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8화 (448/653)

제448화

라온이 냉담한 눈길로 스스로를 백랑도라 밝힌 중년인을 훑어 내렸다.

'백랑도 던커른이라.’

송충이가 파놓은 나무 구멍처럼 좁고 작은 눈과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철탑 같이 단련된 육체를 보니, 지금도 기본 훈련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 이름을 여기서 듣는군.’

자신이 암살자로 살던 20여 년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도객이었는데, 백경에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그의 명성 따위는 아무 상관없지.’

지금 철전대는 큰 부상을 입어서 휴식을 취해야하고, 흑탑에 납치를 당했던 인질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저들 모두를 책임져야하는 입장인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지그하르트에 따지겠다고 주절거리니 좋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백랑도가 분노가 차오른 눈빛을 쏘아내며 도병에 손을 얹었다. 언제라도 뽑을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다.

“뽑으려고?”

라온은 백랑도의 눈빛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뽑아 봐. 그 손모가지 날려줄 테니까.”

마음대로 해보라고 말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하!”

백랑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인상을 구겼다.

“저 녀석의 말대로였군. 미쳤어. 그것도 제대로 미쳤어.”

그는 어깨를 떨고 있는 혈운겸을 돌아보고서 도병에 올려져 있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나?”

백랑도의 분노가 차오른 말과 함께 뜨거운 기세가 타오른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도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두꺼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백랑도의 기세에 눈매를 찡그렸다.

‘꽤 무겁군.’

마기와 결계만 믿고 본래의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난 마륜, 빙향과 달리 제대로 된 무학을 닦은 무인의 기세가 느껴졌다.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지.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이 땅의 주인은 지그하르트다. 육황오마의 틈에 숨어서 깃발을 세운 신주오령 따위를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천검의 검집을 툭 쳤다.

“우리의 영역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양아치에게 인성 교육을 해주고 있지.”

“후우,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야.”

백랑도가 한숨을 내쉬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곳이 지그하르트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검문도 없는 결계 근처지 않나.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공격을 해오다니 오마도 안 할 짓이다!”

“맞는 말이야.”

“그럼….”

“처맞는 말.”

라온이 차디찬 눈빛을 발하며 백랑도의 앞에 섰다.

“관광 목적도 아니고, 실종 문제가 생긴 곳에 아티팩트까지 써가면서 숨어 있는 건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 아닌가?”

“우리는 그저 정보를 모으고자 했을 뿐이다. 숨어 있었다고 팔을 자르고, 폭력을 행사한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제정신이 아닌 건 당신이네. 저놈.”

비웃음을 그리며 백랑도의 뒤에 있는 혈운겸을 가리켰다.

“저 혈운겸이라는 놈이 이 땅에서 날 먼저 공격했는데, 그것도 참아야 하나?”

“뭐…?”

백랑도는 그건 알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뜬 채 뒤를 돌았다.

“머, 먼저 과한 요구를 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겁만 주려고 한 거였고.”

혈운겸은 백랑도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자고 한 건데….”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입을 놀렸다.

“으음….”

백랑도가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 하지만 우리는 지그하르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어. 그저 흑탑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자 했을 뿐이야.”

그는 조금 위축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보? 정보 좋지. 지금 시대에 정보는 곧 힘이 되니까.”

라온이 느릿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이해를 해주는….”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나?”

백랑도의 말을 막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철전대가 이곳에서 흑탑에 납치당한 것을 말하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다. 너희는 육황도 오마도 아니니까. 둘이 치고받기만 해도 만족스럽겠지. 하지만….”

라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인질들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육황오마가 아니라, 신주오령과도 관계가 없지. 평온하게 살던 사람들이 납치되어 제물로 바쳐졌는데 구출하기는커녕 입 싹 닫고 있다가 정보만 빼가겠다고? 지랄이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백랑도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중립을 선언했지? 내가 보기에는 네놈들과 오마는 다르지 않아.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는 괴물들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서늘한 음성 속에 라온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협의가 깃들었다.

“그건….”

백랑도가 넝마가 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명분과 협 모두가 담겨 있는 라온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미간을 구겼다.

“알아들었으면 따라와라.

