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9화 (449/653)

제449화

“나참….”

버렌은 눈을 까뒤집은 채 정신을 잃은 백랑도를 멍하니 응시했다.

‘백랑도라는 무인이 저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닌데….’

백랑도 던커른은 20여 년 전부터 천재 도객으로 대륙에 이름을 알린 무인이다.

수많은 전장과 전쟁을 치르며 실력을 갈고 닦은 그가 아들뻘인 라온에게 패해서 이빨이 뽑힌 채 기절하는 꼴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후….”

짧게 숨을 고르며 라온을 보았다. 그는 흑탑의 층주 둘과 백랑도를 제압하고서도 아직 여유가 있는 듯 가볍게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녀석은 정말 멈추질 않는군.’

본래 무학은 위로 올라갈수록 난해하고 어려운 법이다.

익스퍼트 최상급에만 올라가도 성장세가 둔해지는 게 느껴지는데, 저놈에게 그 당연한 이론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스터에 오르고서도 익스퍼트처럼 성장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라온은 20살이 되기 전에 마스터에 오른 뒤 20살의 후반인 지금 마스터 최상급에 도달했다.

그것도 간신히 벽을 넘은 게 아니라, 같은 수준의 무인 셋을 압도할 정도의 절대적인 무력과 정신력을 지녔다.

불가사의. 지금 라온의 무력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하아….”

마르타가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괴물 자식 또 위로 갔어.”

아리안 가문에서 몸을 비틀며 싸울 때와 격이 다른 무력이다.

오러나 육체가 강해진 게 아니라, 검술의 차원이 한 단계 상승한 느낌. 가주님과 검귀 님께 배웠다던 그 지랄 맞은 검술 훈련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끼어드는 건데.

라온이 가주님과 검귀 님께 수련을 받기 시작하는 날부터 함께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그녀는 인상을 구겼다.

“이대로는 안 돼.”

“음?”

“뭐?”

얇게 튀는 목소리에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시선을 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예상과 달리 나무늘보처럼 느릿하게 말하는 루난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맹한 눈이 아니라,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라온을 못 쫓아가.”

루난은 라온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매를 꾹 내렸다.

“이 둔탱아. 너 아직도 저 괴물을 따라잡는 거 포기 안 했어?”

마르타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우리는 익스퍼트 최상급이고, 저 괴물은 마스터 최상급이야. 우리도 나름 천재라 불리지만, 저건 아예 종이 다르다고.”

“내 생각도 같아.”

버렌이 마르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크가 드래곤을 따라가려다간 날개가 찢어지는 법이지. 우리도 나름 최선을 다해서 훈련하고 있잖아. 라온과 속도가 다를 뿐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그는 라온을 따라잡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게 옳은 방법이라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게 아니라, 차이가 너무 커.”

루난은 버렌과 마르타의 말을 듣고서도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해서는 우리가 마스터가 되기 전에 라온이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갈 것 같아. 그럼 또 도움을 못 줘.”

그녀는 라온이 광풍대를 받치는 게 아니라, 가끔은 광풍대가 라온을 받치고 싶다며 찰랑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건….”

“으음….”

버렌과 마르타는 답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생각해보면 루난의 말대로다. 라온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계속 받기만 했고, 자신들이 마스터에 오르기 전에 라온이 먼저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갈 것 같았다.

“확실히 그건 열받네.”

마르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마스터에 오르기 전에 저놈이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가는 꼴은 못 봐!”

“마찬가지야. 속도가 다르다고 했지만, 그것만큼은 용납 안 될 것 같군.”

버렌도 같은 생각이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법은 있어?”

“그냥 열심히 훈련하자고 하면 뒤진다.”

“추가 훈련을 받는 거야.”

루난이 옅게 반짝이는 눈동자로 버렌과 마르타를 올려보았다.

“그걸 누가 해주는데?”

“사람이 없지 않아?”

“있어.”

그녀가 호수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마 해줄 거야.”

* * *

라온은 버렌과 루난, 마르타의 대화를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들도 수련 바보라니까.’

본인들도 마기로 가득 찬 결계 안에서 흑탑의 마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놓고 다음을 생각하는 게 대견했다.

특히 그 말을 먼저 꺼낸 게 루난이라는 것이 더욱 기특했다.

‘그런데 누구에게 부탁하려는 거지?’

슬리온 가주에게 말하려나?

