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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3화 (443/653)
  • 제443화

    쿠구구구구!

    라온과 아이언드의 강렬한 격이 맞부딪치자, 습기가 내려앉은 무른 땅이 뭉개지고, 호수가 끓어오르듯 기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광풍대와 백련대 역시 각자의 주군 뒤에 서서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허리춤에 손을 가져대 댔다.

    그들의 기파 역시 적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누구 하나가 검을 뽑고 휘두르기만 하면 바로 지그하르트 내전이 발생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이언드가 두터운 손가락을 검병 위에 얹었다.

    “왜 싫다는 것이냐.”

    아이언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상황은 급박하다. 넓게 퍼뜨려서 더 많은 곳을 조사하는 게 철전대를 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알 텐데?”

    그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사나운 기파가 되어 라온의 전신을 덮쳤다.

    “당연히 빠르겠죠. 하지만 그건 검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계획이지 않습니까.”

    라온은 점차 강해지는 아이언드의 기세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냉랭한 시선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철전대 전체가 자그마한 반항도 못 하고 사라졌는데, 인원을 한 명씩 배치해서 흩뜨린다? 사과를 하나씩 떼다가 도둑놈에게 바치는 것도 아니고, 검사들을 죽으라고 내던지는 꼴 아닙니까.”

    “그전에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아이언드가 서늘한 눈동자를 굴린다. 그는 검사들이 사라지거나, 당하기 전에 충분히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와 너 그리고 각 조장들이 제 위치에 서 있다면 문제가 생기기 전에 수하들을 구할 수 있다. 혹여나 납치되면 더 좋다. 그 상황을 이용하여 철전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을 테니까.”

    “본인과 수하들의 능력을 과신하시는군요.”

    “뭐?”

    “이 지역 전체를 감지하려면 대주님이 100명 있어도 불가능합니다. 부대주 급이라면 모를까, 조장들은 근처에서 납치가 일어나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 겁니다. 쓸데없는 희생만 늘리는 최악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라온은 아이언드 뒤편에서 입술을 씹고 있는 백련대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

    “흑탑 놈들도 우리가 철전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또 납치하는 위험을 무릅쓸 리 없죠. 그 자리에서 죽이고 사라질 겁니다. 대주님은 그 흔적이라도 원하시는 듯 보이는데, 그걸 얻어도 아무 의미 없을 겁니다.”

    흑탑의 마인들은 이미 철전대 전체를 특별한 방식으로 납치했다.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을 이뤘거나, 이루는 중일 텐데,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납치 대신 죽인다라. 그야말로 원하는 바다.”

    아이언드는 반박하지 않고, 묵직하게 오른발을 내디뎠다.

    “백련대와 철전대는 다르다. 내 수하들은 흑탑 따위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런 허술한 놈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왼발까지 앞으로 뻗어온다.

    아이언드의 철탑 같은 육체가 한층 더 커 보였다. 동시에 그의 기세가 둥글게 말리며 소리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기막이 일으켰다.

    우우우웅.

    자연스러운 마나의 움직임. 지금 기막이 설치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참 전부터 대주의 위에 오른 괴물다운 실력이었다.

    ‘기막을 펼친다는 건….’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한다는 거겠지.

    “그리고 죽어도 상관없다.”

    예상대로다. 아이언드는 조금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어차피 강해질 수 있는 이들은 정해져 있고, 대부분의 무인은 그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는 역할이지. 조금 빨리 죽는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당신의 수하 아닙니까?”

    라온은 그 질문을 하면서 뒤편으로 아주 연한 마나의 흐름을 일으켰다.

    “수하?”

    아이언드의 비웃음이 진해졌다. 그가 말을 시작하려 할 때 마나를 비틀어서 단단한 기막에 미세한 구멍을 뚫었다.

    “충실한 수하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에 관한 실마리를 가져와야지. 어차피 대부분은 미끼들이다. 내가 직접 가꾼 놈들만 남는다면 몇이 죽어도 상관없어. 내가 전주가 될 때까지만 버티면 될… 음?”

    그는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다가 이상함을 느낀 듯 우뚝 멈춰 섰다.

    “너 설마….”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했는데도 이렇게 빨리 알아차리다니, 역시나 대주다운 실력이다.

    ‘다만….’

    이미 전부 다 들었어.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백련대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조금 전 아이언드가 했던 말들은 기막을 뚫고, 저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절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으음….”

    “대, 대주님?”

    “지금 그 말….”

    백련대 검사들은 아이언드의 등을 보며 입술을 깨물거나, 눈동자에 핏발을 세웠다.

    “…….”

    신기하게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검사들도 상당했다. 아이언드가 말했던 직접 가꾼 무인들 같았다. 확실히 가진 실력이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야아아아아!

    젖은 빨래처럼 어깨에 축 늘어져 있던 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저놈 수하를 무엇으로 아는 것이냐! 당장 조져버리거라!

