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화
라온은 숙소 입구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왜 저렇게 모여있는 거지?’
뛰어난 기세를 휘감은 무인들이 문 앞에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맛집에 줄을 선 손님 같은 모습이라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은데.’
귀살창과의 일합대결을 통해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감질나는 의념의 깨달음이라 리메르와 대련을 통해 정리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주님. 저게 무슨 일….”
라온이 뒤를 돌아서 리메르에게 말을 하려다가 멈춰 섰다.
“이 인간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 주머니 속 금화를 보며 헤죽거리던 붉은 머리 엘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지, 진짜 없네?”
도리안도 깜짝 놀랐는지 본능적으로 본인의 배 주머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귀때기는 네놈이 저 인간들에게 감각이 쏠렸을 때 사라졌느니라.
라스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그 엘프… 귀신 같네.’
숙소 앞에 선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린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 짧은 틈을 노리고 도망을 치다니, 암살자로 자랐으면 살왕을 넘어 사신이라 불렸을 것 같았다.
-또 도박장에 갔겠지. 그 귀때기가 마계에 있었다면 도박의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이젠 너도 아는구나.’
-뻔하잖느냐.
웃음이 나왔다. 리메르의 행동 패턴은 눈치 없는 라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모양이다.
‘미리 돈을 빼놔서 다행이네.’
리메르가 몰래 챙겼던 금화 대부분을 회수해서 다행이었다.
그걸 그대로 가져갔다면 기껏 빨아먹은 신주오령의 돈을 도로 토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중독을 넘어서 머리가 깨진 수준이라니까.’
라온이 눈동자가 돌아간 리메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귀때기가 중요한 게 아니니라.
라스가 입구 앞에 선 사람들을 보며 눈매를 깊게 찌푸렸다.
-불안하느니라.
‘뭐가 불안해?’
-저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오늘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느니라!
‘그럴 일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라스가 먹고 싶다고 했던 랍스터와 족발 식당은 바로 이 근처다.
갑자기 전쟁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못 먹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용히 지나간 적이 없지 않았느냐!
‘마왕이 왜 그렇게 간땡이가 작아. 믿으라고.’
-끄으응, 네놈도 세상에 억까를 당해봐야 알 것이니라.
‘거창하기는.’
라온이 부르르 떠는 라스의 등을 툭툭 쳐주고 앞으로 나왔다.
“일단 들어가 보죠.”
“네에!”
엔시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이라는 것도 좀 그만 찍으시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엔시아는 도박장에서 나온 이후에도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손바닥 크기의 아티팩트에 어떻게 저 많은 종이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그만 찍어요!”
엔시아가 사진기를 내리며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지금의 라온 님은 자연광을 받아서 미모가 미쳐 날뛰고 있어요! 역시 조명보다는 자연광이 최고라니까! 개존잘이야.”
그녀는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피곤하네.’
희극제를 하루종일 상대하거나, 귀살창과 일합대결을 하는 것보다 엔시아와의 짧은 대화가 더 힘들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다.
‘이게 억까인가?’
-억까는 개뿔이! 본왕이 세상에 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건 장난 수준도 아니야!
‘그러냐.’
라온 고개를 저으며 숙소로 향했다. 문 앞에 대기하던 무인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돌아갔다.
“어?”
“금발적안?”
“오셨다!”
“라온 님이야!”
“백검룡!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인들은 눈동자에 선명한 빛을 띄운 채 달려왔다. 같은 곳에서 왔는지 복장이 비슷한 집단이 여럿이었다.
‘고수가 한 명씩 끼어있군.’
서른 내외 정도의 젊은 층은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수준이었고, 그들을 이끄는 중년인들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라온은 걸음을 멈추고,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트벤 가문에서 온 덤트칸이라고 합니다. 라온 님께 대련을 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온 님의 영웅담을 듣고 꼭 한번 검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흑탑의 층주 둘을 무찔렀다는 검을 견식하게 해주십시오!”
집단의 대표로 보이는 중년인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무력 수준이 높고, 대부분이 가주나 그와 비슷한 직위를 가졌기에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음….”
