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50화 (450/653)
  • 제450화

    라온은 광풍대, 철전대를 이끌고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알현실의 위압감 넘치는 철문은 드물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로엔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어. 역시 믿음을 배신하지 않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셰릴이 손을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시죠.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사람은 대견하다는 듯 평소보다 진한 웃음을 흘리며 알현실 안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셰릴과 로엔에게 마주 인사를 하고서 알현실로 들어갔다.

    다림질한 듯 말끔하게 깔린 카펫을 밟으며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오마와 신주오령 때문에 대륙 전체가 시끄럽기 때문인지 전주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이전에 비해 대주와 단주의 숫자도 적었다.

    -어어?

    라스가 알현실을 둘러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파티가 아니지 않느냐! 이 거짓말쟁이 놈이!

    ‘말했잖아. 파티지만 네가 먹을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라온이 라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젠장! 구슬 아이스크림 세트를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다시 골라야 하지 않느냐!

    녀석은 구슬 아이스크림 세트의 맛을 다시 골라야 한다면 민트초코와 파인애플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라온은 라스를 밀어내고 단상 앞에서 서서 고개를 들었다.

    글렌은 옥좌에 등을 파묻은 채 냉랭함이 깃든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글렌의 붉은 눈동자 안에서 옅은 빛이 반짝였다. 철전대를 구해서 돌아온 건 그에게도 기쁜 일인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담백한 음성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광풍대와 철전대 검사들의 힘이 깃든 외침이 들려왔다.

    “광풍대. 철전대 수색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임무 완수에 대해 말했다. 글렌의 굳게 닫혀 있던 입매가 가늘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일어나라.”

    글렌은 조금 전 떨림이 착각이라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는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을 살피며 가늘게 눈썹을 내렸다.

    “철전대주.”

    “예. 가주님.”

    트레빈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토벌 임무를 마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보고하지 않고, 바로 복귀했기 때문에 글렌만이 아니라, 다른 간부들 역시 사정이 궁금한 듯 트레빈을 바라보았다.

    “임무 완수 보고를 한 뒤 가문으로 복귀하는 길에 얼어붙은 호수에 빠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무학 자체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구출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갑자기 빙판에서 시꺼먼 기류가 튀어나와 저희 모두를 마기로 이루어진 이면 세계에 빠뜨렸습니다. 그 이후에….”

    트레빈은 어떻게 흑탑의 함정에 빠지고, 그 결계 안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를 담담한 음성으로 말해주었다.

    “잘 견뎠구나.”

    글렌은 트레빈의 눈동자에 맺힌 울분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트레빈은 죄송하다는 말을 비명처럼 외치며 허리를 굽혔다.

    “제가 나약하여 많은 대원들을 잃었습니다. 지그하르트의 대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참고 있던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며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검을 잡은 이상 이 세계에서 약한 건 죄다.”

    글렌이 턱을 괴고 있던 왼손을 내리고 가라앉은 눈으로 트레빈을 바라보았다.

    “허나 스스로가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법이지.”

    그는 얼굴이 빨갛게 물든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을 차례로 살피며 턱을 들어 올렸다.

    “강해져라. 너희들의 약함 때문에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무력과 정신을 갈고 닦아라. 그게 사자들을 위한 길이며 위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해지겠습니다!”

    철전대 검사들은 가주전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대답을 터트렸다.

    “비연회주에게 말을 해놓았으니, 철전대주가 전사자들을 챙겨주도록.”

    “알겠습니다.”

    트레빈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짧은 한숨에 쓰린 감정을 뱉고서 뒤로 물러났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라온의 이름을 호명했다.

    “예.”

    라온이 담담하게 대답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마인들이 빙판의 내면에 결계를 설치한 것을 어떻게 발견했지?”

