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5화 (445/653)

제445화

라온이 빙판을 누르고 있는 오른손을 떨었다.

‘들려.’

빙판에서 피어난 마기가 신성력에 의해 벌어지며 내부의 소리를 뱉어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까지.

‘여기에 있었어.’

이제 확실해졌다. 이 빙판과 연결된 결계 안쪽에서 철전대와 흑탑의 마인들이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빙판의 작은 틈으로 다른 공간을 만든 거지?’

-거울을 이용한 것이니라.

라스가 빙판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혀를 찼다.

‘거울?’

-예로부터 인간들은 거울을 무서워했다. 거울 속에서 다른 차원에 사는 자신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두려움을 이용하기 위해서 많은 주술과 저주가 만들어졌느니라.

녀석의 말을 들으며 빙판을 보았다. 어둑한 색으로 얼어붙어 있지만, 거울처럼 신기할 정도로 얼굴이 잘 비쳤다.

‘그럼 흑탑 놈들이 이 빙판을 거울처럼 이용해서 결계를 만들었다는 거야?’

-맞느니라. 거울 안쪽의 이면으로 끌어들이는 주술을 빙판으로 이용했느니라. 네놈들이 검으로 결계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지. 네가 찾는 인간들은 저 빙판 안쪽의 세계에 있을 것이니라.

라스는 상황의 다급함을 알아서인지 오랜만에 진지하게 답을 해주었다.

‘빙향의 주술인가….’

흑탑의 층주 빙향은 냉기를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그녀가 이 빙판을 이용하여 결계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라온은 계속 들려오는 전투 소리와 비명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버티다니….’

마을까지 갔다가 허탕 쳤을 때 구조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철전대가 싸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라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요?”

광풍대 검사들이 급격하게 변하는 라온의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빛냈다.

“찾았어.”

라온이 손가락으로 빙판 아래를 가리켰다.

“이 빙판의 안쪽에서 철전대가 싸우고 있다.”

광풍대 검사들에게 지금까지 알아냈던 사실들을 간결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이 아래에 있다고?”

“세상에….”

“적의 결계 속에서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다니….”

“그래. 대단하지. 다만….”

라온이 빙판 안쪽의 마기를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일부러 살려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마륜과 빙향 둘 중 하나라면 모를까. 둘 다 움직였고, 결계까지 만들었는데, 철전대가 버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흑탑 놈들은 결계 안쪽에서 다른 목적을 이루려는 것 같았다.

'우리를 유인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철전대를 이용하여 자신과 광풍대를 끌어들이나 싶었지만, 그럴 거면 쉽기 찾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이런 어려운 방식으로 결계를 이룬 것을 보면 숨어서 할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뭐가 맞든. 지금은 최대한 빨리 저 결계를 깨야 해.’

그런데 어떻게?

결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걸 열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라온이 멍하니 떠 있는 라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냐.

‘어떻게 해야 저 결계로 들어갈 수 있지?“

-본왕이 그딴 걸 어떻게 알겠느냐.

‘너 이런 방식의 차원에 대해 아는 거 아니었어?’

-예전에도 말했지만, 본왕은 복잡한 거 모르느니라.

라스는 결계를 여닫는 법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때려 부수고, 깨부수면 알아서 열리고 비틀어지느니라.

녀석은 결계 따위는 힘만 있으면 상성이고 뭐고 다 알아서 열리게 되는 법이라며, 빨리 강해지라고 비웃음을 흘렸다.

‘힘이 있다면이라….’

지금의 자신이 결계를 억지로 비틀어 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조금 전 라스의 말을 통해서 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힘이 없지만, 상성은 있어.’

마인들의 결계를 단숨에 깨부수고 열 정도의 힘은 없지만, 마기의 공간을 비틀 정도의 신성력은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나중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한 번 들었기 때문인지 결계 안쪽에서 계속 소리가 들려온다. 비명이 난무하고,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시간도, 낭비할 신성력도 없었다. 지금 결착을 봐야 했다.