라온이 백랑도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가 무엇을 숨기고 있고, 흑탑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아야겠으니까.”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우리와 흑탑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백랑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너를 따라갈 수도 없다.”

그가 다시 도병에 손을 얹으며 뜨거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제천검의 검병을 움켜쥐었다.

“명분이 어쩌고 하더니, 전부 잃었는데도 제 실속만 차리려고 하잖아. 그게 쥐새끼 같은 너희들의 근본이다.”

“후우….”

백랑도는 라온의 도발에 긴 한숨을 흘려냈다.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겠군.’

사실 그분께서도 혈운겸만 데리고 복귀하라고 지시했지만, 그의 팔이 잘린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지그하르트가 백경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나선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명분이나, 상황이나 좋은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적당히 손을 봐주고 물러나는 게 제일이겠어.’

라온의 무력은 마스터 최상급으로 보이지만, 결계 속에서 마륜, 빙향과 싸우면서 많은 힘을 소모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제압하고 이 자리를 뜨는 게 최선이었다.

“언제든지 와라.”

라온은 흑룡포를 펼치며 설화의 감각을 운용했다.

‘쉬운 상대는 아니야.’

기감으로 느껴지는 기파가 산처럼 거대하다. 도 하나로 마스터 최상급에 오른 자였고, 마기나 술수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쉽게 이기려 들었다간 역공을 당할 것이다.

다만 글렌과 렉타르에게 배운 검술들을 제대로 써볼 기회라는 생각에 조금 가슴이 뛰었다.

‘안 오면 내가 먼저 가는… 음?’

백랑도의 기운을 읽으며 제천검을 뽑으려 할 때 설화의 감각에 다른 존재가 잡혔다.

‘추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네.’

라온이 우측 숲으로 눈동자를 돌리며 짧게 혀를 찼다.

저 수풀 안쪽에서 백련대주 아이언드가 올빼미처럼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내가 지면 끼어들려고 기다리는 중인가?’

아이언드는 이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척을 감춘 채 숨어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튀어나와서 도움을 주었다고 생색을 내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라온은 아이언드에게 자그마한 공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제천검을 꽉 말아 쥐었다.

“대화로 풀고 싶은데, 방법은 없나?”

“너희 모두가 지그하르트까지 따라오면 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백랑도가 탁한 기합을 내지르며 도를 뽑았다. 극쾌에 이른 발도술. 그의 이명처럼 하얀 늑대 같은 도신이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치이이잉!

라온은 이미 백랑도의 기세를 읽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제천검을 발검하며 청우의 흐름을 담았다. 청아한 검명과 함께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앙!

호수의 중심에서 발검과 발도가 맞부딪치며 매서운 강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크드드드득!

라온과 백랑도는 오러의 막으로 강기를 무시한 채 서로에게 검과 도를 밀어붙였다.

“듣던대로 제법이구나!”

백랑도가 도신을 비틀어서 제천검을 쳐낸 뒤 수직으로 도격을 내리쳤다. 힘과 속도, 무거움을 극한까지 다듬은 강맹한 초식이었다.

라온이 하늘을 무너뜨리는 듯한 백랑도의 도격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광아검과 비슷한데?’

백랑도의 도격은 그 이명처럼 짐승 같은 부분이 있었다. 정형화된 초식보다 그때그때의 감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쿠우웅!

진각을 밟았다. 호수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제천검을 올려 쳤다.

검신에 휘감긴 만화공의 기운이 만개하듯 펼쳐지며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앙!

검격과 도격이 맞부딪치며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폭발하고, 호수가 대해가 된 듯 출렁였다.

“아직이다!”

백랑도는 도격이 정면에서 막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살기 짙은 음성을 뱉으며 목을 노려왔다.

“나쁘지 않군.”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굽힌 무릎을 앞으로 내디뎠다. 호수에 두꺼운 족적을 남기며 광아검의 초식을 내리꽂았다.

글렌과 렉타르가 이빨을 갈아준 미친 맹수가 사나운 포효를 터트렸다.

쩌어어어어엉!

검과 도가 정면에서 격돌하며 호수를 에워싸는 용오름이 치솟았다.

