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라온이 가주전 앞에 도착했을 때 백련대가 본관을 가로질러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패잔병 같네.”
도리안의 말대로 백련대는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처럼 걸음에 힘이 없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지고 온 것 같다고.”
도리안이 옆으로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음? 잠깐….”
라온이 백련대의 모습을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진짜 얻어맞은 건가?’
제대로 살펴보니, 백련대 검사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누구와 싸운 거지?’
그곳에 더 이상 적은 없었을 텐데.
흑탑과 백경 모두 처리했는데, 대체 어떤 적과 싸웠는지 추측이 되질 않았다.
“어?”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백련대를 보다가 눈매를 찡그렸다.
‘아이언드까지 당했다고?’
아이언드도 심하게 당한 듯 머리와 얼굴의 반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고, 우측 어깨부터 허리까지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가 백련대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지, 진짜 다쳤는데요?”
도리안도 이제 저들의 부상이 진짜인 것을 알아차리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탑의 본대와 싸우기라도 한 건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백련대는 광풍대보다 조금 더 강하다.
어딜 가도 강자라 불릴 이들이 저렇게 깨졌다는 게 신기했다.
‘근데 왜 한 명도 죽지 않았지?’
이상하게도 모두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은 이들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기묘한 상황이었다.
호피른 지역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이언드가 가주전 앞으로 다가왔다.
“으음….”
아이언드는 이쪽을 노려보며 손으로 구긴 종이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라온이 아이언드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며 턱을 살짝 들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숨바꼭질을 하고 계시던데, 누구에게 잡히기라도 하셨나 보네요?”
백랑도와 싸울 때 그가 끝까지 나오지 않고 숨어 있던 것을 비꼬며 입매를 가늘게 말아 올렸다.
“…알 것 없다.”
아이언드는 이를 바득 갈고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백련대는 민망한 듯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그 뒤를 따라갔다.
“흐음….”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백련대의 뒤에 따라붙었다. 얇게 기막을 펼쳐서 앞서가는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가자.”
“어, 어딜 가요?”
도리안이 기겁하면서 소매를 붙잡았다.
“저놈들이 제대로 보고를 하는지 확인해야지.”
“가주님 앞인데 알아서 잘하겠죠.”
“아니야. 대놓고 거짓말을 뱉을 눈이었어.”
라온은 도리안을 질질 끌며 백련대의 뒤를 쫓았다.
-한심하군.
라스가 어깨를 세차게 두드렸다.
-복수는 허망한 것이니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
‘…그게 분노의 군주라는 놈이 할 말이야?’
마왕이라는 놈이 복수를 재촉하기는커녕 하지 말라고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아이스크림이 고프기는 한 모양이다.
다만 지금이 아니라면 아이언드의 얼굴이 망가지는 것을 보기 힘들기에 꼭 따라가야 했다.
-제발! 아이스크림 매장 문 닫는단 말이다!
‘그럼 내일 2세트.’
-콜이니라! 복수는 당연히 꼭 해야지! 암! 마왕의 복수는 100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느니라!
라스가 환호를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 여덟 개를 고를 수 있는 거지. 일단 민트초코만 4개를 고르고, 이달의 맛 하나에 초코와 딸기, 파인애플 맛까지 고르면…. 좀 부족한데?
‘…….’
이젠 저놈 진짜 질린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백련대를 따라 알현실 앞에 섰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아이언드가 다가가자마자, 문이 열리고 로엔이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로엔은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했고, 아이언드가 그에게 고개를 숙인 후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련대가 모두 들어간 후 로엔이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그에게 다가갔다.
“광풍부대주님?”
로엔은 놀라지는 않았지만,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어쩐 일로….”
“광풍대와 백련대가 같은 임무를 맡았으니, 당연히 저도 참여해야죠.”
라온은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당당하게 나갔다.
“허허허.”
로엔이 가는 웃음을 흘리며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 단상 위 옥좌를 올려보았다. 글렌이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죠.”
로엔이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로엔에게 인사를 한 뒤 평소 보고를 할 때 대기하던 간부들처럼 기둥 앞에서 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오늘 보고의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도리안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치며 직각이 되도록 허리를 굽혔다.
“음….”
글렌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네가 왜 여기에….”
아이언드는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보고 시작하시죠.”
라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옥좌를 가리켰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아이언드와 백련대 검사들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들의 떨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라온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언드.”
글렌이 서늘한 눈빛으로 무릎을 꿇은 아이언드와 백련대 검사들을 굽어보았다.
“백련대는 흑탑이나, 백경과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 모습은 뭐지?”
그는 패잔병 그 자체가 된 듯한 백련대를 훑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게 사실….”
아이언드가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흑탑이 아니라, 에덴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에덴?”
“예. 에덴의 머, 멀린이 갑작스럽게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는 멀린의 이름을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린?’
라온은 멀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거기에 있었다고?’
백련대가 우연히 멀린과 부딪칠 확률은 극히 낮다.
