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63화 (463/653)

제463화

지그하르트의 외총관 일리운이 성벽 아래를 내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내 평생 이런 광경을 보고도 가만히 있게 될 줄은 몰랐군.”

지금 시선에 들어오는 건 지그하르트를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의 행렬이다.

저들이 칼을 들고 달려온다면 당장 뛰어 내려가서 밀어버리겠지만, 저 행렬에서는 자그마한 살기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그하르트에 닿는 게 목표인 듯한 의지만 고요하게 피어날 뿐이었다.

‘그래. 저럴 수밖에 없지.’

저들은 희극제의 추종자니까.

지금 가문으로 걸어오는 사람 중에 백경의 무인은 없었다.

저들 모두는 수하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지그하르트로 향하는 희극제의 영웅적인 행보에 감동하여 그녀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곳까지 쫓아왔을 뿐이었다.

‘저것들은 목 위에 달린 게 폼인 건가?’

저들은 눈에 뻔히 보이는 희극제의 수작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따라붙어서 찬양하고 있다.

왜 사이비 종교가 탄생하고 수많은 신도가 모여드는지 처음으로 알 것은 느낌이었다.

“쯧.”

일리운이 혀를 차며 뱀처럼 늘어진 행렬의 선두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채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키가 큰 여성이 보인다. 저자가 바로 희극제라 불리는 백경의 수장이었다.

‘대단하군.’

저 많은 이들을 제대로 조련했어.

미리 말을 해놓았는지 희극제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폭력적인 행위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그저 진심으로 따를 뿐이었다.

“지랄맞군.”

일리운이 성벽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음에 안 들어.’

지그하르트의 외총관은 성벽을 수호하고, 병력을 관리하는 장수와도 같은 자리다.

성격상 목숨을 건 싸움이 낫지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 체한 듯 속이 답답해졌다.

“후우….”

일리운이 밀려오는 짜증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추종자들의 행렬이 멈추고, 희극제라 불리는 여성만이 성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지?’

지금 추종자들이 멈춰선 장소는 정확히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려고 했던 곳이었다. 어떻게 알고 저기서 멈춰 섰는지 모르겠다.

등골에 스치는 불길함을 느끼는 순간 희극제가 정문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단아한 빛을 띤 흑발과 불꽃에 휩싸인 듯한 적안. 그 사이를 메우는 설원 같은 하얀 피부까지. 절세의 미녀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백경의 아리엘이라고 합니다.”

희극제는 정중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본명을 밝혔다.

“수하들의 일로 가주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담담한 음성으로 지그하르트에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오러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존재감이 드리운다. 이 성벽을 넘어 하늘에 닿을 듯했다.

신주오령 따위는 육황오마라는 고래 사이에 낀 새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툭툭.

일리운이 손가락으로 성벽을 두드렸다.

‘제일 고약한 경우로군.’

시건방을 떨거나, 당당하기만 했다면 상대하기 편했겠지만, 희극제는 예절 속에 당당함을 둘렀다. 건드리기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당장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가주님은 이미 희극제의 입장을 허가했으니까.

“문을 열어라!”

일리운의 짜증이 깃든 외침에 지그하르트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듯한 거대한 울림에 희극제의 추종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문 바로 앞에 선 희극제의 표정은 조금의 변하지 않았다.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이는 눈빛으로 열리는 문을 지켜보았다.

지그하르트의 정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희극제가 뒤를 돌았다. 그녀는 함께 이곳까지 와준 사람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는 저 혼자 가보겠습니다.”

희극제는 꼭 수하들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우오오오오오!”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라던 일을 이루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희극제 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수하분들을 꼭 구해오실 거라 믿습니다!”

사람들은 희극제를 찬양하며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외쳤다.

북방의 차디찬 바람 속에서 저런 반응이라니 꼭 세뇌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건 아니겠지.’

외부 정보원들은 희극제가 강압적인 언행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왔다.

저들 모두는 희극제의 굳건한 행보와 찬란한 외모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았다.

일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리운 외총관님.”

희극제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허리를 굽혀왔다.

목소리와 자세에 어린 기품 때문인지 먼저 숙이고 있음에도 이쪽이 밀리는 기분이었다.