    “철전대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곳이 두 호수 사이였기 때문에 그 장소부터 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색을 하는 중에 얼어붙은 호수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찾아가 보니, 백경의 무인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압하여 정보를 듣고, 빙판의 마기를 찾아서….”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에 관한 건 숨긴 채로 혈운겸을 제압한 뒤 간신히 마기의 흔적을 찾고,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싸운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결계에서 나온 이후에는 백랑도가 시비를 걸어와서 그를 쓰러뜨린 후 백경의 무인들과 함께 제압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뒤편에서 광풍대에게 묶여 있는 혈운겸과 백랑도를 가리켰다.

    “백경이라….”

    글렌의 시선이 백랑도를 향했다.

    “건방지군.”

    “끄으윽….”

    기세도, 오러도 없는 시선을 보냈을 뿐인데, 백랑도와 혈운겸은 숨이 끊어질 듯한 신음을 흘리며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백경? 미친놈들이네.”

    “감히 우리의 영역에서 저런 개잡짓을 해대다니….”

    “가주님!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당장 저놈들의 목을 들고 백경을 찾아가야 합니다!”

    간부들은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듯 사나운 기세를 일으켰다.

    그 기세에 노출된 백경의 무인들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글렌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살기를 불태우던 간부들이 기세를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다시 라온에게 시선을 돌리며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그럼 네가 층주인 마륜과 빙향을 베고, 저기 있는 백랑도까지 꺾었다는 것이냐.”

    “운이 좋았습니다.”

    라온은 담백하게 답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운? 하나면 모를까. 마스터 최상급 수준 세 명을 연달아 꺾는 것은 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렌의 목소리는 책을 읽는 듯 건조했다. 그래서 띄워주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저 배우고, 익힌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라온이 글렌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렉타르의 가르침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다는 의미를 담은 인사였다.

    “그런가.”

    글렌은 인사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륜, 빙향에 이어서 백랑도까지 꺾다니, 대단하긴 하네….”

    “그것도 마륜, 빙향은 마기로 가득 찬 결계에서 잡은 거잖아.”

    “허어, 나도 그 셋하고 연속으로 싸우면 질 거 같은데….”

    “이젠 정말 괴물이라고 밖에 못 부르겠네.”

    “20살에 마스터 최상급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원….”

    “선택식 때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대에 끌고 왔어야 했는데!”

    백경의 무인들에게 향했던 간부들의 관심이 다시 라온에게 돌아갔다.

    몇몇 직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간부들이 대단한 업적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박수를 보내주었다.

    “저 말이 맞다. 마기로 이루어진 결계 속에서 흑탑의 마인들과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글렌은 간부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에 손을 가볍게 내렸다.

    “광풍대들 또한 모두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라온과 광풍대가 깊게 허리를 굽혔다. 글렌에게 칭찬받았기 때문일까. 검사들의 얼굴에 뜨거운 홍조가 피어났다.

    “철전대와 인질들을 구해온 건 분명 훌륭한 성과다. 다만.”

    글렌이 냉랭한 눈동자로 라온을 굽어보았다.

    “광풍부대주는 본래 동료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보상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었지.”

    “어?”

    “그, 그런 말을 했다고….”

    “라온 님….”

    “저 사람은 정말.”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은 라온이 보상 따위는 필요 없다는 말을 했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과 감격이 동시에 피어난 눈동자를 떨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나?”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을 받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정말 트레빈과 철전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아무 상관 없었다.

    -구슬 아이스크림!

    파티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하여 늘어졌던 라스가 개구리처럼 펄떡 뛰어올랐다.

    -구슬 아이스크림으로 별관을 모두 채워달라고 말해라!

    ‘가만히 좀 있어.’

    어린 고양이처럼 손과 발을 버둥거리며 산더미 같은 아이스크림을 요구하는 라스를 쳐내고, 입을 다물었다.

    “너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는다.”

    글렌이 지루하리만큼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동료를 위기에서 구해왔는데,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지그하르트를 욕하겠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셰릴이 옆으로 붙으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왔는데,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어야죠.”

