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9화
데닝로즈가 대지의 마나가 깃든 바늘을 열여섯 방위에 꽂자, 숙소 주변으로 허연 안개가 피어났다.
다만 일출 직전의 안개처럼 옅어서 손으로 휘젓기만 해도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유선운무진이라고 해요. 연한 안개처럼 보이지만, 외부에서 이 저택을 살피려고 하면 안개가 짙어져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거예요.”
데닝로즈는 유선운무진에 대해 설명하며 손가락으로 안개를 휘저었다.
“음….”
라온이 기감을 펼쳐서 유선운무진의 흐름을 살폈다.
‘고요하군.’
안개는 저택 주변을 잔잔하게 휘돌다가 한 번씩 강한 파동을 일으켰다.
외부의 시선을 막기 위한 반응인 것 같았다.
‘자연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방식이야.’
진법을 쭉 살피는데 특별히 모난 곳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치가 간단해서 쉽게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높은 수준의 진법인 것 같았다.
“진법에도 조예가 있으셨군요.”
“조금 배우긴 했었어요. 다만….”
데닝로즈가 하늘을 올려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란세빌에서 크게 당한 이후로 제대로 파고들었죠.”
그란세빌에서 사도의 진법에 당했던 일을 떠올렸는지 그녀의 미간을 주름이 졌다.
“다시는 저희 대원와 주민들이 제물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요.”
라온은 작은 주먹을 말아 쥐는 데닝로즈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네.’
지부장의 업무를 하면서 난해한 진법까지 익히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래서 그녀가 더 커 보였던 것 같다.
‘이쪽도 마찬가지고.’
우측으로 시선을 돌려 사진기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엔시아를 보았다.
그녀 역시 가문에서 기대받는 인재였기에 많은 업무를 하고 있을 텐데,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아티팩트를 개발해 냈다.
데닝로즈와 엔시아 둘 다 전보다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면서도, 조금은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만 멈춰 있는 느낌이야.’
점점 성장하는 두 사람에 비해 자신만 그 자리에 머무는 듯한 기분이라 혀 안쪽에 쓴맛이 돌았다.
-이게 진짜 미쳤나!
마른 생선처럼 누워 있던 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멈춰 있어? 지이이이이랄!
‘어?’
-네놈이 제일 많이 바뀌었구만, 어디서 케르베르스 똥을 처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케르베로스 똥?’
-본왕의 기운을 쪽쪽 빨아 먹으면서 성장해놓고, 그딴 막말을 주절거리다니! 네놈의 양심에는 분명 털이 났을 것이니라!
라스는 무슨 인간이 이렇게 욕심이 많냐며 인상을 구겼다.
‘그런가?’
라온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보았다.
최근 무학의 경지가 정체되어 있어서 솔직하게 말했던 거지만, 그간 많은 성장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더 마음을 편히 먹고 나아가도 될 것 같았다.
‘위로해줘서 고맙다.’
-위로해 준 게 아니라! 욕한 것이니라!
‘나한테는 도움이 됐어.’
라스의 머리를 툭 쳐준 후 숙소의 정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무인들의 눈동자가 호수에 비친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면 대련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혹시나 해서 왔는데, 기연이로군.”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무인들은 대련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뺨이 붉게 물들었다.
‘역시.’
백경의 냄새는 나지 않아.
희극제는 어제의 실패를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본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인들만 이곳으로 보낸 것 같았다.
“예. 대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라온이 가장 먼저 왔다던 트벤 가문의 덤트칸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와 대련하기 전에 트벤 가문의 무인들과 제 수하들을 먼저 붙여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제자들을 말입니까?”
덤트칸이 뒤에 선 제자들을 보며 눈을 껌벅였다.
“예. 수준도 비슷하니,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흐음, 확실히 광풍대 검사분들도 모두 상급과 최상급이로군요.”
덤트칸이 광풍대 검사들을 차례로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제 제자 녀석들은 지금 경지에 오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경험이 벌어져 있어서 대련에서 꽤 차이가 날 겁니다.”
그는 제자들의 실력을 믿는 듯 광풍대가 모두 패배해서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며 걱정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승패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라온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흠,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덤트칸이 뒤를 돌아보며 묻자, 그의 제자들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련하게 해주십시오!”
“지그하르트의 검수들과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덤트칸의 제자들도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결정이 났군요.”
라온은 트벤 가문의 무인들에게 준비하라고 말한 후 광풍대에게 돌아갔다.
“다 들었지?”
“확실히 좋은 기회야.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버렌이 트벤 가문의 무인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시작도 안 했는데 무시하네? 뒤지고 싶나?”
마르타는 광풍대가 힘들 거라고 말한 덤트칸을 노려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준비됐어.”
루난은 언제라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그럼 첫 번째는 크레인.”