슬리온 가문의 가주인 로칸 슬리온은 대놓고 루난을 아끼는 딸바보로 보였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나한테 부탁해도 될 텐데.’

버렌과 마르타, 루난의 강해지고 싶다는 갈망이 마음에 들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추가 훈련을 도와줄 수 있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저것들을 강해지고 싶은 거지, 죽고 싶은 게 아니니라.

라스가 허튼 생각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놈하고 하루종일 붙어 있는다면 저것들 전부 죽을 것이니라.

녀석은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동그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이스크림 생각은 끝났어?’

-하아, 답이 안 나온다. 일단 민트 초코 2개는 고정인데, 그러면 남은 2개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달의 맛을 추가하면 딱 하나가 남는데, 그걸 고르기엔 맛이 너무 많….

‘음….’

라온은 괜히 말 시켰다고 생각하며 호수 밖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혈운겸에게 다가갔다.

“너희한테 불리한 일은 입을 싹 닫고, 유리한 말만 지껄인 모양이야?”

혈운겸은 백랑도에게 본인이 먼저 낫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백랑도와의 전투는 그 이유로 벌어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네가 멍청하게 주둥이를 놀린 덕분에 이 자가 이런 꼴이 된 것이다.”

라온은 가슴에 큼지막한 상처가 벌어지고, 앞니가 모두 날아간 백랑도를 가리키며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소, 속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을 뿐인데….”

혈운겸이 하나 남은 팔을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벗어나?”

라온이 냉랭한 음성을 뱉으며 시선을 내렸다.

“너도, 네 부하들도 그리고 이 바보의 목숨도.”

혈운겸과 백경의 무인들, 백랑도를 차례로 가리켰다.

“전부 지그하르트의 것이다. 설령 혀를 깨물고 죽는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해.”

“끄으윽….”

“아….”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에 혈운겸과 그의 수하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하고 싶은 말은?”

“어, 없습니다!”

혈운겸과 그의 수하들은 죽음보다 짙은 공포에 질린 듯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트득.

라온이 혈운겸과 백랑도를 보며 제천검의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 당장 네놈들의 다리를 뽑아서 입을 열게 하고 싶지만, 운 좋은 줄 알아라.”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철전대와 광풍대의 부상을 치료해야 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도 챙겨야 하기에 지금은 이들의 입을 열 때가 아니었다.

“가문으로 복귀하는 대로 네놈들의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뜯어내 줄 테니, 기대하고 있도록.”

라온은 그 말을 하며 혈운겸과 그의 수하들이 움직일 수 없도록 오러로 몸을 마비 시켰다.

그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마크 괴튼과 광풍대 검사들이 혈운겸과 백경의 무인들을 들쳐멨다.

“도리안. 털옷 있지?”

“아, 당연하죠!”

라온이 손짓을 하자, 도리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아서 개수가 모자를 테니까. 어린아이부터….”

“충분히 있는데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사람들의 숫자에 맞는 털옷과 부츠, 장갑을 꺼내 들었다. 모자르기는커녕 오히려 넘칠 것 같았다.

“…이렇게 많다고?”

“필수품이잖아요!”

그는 씩 웃더니 사람들에게 직접 털옷을 나누어주었다.

‘진짜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도리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철전대주 트레빈이 힘없는 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백경과 문제가 생겼을 줄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혈운겸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저쪽입니다. 희극제인지 뭔지가 직접 와도 아무 말 못 할 거예요.”

증거와 상황, 명분이 모두 이쪽에 있다고 말하며 민망해하는 트레빈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백경 같은 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요. 부상자와 전사한 이들을 챙겨야죠.”

“…그래. 그렇지.”

트레빈이 뒤편을 돌아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돌아갈 테니까. 준비하세요.”

“알겠다.”

라온은 광풍대와 철전대에 이어 인질들까지 챙긴 후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있군.’

아이언드는 지금도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하들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 있는 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 같았다.

라온은 아이언드에게 조소를 보내며 시선을 돌렸다.

“평생 그렇게 구경이나 하고 있으시지.”

* * *

백련대주 아이언드는 호수를 떠나는 라온과 광풍대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놈이….’

저렇게 강했던가?

마스터 최상급. 지금까지 라온의 성장세를 보면 빠르긴 해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경지다.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하지만 저 무력은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어.’

철전대주는 빈사 상태였으니, 저 안에서 마륜과 빙향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라온 뿐이다.