라온이 무인들의 정수리를 보며 턱을 바짝 당겼다.
‘대련 때문에 온 거였나.’
왜 이 구석에 있는 숙소에 모여있나 했더니, 이들 모두는 대련을 신청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았다.
본래 이런 축제에는 뛰어난 무인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적당한 수위의 대련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지금 대련을 청한 중년인들의 무력 수위도 마스터를 한참 넘어섰기에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왔어.
대련이 이루어진 이후 소문이 나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수야 있지만, 이렇게 한 번에 찾아온 게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귀살창은 이런 일에 힘쓸 양반이 아니니까. 희극제겠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밟히는 걸 좋아하는 변태인가?’
그 정도로 깨졌으면 자중할 때도 되었는데, 계속 술수를 만들다니, 희극제도 정상은 아니었다.
“희극제님이 보내신 겁니까?”
“알고 계셨군요!”
본인을 덤트칸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극제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이곳에 백검룡께서 계시다고 들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제게는 숙소가 구석이라 심심하실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혹시나 하고….”
다른 무인들도 덤트칸의 말에 동의하며 희극제가 보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라온은 무인들에게 잠시만 더 대기해달라고 말한 후 숙소로 들어갔다.
광풍대는 저택 밖에 있는 작은 연무장에 둥글게 모여있었다.
‘음?’
밖의 무인들에 관한 회의를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둘러싸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꽤 친한 사이 같았다.
‘쟤들이 친한 사람이 있었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연무장으로 향할 때 광풍대가 둘러싸고 있던 사람이 먼저 일어섰다.
붉은 꽃이 피어난 자주색 드레스가 가볍게 펄럭인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장미 안대가 햇살을 받아 더 어둑한 색을 드러냈다.
암시장주의 제자이자, 지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데닝로즈였다.
‘데닝로즈?’
라온이 데닝로즈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가문을 떠나기 전에 서신을 교환할 때도 아무 말이 없어서 그녀가 이곳에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백검룡을 뵈어요.”
데닝로즈가 드레스의 중단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라온이 데닝로즈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서신으로는 자주 뵈었잖아요.”
데닝로즈는 오랜만이라고 해서 아쉽다는 듯 눈매를 살짝 좁혔다.
“직접 뵌 건 일 년이 넘었으니까요.”
“제가 여기에 올 줄은 모르셨다는 표정이네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렇습니다.”
라온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곳일 테니까.’
백경은 암시장의 사업장과 영역을 빼앗아서 힘과 정보력을 키웠다.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는 법이죠.”
데닝로즈는 라온의 생각을 이해한 듯 연한 미소를 지었다.
“초대를 해주셨기에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그녀는 언젠가 백경은 이 초대를 후회할 거라며 치마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이쪽도 보통은 아니네.’
암시장에 초대장을 보낸 희극제도 미쳤지만, 그 초대장을 받고 찾아온 데닝로즈도 정상이 아니었다.
-음, 조금 서늘한데….
라스도 두 여자의 냉기를 느낀 듯 어깨를 떨었다.
“처음 뵙네요. 엔시아 님.”
데닝로즈가 라온의 옆에서 계속 사진을 찍는 엔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엔시아가 숙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사진기에서 눈을 뗐다.
“절 아시나요?”
“직업 특성상 요난 가문의 천재를 모르면 안 되거든요.”
“직업?”
그녀는 데닝로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분은 암시장주의 제자이신 데닝로즈 님입니다.”
라온이 중간에 끼어 있었기에 데닝로즈를 대신해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아! 그래서 직업 특성이라고 하신 거군요! 반가워요!”
엔시아는 외모만큼이나 시원하게 손을 내밀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데닝로즈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서 엔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녀가 사진기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전부터 무엇을 하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 이거요? 제가 개발한 사진기라는 아티팩트에요. 이렇게 사진이라는 걸 남길 수가 있죠.”
엔시아가 자랑을 하듯 라온이 찍힌 사진을 흔들며 직접 만든 사진기를 설명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였기에 금방 친해진 듯 구김살 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그 사진기라는 아티팩트를 만든 게 오직….”