라온이 세 조장을 보면서 크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엥? 저요?”
본인의 차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크레인이 입을 떡 벌렸다.
“이런 건 원래 조장님부터….”
“네가 고유 크레인이잖아.”
라온은 빨리 나가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 지면 뒤진다.”
마르타가 크레인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건 마르타 말이 맞지. 선봉은 무조건 이겨야 해.”
버렌이 서늘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루난은 말없이 설화의 검병을 쥐었다. 마르타 이상으로 강압적인 제스처였다.
“뭐, 좋습니다! 가볍게 깨부수고 올게요!”
크레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봐주지 마. 최선을 다해.”
라온이 크레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예전에는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상대에 맞춰주는 게 예의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 장소까지 와서 대련을 신청했다는 건 진짜를 보고 싶다는 뜻이기에 전력을 다해서 상대해주는 게 예의였다.
“예!”
크레인이 격한 외침을 터트리고,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트벤 가문의 헨리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의 크레인이오!”
두 무인은 서로 인사를 나눈 이후 바로 검을 뽑았다.
“그럼 시작.”
라온이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헨리가 먼저 움직였다. 가벼운 보법을 밟으며 거칠게 검을 내리쳤다.
“흐읍!”
크레인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검기를 일으켰다.
쩌어어어엉!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며 강렬한 충격이 연무장을 울렸다.
다만 먼저 밀려난 건 선공을 취했던 헨리였다.
“윽!”
헨리가 급하게 자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크레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직선적인 보법을 밟으며 나아가 두 번째 검격을 올려 쳤다.
캬아아아앙!
크레인의 매서운 검기가 부채꼴로 번지며 헨리의 불안정한 검세를 깨뜨렸다.
푸욱!
헨리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그가 들고 있던 검이 연무장 바닥에 박혔다.
“어?”
크레인은 본인도 당황한 듯 넘어진 헨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렇게 약한….”
“승자 크레인!”
라온은 크레인이 실례하지 않도록 그의 승리를 외쳤다.
“이, 이게….”
덤트칸은 검을 놓친 제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분명 헨리가 더 위였는데?’
헨리가 크레인이라 불린 검사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기에 이렇게 쉽게 패배할 줄은 몰랐다.
방심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선풍검이나, 나찰녀 같은 조장이라면 모를까. 이름 없는 대원에게 지다니….’
이곳에 배우기 위해 찾아온 건 맞지만 그건 자신의 일이다. 제자들이 광풍대에 지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케닌!”
“예!”
이번에는 절대 지지 않기 위해서 애제자인 케닌을 불렀다. 마스터의 벽을 깨기 직전인 그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
라온은 케닌이라는 젊은 무인을 살핀 후 마르타를 불렀다.
“전력으로 조지면 되는 거지?”
“조지지는 말고….”
너무 심하게 패지는 말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나찰녀. 살살해.”
루난이 입 앞에 손을 모으고 응원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외쳤다.
“너부터 상대해줄까? 아앙?”
“나중에 해.”
마르타가 루난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막으며 그녀가 연무장으로 들어가도록 등을 밀었다.
“트벤 가의 케닌이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의 마르타다.”
마르타는 루난 때문에 열이 받았는지 인상을 구기며 본인을 소개했다.
“대련 시작!”
라온이 손을 올리자마자, 마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후우.”
케닌은 마르타에 대해 알고 있는지 먼저 들어오라는 듯 방어 자세를 갖췄다.
“방어를 하시겠다?”
마르타가 차게 웃으며 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검이 황색으로 물들더니, 거대한 압력이 솟구쳤다.
쿠구구구구!
벼락처럼 떨어지는 일검. 대지의 속성에 깨달음을 얻은 그녀의 검격에 태산의 무게가 휘감겼다.
“크윽!
케닌이 사선으로 들어 올린 검에 전력을 쏟았지만, 마르타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다리가 땅에 박히고, 검을 쥔 손이 부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쿠와아아앙!
막대한 충격이 터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후우우욱!
라온이 바람을 일으켜 연기를 밀어내자,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케닌이 보였다.
그의 검은 반으로 부러진 채로 떨어져 있었다.
“너무 약하잖아.”
마르타는 기절한 케닌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이 정도면 안 조진 거야.”
그녀는 힘 조절을 한 거라고 말한 후 광풍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네.”
라온이 케닌의 상태를 파악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리가 크고, 강한 충격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케닌에게 큰 부상은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조지지 말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 같았다.
“허어….”
덤트칸은 노랗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인의 제자가 연속으로 패배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대련 시작하시죠.”
라온은 연무장을 가볍게 다진 후 덤트칸을 불렀다.
“…알겠소. 카만.”
덤트칸이 입술을 깨물며 바로 뒤에 있던 검사에게 손짓을 했다. 기절한 케닌과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었다.
“루난.”