라온은 광풍대 검사들을 돌아보며 빙판을 가리켰다.

“모두 모여.”

“예!”

광풍대 검사들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시를 받자마자, 조별로 전열을 갖춰 섰다.

“지금부터 결계를 비틀 거야.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 바로 움직이도록.”

“응.”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드디어 방법을 찾았나 보네.”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질문조차 하지 않고,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검사들 역시 준비를 끝내고 검을 다 잡았다.

'믿음직스럽네.'

백련대와는 전혀 다른 광풍대만의 의리를 느끼며 빙판에 손을 얹고,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을 운용했다.

고오오오오!

신성력을 얇게 저며 마기가 흘러나오는 빙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마기가 고통을 느끼듯 찌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단전에 남은 신성력을 모조리 쏟아냈다.

빠지지지직!

그 순간 얼어붙은 호수에 밤이 찾아온 듯 빙판이 시꺼멓게 물들며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쪼개진 빙판의 틈에서 마기가 마구잡이로 솟구치더니, 검게 젖은 결계의 틈이 억지로 벌어졌다.

아쉽게도 결계 자체를 부수지는 못했지만, 그 틈을 비집어 열 수는 있었다.

“아….”

혈운겸이 그 모습을 보며 가는 신음을 흘렸다.

“마, 마기의 결계를 억지로 열었다고?”

그는 마기의 결계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는지 벌어진 결계의 틈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이런….”

“너희들의 처우는 일을 끝낸 뒤에 정하겠다.”

혈운겸과 백경의 무인들이 움직일 수 없게 제압한 뒤 뒤를 돌아보았다.

광풍대 검사들이 준비되었다는 듯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라온이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어둠을 태우는 적염의 불길과 함께 결계의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빚을 갚을 때다.”

* * *

“허어억….”

철전대주 트레빈이 가슴팍을 움켜쥐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내상의 통증을 참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고 싶었지만, 이미 다 헤져서 더이상 씹을 곳도 없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군.’

어렸을 때부터 죽는다면 전장에서 싸우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이런 전장은 아니었다.

이곳은 신념과 신념 그리고 힘과 힘이 부딪치는 무인들의 전쟁터가 아니라, 학살의 장이었으니까.

“후욱.”

트레빈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핏물로 차오른 붉은 웅덩이 위로 흑탑의 마인들과 놈들이 납치한 사람들이 보인다.

피이이익!

바람이 부는 듯한 소음이 들리자, 가장 앞에 있던 노인의 목이 툭 떨어졌다. 생을 잃은 시체에서 검은 기류가 피어나 결계의 천장으로 솟구쳤다.

우우우웅!

천장 위에서 일렁거리는 마기의 뭉치가 더욱 어둑한 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그 말에 노인의 뒤에 있던 젊은 청년이 앞으로 끌려왔다.

“지금까지 들었으니 알겠지?”

마인은 두려움에 떠는 청년의 눈을 보며 사이한 미소를 흘렸다.

“너희가 죽는 이유는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이다.”

그 말과 함께 아직 어린 청년의 왼쪽 가슴에 시꺼먼 구멍이 뚫렸다.

“아아….”

청년은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쓰러졌다. 그의 도드라진 안구에서 원한의 기류가 피어나 천장에서 출렁이는 마기로 스며들었다.

“크윽….”

트레빈이 어금니를 바드득 씹었다.

‘지옥이다. 여긴 지옥이야.’

마륜과 빙향이 만들어낸 이 결계는 악마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놈들은 미리 납치한 백여 명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 결계를 유지하고, 라온을 향한 원한의 저주를 만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신공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망할 사람은 라온이 아니라, 저 흑탑의 마인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의 심리상 어쩔 수 없이 라온을 향한 원망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그사이에 또 한 명의 중년 여성의 목이 잘려 나갔다.

저주가 많이 모였기 때문인지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젠장….”

