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웅장했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신주오령의 수장들과 중립 세력의 무인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은은하게 내려서던 달빛조차 말을 잊은 듯 붓끝처럼 구부러졌다.
고오오오오!
라온은 그 경악의 중심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진중한 의념이 매서운 기파가 되어 그의 신념을 드러냈다.
“허어….
“이, 이게 무슨….”
중립 세력의 수장들이 앉은 곳에서 낮은 신음과 거친 탄성이 들려왔다.
“……저게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약관을 갓 넘었다고 하던데, 믿을 수가 없군.”
“21살짜리가 저런 우악스러운 기세를 일으키다니…….”
“소문이 맞는 건 외모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는 무력이었나.”
“천재라 불린다던데, 잘못된 말이다. 저건 괴물이야.”
라온을 처음 본 무인들은 달빛마저 죽여버리는 외모와 공간을 아우르는 패기에 질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대단한 분이라고!”
트벤 가문의 수장 덤트칸이 옆에 앉은 무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일검으로 내게 깨달음을 주신 진짜 무인이시지. 어리다고 만만히 보면 안 돼.”
그는 신주오령 앞에서도 당당한 라온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신성 왕국의 성기사 단장 바이튼이 연한 미소를 그렸다.
“라온 님은 진짜 기사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지. 연배가 한참 낮음에도 존경할 수 있는 분이다.”
그 역시 덤트칸처럼 옆에 있는 이들에게 라온의 대단함을 설파했다.
“사실 백검룡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그래. 신주오령이 회의장에 부른 건 백검룡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간부였으니까.”
“이 회의는 공식적인 행사잖아. 서로 존대를 사용하는 게 맞지.”
라온의 서릿발 같은 기세와 몇몇 수장들의 외침 때문인지, 다른 중립 단체의 수장들도 라온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희극제는 회의장의 분위기가 라온에게 호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손끝을 떨었다.
‘좋지 않아.’
라온은 정당한 명분과 함께 지그하르트의 의지를 드러냈고, 중립 세력은 그런 그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미리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시작은 분명 계획대로였는데.
귀살창이 늦게 도착한 것도, 라온과 귀살창이 서로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어린 천재를 혐오하는 사검마가 시비를 걸었던 것도 모두 예상한 대로였다.
그 상태로 끝까지 갔으면 좋았겠지만, 중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라온이 변했어.’
지금까지 봐온 라온이라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먼저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는 망나니짓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무지성으로 상대의 말을 틀어막는 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를 대며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묵직한 명분과 함께 펼쳐지는 고고한 기파에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라온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악검후는…….’
희극제가 입술을 깨물며 악검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과 똑같이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젠장.’
사실 건방진 행동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사검마가 아니라, 악검후다.
라온이 사검마의 말을 억지로 틀어막을 때 악검후가 나서서 그에게 망신을 주고, 무릎 꿇리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명분 있는 말로 사검마의 입을 막았고, 악검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또한 라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후욱….”
사이한 숨소리에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검마의 입에서 탁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진심으로 분노한 듯 뱀눈으로 라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망해.’
악검후와 달리 사검마는 정도를 모르는 자다. 오마와 비슷한 성향인데다가 나이와 외모에 열등감이 있어서 라온에게 진심으로 칼을 들이밀 수도 있었다.
드드드득!
사검마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 * *
“귓구멍이 막혔나.”
라온이 사검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내게 말을 높이라고 했다. 대우받고 싶다면 먼저 상대를 대우하는 법을 배우도록.”
턱을 모로 틀고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읊어 주었다
“네가 미쳤구나. 아주 단단히 미쳤어!”
사검마가 부르르 떨리는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조그마한 명성과 무력을 지녔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냐!”
그가 검병을 움켜쥐며 살의로 범벅이 된 미소를 지었다.
라온이 혀를 살짝 깨물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사검마에게서 전해지는 기세가 조금 전과는 격이 달라졌다.
진심으로 살기를 일으킨 듯 내장이 삶아지는 듯한 기분이다. 조금만 방심하거나, 오러의 운용을 멈춘다면 한 줌 핏물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깽판을 치기 위해서 출장까지 왔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명성, 무력, 배분. 본좌보다 무엇 하나 나은 게 없거늘! 가문의 이름 뒤에 숨은 망나니 놈이 어딜 감히!”
“아, 스스로를 부를 때 본을 쓰는 애들은 하나 같이 정상이 없네.”
