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53화 (453/653)
  • 제453화

    아이언드는 라온에게 눈동자를 돌리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저놈 대체 뭐지?'

    라온이 알현실에 들어왔다고 해도 보고 중에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며칠 전만 해도 검사들의 처우를 생각하라며 자신에 못지않은 기세와 존재감을 드러내던 괴물 녀석이 가주에게 꼬치꼬치 고자질하는 모습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갑자기 유아퇴행이라도 왔냐고!’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노년의 무인보다 더 차분하고, 침착했던 놈이 갑자기 5살로 돌아가서 형이 과자를 빼앗아 먹었다고 부모에 이르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지금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빌어먹을….’

    보고한 이후에 끼어들었으면 적당한 핑계라도 댔을 텐데.

    보고를 끝낸 후에 라온이 끼어들었다면 생각을 정리해서 어떻게든 도망칠 구멍을 만들었겠지만, 보고 중에 놈의 고자질이 벌어졌기에 당황하여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준비해놨던 토대들이 물거품처럼 녹아버렸다.

    ‘아니, 제일 이상한 건….’

    저 둘이야.

    아이언드가 당상 위로 슬쩍 시선을 올렸다. 글렌과 셰릴의 섬뜩한 눈동자를 보며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왜 안 막은 거지?’

    지그하르트의 왕이나 다름없는 글렌에게 보고하는 중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버릇이 없다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직계들도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글렌과 셰릴은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더 말하라는 듯 입까지 다물었었다.

    처음 보는 상황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이언드.”

    글렌의 입에서 오싹하리만큼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아이언드는 닭살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부대주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이지?”

    “그, 그게….”

    전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조금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아예 다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라온이 기막을 뚫고 자신의 음성을 퍼뜨린 것 때문에 증인이 너무 많았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간 더 위험해질 것이다.

    “제가 몸을 숨겼던 나무는 그 근처에서 가장 큰 곳이었습니다. 위치는 별로였지만, 혹여나 다른 적이 나타났을 때 확실한 역습을 가할 수 있어서….”

    “어쩐지 이상했어.”

    셰릴이 아이언드의 말을 끊으며 턱을 모로 틀었다.

    “백련대가 꾸준히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간 사상자가 너무 많았지. 특히 부상을 입은 검사는 다음 임무에서 거의 죽더라고.”

    그녀가 입매를 비틀며 아이언드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지? 실전에서 약한 검사들을 죽이고, 더 재능 있고 도움이 되는 아이들을 새로 받으려고?”

    “절대 아닙니다!”

    아이언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저와 백련대는 지그하르트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린 게 전부입니다. 이번 일은 광풍부대주와 의견 대립을 하면서 일어난 약간의 오해에 불과합니다!”

    아이언드는 머리로 바닥을 치며 절대 아니라고 외쳤다.

    “믿어 주십시오!”

    이번 임무와 달리 셰릴의 말에 증거는 없다. 분위기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우겨야 했다.

    ‘절대 인정해서는 안 돼.’

    * * *

    라온은 머리를 박은 채 믿어 달라 외치는 아이언드를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연기 한번 잘하는군.’

    딱 한 번의 임무를 같이 했음에도 알 수 있다.

    아이언드는 가문의 검사들을 본인이 위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놈의 눈에 사람은 도움이 되는 자와 되지 않는 자로만 나누어져 있을 것이다.

    ‘저런 놈은 어딜 가도 있네.’

    데루스 로베르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라 자연스럽게 분노가 타올랐다.

    ‘그냥 놔둘 수는 없지.’

    라온이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 아이언드의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백련대 검사들을 가리켰다.

    “음….”

    셰릴은 그 손가락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련대에 묻지.”

    그녀가 아이언드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생각은 어때? 백련대주가 너희를 소모품으로 여긴다고 생각한 적 없어?”

    “아닙니다!”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대주님을 그런 짓을 할 분이 절대 아닙니다.”

    아이언드가 각을 잡고 키우던 백련대의 조장과 부조장들은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평대원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거기 맨 뒤.”

    셰릴은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듯 가장 뒤에 있는 검사들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너희가 말해 봐. 아이언드가 일부러 검사들을 사지에 밀어 넣은 거 본 적 없어?”

    “…….”