“날 아시오?”

“지그하르트를 수호하는 사자를 모를 수 없지요.”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외총관 일리운이오.”

일리운이 짧게 고개를 까딱이고, 손을 들어 내부를 가리켰다.

“따라오시오. 가주전까지 안내해주겠소.”

“감사합니다.”

그는 뒤를 따라오는 희극제를 흘깃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 불편해.’

* * *

아리엘은 고고한 위엄이 서려 있는 지그하르트의 대로를 여유로운 행색으로 걸었다.

대로의 외곽에 일렬로 선 검사들이 위협하듯 서늘한 기세를 피워냈다. 개인의 무력이 꼬이고 꼬여 하나의 군기가 되어 압력을 보내왔지만, 미소만 나왔다.

‘읽었던 대로군.’

수많은 사람이 뒤를 따라온 것도, 지그하르트 외총관 일리운이 마중 나와 안내하는 것도,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위협적인 기세를 풍기는 것도 모두 알고 있던 대로였다.

‘빈틈이 없어.’

아리엘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바위처럼 굳건한 눈동자와 섬뜩한 검기를 휘감고 있었다. 실전과 수련 모두를 제대로 단련했다는 뜻. 하나같이 수준이 높았다.

‘대륙의 멍청이들은 이걸 모른다니까.’

얼마 전까지 지그하르트는 육황의 말석으로 취급받았다. 땅에 박힌 바위처럼 북쪽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가 대륙의 기록들을 갈아치우고, 글렌 지그하르트가 타천과 백혈교주를 동시에 깨부수며 다시 그 이름을 위로 올렸다.

‘우리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지.’

백경은 처음부터 지그하르트를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설정했다.

그 예측대로 주변에 선 검사들은 어디에 가서도 고수 소리를 들을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용담호혈. 그 단어 말고는 지그하르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후후.

아리엘이 입매를 가늘게 올렸다.

‘많은 것을 얻어서 갈 수 있겠어.’

본래 명성이라는 건 돈과 시간을 퍼부어도 얻기 힘든 법인데, 이번 사건을 통해 백경과 희극제라는 이름의 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특히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기에 두려움 따위는 없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아리엘은 검사들이 일으키는 기세를 바람을 탄 듯 즐기며 일리운의 옆으로 다가갔다.

“뛰어난 검사들이 많군요.”

“검가이니 당연한 일이지 않소.”

일리운이 눈동자를 돌렸다. 그는 검사들의 칭찬을 듣고서도, 노골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렇죠. 하지만 듣던 것 이상이에요. 대륙에서는 지그하르트를 육황에서 그리 높은 순위에 두지 않는데, 오늘 보니 그 순위를 모두 갈아치워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일리운은 아리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작 저런 칭찬을 들었다고 헤죽거릴 일도 없었지만, 그녀를 볼수록 이상하게 속이 거북했다.

‘이 여자 무언가 이상해.’

거대 세력의 수장 중에 정상이 몇 없다지만, 이 희극제라는 사람은 심했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수많은 검사들이 섬뜩한 기세와 눈빛을 보내고 있음에도 미소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에 집에 온 듯한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더 기이한 건 뒤에 있던 희극제를 신경 쓰다가 길이 살짝 틀어지면 오히려 그녀가 방향을 바꿔준다는 점이었다. 꼭 이곳에 자주 와본 사람처럼.

“후….”

일리운은 멀리 보이는 본관에 시선을 고정하며 낮은 숨을 뱉었다.

‘이거 쉽지 않겠어.’

* * *

라온은 알현실의 기둥 앞에 선 채로 눈을 내리감았다.

‘곧 오겠군.’

조금 전 희극제가 정문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외총관 일리운이 안내를 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대충 이미지는 잡히는데….’

혈운겸과 백랑도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것만으로 희극제가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지만, 직접 보고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특히 천기를 읽는 방식이 궁금….’

“저 녀석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라온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불평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진무전주 발데르가 짜증이 어린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주 이상만 올 수 있는 곳에 왜 부대주인 저게 있는 거냐고.”

그는 직접 말을 해보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진무전주님은 생각이 우리 집 기둥만큼이나 크시네요.”