트레빈이 검을 쥔 손을 떨었다. 당장 달려 나가 모두를 구하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정상이 아니었고, 뒤에 지켜야 할 인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버러지들이 죽을 때마다 그만두라고 외치지 않는군.”

비쩍 마른 노인이 비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손에는 두 자루의 륜이 들려 있었는데, 투명한 날이 온통 끈적한 피로 젖어 있었다. 이 노인이 바로 흑탑의 층주 마륜이었다.

“하긴 본인들의 걱정을 하느라 바쁘겠지.”

마륜이 발밑에 쓰러져 있던 철전대 검사의 시체를 걷어차며 코웃음을 쳤다.

“이놈이….”

트베린이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동료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모습에 참고 있던 분노가 들끓었다.

“이해한다. 인간은 본래 자기만 생각하는 짐승이니까.”

마륜이 서커스를 하듯 륜을 던졌다가 받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원망해라. 너희가 죽는 이유는 그놈이 본탑을 건드렸기 때문이니까.”

“끄으으윽….”

“빌어먹을….”

“망할!”

철전대 검사들은 동료의 시체가 짓밟히고,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함과 마륜에 대한 공포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트레빈이 수하들의 얼굴을 살피며 탁한 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겠지.’

살아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라온을 원망하지 말라는 건 무리다.

본인들이 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저놈들의 계략이다. 라온을 모르는 인질들과 달리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철전대를 통해 지독한 저주를 완성하려는 게 분명했다.

‘놈들의 술수에 넘어간 채 죽을 수는 없지.’

이건 지그하르트와 흑탑의 싸움이다. 라온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쿠우웅!

트레빈이 거칠게 발을 구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강맹한 오러가 일순간 마기를 밀어내고 상서로운 빛을 일으켰다.

“설마 지금 라온을 원망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흑탑의 추잡한 수에 넘어갈 놈이라면 지금 당장 검을 던져버려라!”

음성에 오러를 담아 외치자, 시간이 멈춘 듯 결계가 고요해졌다.

“당연하죠!”

“그 괴물을 원망해서 어디에 씁니까!”

“적은 저놈들이지. 라온 님이 아닙니다!”

철전대는 언제 마음이 흐트러졌냐는 듯 입매를 말아 올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지원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트레빈이 은색 칼날 위로 강기를 불태우며 담백한 미소를 흘렸다.

“우리는 싸운다! 아리안 가문을 5일 동안 지켜냈던 광풍대가 그러했듯 이 지옥에 지그하르트의 의지를 세워라!”

“예!”

철전대의 의지가 하나로 엮이며 시퍼런 기세가 솟아올랐다.

억지로 버티던 검사들의 눈동자에 선명한 의지가 깃들고, 그들이 쥔 칼날 위로 신묘한 빛이 타올랐다.

“으음….”

마륜은 처음 결계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진 철전대의 기파를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아아, 내가 저놈 빨리 처리하라고 했지?”

마륜의 뒤편에서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백발의 여성이었는데, 회색 눈동자에 자그마한 인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마녀가 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빙향이었다.

“귀찮게 됐잖아.”

빙향이 손톱을 손질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제 제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쩔 거야! 문제 생기면 네가 부탑주한테 찾아가!”

그녀는 천장에서 흐물거리는 원한의 저주를 보며 손을 휘저었다.

“확실히.”

마륜이 빙향의 짜증을 무시하며 트레빈을 노려보았다.

“너부터 처리해야 했었군.”

그는 신뢰 어린 눈빛으로 트레빈의 등을 바라보는 철전대 검사들을 훑으며 매서운 살의를 일으켰다.

“저주를 빠르게 만드는 매개체가 아니라, 방해꾼이 될 줄은 몰랐구나.”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네놈은 여기서 처리해야겠다.”

“누구 마음대로.”

트레빈이 입매를 가늘게 올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피로와 고통에 머리가 멍했지만, 싸우지도 않고 죽을 수는 없었다.