    라스는 부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대가리를 깨부숴야 한다면 검을 뽑으라고 외쳤다.

    -아니다!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만년 넘게 본인의 몸이 얼어붙은 꼴을 보게 만들어줄 테니까!

    녀석은 본인의 일이 아님에도 화가 단단히 났는지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부하를 소중히 여기는 성격만큼은 진짜였다.

    “추잡한 짓을 하는군.”

    아이언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언제 기막을 쳤냐는 듯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건조한 시선을 보내온다. 솔직히 당황하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글쎄요. 대주님의 실력이 부족하신 거 아닙니까.”

    라온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매를 가늘게 말아 올렸다.

    “백련대에 균열을 일으키려 했겠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그가 뒤를 돌아 백련대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 발언에 불만이 있는 놈은 나와라. 지금이라도 대에서 내보내 주겠다.”

    아이언드는 민망하지도 않은 듯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갔다. 감정의 일부분이 잘려 나가서 아예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인 것 같았다.

    “…….”

    백련대 검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질문이 안 들린 건가?”

    “없습니다!”

    아이언드가 두 번째로 묻자, 부대주, 조장, 부조장 그리고 그가 직접 키운 실력자들이 뒷짐을 진 채로 없다고 외쳤다.

    “이젠 협박입니까? 어디가 더 추한지 모르겠군요.”

    라온이 아이언드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선택식 때 대주님이 하셨던 말을 기억합니다. 저를 높은 곳으로 올려줄 테니, 백련대로 오라고 하셨죠. 그곳이 저승이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높은 곳은 맞네요.”

    “너….”

    아이언드의 이마에 두꺼운 힘줄이 올라오고, 백련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도, 지금도 전 당신의 발판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후회할 텐데?”

    “보통 저한테 그 말을 한 사람들이 후회하더군요.”

    라온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싸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계속 시비를 거는군. 실력이 좀 올랐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지?”

    “시비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선에 대해 말씀드린 겁니다.”

    이곳에 와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말과 행동 따위를 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바쁘고, 다급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라온이 제천검의 검집을 툭 치며 각이 진 미소를 흘렸다.

    “지금 싸울 수 없는 건 맞지만, 대주님이 딱히 두렵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아이언드의 기세가 폭발하는 화산처럼 치솟는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호수 주변이 그의 기운으로 뒤덮였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억누르고 있던 기세를 개방했다. 들불처럼 솟아오른 장대한 기파가 아이언드의 기운을 밀어내고 공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오러와 오러가 부딪치며 하늘이 어둑하게 가라앉고, 대지의 축이 무너진 것처럼 웅대한 진동이 일어난다. 고수라 불릴 검사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질 정도였다.

    “못 믿으시겠다면….”

    라온이 검집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웃었다.

    “이번 일을 끝낸 뒤 한 번 붙어보시겠습니까?”

    아이언드의 기세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가볍게 손짓했다.

    “…….”

    아이언드는 대답 없이 오싹하리만큼 건조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기억해두지. 잊지 말도록.”

    그는 확연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라온을 노려보다가 떠날 것처럼 등을 돌렸다.

    “잠시만요. 아직 할 말이….”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일 테니, 너희끼리 알아서 하도록.”

    조금 전의 부딪침 때문에 알게 된 것을 말해주려 했는데, 아이언드는 다 필요 없다며 그대로 호수를 떠났다.

    “으음….”

    백련대 검사들은 입술을 깨물다가 아이언드를 따라갔다. 그중에서 몇몇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여왔다. 저들은 곧 백련대를 빠져나갈 것 같았다.

    “후아아아….”

    “이게 무슨 일이래?”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광풍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모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는 듯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괜찮겠어?”

    버렌의 날카로운 눈동자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저런 걸 보면 참을 수가 없거든.”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대놓고 사람을 미끼로 쓰려는 놈을 보고서도 참을 만큼 비위가 강하진 않았다.

    “잘했어! 저 새끼 우리 다 미끼로 써먹으려고 했던 거잖아!”

    마르타가 체한 게 내려간 것처럼 시원했다며 등을 쿵 두드려주었다.

    “존잘 라온이었어.”

    루난도 잘했다는 듯 다가와서 고개를 크게 꾸벅였다.

    “어떻게 저런 놈이 대주에 올라간 건지.”

    “저러니까 젊은 나이에 대주에 올라갔겠지.”

    “어쩐지 백련대 인원이 너무 자주 바뀌더라….”

    라온은 광풍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선한 이들보다 더러운 놈들이 득세하는 법이었다.

    “어쩐지 백련대주를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아프더라구요. 속이 저렇게 검을 줄이야.”

    도리안은 아이언드를 볼 때마다 불안했다며 어깨를 우스스 떨었다.

    “저 인간 망신시킨 건 속이 시원하기는 한데, 우리 이제 어째요?”

    크레인이 웃다가 한숨을 쭉 내뱉었다.