마기로 가득 찬 결계 속에서 본인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있는 마륜과 빙향을 잡은 후 결계까지 으깨버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백랑도까지 잡았지.’

마기라는 강력한 힘에 의존하는 마륜, 빙향과 달리 백랑도는 제대로 된 무학을 닦은 무인이었지만, 라온에게 압도적으로 패했다.

무력이 더 높음에도 무학의 경지 차이로 밀리다니, 무인으로서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뿌드드득.

아이언드가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두꺼운 나뭇가지가 아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보는 게 맞겠군.”

나를 찾은 것도 같고.

라온은 이쪽을 보면서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이곳에 숨은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밟아놓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어.

라온의 성장세는 정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언제 벽을 넘을지 모르기에 지금 확실하게 기를 꺾어놓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문에 돌아가야겠군.’

아이언드가 라온을 짓밟을 계획을 짜며 입매를 찡그릴 때 뒤에서 그를 살피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고오오오.

아이언드가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 뒤편의 언덕. 푸른 수풀이 가득 차오른 녹옥의 절벽 위에 검은 로브를 두르고, 피부가 갈라진 노파의 가면을 쓴 여성이 서 있었다.

“흐응….”

그녀는 아이언드의 등을 보며 손에 든 꽃잎을 하나씩 뜯었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멀린은 마지막 꽃잎이 놔둔다에서 떨어진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 뭔가 거슬리는데, 죽이고 싶은데….”

그녀는 가면 아래로 살짝 보이는 입술을 매만지며 새로운 꽃을 들어 올렸다.

“하나만 더 해보자. 죽인다. 놔둔다. 죽인다. 놔둔다….”

* * *

라온은 높으면서도 굳건한 지그하르트의 정문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편해지네.’

처음 저 고고한 문을 보았을 때는 감옥 같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리움과 따스함이 깃든 현관처럼 보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집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라온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정문을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잘 따라왔군.’

흑탑의 마인들에게 납치당했던 사람들은 도리안이 꺼낸 털옷을 입고 열심히 쫓아오고 있었다.

사실 저들을 바로 집으로 보내 주고 싶었지만, 마기에 노출되어 있었고, 부상까지 입었기에 가문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고 싶었다.

저들 역시 자신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한 명도 거부하지 않고 이곳까지 따라와 주었다.

철전대와 광풍대는 본인들도 다쳤음에도 사람들을 한 명씩 챙기고 있었다. 둘 다 백련대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짜 무인들이었다.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그럼 네가 먹지 그러냐?

머리 위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라스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뭘 먹어?’

-저것들 말이다.

라스가 사람들을 업거나, 끌어주는 철전대 검사들을 가리켰다.

-마음에 든다면 네 밑으로 받아들여라.

녀석은 마음에 드는 인재를 직접 받아들이는 게 마왕의 덕목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딱히 마왕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그리고 같은 대인데 받기는 뭘 받아.’

-그럼 위로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위….’

광풍대가 광풍전이 된다면 다른 대와 단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막 광풍대가 되었는데 전으로의 승급을 생각하는 건 과해 보였다.

-과하기는 무슨! 네놈은 본왕과 함께 마계에 내려가 새로운 마왕이 되어야 할 놈이다. 고작 허접한 인간 좀 받아들이는 것으로 고민하지 마라. 좀 욕심을 가지란 말이다.

‘그러다 너처럼 배 터져.’

내 진짜 목표는 위에 서는 게 아니니까.

라온은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복수와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겠다는 다짐을 다시 떠올리며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광풍전이라….’

전주의 기본 조건은 그랜드 마스터다. 아직 그 벽에 닿지도 못했고 대주도 아니기에 전주를 생각하는 건 무리였지만 대 이후에 새로운 목표를 잡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은 해보는 게 좋겠네.’

마음속에서 정리를 끝냈을 때 지그하르트의 정문이 열리며 외총관 일리운이 걸어 나왔다.

“수고했네!”

일리운은 평소와 다르게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가문의 일원을 구한 것이 그에게도 기쁜 것 같았다.

“바로 가주전으로 가보게.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는 다른 일은 맡기라고 말하며 멀리 보이는 가주전을 가리켰다.

-다들 기다린다고?

라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입맛을 다셨다.

-그럼 파티인가?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녀석은 전에 본관에서 열렸던 파티가 인상적이었는지 입맛을 다셨다.

‘파티긴 하겠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 내가 먹을 게 넘치는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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