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라온이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가주님. 여긴 어떻게….”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을 살피듯이 잠시 안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뜻 같았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인 후 벗어놓았던 겉옷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잠깐!
라스가 문 앞으로 떠올라서 동그란 주먹을 휘둘렀다.
-본왕과 약속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빨리 자겠다고!
녀석은 약속 좀 지키라며 인상을 구겼다.
‘미안한데….’
라온이 라스의 푸르딩딩한 머리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안 가면 앞으로 밥도 못 먹을 수도 있어. 너 평생 나딘빵만 먹고 싶어?’
-나, 나딘빵?
라스가 창문 밖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맞다! 저 영감. 나딘빵만 먹고 살잖아! 무얼 하는 것이냐! 당장 따라 나가라! 빵 주면 절대 먹지 말고!
녀석은 밉보여서는 안 된다며 빨리 쫓아가라고 외쳤다.
‘그래. 그래.’
라온이 옅게 웃으며 조용히 별관을 나섰다.
글렌은 뒷짐을 진 채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알현실 옥좌에 앉아 있을 때와는 눈빛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따라오거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별관 뒤편의 호수에 발을 얹었다. 북망산으로 향하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호수를 걸어갔다.
‘뭐지?’
고요하다. 글렌은 호수가 아니라, 단단한 땅을 걷는 듯 자그마한 물결도 일으키지 않았다. 자연 자체에 어우러진 것처럼 보였다.
“음….”
라온이 호수에 발을 올렸다. 물 위를 걷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글렌처럼 아무런 물결 없이 뜨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하신 거지?’
글렌은 의도 없이 그냥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 또한 가르침 같았기에 그의 움직임을 떠올려보았다.
‘흐름인가….’
글렌의 발끝은 멈춰 선 호수와 같은 흐름을 이뤘다. 아무래도 이 작은 호수의 흐름에 본인의 기운을 조화시킨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글렌과 렉타르 두 사람 다 세상에는 각자의 흐름이 있다고 말했었다.
바람에는 바람의 결이, 물에는 물의 결이 있으니, 그 흐름을 잘 파악하라고 조언해주었었다.
지금 글렌은 그 흐름을 이용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말 친절하시네.’
유아의 말대로 글렌은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이 보여주었던 물과 동화되는 듯한 걸음을 따라 걸었다.
차악.
아예 잔물결 자체를 지우지는 못했지만, 처음과 달리 물이 흔들리는 비중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글렌은 호수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북망산의 초입에 있는 공터에서 등을 돌렸다.
“가주님을 뵙습….”
“볼 때마다 인사할 필요 없다.”
글렌이 손을 저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달빛처럼 고요한 눈동자에 손끝이 떨렸다.
“네게 주지 못한 게 있어서 왔을 뿐이다.”
“주지 못한 것이라면….”
“넌 흑탑에 납치되었던 철전대와 인질들을 구하고, 백련대의 비리를 밝혔으며, 백경의 무인들을 사로잡아 정보까지 빼냈지.”
글렌은 별 감정이 없는 듯한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정도 일을 해낸 것치고 금패 하나는 너무 적다고 하더구나.”
그는 본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조언한 듯이 말하며, 추가적인 보상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살짝 입술을 깨물며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말해 보거라.”
“인질을 구한 건 저와 광풍대만이 아닙니다. 철전대가 결계에서 버티지 못했다면 단 한 사람도 살리지 못했을 겁니다.”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보라는 뜻 같았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제게 주실 보상을 철전대에 나누어서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드높였고, 앞으로도 높이 세울 수 있는 진짜 무인들입니다. 빨리 일으켜 세우고 싶습니다.”
알현실에 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흠.”
글렌은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입매가 가늘게 떨리는 듯 보였다.
“철전대는 네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합당한 상을 내렸으니까.”
“예?”
“상처를 회복하고, 육체와 단전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영약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무학서를 주었다. 녀석들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더 단단하게 굳어져서 나타날 것이다.”