“응.”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연무장으로 나왔다. 맹한 눈매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침착함이 어려 있었다.
“카만이라고 합니다.”
“루난 슬리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련 시작.”
카만은 두 번의 대련을 보았기 때문인지 섣불리 움직이지도, 방어를 굳히지도 않았다.
매서운 검기를 쏘아내며 견제부터 시작했다.
타악!
루난은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보법을 밟았다. 서리가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은은한 푸른빛을 일으켰다.
“흐읍!”
카만은 루난이 움직인 순간 연속으로 검기를 쏘아냈다. 찰나의 순간에 나아간 일곱 개의 검기가 루난의 전신을 노렸다.
‘됐어!’
마스터가 아닌 이상 저 검기를 모두 막아내는 건 무리다.
빈틈이 벌어지는 순간에 두 번째 검기 다발을 날려서 승기를 잡아야 했다.
카만이 루난의 반응을 예측하며 오러를 끌어 모을 때였다.
후우우욱!
루난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며 그가 내뻗은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이, 이게 무슨….”
카만이 당황하여 입을 벌릴 때 그의 목젖에 푸른 칼날이 닿아 있었다.
어느새 뒤로 이동한 루난이 카만을 완벽하게 제압한 것이다.
“져, 졌습니다.”
카만은 진한 오러가 맺혀 있는 검을 떨구고 패배를 인정했다.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수고.”
루난은 카만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루난 이후로도 광풍대는 단 한 번에 패배도 없이 여러 가문과 왕국에서 찾아온 무인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사실 모든 대결이 너무 빨리 끝나서 대련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였다.
“이, 이게 말이 돼?”
“분명 이쪽의 수준이 높은데,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는 거야!”
“아무리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나이 차이가 나는데 어찌….”
제자와 수하들의 일방적인 패배를 본 중년의 무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광풍대를 바라보았다.
다만 라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지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누가 가르쳤는데.
지금 광풍단의 승리에는 그들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일대일 대련으로 몸에 죽음을 새겨주고, 지옥훈련으로 정신력까지 키워주었다.
경지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라온이 더 진한 웃음을 흘리며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보았다.
‘저 녀석들은 더 특별하고.’
저 세 사람은 정규 수련을 끝낸 후에 리메르를 찾아가 추가 훈련까지 받았다.
검계현신을 열기 위해 속성 수련을 받은 것 같은데, 오히려 기본적인 무력이 확연히 성장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셋 모두 마스터에 오를 것 같았다.
라온은 광풍대 모두에게 수고했다는 의미의 고갯짓을 보낸 후 덤트칸에게 다가갔다.
“이제 저희 차례군요.”
“아, 알고 있소.”
덤트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연무장으로 올라왔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눈빛이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되찾는 평정. 마스터 상급에 오른 무인다웠다.
“대련 시작!”
준비를 끝내자, 심판을 맡은 마크 괴튼이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렸다.
“흐읍!”
먼저 움직인 건 덤트칸이다. 그가 자세를 낮추며 땅을 박찼다. 단숨에 뛰어들어 전력으로 검을 내지르는데, 곧게 선 검극에서 섬뜩한 기파가 느껴졌다.
‘제대로 갈고 닦은 검술이군.’
데닝로즈의 말대로 덤트칸의 무학은 고요함 속에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교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의 찌르기였다.
‘하지만….’
가슴이 뛰지는 않아.
조금 전에 귀살창이 일으킨 의념의 무학을 보았기 때문일까. 덤트칸의 검세가 너무도 가볍게 느껴졌다.
‘이젠 더 나아갈 때라는 거겠지.’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천검을 고쳐 쥐었다.
만화공 백화.
회천.
제천검의 칼날에서 튀어 오른 나선의 불꽃이 혜성의 꼬리를 그렸다.
쩌어어어억!
덤트칸이 피워 올린 강기가 단숨에 녹아내리고, 허공에는 회천이 일으킨 붉은 궤적만이 가득 찼다.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 * *
“져, 졌습니다.”
마지막에 온 슈페르 신성 왕국의 성기사 단장 바이튼의 패배 선언으로 숙소에 들어온 이들 모두가 라온에게 무릎을 꿇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이 제천검을 납겁하며 바이튼에게 고개를 숙였다.
광풍단에 이어 자신까지 기사단장이나, 가문의 대주, 가주들을 모두 5합 이내로 제압했기 때문에 숙소 내부는 도서관이 된 듯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비슷한 실력이라 생각하며 대련을 신청해온 무인들 모두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음….”
라온은 거의 망가지지 않은 연무장 바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되려나.’
무인의 예의로서 봐주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했는데 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진짜 무인으로서 이곳에 왔다면 제대로 상대해줘서 고맙다고 할 것이고, 희극제의 입김이 들어간 이들이라면 좋지 않은 소문을 낼 것이다.