자신을 따라온 멀린이 아이언드의 언행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먼저 공격한 게 분명했다.
-그, 그 변태 스토커가 거기에 있었다고?
라스도 경악스러웠던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마 아이스크림 생각을 하느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잠깐.”
글렌의 뒤에 서 있던 셰릴이 손을 들어 올렸다.
“멀린의 실력은 내가 잘 알아. 지금도 계속 마력과 마법 경지가 늘고 있는 괴물이지.”
셰릴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가늘게 내렸다.
“그 미치광이가 기습했는데, 어떻게 한 명도 죽지 않은 거지?”
아이언드가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 * *
아이언드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백련대와 함께 호피른 지역을 떠났다.
‘그 건방진 놈. 본인이 한 말이 있으니 대결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가문으로 복귀한 후 바로 라온에게 검투를 신청한다는 계획을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밤이 찾아온 듯 하늘이 어둑해졌다.
“음?”
고개를 들어 올리니, 검게 물든 먹구름 아래 노파의 가면을 쓴 괴인이 떠 있었다.
“머, 멀린!”
에덴의 멀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검을 뽑았지만, 그녀는 공격해 오지 않고, 허공에서 꽃잎을 따고 있었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아아아!”
멀린은 잎이 다 떨어진 꽃을 던지며 환호를 질렀다.
“이러면 2대 2니까. 어쩔 수 없어. 딱 죽기 직전에 끝낼게. 너는 그이를 위한 먹이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녀가 죽기 직전에 끝낸다는 말을 했을 때 먹구름 속에서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우우우웅!
마법진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지며 가지각색의 마법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개진!”
“개진!”
아이언드의 지시에 백련대가 재빠르게 방어형 검진을 펼쳤다.
찌지지직!
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급박하게 운용한 검진이라 멀린의 마법은 송곳이 종이를 뚫어버리듯 검진의 흐름을 가볍게 깨부숴버렸다.
“빌어먹을!”
아이언드가 이를 악물며 강기의 막을 펼쳐냈음에도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멀린의 마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쿠구구구궁!
무너진 오러의 벽 위로 다양한 속성의 마법이 터지며 검진 내부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끄아아아악!”
“커헉!”
“으으윽….”
백련대 검사들은 폭발하는 마법에 진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 미친 마녀가!”
아이언드는 쓰러진 수하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육체에 강기를 두른 채 뒤로 물러섰다.
“응. 마녀 맞아. 미친 것도 맞고.”
멀린이 낄낄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뒤에 떠 있던 마법진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며 장대한 빛을 뿜어냈다.
콰과과과과!
마법진에서 더 두껍고, 진한 마나를 휘감은 마법진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윽!”
아이언드가 도망치려고 했지만, 멀린의 마법들은 눈이 달린 것처럼 오직 그에게만 따라붙었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유도 기능이 있으니까.”
멀린이 어깨춤을 추며 헤죽 웃었다.
“제기랄!”
아이언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시퍼런 오러가 타오르는 검으로 거대한 화염구를 갈라버렸다.
촤아아악!
백련대의 주인답게 그의 검술은 현묘한 흐름을 이루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법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하지만 멀린의 마법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마력이 무한한 것처럼 계속해서 강기 수준의 마법을 내리꽂았다.
“끄으으윽!”
아이언드가 신음을 흘렸다. 오러가 동이 나면서 강기의 방패가 뭉개지고, 맨몸 위로 마법이 터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화염구를 맞은 오른쪽 어깨에 심한 화상을 일어났고, 냉기의 창이 꽂힌 왼쪽 어깨에는 동상이 돋아났다.
연달아 떨어지는 마법의 충격에 내상까지 입어서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 멀었어.”
멀린은 자신을 죽일 수 있음에도 본 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의 마법만 사용해서 고통과 충격만을 주었다.
“끄으으윽….”
아이언드가 검을 땅에 박은 채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 죽여라.”
오러와 체력이 바닥이라 무엇도 할 수 없었지만, 멀린은 아직 건재했다.
너무도 큰 실력 차이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의 마법이 투명하게 변했다.
퍼버버버벅!
멀린은 마나를 응집시켜 주먹 크기로 만든 뒤에 자신의 육체를 샌드백처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동시에 열 곳 이상의 타격이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끝없는 고통에 머리가 멍해졌다.
“커어어억!”
아이언드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나서야 마나의 뭉치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조, 조롱하지 말고 죽여라!”
그가 이를 악물며 죽이라 말했지만,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반만 죽인 거 맞겠지?”
멀린은 들뜬 미소를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작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허….”
아이언드는 다시 맑아져 오는 하늘을 보며 피를 토했다.
“이게 대체 뭐야….”
* * *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이언드는 수하들을 놓고 도망치려 했다는 것과 멀린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반반? 그게 무슨 의미지?”
글렌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언드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맞네.”