라온과 백랑도는 사납게 울부짖는 폭풍 속에서 서로를 향해 검격과 도격을 쏟아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초식의 교환 끝에 먼저 튕겨 나간 건 백랑도였다.

치이이이익!

백랑도는 거센 용오름에 등이 찢기며 밀려난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억….”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를 쥔 손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의 무학 경지가 더 높았고, 도에 더 많은 오러가 담았는데 밀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거짓이다! 말이 안 돼!”

백랑도가 악을 지르며 백수도의 절기 찬잔표를 펼쳐냈다.

산중제왕이라는 호랑이가 발톱을 내리치는 듯한 날카로운 강기가 라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분노한 듯 보였지만, 그의 머리는 아직 냉정했다.

‘분명 피하겠지.’

놈은 검수니까.

이런 두꺼운 공세를 피한 뒤 반격을 가하는 게 검수의 기본이었기에 라온 역시 회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자신의 노림수였다. 찬잔표에 이어지는 격전궁이 라온의 몸을 헤집을 테니까.

하지만.

쩌어어어엉!

라온은 찬잔표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달려 나가 백수도의 흐름을 깨뜨렸다. 검사가 아니라, 무식한 도객을 보는 듯했다.

“정말 나와 정면에서 싸우겠다는 거냐! 소모전은 절대 지지 않는다!”

“소모전?”

라온이 턱을 모로 틀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헛소리 마. 피하지 않는 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다.”

그 말과 함께 광아검을 연달아 펼쳐냈다.

쩡! 쩌저정!

검과 도로 이루어지는 힘과 속도의 승부. 일반적이라면 더 경지가 높고 강한 힘이 담긴 백랑도가 우위에 서야 했지만, 밀어붙이는 건 라온이었다.

콰아아아앙!

강과 쾌, 중의 묘리를 지금의 한계까지 다듬은 그의 검은 백랑도의 도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고, 인간의 범쥐를 넘은 육체가 그 뒤를 받쳐주었다.

라온은 처음부터 승산을 가지고 백랑도와 정면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쿠구구구구!

얇은 검에 밀려나는 백랑도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듯 거세게 흔들렸다.

“이놈….”

검은 빠르고 다채로우며, 도는 무겁고 강하다는 기본 논리를 깨부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힘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이대로는 밀린다!’

동급.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이 더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터엉!

백랑도가 억지로 라온의 검격을 쳐내고 안쪽 공간을 파고들었다.

도를 쥐지 않은 왼손 주먹을 내뻗었다. 근접 거리에서 권각으로 몰아붙이겠다는 뜻이었다.

뻐어어억!

라온은 당황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실전 경험이 많은 백랑도라면 충분히 고를 선택지였다.

왼손으로 훈련생 시절에 배웠던 벽력권의 투로를 일으키며 백랑도의 주먹을 쳐냈다.

터어어엉!

완벽하다고 생각한 기습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백랑도의 좁은 눈구멍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 역시 도망치지는 않았다. 재차 달려들어 도격과 권격을 동시에 뻗어냈다.

콰과과과광!

서로의 숨소리가 들리는 근접 거리에서 검과 도를 쥐고 있는 주먹이 연달아 부딪쳤다.

벼락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빙판이 갈가리 부서져 녹아내렸다.

두 사람은 찰랑이는 호수에 발을 기댄 채 서로의 숨구멍을 향해 검과 도, 그리고 주먹을 질풍처럼 뻗질렀다.

‘무학의 수준도, 실전 경험도 뛰어나.’

라온은 인상을 구기는 백랑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방식을 바꿔볼까.’

백랑도의 무력은 진짜다. 힘으로만 제압하기에는 그의 무위가 아까웠기에 다른 검술도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직 멀었다!”

백랑도가 입술을 씹으며 도를 내리쳐왔다. 전보다 더 빠르고, 강맹한 위력. 거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공간을 잡아먹으며 밀고 들어왔다.

“나도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라온은 이전처럼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광아검과 만화공을 가라앉히고, 글래시아와 설풍검결을 운용했다.

카르르르륵!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제천검의 칼날이 태산처럼 내리꽂히는 백랑도의 강기를 깎아냈다.

백랑도의 도가 미끄러지며 땅을 쳤지만, 제천검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풍검결에 부드러움과 변화를 담아낸 결과였다.