“라온 님.”
허공을 보며 앞으로의 일을 그리고 있을 때 뒤편에서 덤트칸과 다른 무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대련을 신청한 모두가 두 손을 모은 채 다가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인들 모두가 검집을 잡은 채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몸을 굽혔다. 그들의 음성에 뜨거운 감정이 묻어났다.
“저희를 무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짧은 대견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배려를 해서 길게 싸워 주셨다면 실망했을 겁니다.”
“깔끔하게 지니까 오히려 속이 시원하네요.”
가주라는 직책 때문에 하오체를 사용하던 검사들까지 말을 높이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라온이 검사들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받아들인 모양이네.’
모두의 눈빛을 보니, 자신이 진심으로 상대해준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검으로 만들어낸 언어가 통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수련한 뒤 다시 대련을 청하죠.”
“앞으로도 무운이 함께 하시길.”
검사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서 한 명씩 지그하르트의 숙소를 떠났다.
-오?
라스가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
‘약속 지킨다고 했잖아.’
라온은 눈이 동그래진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놈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구나! 드디어 마족이 되었어!
녀석은 잘했다고 떠들며 어깨를 두드렸다.
‘인간인데….’
라온이 라스를 보며 헛바람을 흘릴 때 뒤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끝냈는데, 오히려 기뻐하다니. 예상외라고 생각하시나요?”
데닝로즈가 검사들이 떠난 숙소의 문을 보며 작은 웃음을 보였다.
“이게 당연한 거예요. 저분들은 모두 어떠한 문제도 일으킨 적 없이 무학만을 연마한 중립 분들이시니까요.”
그녀가 조금 더 짙은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희극제가 일부러 그런 무인들만 보냈겠지만, 역으로 라온 님께 큰 도움이 되었네요.”
데닝로즈는 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그하르트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줄 거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같군요.”
“이제 진법을 해제할게요.”
그녀가 드레스 밑단을 잡고 바늘집을 꺼내려 할 때 그 안에 끼어 있던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아….”
데닝로즈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얼굴이 본 적 없는 색으로 변해갔다.
“이, 이건….”
“창피해할 필요 없어요! 세 번째 팬!”
엔시아가 사진기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존잘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녀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 팬? 두 번째도 있어요?”
“저기.”
엔시아가 우측을 가리켰다.
“존잘 라온.”
루난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존잘이라 중얼거렸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떨어진 사진을 주워서 들었다.
귀살창과 도박할 때 찍었는지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데닝로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예?”
“그거 주세요.”
사진을 달라는 말이 나올 줄 생각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마른침을 삼키며 내밀었다.
“고, 고마워요!”
데닝로즈가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훌쩍 물러났다.
“지금 민망한 표정도 좋아요! 개존잘이야!”
엔시아는 너무 좋다고 외치며 사진기를 작동시켰다.
“그 사진기는 대체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라온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엔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작은 크기에서 계속 종이가 뽑혀 나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어제부터 저 사진기라는 아티팩트의 원리가 궁금했다.
“라온 님의 존안을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서요.”
“허….”
입이 떡 벌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저런 새로운 아티팩트를 개발하다니, 대단하다는 말도 안 나왔다.
“어려웠을 텐데요?”
“물론 쉽지는 않았죠.”
엔시아가 사진기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옵스큐라라고 암실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그 반대편에 외부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이론을 이용했는데, 이게 보는 건 가능한데 사진을 뽑을 수는 없어서 마나를 담은 보석을 끼워 넣어서 지금의 방식을 만들었죠.”
“마나를 담은 보석?”
“네. 마나석을 이용하면 너무 강해서 사진기가 부서졌거든요. 그래서 각 속성에 맞는 보석들을 이용해서 힘의 균형을 나눴죠. 아공간 주머니의 이론도 들어갔고.”
“아….”
라온이 손을 툭 떨어뜨린 채 멍하니 입을 뗐다.
“속성으로 힘의 균형을 나눈다….”
엔시아의 설명을 듣자마자, 뇌리에 붉고, 푸른 벼락이 내리쳤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두 속성에만 집중할 필요는 없지. 다른 방식으로….”
-어?
라스가 점차 투명해지는 라온의 눈을 보며 턱을 떨었다.
-야! 어디가! 돌아와! 왜 하필 지금인데!
이제 밥을 먹으러 가려 할 때 왜 갑자기 무아지경에 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이 미친놈아! 돌아오라고! 일단 먹고 가! 먹고 다시 가라고! 그때는 보내줄게!
끝없이 라온을 불렀지만, 그의 시선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본왕의 일 잘 풀릴 리가 없지! 다 알고 있었느니라!
라스가 하늘을 향해 욕을 내뱉다가 젖은 수건처럼 어깨를 축 내렸다.
-야아….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79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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