라온은 멀뚱하게 떠 있는 라스를 힐끔 보며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지금 친목회 하려고 여기 모였어?”
“뭐?”
“나를 부른 건 너희들이다. 지그하르트의 간부를 초청했기에 약속까지 취소하고 와주었는데, 돌아오는 건 저딴 개소리라니 어이가 없네.”
“네놈이 진짜 지그하르트의 대표도 아니지 않느냐!”
사검마는 리메르가 있지 않냐며 승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처음으로 맞는 말을 하네. 맞아. 지그하르트의 대표는 대주님이지.”
“그럼 네놈이 개짓거리를 했다는 걸 인정하는….”
“하지만 대주님은 이 패를 내게 넘기셨다.”
사검마의 말을 단칼에 끊으며 신주오령의 수장들을 향해 한 발 더 다가갔다.
“가주님의 승인까지 받았기에 지금은 내가 지그하르트의 대표다. 가문의 이름 뒤에 숨은 게 아니라, 그 이름을 짊어지고 이 자리에 왔다.”
라온의 음성에 깃든 의지가 폭풍처럼 치솟으며 흑룡포가 저절로 펼쳐진다. 지그하르트의 패에 새겨진 불꽃에서 더 장대한 빛이 번뜩였다.
“윽….”
사검마가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먹히고 있군.’
저놈에 대한 정보를 들은 보람이 있어.
데닝로즈는 회의에 초대받자마자, 신주오령의 수장들에 관한 정보를 풀어주었다.
악검후는 예의를 중시하지만 융통성이 있고, 사검마는 외모와 나이에 관한 열등감이 있으며 정도를 모른다고 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르기에 희극제를 대하듯 무조건 망나니짓을 할 게 아니라, 완벽한 명분을 내세워 처음부터 움직일 수 없게 찍어 누르는 게 맞았다.
“궤변이다!”
사검마는 멍청이들이 입에 달고 사는 한마디를 주절거렸다.
이쪽의 명분이 먹혔다는 뜻. 지금부터는 대놓고 깽판 치는 망나니로 돌아가도 될 거 같았다.
“궤변은 네 얼굴이고.”
“이 어린놈이!”
“왜 늙은 놈아.”
어린놈에 늙은 놈으로 답하자, 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음….
라스조차 이건 좀… 하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크으으윽!”
사검마가 결국 참지 못하고,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가 검을 뽑고 달려들려고 할 때 악검후가 눈을 떴다.
“거기까지 하도록.”
악검후가 사검마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가 청아하게 빛났다.
“백검룡의 말이 맞다. 지그하르트를 초청한 건 우리고, 그들을 대우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말을 높이는 게 맞다.”
그녀는 그 말을 지키려는 듯 팔짱을 풀고 검을 테이블에 기대어 놓았다.
라온이 악검후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악검후는 끝까지 가만히 있고, 희극제가 움직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녀는 직접 나서서 사검마를 자제시켰다.
“그만하라고? 본좌가 저 버러지에게 모욕당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이냐!”
“네가 스스로 무덤 파는 꼴은 봤지.”
악검후의 시선이 초승달처럼 굴곡져 흘렀다.
“먼저 상대를 모욕한 건 백검룡이 아니라, 너다.”
“내가 뭘 했다는 것이냐!”
“버릇이 없다고 하면서 너부터 먼저 말을 놓은 건 잊었나?”
“하, 하지만 저놈은 우리와 동급인 귀살창에게 반말을 했다!”
“정작 반말을 들은 귀살창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귀살창에게 향했다.
“나? 나는 상관없어! 저 녀석과 시원하게 말을 텄거든.”
귀살창이 라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무식한 놈! 20살짜리한테 반말을 듣고 웃음이 나온단 말이냐!”
“난 잘난 놈은 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자거든. 거기다 쟤는 재미까지 넘치잖아. 늙은이들이 어린놈이라는 말을 하는 건 많이 봤는데, 거기에 늙은 놈이라고 대꾸하는 놈은 처음 봤어. 당장 친구 먹고 싶을 정도라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늙은 놈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폭소를 터트렸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직사각형 테이블 중앙에서 덩치 큰 남성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워낙에 커서 어깨가 찢어질 것처럼 팽팽했다.
“초대를 하셨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라온이 로브의 거한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무인인가? 그런데 왜 로브를…어?’
무인이 로브를 입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그의 가슴 부근에 새겨진 사색 탑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육황의 일익 마탑의 문양이었다.