“아….”
라온이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글렌이 챙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자신보다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니, 상관없다.”
글렌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다만 목소리와 달리 눈빛에 깃들어 있던 냉랭함이 한결 가신 듯 보였다.
“창궁검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간신히 초식만 익혔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검술서를 여러 번 읽었지만, 검술을 익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흑탑이나, 백경 놈들과 싸울 때는 사용하지 않은 건가?”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검술을 쓰는 건 바보짓이라 기존의 검술들만 사용했습니다.”
“그렇군.”
글렌이 그게 맞다는 듯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목소리에 어려 있던 냉기도 조금 가신 것 같았다.
“내가 네게 줄 상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네가 아이언드와 검투를 치르는 날까지. 자정부터 한 시간 동안 창궁검을 가르치겠다.”
“아….”
라온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대륙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초월자의 가르침을 받는데, 별 게 아니라니,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절대 얻을 수 없는 기연 중의 기연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렉타르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검술 수련은 미루는 거 아니셨습니까?”
“상황이 변했다. 그리고….”
글렌이 뒤를 돌아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곳에 없는 건 그의 문제가 아니더냐.”
그는 검귀가 이곳에 없는 게 잘못이라며 검이나 뽑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어찌 되었든….’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천검을 뽑았다.
“네가 무학서를 보고 그렸던 창궁검을 펼쳐보아라.”
“알겠습니다.”
천천히 심호흡한 뒤 속도나, 위력보다는 초식 하나하나의 완성도에 집중하며 창궁검을 펼쳤다.
“껍데기뿐이로구나.”
글렌이 실망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까지 네가 익혔던 검술들은 껍데기만 있어도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겠지만 창궁은 다르다.”
그가 지루하리만큼 느리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수도를 세운 채 하늘을 가리켰다.
쿠구구구구!
글렌의 손이 한 자루의 검처럼 보인다. 대륙장인들이 만든 명검 그 이상으로 날카로운 그의 수도가 달이 없는 어둑한 천공에 한 줄의 선을 그렸다.
찌지지지직!
먹구름이 갈라지고, 글렌의 눈동자 같은 붉은 달이 제 모습을 비친다. 눈앞에서 보고도 말이 나오지 않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상승의 무학에는 그에 따른 운용법이 있는 법. 깔끔한 초식에만 집중하려면 평생 기본 검술만 익히는 게 낫지.”
글렌은 설명을 하면서 수도로 창궁검을 펼쳐냈다. 그의 손짓에 하늘과 땅이 울부짖는다. 이 공간은 글렌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전에도 말했을 터다. 세계에는 각각의 흐름과 결이 있는 법이라고.”
“예.”
라온은 조금 전 글렌이 보여주었던 수중보행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쌓은 검력을 통해 하늘과 땅을. 네 공간을 지배하는 게 창궁검의 묘리다.”
글렌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자, 오싹하리만큼 예리한 기운으로 가득 찼던 기세가 물로 씻은 듯 사라졌다.
“할 수 있겠나?”
“…….”
떨리는 손으로 제천검을 고쳐 잡았다. 힘들다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다.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뇌광이 비치는 듯한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죽어도 따라가겠습니다.”
* * *
지그하르트 본관 의무대.
홀로 병실에 누워 있던 아이언드가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기랄….”
일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꼬이는 거지?
임무에 나가서 자그마한 활약도 못 했고, 멀린에게 습격받아서 부상을 입었으며, 라온의 고자질 때문에 쉬지도 못한 채 천검대에게 조사까지 받았다.
백련대 간부들이 나서서 단원들을 희생시킨 적 없다고 변명을 해주었지만, 평단원들의 증언 때문에 곱게 넘어가는 건 힘들어졌다.
‘그 망할 놈!’
이 모든 일은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이다.
그놈이 흑탑의 비밀을 풀고, 글렌에게 꼰지르지만 않았다면 이런 개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구구구구.