“이이익!”

백랑도는 악몽을 꾸는 듯 눈에 악의를 태우며 바닥에서부터 도를 쳐올렸다. 차디찬 호수를 증발시키는 섬뜩한 강기가 솟아올랐다.

치이이이이잉!

라온은 무게 중심을 낮추며 설풍검결의 벽람해중을 펼쳐냈다. 사선으로 내려서는 은색의 질풍이 백랑도의 도격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백랑도는 본인의 강기가 바람에 밀려 나가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연달아 도격을 내리쳤다.

하나하나가 이 호수 전체를 뒤집어엎을 위력의 공세였지만, 라온이 일으키는 은빛 바람은 절대 뚫리지 않았다.

“이제 내 차례지.”

라온은 백랑도의 도격을 모조리 흘러버린 뒤 왼발과 함께 제천검을 내질렀다.

검극에 맺혀 있던 아릿한 냉기가 섬전처럼 뻗어나갔다. 설풍검결의 청중홍이었다.

“크윽!”

백랑도가 도로 반원을 그어 내렸지만, 청중홍은 도막을 유연하게 밀어내고, 그의 허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후욱, 참는 건 여기까지다….”

백랑도가 피나도록 입술을 뜯으며 도를 들어 올렸다.

은빛 도신 위로 상상을 불허하는 거력이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터지고, 호수 전체가 검은 파랑이 돋아날 정도였다.

“으아아아아!”

그가 묵직한 기합을 내지르며 도를 내리쳐왔다. 묘리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경지와 담겨 있는 힘은 차원이 달랐다. 더 강해진 설풍검결로도 막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른 길을 가면 되지.’

라온은 힘을 빼듯이 제천검을 부드럽게 말아 쥐고 오른발을 내디뎠다.

거칠게 출렁이는 호수 표면을 스치며 뒤로 젖힌 제천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칼날에 깃드는 건 붉은 불꽃도 푸른 냉기도 아니다. 새하얀 그림자가 검신 뒤에서 흘러나와 햇살처럼 번져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5형 백영섬.

대검에서 돋아난 그림자처럼 거대해진 백색 물결이 백랑도의 도격을 휘감았다.

화아아아아아아!

백랑도가 내리꽂은 도에 맺힌 강기가 지워지고, 힘이 사라지며, 속도와 무게가 녹아내린다.

트드드득!

백색 그림자가 스친 도신이 반으로 부러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경악을 두른 백랑도의 눈동자뿐이었다.

촤아아아악!

백랑도의 쇄골에서부터 허리까지 사선으로 이어지는 상흔이 돋아나고, 시뻘건 핏물이 터져 나왔다.

“커헉….”

백랑도는 파도치는 호수 속에 반 토막 난 도를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라온은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제천검을 내려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백영섬까지 성장했군.’

광아검과 설풍검결, 화령에 이어서 백영섬도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글렌과 렉타르의 가르침은 자신이 익힌 모든 검술에서 녹아 있었다.

“아, 악마다. 사악한 악마의 검술이 분명….”

“시끄러.”

라온은 고통과 공포에 떠는 백랑도의 턱을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뻐어어억!

그는 파도치는 호수에 둥둥 뜬 채로 눈을 까뒤집고 넘어갔다.

라온이 가라앉는 백랑도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려 호수 밖으로 던졌다.

“으아아악!”

혈운겸은 옆으로 떨어진 백랑도를 보며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라온은 혈운겸에게 다가가며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라스를 보았다.

‘너도 분위기를 아네. 이런 때 조용한 걸 보면.’

평소와 달리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것을 보면 마왕 주제에 상황 파악은 잘하는 것 같았다.

-…하지 않으려나?

‘뭐라고?’

-한 세트면 네 갠데, 일단 민트초코는 무조건 넣고, 이달의 신제품도 맛봐야 하고. 아니지 민트초코를 두 개 넣고 다른 세 개 중에서 초코와 딸기를 고르면 신제품을 넣을 자리가….

‘…….’

분위기에 맞춰서 조용한 게 아니었다. 녀석은 아까 말한 아이스크림 한 세트를 어떻게 고를지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라온은 기절한 백랑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순하고….’

식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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