    “철전대만이 아니라, 인질을 살리고, 백경의 버러지들까지 잡아왔잖습니까.”

    다른 간부들도 동의한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트레빈 때문인지 직계들도 투정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역시나 그렇군.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대기하던 로엔이 넓은 판을 들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철전대와 인질을 구해온 광풍부대주 라온 지그하르트에게는 금패를, 광풍대에게는 은패를 수여한다.”

    그는 한 명씩 올라오라는 듯 라온에게 먼저 손짓을 했다.

    “예.”

    라온이 그 손짓을 보고 단상 위로 올라가 글렌의 앞에 섰다.

    “너를 보내는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구나. 수고했다.”

    글렌은 철전대가 복귀한 것이 기쁜지 직접 금패를 내려주며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금패를 받으며 글렌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이전과 달리 부상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직접 말했던 게 있었고, 보상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미소를 지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 1조 조장 마르타 지그하르트.”

    글렌은 라온을 시작으로 조장들과 조원들 모두에게 패를 나누어 준 뒤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스했던 분위기가 녹아내리고, 섬뜩하리만큼 거대하고 고고한 기세를 타올랐다.

    “모두 알다시피 오마 중 넷이 활동을 시작했다. 남은 하나도 곧 문을 열고 움직이겠지.”

    그는 지금도 다른 검사들이 외부에 나가 오마와 싸우고 있다며 서늘한 눈동자를 빛냈다.

    “이젠 참을 필요 없다. 오마를 만난다면 문답무용으로 목을 베어라. 특히 흑탑과 에덴은 끝까지 쫓아가서 씨를 말려버리도록. 내가 허락하겠다.”

    글렌은 앞으로 오마와는 대화를 할 필요도 없다며 모조리 베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예!”

    간부들은 지그하르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어깨 위로 장인이 다듬은 칼날 같은 아릿한 기파가 솟구쳤다.

    “모두 돌아가라.”

    글렌은 오늘의 행사가 끝났다며 다시 옥좌에 앉아서 손을 휘휘 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간부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서 알현실을 빠져나갔지만, 라온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느냐?”

    “저들은 제가 심문해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혈운겸과 백랑도를 가리켰다.

    “제가 잡았으니, 심문도 직접 하고 싶습니다.”

    “자신 있느냐?”

    글렌은 네가 정말 할 수 있겠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예. 믿어주십시오.”

    지금의 삶이 아니라, 전생의 암살자의 삶에서 배운 것을 이용한다면 저 둘의 입을 여는 것쯤은 간단했다.

    “그래. 검사라고 정당하고, 고귀한 일만 할 필요는 없지.”

    글렌이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시작해보거라.”

    “감사합니다.”

    라온은 예를 다하여 허리를 굽힌 후 알현실을 떠났다.

    쿠구구구궁!

    글렌은 알현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낮은 숨을 내쉬며 옥좌에 등을 기댔다.

    “대단하네요.”

    천검대주 셰릴이 글렌을 올려다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륜과 빙향 그리고 저 백랑도까지. 하나같이 쉽지 않은 상대를 모조리 꺾다니 예상 이상의 발전이에요.”

    그녀는 라온의 재능을 알고 있었음에도 놀랐다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허허허, 저도 저 수준까지 올라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그랜드 마스터의 벽에 닿지도 않으셨을 텐데….”

    로엔도 라온이 서 있던 자리를 스쳐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효과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스승이 중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바뀔 줄은 몰랐어요.”

    셰릴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흠!”

    글렌이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스승이 뛰어난 게 아니라, 제자가 뛰어난 것이야!”

    그는 본인과 렉타르가 잘 가르친 게 아니라, 라온이 잘 배운 거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그런가요.”

    로엔과 셰릴은 눈동자를 굴리는 글렌을 바라보며 보드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셰릴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턱을 틀었다.

    “라온에 대한 보상을 금패 하나로 끝내실 건 아니죠?”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답을 해주듯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아니,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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