“네 목을 벨 때까지는 쓰러질 수 없다.”

“아쉽군.”

마륜이 양손에 든 륜을 뒤로 젖히며 입맛을 다셨다.

“그 굳건한 의지로 흑탑에 들어왔다면 층주도 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손에 잡혀 있던 한 쌍의 륜이 날아든다.

우우우웅!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륜에 휘감긴 마기가 너무도 지독하여 경시할 수가 없었다.

“네놈들과 한솥밥을 먹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다!”

트레빈이 이를 악물고 철관검의 절기를 풀어냈다. 칼날이 망가졌음에도 검은 주인의 의지를 아는 듯 검세에 날카로움을 더해 주었다.

쩌어어어엉!

철관검의 절기가 륜을 거칠게 밀어냈지만, 아직 두 번째 륜이 남아 있었다.

“으아아아!”

트레빈은 내상으로 인해 피를 토하면서도 두 번째 륜의 중심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캬갸갸갸걍!

강기를 두르고 있음에도 회전하는 륜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손끝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오러도, 검술도 아닌 오기로 마륜을 쳐내고서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이제 정말 힘이 없어.

처음에 인질들을 구하려다가 무리했고,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여 힘을 과하게 사용했다.

특히 마기로 이루어진 결계 때문에 제힘을 다 발휘할 수 없어서 이젠 허리 위로 검을 들 기운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까워.”

마륜의 말과 다르게 그가 회수한 륜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의 마기가 피어났다. 회색으로 물들었던 륜의 날이 점차 검게 젖어가고 있었다.

‘검은 륜….’

마륜이 진심이 되면 륜의 색이 검게 물든다고 하던데, 지금부터가 진짜인 것 같았다.

“네놈의 목숨은 이 마륜으로 끊어주도록 하지.”

놈의 비웃음과 함께 다시 두 자루의 륜이 날아든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짓쳐 드는 륜을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정상이라고 해도 견디기 힘들겠지. 하지만….’

끝까지 버틴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리안 가문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있기에 먼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라도 싸워야 했다.

“으아아아아아!”

트레빈이 악을 지르며 철관검의 절기 사해참일을 펼쳐냈다. 오러는 소량밖에 스며들지 않았지만, 검의 투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피아아아아앙!

오러가 얇게 휘감긴 칼날이 마기를 듬뿍 머금은 륜을 쳐냈다.

‘이게 깨달음인가? 하지만….’

늦었어.

철관검의 경지가 성장한 것 같지만, 남은 오러와 체력이 없다. 눈앞으로 두 번째 륜이 쇄도하고 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트레빈은 검을 내리며 양팔을 펼쳤다. 뒤에 있는 수하들과 인질들을 보호하고 홀로 죽겠다는 대주로서의 마지막 의지였다.

‘눈을 감지는 않겠어.’

무인으로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며 시꺼먼 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을 때였다.

빠지직!

허공에서 달걀 껍데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기이한 소리가 연거푸 터지며 절대 흔들리지 않았던 천장에 거대한 균열이 돋아났다.

콰아아아아앙!

마기로 출렁이던 천장이 무너지며 시뻘건 불길의 폭풍이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이미 륜은 목젖까지 다가와 있었다.

죽음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문 순간 열화의 폭풍 속에서 불꽃보다 진한 적안이 번쩍였다.

라온.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가 붉은 벼락이 되어 강림했다.

쩌어어어어엉!

마기로 가득 찬 륜이 찌그러져 튕겨 나가고, 저주를 담고 있던 어둠이 녹아내린다.

무너지는 결계의 중심에서 라온이 등을 돌렸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흑룡포가 포효하듯 출렁였다.

“버텨주어서 고맙습니다.”

라온의 미소와 달리 그의 붉은 눈동자 위로 서슬 퍼런 기광이 번쩍였다.

“이제 맡기십시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