    백련대 검사들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 예전에 중상을 입은 동기를 구할 여유가 있었음에도 대주님이 그냥 놔두고 가라는 말을 하,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와 제 후임이 마법에 직격당해서 심한 부상을 입었었는데, 저는 운 좋게 살았지만, 그 녀석은 방치되다가 그만….”

    “작년에 저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봇물이 터진 듯 아이언드가 행했던 비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온이 울분을 토하는 검사들을 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뚝을 무너뜨렸던 게 효과가 있었군.’

    얼마 전 아이언드가 속내를 밝힐 때 기막을 뚫어서 소리를 퍼뜨렸던 게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당시에 충격을 받아서 눈빛이 흔들렸던 검사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아이언드는 수하들이 직접 입을 열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턱을 잘게 떨었다.

    “이, 이건 아닙니다! 분명 이상한 꾐에….”

    “닥쳐.”

    셰릴이 검집을 매만지며 인상을 구겼다.

    “구제가 안 되는 쓰레기였네.”

    그녀는 당장 검을 뽑고 싶은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 오해입니다!”

    아이언드가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임무 수행 중에 모두를 살피는 건 불가능한 일….”

    “아이언드.”

    그가 절대 아니라고 외칠 때 글렌이 옥좌에서 등을 떼며 냉랭한 음성을 흘렸다.

    “아, 예!”

    백련대주가 아니라, 본래의 이름이 호명되자, 아이언드는 손가락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문의 검사들은 네가 밟고 올라갈 계단이 아니다.”

    글렌의 목소리는 가뭄이 찾아온 것처럼 건조했다. 거대한 알현실 전체가 냉랭하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끄읍….”

    아이언드는 글렌의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목을 부여잡은 채 눈에 핏발을 세웠다.

    툭툭.

    글렌은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섬뜩한 눈동자로 아이언드를 굽어보며 손가락으로 옥좌를 두드렸다.

    “지금 이 시간부로 백련대의 활동을 중지한다. 천검대주는 그간 백련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조사한 후 보고하도록. 처벌은 그 이후에 정하겠다.”

    “예!”

    셰릴이 맡겨만 달라는 듯 팔을 걷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주님! 저는 가주님이 걸으셨던 혹한의 길을 따라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저 당신의 뒤에 서기 위해서….”

    아이언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글렌의 이름을 외쳤다.

    “…….”

    다만 글렌은 조금 전처럼 사나운 기세를 일으키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감았다.

    라온이 눈을 감은 글렌을 보며 뺨을 쓸어내렸다.

    ‘예전 일이 마음에 걸리시는 건가?’

    실비아와 주디엘에게 듣기로 글렌 역시 예전에 힘을 추구하다가 마에 빠져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신경 쓰지 않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 그는 그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쁘지.’

    글렌의 냉정했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최근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이언드가 글렌을 따라 했다는 말에 짜증이 돋아났다.

    “상황이 다 끝났으면 저도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알현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 돌아갔다.

    “제가 이번 일을 만들었으니, 끝도 제가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뭐?”

    셰릴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

    “그간 쌓아놓은 공이 월등하기 때문에 백련대주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대주의 직위에서 내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맞는지 셰릴과 글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되면 지금 백련대주의 죄를 밝힌 저 검사들에게 부조리가 가해질 수도 있죠.”

    라온이 아이언드의 잘못을 고한 백련대 검사들을 가리켰다.

    “그러니 백련대주와 검투를 치러서 그를 백련대에서 아예 쫓아내고 싶습니다.”

    “음….”

    “오?”

    그 말에 글렌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셰릴이 입을 떡 벌렸다.

    글렌과 셰릴이 벌을 내린다고 쳐도 아이언드가 대주의 자리에서 내려올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년간의 활동 정지. 혹은 근신이나 정직 같은 징계가 내려올 것이다.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도 없고, 다른 검사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에 그를 땅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싶었다.

    ‘데루스와 닮았으니까.’

    아이언드는 사람을 물건처럼 이용해먹는 데루스 로베르트와 닮았기에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거기다….’

    좋은 수련 대상이기도 하지.

    아이언드의 무력은 마스터 최상급. 그것도 그랜드 마스터의 벽에 닿아 있는 상태다.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가도 그랜드 마스터가 될 고수였기에 좋은 대련 상대였다.