‘마탑? 그럼 저 사람이 유리아라고?’
메케인이 신번 유리아가 왔다는 말을 했는데, 저 거한이 마탑의 천재라는 유리아인 것 같았다.
유리아라는 이름이라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남자. 그것도 야수연맹의 무인들을 뺨칠 정도의 거한일 줄은 몰랐다. 고정관념이란 게 처음으로 무서웠다.
‘오늘 일 중에 가장 놀랍군.’
라온은 유리아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작게 턱을 주억여 주었다.
다만 그는 편을 들어준 것과 달리 꼭 싸우고 싶은 사람처럼 열기가 차오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유리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기에 다시 사검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할 말 있나?”
“…….”
사검마는 입술을 질겅 씹은 채 검병에 올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없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없소!”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돌린 채 본인의 자리에 앉으려다가 멈춰 섰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 왜 그러나 봤더니, 일어날 때 의자를 부숴버려서 앉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후….”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진 사검마와 눈을 부릅뜬 채 감탄하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자신을 본이라고 칭하는 애들은 바보가 맞네.’
무력으로 하늘에 닿은 놈들이 하나같이 멍청한 짓을 하는 걸 보니, 특징으로 잡아도 될 것 같았다.
라온이 자리로 돌아가다가 멈춰서 희극제를 보았다.
‘답답해하고 있군.’
희극제의 표정은 지금의 결과를 예측한 것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입술이 얇게 떨리는 건 감추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희극제 님.”
“예.”
희극제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에….”
“잠깐!”
그녀에게 질문을 하려 할 때 사검마가 손을 들어 올렸다.
“왜 나한테는 말을 놓고, 희극제에게는 존댓말을 하는 것이냐!”
“…….”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한심한 눈으로 사검마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멍청하네.”
귀살창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극제는 처음부터 존댓말을 해서 존댓말을 듣는 거고, 너랑 나는 반말을 해서 반말을 듣는 거잖아. 이게 이해가 안 돼?”
그는 생각 좀 하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너도 존댓말로 시작했으면 사검마 님 소리 들었겠지. 지금이라도 할래?”
“필요 없다!”
사검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대신 귀찮음을 풀어준 귀살창에게 한 번 눈길을 준 후 다시 희극제를 보았다.
“여기에 신주오령의 수장은 넷뿐인데, 남은 한 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해적왕께서는 참여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주오령의 회의 아닌가요?”
“맞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해적은 바다에 있어야 한다며 거절을 하셔서….”
“인원을 다 모으지도 못하고 회의를 구경하러 오라고 하다니, 일 처리가 주먹구구식이군요.”
라온이 희극제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은 법입니다.”
“…….”
희극제가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미세하게 튀어나왔다.
‘열 받았군.’
하도 많이 마주하다 보니, 이제 그녀의 감정이 훤히 보였다. 지금 상당히 열이 오른 상태가 분명했다.
‘역시 저 여자를 갈구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
다른 사람보다 타격감이 깊게 들어가서 치는 맛이 좋았다.
“크하하하하!”
귀살창이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너 마창회에 들어올 생각 없냐? 지금 바로 부회주의 자리를 주마!”
“미친 건 너야.”
라온은 귀살창에게 인상을 찡그리고서 본래의 자리에 앉았다.
‘조금 아쉽군.’
해적왕을 제일 보고 싶었는데.
신주오령 중 가장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 해적왕이었다.
바다를 제집처럼 노니는 자유인이라고 하기에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지 않았다니, 영 아까웠다.
다만 확실히 알게 된 건 있다. 신주오령은 완벽한 동맹체가 아니라, 언제라도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넝마 덩어리 조직이었다.
탁!
라온이 가볍게 테이블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은 뒤 턱짓을 했다.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회의 시작하시죠.”
그는 본인이 이 회의를 주도하는 회장처럼 지시 아닌 지시를 내렸다.
“아….”
“으음….”
신주오령의 수장들과 중립 세력의 무인들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라온을 돌아보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라스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서 눈을 껌벅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서 네놈이 주도권을 가지게 된 거냐고! 이해가 안 가느니라!
녀석은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속 시원하네요.”
데닝로즈는 기대 이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료로 정보를 준 보람이 있다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달칵!
사진기 소리에 우측을 보았다. 엔시아가 사진기를 내리며 황홀함이 묻어나는 음성을 흘렸다.
“대.존.잘.”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82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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