라온이 입을 떼려고 할 때 리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기둥?”

“라온이 백랑도와 혈운겸을 직접 후려 패고 잡아 온 당사자인데, 여기 있어야지. 그럼 집에 보냅니까?”

그는 한심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크으….”

발데르는 짜증이 가득 돋아난 표정이지만, 반박하지 못하고 인상만 구겼다.

“아, 참고로 저희 집 기둥은 제가 술 먹고 부러뜨려서 딱 제 손가락만 해요. 전주님 지능이랑 비슷하겠죠?”

리메르가 본인의 새끼손가락을 가리키며 낄낄 웃었다.

“네놈이… 큭.”

발데르가 눈을 부라리며 리메르에게 다가가려다가 단상 위에 있던 글렌의 눈치를 보고 멈춰 섰다.

라온이 입매를 말아 올리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야. 딱 이게 철없는 인간의 표본이지.’

리메르처럼 남을 잘 골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딱 저 사람의 반만 따라 해도 오늘 깽판은 성공적일 것이다.

라온은 열이 바짝 오른 발데르를 지나 다른 전주들을 살폈다.

현무전주 데니어는 평소와 같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그 역시 희극제가 만든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

카룬은 말도 하지 않았고, 이쪽에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다만 그 무관심에서 살기보다 더한 악의가 느껴졌다.

라온이 손가락을 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적도 많군.’

데루스 로베르트와 오마 중 네 그리고 가문 내에도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삶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 생기겠….’

적이 하나 더 늘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알현실 밖에서 외총관 일리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총관입니다.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글렌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는 건조한 음성을 흘려 희극제의 입장을 허가했다.

“들어오라.”

그 말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갈라진다. 가주전이 뒤흔들리는 듯한 흔들림과 함께 문 앞에 서 있던 큰 키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온다. 이곳이 본인의 집이라도 되는 듯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걸음걸이였다.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들었다.

‘저자가 희극제인가.’

목을 살짝 스치는 단발이 달이 비치지 않는 밤하늘처럼 어둑했다. 가늘게 올라간 눈매 속 눈동자는 핏방울이 맺힌 듯 붉었고, 생기 있는 입술은 이슬과도 같은 청아함을 드러냈다.

인세에 드문 미모였지만, 시선을 끄는 건 그녀의 외모가 아니다. 존재감. 알현실의 강자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존재감이 놀라웠다.

글렌이 아니라면 지금 이곳에서 희극제의 존재감을 누를 사람이 거의 없어 보였다.

다른 이들도 그녀의 기운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역시 괴물이었군.’

라온이 중앙으로 걸어오는 희극제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깽판이 먹힐 가능성이 더 높아졌어.’

* * *

아리엘은 알현실 중앙으로 걸어가며 손끝을 떨었다.

‘역시 장난이 아니야.’

글렌 지그하르트. 북멸왕 혹은 북패왕이라 불리는 남자의 존재감은 그 이름 이상으로 거대했다.

살이 떨리는 위압. 백혈교주와 타천을 몰아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 그저 앉아만 있음에도 심장을 조이는 것 같은 묵직한 기운이 전신을 찍어 눌렀다.

‘예측 그 이상의 무력이지만 달라질 건 없지.’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끝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까.’

아리엘은 차분한 안색을 유지하며 단상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백경의 아리엘이 북방의 패왕을 뵙습니다.”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기 위해서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혔다.

“일어나시오.”

위에서 뚝 끊어질 듯한 글렌의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키며 글렌과 눈을 마주쳤다. 목소리 이상으로 냉랭한 눈빛. 세상을 굽어보는 패자의 위엄이 드러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리엘은 글렌의 패기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상보다 길이 멀고 험하여 조금 시간이….”

“뭔 개똥 같은 소리야.”

아리엘이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고 본론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귀에 속속 박히는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가 지발로 걸어와 놓고, 뭘 예상보다 늦어.”

“….”

아리엘이 억지로 표정을 유지한 채 뒤를 돌았다.

“어? 들렸어요?”

마성의 미모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금발적안의 미청년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왜 들리지?”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63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저작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의 내용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