    “검투라면 너도 걸어야 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셰릴이 검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조건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도 같은 걸 걸겠습니다. 제가 진다면 부대주 직을 내려놓고 광풍대를 떠나겠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아이언드의 죗값을 대신 치를 금패도 2개 내놓도록 하죠.”

    “라온?”

    셰릴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글렌은 아이언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언드. 어떻게 하겠느냐.”

    “바,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언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회복해야 하니, 한 달 뒤에 검투를 진행하겠다.”

    글렌은 조사는 진행하되 징계는 검투 이후로 미루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셰릴이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믿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다 따라오도록.”

    그녀는 백련대에게 손짓을 하며 알현실을 떠났다.

    “크읍….”

    아이언드는 두고 보자는 듯 시퍼런 살의가 피어오르는 눈으로 라온을 노려보다가 셰릴의 뒤를 따라갔다.

    ‘계획대로 됐네.’

    글렌과 셰릴에게 고자질을 할 때는 조금 민망했지만, 일이 생각한대로 풀려서 다행이었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알현실 떠나기 위해서 글렌에게 인사를 하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언드를 이길 자신은 있느냐.”

    시선을 들어 올리자, 글렌이 살짝 비틀어진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예.”

    라온은 글렌의 눈을 마주하며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최강의 검사에게 검을 배웠습니다. 저런 가짜 무인에게 질 일은 없습니다.”

    “커흠.”

    글렌은 대답을 듣자마자 입에 손을 얹으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감은 좋구나.”

    그가 딱딱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뺨이 옅은 홍조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글렌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잡아온 이들에게 심문은 해보았느냐?”

    “지금부터 하려고 합니다.”

    “알겠다. 기다리도록 하지.”

    글렌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라온은 글렌에게 정중한 예를 차리고서 알현실을 나섰다.

    쿠우웅.

    글렌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로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나?”

    “예?”

    “라온이 내게 대륙 최강의 검사라 말했네. 내게 배웠으니 질 수가 없다는군! 자신감이 기특해!”

    그는 입꼬리를 천장까지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저 녀석 무학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었어.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네.”

    “허허허.”

    “저 아이에겐 위에 설 수 있는 재능이 있어. 리메르. 그 멍청이의 말이 맞았군.”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로엔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라온이 배운 대륙 최강의 검사라 칭해질 사람이 글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라온 도련님이 백련대주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실력 차이가 조금 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꼭 무언가 믿는 게 있는 것처럼 평소와 다른 들떠 있는 미소를 그렸다.

    “그보다 심문은 제대로 못 하겠지?”

    “예.”

    로엔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문은 훈련을 하거나, 전투를 치르는 것과는 다르죠. 독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라온이 서 있던 기둥 앞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백랑도와 혈운겸 모두 독기가 가득해서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글렌이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지켜보다가 적당히 나서주게.”

    “알겠습니다.”

    * * *

    라온은 가주전을 나온 후 바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감옥을 지키던 검사들은 문을 열어준 뒤 혈운겸과 백랑도가 갇혀 있는 독방까지 안내해주었다.

    마비된 혈운겸과 백랑도를 질질 끌고 심문실로 데리고 갔다.

    “안색이 좋은 걸 보니 잘 먹고 잘 잤나 보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혈운겸과 백랑도의 마비를 풀어주었다.

    오러를 운용할 수 없기에 두 사람은 몸을 움직이게 되었음에도 공격해오지 않고 미간만 구겼다.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

    “그래. 아는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어!”

    백랑도와 혈운겸은 심문에 버티기로 결정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그럼.”

    라온이 가볍게 웃으며 다시 두 사람을 마비시켰다.

    “말하지 마. 나도 안 들을 테니까.”

    양손가락에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를 휘감아 백랑도와 혈운겸의 마나회로에 꽂아 넣었다.

    뿌드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백랑도와 혈운겸이 바닥에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끄으읍….”

    “커헉….”

    두 사람은 조금 전 당당하게 말했던 것과 다르게 고통에 질려서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여전히 잘 통하는군.’

    지금 사용한 건 그림자들의 심문 기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선한 고문법이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만이 아니라, 수천 마리의 개미가 살을 물어뜯는 듯한 가려움증까지 일으켜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버틸 수가 없다.

    ‘거기다 만화공과 글래시아 덕분에 추위와 더위까지 느끼게 됐지.’

    고통과 가려움 그리고 더위와 추위까지 한 번에 몰아치기에 저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고문이 아니었다.