    “철전대를 찾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그는 철전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루첸 님.”

    버렌이 루첸에게 손직을 했다.

    “아, 네!”

    루첸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서 있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호수도 다 조사해보셨습니까?”

    “예. 수중 호흡 능력이 있는 정보원들이 들어가 보았지만, 이쪽에도 시체나 싸운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깊은 곳까지는 확인 못 했지만, 주변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마르타가 화를 못 이기고 발을 구를 때 라온이 손을 들었다.

    “여기가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야 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조금 전에 실마리를 잡았으니까.”

    라온은 출렁임이 잦아드는 호수를 보며 입매를 매만졌다.

    “어…?”

    “시, 실마리?”

    “정말이에요?”

    광풍대 검사들은 생각도 못 했던 듯 깜짝 놀라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 대체 어디서….”

    루첸도 어디서 실마리를 찾았는지 모르겠는지 입을 떡 벌렸다.

    “조금 전입니다.”

    라온은 맑은 호수가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얼음 호수 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랑 백련대주의 기세가 극에 올라서 부딪쳤을 때 얼음 호수 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어요.”

    백련대주를 자극한 건 그의 언행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대한 오러의 부딪침이 일어나면 주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흑탑의 주구들이 기척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의도한 대로 반대편 얼음 호수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허….”

    루첸이 라온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아이언드 님의 기세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까지 하셨다는 겁니까?”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턱을 푸르르 떨었다.

    “저 녀석한테 상식을 대면 안 됩니다.”

    “맞아. 우리 머리만 아프지.”

    “비상식 괴물.”

    버렌, 마르타, 루난은 종이 다르다고 생각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검사들 역시 놀라면서도 라온은 그럴만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그러면….”

    “놈들이 흑탑이야?”

    “그건 아니야.”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어.”

    숨어 있는 이들이 마나를 운용하는 방식은 평범한 무인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아티팩트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운용하는 건 분명한 마나였다.

    “얼음 호수를 살피는 척하면서 따라와.”

    라온은 무인들이 숨어 있는 나무를 알려준 후 손을 털었다.

    “놓쳐서는 안 되니까. 천천히 포위하도록.”

    * * *

    라온은 관광을 나온 사람처럼 차분한 걸음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걸었다.

    얼음 호수는 조금 전 보았던 맑은 호수와 달리 먹물이 섞인 것처럼 탁한 빛이 끼어 있었다.

    다만 기감으로 살펴도 이질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에 왔을 때와 호수의 색이 조금 다른 건 분명하지만, 큰 의미는 없는 듯 보였다.

    “수색해.”

    “예!”

    광풍대는 지시를 받자마자, 2명씩 나눠서 호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체계 없이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저들은 모두 미리 명령한 대로 얼음 호수 바깥쪽에 눈이 가득 쌓인 느티나무 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천히 호수를 살피다가 포위망이 구축되었을 때 기척을 느꼈던 나무로 다가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후우우웅!

    차디찬 북풍을 맞아 가는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누가 보아도 이상할 게 없는 눈 맞은 나무였지만, 저 위에는 다섯 놈이 숨어 있었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기척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특별한 무언가를 두르고 있는 듯했다.

    “내려와.”

    라온이 나무 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다 보이니까. 허튼짓 말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무 위에서 매서운 기세가 일어난다.

    마른 가지만 가득하던 나무 위 공간이 커튼처럼 흐물거리더니, 샛노란 빛과 함께 흑의인 다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그중 가운데 서 있던 중년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왼쪽 눈꺼풀 위에 사선으로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느껴지는 무력과 기세로 볼 때 저 남자가 이들의 수장인 것 같았다.

    “흑탑인가?”

    라온이 중년인의 당황한 눈동자를 보며 언제라도 제천검을 뽑을 수 있게 손가락을 풀었다.

    “아, 아닙니다.”

    대답은 나무 위가 아니라, 뒤에 있던 루첸에게 들려왔다.

    “저자는 희극제의 수하인 혈운겸입니다.”

    루첸은 중년인의 얼굴을 본 적 있는 듯 신주오령 중 백경을 세운 희극제의 수하라고 말해주었다.

    “들었겠지. 우리는 흑탑이 아니다. 괜히 시비 걸지 말고….”

    “희극제의 수하가 왜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지?”

    “그건 네가 알 바가….”

    “알 바가 맞다.”

    조소 흘리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지옥불처럼 타오른 열기가 대지에 차오른 냉기를 녹이고, 혈운겸과 그의 수하들을 휘감았다.

    맹렬하게 치솟은 열기에 놈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크으윽….”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가 누구인지 듣고도 왜….”

    “목이 날아가기 전에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을 뱉어라.”

    라온이 뒤로 물러난 혈운겸을 보며 턱을 모로 틀었다. 그의 눈동자 위로 서슬 퍼런 살기가 번들거렸다.

    “신주오령이고, 희극제고 나한테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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