셰릴이 느릿하게 턱을 주억였다.
“미친 짓 하는 거 보니까. 그 광녀가 맞아.”
그녀는 멀린이라면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라온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과 부딪친 아이언드를 죽이려고 꽃잎 점을 친 것 같았다.
반반이라고 했으니, 죽인다와 놔둔다가 똑같이 나와서 딱 반만 죽이고 떠난 것 같았다.
얼음 동굴에 들어온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적에게 농락당한 뒤 패했음에도 면목 없이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언드는 글렌에게 죽여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백련대 검사들도 그처럼 허리를 굽혔다.
“일어나라.”
글렌이 나지막한 음성을 흘리며 손가락 마디를 까딱였다.
“적에게 농락당하고 패했다면 너와 네 수하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실력을 키워라. 그게 위에 서는 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이언드가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전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저는 수색 임무를 받고….”
그가 차려 자세로 서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두 호수의 탐색을 끝냈을 때 광풍대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아이언드의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그는 조용히 넘어가자는 듯한 눈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두 대는 한 번도 손을 맞춘 적이 없기에 각자 움직이기로 하고….”
“그거 아닌데.”
라온은 경쾌한 목소리로 아이언드의 말을 끊어버렸다.
“분명 함께 움직이자고 하셨잖습니까.”
“무, 무슨 소리냐. 너와 나는 따로….”
“그건 그 이후죠. 함께 움직이되 검사를 한 명씩 나눠서 퍼뜨리자고 말씀하셨잖아요.”
“으음….”
그걸 그새 까먹었냐고 말하자, 아이언드가 대답하지 못하고 손끝을 떨었다.
“검사를 한 명씩 움직이게 만들어서 미끼로 던지자는 말도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도 들었지?”
라온이 팔꿈치로 옆에 선 도리안을 찔렀다.
“끄읍, 그, 그랬죠!”
도리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
셰릴의 눈동자 위로 서늘한 기운이 피어났다.
“음….”
글렌도 미끼라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미끼를 말하는 거지?”
“미끼가 아니라….”
“그곳은 이미 철전대가 납치된 곳이었기에 한 명씩 움직이면 적에게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백련대주님은 오히려 그게 좋다고, 적에게 당하면 위치를 추측할 수 있다고 하셨었습니다. 약해빠진 수하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셨죠.”
라온이 웃음기가 섞인 음성으로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아이언드….”
셰릴이 죽일 듯 미간을 구기며 아이언드를 노려보았다.
“아, 아닙니다. 충분히 구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철전대가 납치된 지 많은 시간이 지나서 빨리 구하기 위해….”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호피른 지역이 얼마나 넓은데요, 백련대와 철전대 둘이서는 감당 못 합니다.”
아이언드는 다급하게 손을 저을 때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일단… 계속해봐라.”
글렌은 보고가 다 끝난 이후에 따져보자는 듯 계속하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 알겠습니다. 광풍대와 따로 움직이기로 한 뒤 저희는 바로 마을 쪽으로 향했는데….”
“그것도 아닌데.”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제가 알아차린 실마리가 있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안 듣고 가셨지 않습니까.”
“무, 무슨 소리냐!”
“얼음 호수 쪽에서 인기척을 느껴서 함께 포위하자고 제안하려 했는데,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말을 하면서 아이언드의 바로 뒤에 있는 백련대 부대주를 가리켰다.
“부대주님도 들었지 않습니까?”
“그게….”
부대주는 답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지만, 그걸로 대답이 되었다.
고오오오!
셰릴은 한계 이상으로 짜증이 돋은 듯 붉어진 눈동자로 아이언드를 노려보았다.
글렌만 없었다면 당장 검을 뽑을 기세였다.
“다음.”
글렌의 음성에도 냉랭함이 차올랐다.
“그, 그 이후에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얼음 호수에서 마기가 터져 나온 것을 확인하고, 달려갔습니다. 다만 그때는 모든 일이 다 끝나서….”
“그것도 아닌데.”
라온은 아이언드를 놀리듯 차분하게 손을 들었다.
“나무 위에 숨어서 저와 백랑도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셨잖습니까.”
“그건 혹시 모른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백랑도나 혈운겸이 도망을 치거나 다른 놈들이 왔을 때를 위해서….”
아이언드도 이번에는 미리 생각을 정리한 듯 핑계를 내놓았다.
다만 그건 빈틈이 송송 뚫려 있는 이유였다.
“그건 말이 안 돼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주님이 숨어 있던 나무는 길목이 막혀 있는 방향에 있었죠.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쪽으로는 도망 안 갑니다. 만약 다른 놈들이 온다고 해도 그 먼 곳에서 도움을 주려다간 한참 늦죠.”
“그, 그게… 헉!”
아이언드가 억지로 변명하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아….”
글렌과 셰릴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안색이 노랗게 질려갔다.
라온은 리메르와 닮은 얄미운 미소를 그리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좋네.’
저게 보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