    라온은 정말 그 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글렌에게 받았던 창궁검의 무학서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심문실 안에서는 백랑도와 혈운겸의 신음과 책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 * *

    라온은 저물었던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창궁검의 무학서만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읽을수록 새롭네.”

    창궁검은 지금까지 얻었던 무학서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무학을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이 보였다.

    아무래도 다른 무학서처럼 다 보고 태울 게 아니라, 꾸준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끄어어….”

    “아흑….”

    좌측에서 들린 신음에 고개를 돌렸다. 백랑도와 혈운겸은 죄수복이 전부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흐….”

    “으으윽….”

    두 사람은 얼굴에 핏줄이 가득 돋아 오른 채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어제 당당하게 입을 다물 거라 선언했던 모습과는 천지차이였다.

    ‘역시 못 버티네.’

    무인이기 때문에 고통에는 적응했겠지만, 살을 파먹히는 듯한 가려움은 이기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좀 연해졌군.’

    라온은 기가 확실하게 죽은 백랑도와 혈운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도….’

    한숨을 내쉬며 우측 어깨를 보았다.

    -끄으으….

    라스가 태양 아래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어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느니라.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냐!

    ‘너 아직 맛도 못 골랐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가면 또 다르느니라! 일단 좀 가자고!

    녀석은 저것들은 놔두고 빨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며 징징거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라온은 창궁검의 무학서를 덮고 일어서서 백랑도와 혈운겸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그 둘과 눈을 마주쳤다.

    “흐윽….”

    “아….”

    혈운겸은 물론이고, 백랑도까지 고통에 질린 듯 핏발이 선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둘 다 제발 말만 걸어달라는 표정이었다.

    라온은 먼저 혈운겸의 굳어진 입을 풀어주었다.

    “커허억!”

    그가 거센 비명을 터트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 물어보십시오. 무엇이든….”

    혈운겸은 아무거나 말하라는 듯 말을 높이며 고개를 숙였다.

    “희극제가 너희를 그 호수로 보낸 이유는 뭐지?”

    “흑탑의 마인들이 얼음 호수에 나올 때 그들의 상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인질로 잡힌 이들이 얼마나 살아남는지도 확인하고, 마기의 뭉치의 크기도 확인하라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희극제에게 받은 지시에 대해 말해주었다.

    “희극제는 그 호수에 흑탑의 마인과 철전대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저 받은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

    “그럼 희극제가 흑탑과 관계가 있나?”

    “그,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혈운겸은 본인은 희극제에게 명령만 받는 입장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를 볼 때 거짓은 아니었다.

    “그런가.”

    아무래도 지위가 낮아서 거기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 백랑도의 억제를 풀었다.

    “허어어억….”

    백랑도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턱을 떨었다.

    “너는 왜 호수에 온 거지?”

    “그, 그분께서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가라고 하셔서….”

    “그분이 희극제인가?”

    “그, 그렇다.”

    그는 희극제가 이상한 일이 생길 것 같다며 혈운겸을 데리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희극제는 문제가 생길 걸 어떻게 안 거지?”

    “그분은 하늘을 읽는다. 모르는 게 없으신 분이야….”

    여전히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백랑도는 이 와중에도 희극제에 대한 존경이 남은 것 같았다.

    ‘천기를 읽는다는 게 진짜인가.’

    인간이 하늘의 흐름을 본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이 정도라면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럼 희극제와 흑탑의 관계는?”

    “…없다.”

    백랑도는 혈운겸과 다르게 확실하게 흑탑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의 어투로 볼 때 무언가가 더 있는 건 분명해보였다.

    “그럼 다른 오마와는?”

    라온이 백랑도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안구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것도 없다.”

    백랑도는 입매를 꾹 다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을 지옥에 가뒀던 열기와 냉기가 스멀스멀 타올랐다.

    “이번에는 이틀이다. 내일모레 찾아오지.”

    “자, 잠깐!”

    다시 고문을 시작하려고 할 때 백랑도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과, 관계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본 게 있다.”

    “뭐지?”

    “투, 투구를 쓴 자와 함께 계신 걸 보았다!”

    “투구? 어떤 투구.”

    백랑도가 입술을 깨물며 핏발이 선 눈을 들어 올렸다.

    “용. 드래곤의 모습을 한 투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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