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라온은 가주전을 나온 후 뒤를 돌았다. 글렌에게 받은 은패를 소중하게 안은 채 따라오는 광풍대를 보며 손뼉을 쳤다.
“그간 고생 많았다.”
광풍대는 흑탑의 마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뒤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부상을 입은 철전대와 인질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전투를 치를 때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썼기에 여러모로 지쳤을 것이다.
“내일부터 나흘간 휴식하도록.”
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도 바닥을 쳤을 테니, 모두에게 휴가를 주었다.
“우오오!”
“훈련이 정신이 나갈 정도로 빡세지만, 휴식을 줄 때는 또 시원하게 준다니까!”
“이래서 부대주님을 미워할 수가 없지.”
“그럼 그럼.”
광풍대 검사들은 휴가 동안 무엇을 할지를 이야기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검병을 움켜쥐었다.
‘저 녀석들….’
라온은 얇은 아지랑이가 타오르는 듯한 조장들의 눈동자를 살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휴식 대신 훈련을 할 셈인가.’
저들은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기 전에 마스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의 다짐이 진심이었는지 휴식을 취하거나, 논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없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할 생각이네.’
아무도 저들에게 약하다고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게 대견했다.
라온은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알아서 수련하리라 믿고 등을 돌렸다.
그대로 별관으로 가려 할 때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이 다가왔다.
“너희에게 목숨을 빚지게 되었군. 이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갚도록 하겠다.”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은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몸을 숙였다.
“그런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일어나는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에게 고맙다면 최대한 빨리 복귀하십시오. 우리 광풍대의 라이벌이 멈춰 있으면 쪽팔리니까.”
그 말에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은 내가 했던….”
“맞습니다. 아리안 가문에 와서 저희를 구해주었을 때 해주셨던 말이죠.”
라온이 흔들리는 트레빈의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 아니, 우리의 생각도 그와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은 말을 이어갔다.
“지그하르트에서 같은 뜻으로 검을 잡았는데, 목숨의 빚 따위는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전처럼 저희의 옆에서 함께 검을 들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라온은 트레빈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별관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였을 뿐이야.”
“빨리 복귀해.”
“저희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르타, 루난, 버렌도 철전대 검사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나중에 또 붙어봐야죠.”
“복귀 늦으면 우리 등도 못 볼 겁니다. 빨리 돌아오세요.”
“우리 라이벌은 철전대 밖에 없어요. 사실 친한 것도 그쪽밖에 없고….”
광풍대 검사들도 철전대 검사들에게 한마디씩 하고서 가주전 앞을 떠났다.
“…….”
철전대 검사들은 광풍대가 떠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가주전의 앞에 서 있었다.
“후우….”
트레빈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참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빨리 일어서야겠군.”
그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슬픔이 차올라 있던 그의 눈동자에 붉은 활력이 돋아났다.
“그래야죠.”
“우리를 기다리는 녀석들이 있으니까.”
“먼저 가는 꼴은 못 보지.”
철전대 검사들도 미소를 지으며 트레빈이 바라보는 석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트레빈이 차분하게 뒤를 돌았다.
“가자.”
그는 기운을 되찾은 철전대 검사들을 한 명씩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을 보내줄 준비를 해야지.”
* * *
라온이 별관의 현관 앞에 섰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지 저택 밖으로 입맛을 돋우는 요리들의 향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흐읍!
라스가 고무줄처럼 허리를 쭉 늘려서 창문 앞으로 날아갔다.
-오오! 파스타에, 스테이크, 립까지 있느니라! 거, 거기다….
‘거기다?’
-전부 파인애플이 들어갔느니라! 이런 경사가 있다니!
라스는 냄새만으로 요리의 종류만이 아니라, 그 안에 파인애플이 들어간 것도 알아차렸다. 정신 나간 후각이었다.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들어가서 식탁 앞에 앉아라! 요리 다 식느니라!
‘진짜 극단적이라니까.’
분노의 군주라는 놈이 싸움에는 별 관심도 없다가 음식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
어떻게 마왕이 됐고, 왜 하필 분노의 속성을 얻은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후….”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별관의 문을 열었다.
“어?”
큼지막한 바구니에 요리 재료를 들고 가던 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
유아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현관으로 달려왔다.
“철전대 아저씨들 데리고 오신 거예요?”
그녀는 이번에 함께 가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바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래.”
못 돌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그 부분을 말할 필요는 없기에 잔잔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
유아는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았는지 입가에 매달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어?”
“도련님이 오셨어?”
“라온 도련님!”
도련님 소리를 들은 시녀들이 발에 불이 나도록 현관으로 뛰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어요?”