아이언드는 누워 있는 침상이 흔들리도록 말아 쥔 주먹을 떨었다.
‘절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대련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라온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이상해….’
그놈 대체 무슨 생각이지?
현재 자신의 경지는 그랜드 마스터의 벽 바로 앞에서 막혀 있다.
라온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들과는 격이 다른데, 당당히 대련을 신청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도 본인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금패를 두 개나 걸면서 검투를 신청한 걸 보면 나름 자신있다는 뜻인데.
‘놈은 바보가 아니니까.’
라온 지그하르트는 멍청이가 아니다.
상대를 농락하고 조롱하는 쪽에 있어서는 리메르 못지않은 놈이다.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검투를 신청한 게 분명했다.
‘어떤 짓을 하려고… 음?’
라온의 생각을 추측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시꺼먼 그림자가 졌다.
“너, 넌 뭐….”
“…….”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성이 침상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천검대주가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하니 대답만 하도록. 네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천검대 검사들에게 기척을 숨기고 이곳에 당도할 정도의 인간이 멍청하게 진짜 목소리를 알릴 이유가 없느니, 일부러 들려주는 게 분명했다.
“지금의 너는 라온 지그하르트를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무슨 개소리….”
“듣기만 하라고 했을 텐데.”
복면인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며 얇은 책자와 목갑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이, 이건 뭐야….”
“네가 라온을 확실하게 짓밟을 수 있게 만들어 줄 쐐기다.”
“음…..”
아이언드가 입맛을 다시며 책자를 들었다. 겉면에 백잠무결이라고 적혀 있었다.
“네 기운을 순간적으로 2배 이상 증폭시키는 무학이다. 그냥 사용한다면 내상을 입겠지만, 청영단이 네 육체를 보해줄 것이다.”
복면인이 목갑을 열어주었다. 청아한 영약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처, 청영단?”
마나회로와 단전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제일가는 영약 중 하나였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영약을 이렇게 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네가 할 일은 딱 하나. 라온 지그하르트의 단전을 부수거나, 오른팔을 잘라라. 그 두 가지에 네 무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는 대답을 묻듯이 지그시 시선을 내렸다.
“고작 그걸 위해서 청영단을 내어준다고?”
“생각보다 멍청하군. 라온 지그하르트가 널 꺾는 건 지금까지와 결이 다른 일이다.”
복면인의 음성에 비웃음이 묻어났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그 나이에 이루기 힘든 활약들을 했지만, 가문 내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앞에 나서지 않았고, 가문의 일에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임무만 수행했지. 하지만….”
그의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피어났다.
“라온이 널 꺾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놈은 백련대의 평검사들을 위해서 네게 검투를 신청했지. 만약 놈이 이긴다면 가문 내의 영향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될 것이다. 간부들도 놈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아….”
아이언드가 복면인의 말을 들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맞는 말이었다. 놈의 자신감에 대해서만 생각하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죽이지 말라는 이유를 알겠군.”
눈앞의 복면인은 라온을 죽이는 게 아니라, 몰락시키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직계가 아닌 그 누구도 가문의 위에 올라갈 수 없도록.
“하나 더. 내가 온 일은….”
“나도 바보는 아니다.”
“…….”
복면인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이 원하는 건 이뤄질 것이다.”
“…믿도록 하지.”
주인이라고 말했음에도 복면인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바람이 불었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복면인은 사라졌고, 창문이 아주 작게 열려 있었다.
“지금은 너희의 뜻대로 따라주지. 다만….”
아이언드는 책과 영약을 챙기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앞으로는 라온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해야 할 거야.”
* * *
라온이 제천검이 하늘을 겨눴다.
은빛 칼날에 맺힌 상서로운 기운을 따라 잔잔했던 호수에 웅장한 파동이 일어났다.
거대하면서도 묵직한 검세에 호수의 바닥이 갈라지고, 허공으로 물방울들이 떠올랐다.
