸다.

    “당신, 당신, 당신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들어서 대련장에 있는 리크리와 귀빈석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무인을 차례로 가리켰다.

    리크리처럼 신주오령 소속으로 결투에 참여할 젊고 강한 무인들이었다.

    “음?”

    “지금 이게 무슨….”

    지목당한 신주오령의 무인들이 불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참여에 대한 사과로 그대들의 합공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라온이 글렌을 닮은 걸음으로 대련장 중심으로 나아갔다. 광폭한 패기와 함께 나부끼는 흑룡포에서 시꺼먼 비늘이 돋아난다.

    그 홀로 검은 폭풍 속에 서 있는 듯한 장엄한 기파가 번져 나왔다.

    “넷 모두 올라오도록.”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87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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