“일은 잘 끝난 거죠?”
실종되었던 철전대를 구출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녀들은 걱정이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난 괜찮아.”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과하게 다가오면 짜증이 날 텐데, 가족이기 때문일까. 가슴에 기분 좋은 따스함이 피어났다.
“동료를 구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
실비아가 위층에서 내려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라온. 정말 고생 많았어.”
그녀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어깨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햇볕에 바짝 말린 이불에 누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 느껴졌다.
“외총관님이 네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는 걸 알려주셔서 모두 힘내서 저녁을 준비했어. 빨리 씻고 와.”
실비아는 오늘 고급 재료가 잔뜩 들어와서 정말 맛있을 거라며 웃음을 흘렸다.
“알겠어요.”
라온은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로 가려고 하는데, 라스가 실비아를 위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야. 안 오고 뭐 하는….’
-이 모든 게 본왕을 위한 것이라고?
라스는 본인을 위한 음식이라고 생각한 듯 실비아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
저게 진짜 미쳤나….
* * *
라온은 실비아와 시녀들이 차려준 저녁을 거하게 먹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크으으!
라스가 탄성을 흘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게 집이고, 이게 사는 거지. 어머니의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침대에 누우니 극락이니라.
녀석은 마왕 주제에 극락이라는 단어를 쓰며 활짝 웃었다.
‘너희 집도 아니고, 너희 엄마도 아니거든.’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큰 문제가 있느니라.
라스가 침대에서 목을 까딱 올리며 낮은 음성을 흘렸다.
‘뭔데?’
갑자기 녀석의 눈빛이 진지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슬 아이스크림을 네 개만 고를 수가 없느니라! 미치고 팔짝 뛰겠느니라!
‘….’
라스는 아직도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 한 세트만 더 먹어주면 안 되는 것이냐? 33개 중에 고작 4개만 고르는 건 너무 가혹하느니라!
‘싫어!’
라온은 달라붙는 라스를 손등으로 쳐내고 고개를 저었다.
하도 고민을 하기에 한 세트 더 사주려고 했지만, 지금 던진 낚시에 기분이 확 떨어졌다.
-이 치사한 놈! 그게 얼마나 한다고….
‘응. 너보다 비싸.’
-끄으으응….
라스와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디엘의 신호였기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
주디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차분하게 무릎을 꿇은 뒤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백경하고 부딪쳤다고 하던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별문제 없었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무력도 보통이 아니지만, 생각 이상으로 주인에게 충직한 놈들이더군.”
혈운겸과 백랑도의 무력도 놀라웠지만, 그 둘은 이곳까지 잡혀오면서도 백경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다.
모래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단단한 조직인 것 같았다.
“나가 계시는 동안 신주오령에 대해서 조금 더 조사를 해봤습니다.”
주디엘은 혹시 몰라서 백경에 대해 알아봤다고 읊조렸다.
“백경의 수장은 아시다시피 희극제입니다. 그녀는 암시장과 비슷한 수준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잠깐.”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주디엘의 입에서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녀? 희극제가 여자였어?”
“네. 여성입니다. 겉보기에는 30 정도로 보인다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한참 위겠죠.”
주디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하자면 백경의 진짜 힘은 무력이 아니라, 정보력입니다.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전해지죠.”
“암시장 같은 방식인가?”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희극제가 천기를 읽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천기?”
“네. 하늘의 흐름을 읽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는 의미죠.”
주디엘이 은은한 달빛이 아롱져 떨어지는 밤하늘을 가리켰다.
“희극제의 미래 예지가 꽤 잘 맞아서 그녀를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혈운겸, 백랑도와 싸울 때 놈들은 이런 일은 예상에 없었다고 중얼거렸었다.
놈들이 얼음 호수 속에 흑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희극제의 예지 능력 때문인 것 같았다.
“그게 정말이라면 무서운 능력이로군.”
라온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능력만이 아니라, 희극제의 위엄과 지도력 때문에 이름난 무인들이 백경에 많이 속해있다고 합니다. 그랜드 마스터를 둘 이상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희극제의 무력 수위는?”
“밝혀진 바 없습니다.”
주디엘은 그건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랜드 마스터를 데리고 있을 정도이니, 그 이상이라는 건 확실했다.
“백경은 신주오령에서도 움직임을 예측하기 힘든 곳입니다. 상대할 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도움이 됐어.”
내일 밤부터 혈운겸과 백랑도에게 정보를 빼내야 하는데, 주디엘 덕분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번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구해오는 그녀는 복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 전 이만.”
주디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음….”
라온은 주디엘이 나간 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동생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군.’
그녀는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인지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무겁게 다가왔다.