후우우우웅!
제천검의 흐름에 호응하듯 검극을 따라 휘날린 물방울들이 푸른 용오름이 되어 까뭇한 밤하늘까지 치솟았다.
라온이 검무를 추듯 자연스레 제천검을 휘돌리자, 솟아오르던 물방울들이 비가 되어 내려와 다시 호수를 이뤘다.
차랑.
파랑을 일으켰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하게 가라앉아 고요하게 세상을 비췄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제천검을 내렸다.
‘역시 쉽지 않네.’
창궁검으로 하늘을 이루는 게 아니라, 고작 호수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자연에 자신의 의지를 담는 건 어렵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음….”
라온이 고개를 돌려서 호수 밖에 있는 글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내린 채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실망하신 건가.’
2주일이 지났어도 제대로 창궁검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 듯 그의 표정을 좋지 않았다.
다만 라온의 생각과 달리 글렌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글렌은 어깨를 늘어뜨린 라온을 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느라 필사적이었다.
‘저 녀석 정말 천재인가?’
아니, 천재라는 단어로도 설명이 안 돼!
창궁검은 초상승의 검술. 그저 무학의 묘리만 담는 것으로 큰 효과를 내는 검술들과 달리 자연에 녹아들어야만 제힘을 이룰 수 있는 진짜 무학이다.
아무리 라온이라고 해도 년 단위 수련을 해야 반석에 오르리라 생각했지만, 저 아이는 고작 2주 만에 감을 잡고 물속에 본인의 의지를 녹이고 있었다.
‘가르칠 맛이 나는군.’
라온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분석하고 계산한다. 리메르가 놔주지 않고 잡아서 키우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격도 기특하고.’
저 정도 재능이면 건방져지거나, 나태해져도 이해가 될 텐데, 훈련생이상으로 성실했다.
냉정할 때는 냉정하고, 따스할 때는 따스하다. 손자라서가 아니라, 어디에 가서도 정점에 설 수 있는 재능과 성품이었다.
‘아이언드와 붙을 때쯤이면 초식 하나는 이룰 수 있겠군.’
글렌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닥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짓누르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라온.”
“예.”
라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2주 뒤에 이뤄질 검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냐는 게 무슨 뜻인지….”
“역시 모르나.”
글렌이 의문이 담긴 라온의 눈을 보며 턱을 주억거렸다.
“너는 그저 아이언드를 쓰러뜨리고, 그에게 피해를 입은 검사들을 해방시킬 생각만 했겠지?”
“…그렇습니다.”
라온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있긴 하지만….’
데루스 로베르트와 전생의 자신이 생각나서 나선 것도 있지만, 그건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어리구나.”
“예?”
“지그하르트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이루는 건 평검사들이다. 입김이 강한 건 간부들이지만, 그 여론을 만드는 건 간부가 아닌 검사들이다.”
글렌이 달이 비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평범한 이들을 위해 강자라 할 수 있는 아이언드에게 검을 겨눴다. 거기서 만약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
“그래. 평범한 이들이 네 힘이 되어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까지 너를 응원하기만 했던 검사들이 너를 따르기 시작할 것이다. 즉, 네게 가문 내의 영향력이 생기게 되는 거지.”
그가 눈을 내리감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았다.
“훗날이 되겠지만, 네가 바라던 실비아의 직계 승급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음….”
라온이 신음을 흘렸다. 당연히 영향이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글렌이 직접 집어 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꽤 큰일을 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예전에도 했던 질문이지.”
글렌이 고요하게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휘감겼던 허무함이 녹아내리고, 묘한 열기가 그 공간을 채웠다.
“네 길은 이 가문의 정상을 향해 있느냐.”
라온은 처음 보는 듯한 글렌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455화
지 은 이 글개미
발 행 처 다온크리에이티브
기획 / 편집 / 제작 김태현
표 지 알터
ISBN 979-11-6730-123-9 (05810)
ⓒ2021, 글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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