“네. 존잘 라온 님 찍으려구요.”
“조, 존잘?”
“존나 잘생겼잖아요!”
“아….”
항상 침착하던 데닝로즈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조각상 같지 않아요? 어쩜 못나온 게 하나가 없어!”
엔시아는 자랑을 하듯 라온의 사진을 쭉 보여주었다.
“음, 확실히….”
당황하던 데닝로즈도 그건 인정한다는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진기라는 거 살 수 있나요?”
“이건 시제품이라, 제작 공정을 만드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재료도 부족하고.”
“그럼 이 사진은요?”
“관심있으세요?”
엔시아가 헤죽이며 데닝로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마디만 하면 그냥 드릴게요.”
“한 마디?”
“네!”
“어떤 말을….”
“간단해요. 존잘 라온이라고 외쳐주시기만 하면 되요.”
“어….”
데닝로즈가 입술을 떨었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광풍대에게 다가갔다.
“밖에 있는 무인들은 언제 왔어?”
“너 나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왔어.”
버렌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대답했다.
“꼭 짠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지.”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왔다고 말했다.
“점심도 안 먹고 저러고 있어.”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루난이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다 쫓아버리고 올까?”
마르타가 흉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누군가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평소 단순하게 사는 그녀도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주먹을 풀기 시작했다.
“흐음….”
라온이 숙소의 문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희극제의 생각이 보이는군.’
점심도 먹지 않은 채 한참 기다린 무인들의 대련을 거절한다면 속이 좁거나 겁을 먹었다는 소문을 낼 테고, 대련을 받아들인다면 이곳을 지켜보면서 지그하르트의 무학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
‘왜 이곳으로 숙소를 정했는지 알겠네.’
지금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이 머무는 숙소는 넓고 고급지지만, 담장이 낮아서 안을 살피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이 숙소를 배정해 준 것 같았다.
‘이제 희극제가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아.’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를 주고, 어느쪽을 선택해도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다. 매번 느끼지만 제일 고약한 경우였다.
‘다만….’
이번에도 실수를 저질렀네.
귀살창과의 대련을 통해서 의념에 대한 미약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걸 가벼운 대련을 통해 정리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그 상대들이 찾아와주었다. 희극제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내 무학은 보이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불의 고리를 통해서 무학 자체를 성장시키고 있기에 오늘의 경지와 내일의 경지가 다르다.
만약에 오늘 보여준 수준으로 자신의 무력을 판단한다면 누구든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라온이 광풍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쟤들도 시켜볼까?’
대련을 신청한 무인들의 제자들은 광풍대와 맞붙이면 딱 좋은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가주들과 싸우고, 광풍대는 함께 온 애들이랑 붙이면 딱이겠는데.’
자신과 광풍대 모두 경험과 무력을 쌓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이 정도로 도와주다니,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나?’
희극제는 복수를 위해서 여러 계획을 짰겠지만, 그녀의 술수는 오히려 광풍대에 도움만 되고 있었다.
-미치겠네. 왜 만나는 인간마다 호구짓을 해대는 건데!
라스가 이해할 수 없다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희극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네 말대로 여기가 호구들의 도시 같은데.’
라온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대련을 받아들인다고 전하려고 할 때 데닝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밖에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상급의 무학을 갈고 닦은 무인들이에요. 대련을 하신다면 작게나마 얻으실 게 있을 거예요.”
그녀는 이쪽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조언을 해주었다.
“백경 소속이 아니라서 편하게 상대하셔도 될 겁니다. 다만 대련하시면서 무학이 노출되는 게 걱정되신다면….”
데닝로즈가 드레스 밑단에서 바늘 몇 개를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진법을 설치해 드릴게요. 외부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그녀는 조금 심술을 부려야겠다며 고요하게 웃었다. 다만 그녀가 바늘을 꺼낸 드레스 밑단에는 엔시아가 찍었던 사진이 몇 장 끼워져 있었다.
‘…했구나. 존잘.’
라온이 땅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엔시아의 신도가 늘어나는 것 같다.
-네놈 신도 아니냐?
‘시끄러.’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78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저작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의 내용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