‘꼭 찾아줘야겠지.’
주디엘의 동생을 찾는 것도 꼭 이뤄야 할 목표 중 하나였다.
암시장에서도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중무전주 카룬과 정면에서 부딪치더라도 정보를 빼내야 한다.
“그래. 어떻게든….”
라온이 다짐을 되새긴 후 짐을 풀고 있을 때 라스가 머리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 알겠군!
‘뭐가?’
-네놈도 별거 못 얻었다고 본왕에게 화풀이하는 게 분명 하느니라!
‘별거 못 얻어?’
-그렇느니라. 기껏 애들 구해서 왔는데 고작 똥색 패 하나만 받지 않았느냐.
라스는 보상을 제대로 못 받아서 아이스크림을 안 사주는 거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금패만으로도 생각 이상의 수확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거짓말 마라! 네놈처럼 치사한 놈이 거지 같은 보상에 좋아할 리가 없….
녀석이 고개를 저을 때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진혼검에서 거센 진동이 일어났다.
우우우우웅!
고고한 검명과 함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혼검이 마기를 모두 흡수했습니다.]
[진혼검이 정화한 마기를 당신에게 바칩니다.]
진혼검이 다른 음의 기운을 흡수할 때마다 나왔던 메시지였다.
-어억….
라스는 지금 저런 메시지가 뜰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입을 떡 벌렸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요기적응>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능력치만이 아니라, 특성의 등급도 두 개나 올라갔다. 피로가 묻어 있는 전신에서 새로운 활력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진혼검의 특성 <마법 요혈>의 수준이 상승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진혼검의 특성의 수준도 올라가 버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높은 경지에 서 있는 적들을 연달아 쓰러뜨렸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설화의 감각>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특성 <독 저항력>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이번에는 진혼검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주는 보상이었다.
-아억….
라스의 눈동자가 곧 터져버릴 것처럼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뭐가 이렇게 많은 건데!
녀석은 말이 안 된다고 외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솜사탕이 만들어질 때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고맙다. 라스.”
라온이 덜덜 떨리는 라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 네 입은 천국의 문이라니까. 네가 말만 하면 저절로 보상이 튀어나온단 말이지. 더 해줄 말 없어?”
-닥쳐어어어!
* * *
다음 날.
라온은 홀로 5연무장에 나가서 새벽부터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반복해서 운용했다.
그는 해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검을 내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적응이 됐네.”
능력치와 특성이 한 번에 많이 올라서 지금의 육체에 적응하기 위해 검술 수련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만족스럽게 몸이 움직여졌다.
라온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육체만큼은 그랜드 마스터를 넘은 듯한데.’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면 환골탈태의 과정이 일어나서 본인의 무학에 가장 적합한 육체로 변한다고 하는데, 지금 자신은 라스의 시스템 덕분에 환골탈태의 과정을 겪지 않고도 더 뛰어난 육체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사기는 사기라니까..’
-크으윽, 그게 고마우면 아이스크림 좀 먹으라고! 하루종일 땡볕에 서 있느라 죽을 것 같았느니라!
라스는 당장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뛰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뭐 약속을 지키긴 해야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천검을 납검했다.
라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혈운겸과 백랑도에게 고문. 아니, 심문하러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맛은 골랐어?’
-그게….
라스가 동그란 손을 비비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딱 하나만 더 고르게 해주면 안 되는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고를 수가 없느니라! 맛이 너무 많아!
녀석은 딱 하나만 고르면 모를까 4개를 선택하는 건 죄악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죄악 자체인 놈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하나만 사주면 되겠네.’
-이 악귀 같은 놈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나갔다.
‘두 세트 정도는 더 사줘도 되겠지.’
보상을 떠나서 이번 임무에는 라스의 도움이 컸다. 2세트가 아니라, 20세트도 사줄 수 있었다.
연무장을 나와 상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갈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입에 과자 가루를 묻히고 있는 도리안이었다.
“부대주님!”
“뭐가 그리 급해.”
“지, 지금 백련대가 복귀하고 있어요.”
“백련대?”
“네. 정문 근처에서 노가리까고 있었는데, 돌아와서 가주전으로 가더라구요!”
도리안은 백련대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슨 패잔병처럼 걸음에 힘이 없던데요. 옷도 넝마 같았고.”
“그래?”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지금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갈 때가 아니네.’
백련대가 가주전으로 가고 있다고 했으니, 따라붙어서 놈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이기적인 짓을 했는지를 글렌에게 알려주어야 할 때였다.
-얌마!
라온이 백련대를 어떻게 조질지 생각하며 본관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스크림 집 문 닫는다아아아! 약속 좀 지켜! 이 망할 악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